아사쿠라 죠는 가정을 빠르게 꾸리고 싶은 로망 아닌 로망이 있었다. 언제부터 였냐면 열다섯 먹은 꼬맹이 시절부터. 그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같은 반의 여자애 손 한 번도 못 잡아봤으면서 그랬다. 물론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이지만.
엄마와 아빠의 나이 차가 많이 났다. 그래서 죠는 엄청난 늦둥이 자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풍족한 집에서 누구에게도 비할 바 없이 사랑을 듬뿍 받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 책장을 넘겼다. 무언가를 먼저 해달라고 하기 전에 모조리 해주었기에 결과적으로 부모에게 조르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의젓한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빠에게는 죠가 유일한 아이가 아니었다. 같이 살거나 본 적은 없었으나 죠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대학에 다니고 있는 배다른 형이 있었다. 그가 대학 시절에 낳은 첫째 아들. 형제는 오직 한 명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누군가가 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말이 별로 없었으니까. 엄마가 죠에게 말해준 건 그 뿐이었다. 그러면서 비밀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였다. 엄마가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말할 곳이 없었는데. 그렇게 일러주니 괜히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형제에 대한 욕구가 조금 있었으나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궁금증은 금방 흩어졌다.
아빠는 죠가 란도셀을 매기 시작하던 해부터 몇 년 동안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죠도 엄마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병원에 갔다. 거의 주말이나 방과후에 갔지만 때로는 학교에 있던 중간에 엄마가 차를 끌고 데리러 오기도 했다. 병원은 늘 낯설었다. 아주 큰 건물과 휠체어를 타고 흰색 환자복을 입고 지나다니던 사람들. 다 얼굴에 그늘이 져 어두웠고 어딘가에 바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어 엄마 손을 더 세게 잡던 기억이 오래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사흘, 일주일 정도 있으면 아빠는 다시 집에 돌아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집에 돌아오는 주기가 길어졌다. 그게 한 달 석 달 정도 되더니 엄마가 밤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집은 밤처럼 어두워 졌고 점점 온기가 돌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는 죠의 열 세 번째 생일을 앞두고 죽었다. 엄마는 한 달 정도 정신을 놓고 울기만 하더니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문제는 울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들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도 하지 않았고 집도 치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무언가를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그래도 죠는 겨우겨우 돌보았으나 아주 사소한 것 뿐이었다. 냉동 식품을 돌려주거나 몇 번의 토닥임 정도. 죠의 생활 습관도 점점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자꾸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죠는 선생님에게 연달아 사과를 하는 엄마의 숨결을 들었다. 전화를 끊으면 한숨을 내쉬었다. 죠는 바깥에 서서 끝자락이 너덜너덜한 티셔츠 끝자락을 쳐다보다가 감춰버렸다. 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엄마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불러도 놀이터에 가서 놀지 않았고 혹시라도 음식물을 흘릴까 봐 도시락도 늘 남겼다. 죠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엄마가 배우자를 너무 빠르게 잃었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년 뒤의 일이다. 다른 집의 가족 구성원은 셋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 죠를 응원하기 위해 참석하는 건 모자로 얼굴을 가린 엄마 하나였다. 엄마의 팔다리가 다른 사람들이 비해 너무 얇았다. 혹시라도 죠가 잠시 고개를 돌리면 벽을 짚고 겨우겨우 서 있던 엄마는 죠의 시선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때부터 죠도 집에 가고 싶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초조해 졌다. 겨우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두운 집에서 엄마를 보고 있는 게 나았다. 어린 마음에도 은연 중에 엄마를 지켜야 겠다는 불안감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아빠가 돈을 많이 남기고 가버렸다. 결국에는 그게 엄마를 미치게 했다. 대궐 같은 집에 하루 종일 혼자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엄마의 외로움은 겉잡을 새도 없이 증폭되었다. 죠가 차마 더 살필 새도 없이. 그래봤자 열셋 애였다. 눈치를 살폈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금방 드러났다. 엄마는 죠를 버리고 아빠를 찾아 떠나는 걸 택하였다. 이제 집에 가도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침대에 돌아누운 엄마의 등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혼자 남은 죠를 두고 난감해 했다. 어릴 때부터 잘 울지 않고 조용해 성숙한 아이였으나 그게 손이 아예 안 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양육은 다른 의미였다. 아직 학교도 한참 다녀야 하고 진학을 앞둔 중요한 시기를 개판으로 보내게 하지 않으려면 신경 써야 할 곳도 많았다. 양가의 조부모들도 이미 죠의 엄마와 아빠가 있는 곳에 간 지 오래였고 심지어는 두 사람 모두 외동 자식이었다. 먼 친척들은 그의 재산을 탐냈지만 애매하게 크다만 애를 거둘 의향은 없었다. 돈만 가질 궁리를 하며 애가 딸려오는 걸 반려하다가 사달이 났다. 죠는 어른들이 저를 두고 그런 피곤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돈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죠가 인도된 곳은 사회복지 센터였다. 거기에는 죠 같은 애들이 많았다. 제가 버려짐과 다름없는 처지에 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친절하긴 하지만 낯선 복지사의 입매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가 일찍 결혼을 하고 이르게 나를 낳았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그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아쉬웠다. 이제 집에 뛰어 가도 더 이상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게. 엄마와 아빠의 두 손을 잡고 서로 바라보고 웃을 수 없다는 게. 그래서 생각한 거다. 일찍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나의 자식이 될 수도 있는 아이에게는 이런 걸 굳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이 캄캄한 집에 복지사가 사나흘 간격으로 방문했다. 문을 열어주며 늘 지겨웠다. 감시는 필요없다. 어차피 이전에 놀던 친구들과는 다 틀어졌다. 걔들을 미워하는 건 소용 없는 짓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며 친구들의 부모님이 죠와 절대 놀지 못하게 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집에 오는 것 밖에 할 게 없었다. 그가 자꾸만 뭐라뭐라 설명했는데 잘 들리는 건 없었다. 대충 결론을 내려보자면 이제 더 이상 이곳에 혼자 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죠는 그때 처음으로 고개를 내저어 의사 표현을 했다. 당연히 다른 곳에 가긴 싫었다. 혹시 제가 불을 켜지 않아서 그런가요? 그 말에 복지사가 죠의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무 느낌 들지 않았다. 타인이 덥석 접촉했다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죠의 앞으로 남은 재산과 집에 대한 절차 문제 때문인지 복지사를 보는 날이 자꾸만 많아졌다. 어느 날은 복지사가 좋은 일이 생겼다며 죠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누군가의 집에 위탁되었다. 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베이지색 털이 한 무더기로 날리는 큰 개와 모양이 똑같이 생긴 안경을 쓴 중년의 부부가 팔을 벌리고 죠를 반겨줬다. 약간 멍했다. 그게 왜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업무를 처리한 복지사에게나 좋은 일 같았다. 그가 웃고 잇었으니까.
마음이 훌쩍 커버린 어른 아이는 남의 집 남는 방의 차가운 침대에서 억지로 눈을 감고 아침이 오길 기다려야 했다. 그 집에서는 아주 짧게 살았다. 죠가 거기 있는 한 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집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으나 그들이 죠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계속 이상한 종이들을 내밀며 관심도 없는 검사를 시켜댔다. 그게 읽기가 너무 싫어 주기적으로 외운 단어를 인형 마냥 내뱉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침대에 누운 죠는 깜깜한 방 안에서 또렷이 생각했다.
이전의 나의 생각은 틀렸다. 우리 엄마 아빠는 만나지 만났어야 했다.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낳지 않았겠지. 나를 낳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외로워하지 않았어도 될 지도 모르고. 그러니 내가 가정을 꾸리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또 반복 되는 게 외로운 것보다 싫었다.
괜찮아. 그냥 이렇게 혼자 있다가 엄마랑 아빠한테 가는 거야.
色のない夢
1.
유실은 미학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를 잃어야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럼 처음부터 잃지 않으면 그만인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속 편한 소리다. 원래 소중한 게 옆에 계속 붙어있으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평소에는 모른다. 품에 끼고 있던 걸 한 번쯤은 잃어봐야 현실을 깨닫는다. 뒤늦게야 후회하기 마련이다. 나중에 그걸 다시 찾게 된다면 다시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너 저번에 그거 잃어버리고는 얼마나 생지옥을 겪었어 하고 순간순간 정신이 들게 하니까. 실은 운이 좋아야 다시 찾는 거지 다시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영영 못 찾는다면 미치거나 어쩔 수 없이 마음속에 묻거나. 그걸 어떻게 할지는 잃은 자의 몫이다.
어렸을 때 꼭 안고 자야 잠이 들 수 있는 애착 인형이 있다. 이미 꼬질꼬질한 상태로 솜이 터져 몇 번을 꿰매고 눈을 새로 달아주면서까지 데리고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꼴이 되었다. 너무너무 사랑 받아서. 인형의 흉터는 애정의 흔적이다. 그걸 보다 못한 부모가 갖다버리고 최대한 비슷한 걸로 사다가 침대에 슬며시 놓아준다. 그러나 아이는 이불 덮고 누워 그걸 쥐자마자 촉감이 다른 걸 단박에 눈치챈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내 인형 어디 갔냐고 땡깡을 부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 부모는 새로운 인형으로 아이를 최대한 달래보려 하지만 당연히 먹힐 리가 없다. 아이는 잠도 자지 않고 몇 시간을 떼를 부리다 결국 두발 두손 다 든 부모가 쓰레기통에 넣어 내놨던 고물 인형을 다시 갖고 와 애 앞에다가 놔준다. 목이 쉬어라 헐떡이던 아이는 그제야 눈물을 그친 뒤 인형을 안고 익숙한 인형의 향을 들이킨다. 아이는 크면서도, 아니 어쩌면은 다 커서도 그때 인형을 다시 안았을 때의 생경한 느낌을 잊지 못할 거다. 그와 함께 인생의 최초 교훈을 얻는다. 아 이제는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혹은 두 번 다시 너를 뺏기지 않을 거야 하는 그런 것들. 보통이라면 전자고 여기서 조금 삐뚤어지면 후자가 되는 경우다.
그리고 그 비스무리한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이라면 그 뒤로 당연히 그 주체에 대해 저도 모르게 은연중에 집착을 하게 된다. 세상에 있는 각자의 인형에게. 누구에게나 소중한 건 있기 마련인데다가 아무래도 소중한 걸 잃으면 얼마나 끔찍해지는지 몸소 겪은 바가 있으니까.
죠의 경우에는 그게 가정이었다. 그러나 가정은 인형 같은 게 아니라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는 알았다. 영영 잃었다. 힘들었으나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
“…이거 뭐지.”
“…….”
“나 혹시 잘 못 들어온 건가…….”
얼빠진 표정이다. 화를 내고 싶긴 한데 눈 앞에 인물에게 내도 되는 건지 약간 헷갈려서 참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벌레 본 듯 냅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니 친절한 사람 같아 보였다. 필히 그랬다. 그는 그 표정을 하고 손만 움직여 문고리를 턱 잡았다. 문에 올라오는 손가락이 길쭉길쭉했다. 그리고 몸을 바깥쪽으로 빼어서 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게 보였다. 역시 본인이 맞는 호수 앞에 서 있음을 깨닫고 둥그런 눈이 느릿느릿 껌뻑거린다. 분명 당황했다.
“엑, 맞는데….”
“…….”
얇은 밑입술이 옴짝달싹 하다가 이내 일자를 그린다. 물론 당황한 건 죠도 비슷하다. 집안이 조용했기에 현관문 쪽에서 기척이 나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에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치길래 앞에 가서 서 있었을 뿐이다. 실은 그런 게 조금 반가웠을 지도 모른다. 죠가 스스로 열고 들어오는 것을 제하고는 며칠 만에 타인에 의해 열리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집주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보기는 없었다. 그러나 죠는 문이 열리자 의외의 방문자를 반기게 되었다. 보기에 없던 낯선이다. 상대도 그렇게 피차일반으로 생각하는지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죠를 내려다 봤다. 키가 컸다. 언뜻 보아도 상당한 장신이었다. 죠의 고개가 그의 기럭지를 따라 올라간다. 선이 부드럽게 끝나는 얼굴이 희었고 보들거리는 감촉을 내는 듯하였다. 그게 엄청나게 매끈해 보였다. 순간 턱을 쥐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미풍처럼 일었다. 그러나 모르는 이에게 그런 실례를 범할 수는 없었으니 생각 뿐인 공상은 그렇게 그쳤다. 대신 바깥에서 들이치는 해에 얇은 머리칼이 반짝이는 걸 눈에 담고만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이 개새끼가 설마…….”
“…….”
“미안. 오해하지 마. 너한테 한 건 아니야.”
“…….”
“그, 혹시 말 못하는 거야?”
죠는 양옆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혼잣말에 가깝던 말을 중얼거리던 그의 눈이 살짝 찌그러지며 웃었다. 그래도 아직 죠의 정체를 의심하는지 금방 다시 원상복구 되었으나 눈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애새끼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만.”
남자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다시 죠를 바라봤다. 죠에게 뭐라도 설명을 해보라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에 응당한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말이 목구멍에서 걸린 듯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죠가 그리 수다스러운 타입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은 건지 혼자 해결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하였다. 죠를 잠시 내버려 두고 뒷걸음질을 쳐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화면을 몇 번 만지작대더니 금방 핸드폰을 뺨에 갖다 댔다. 죠는 그의 몸이 반쯤 들어온 현관에서 모조리 빠져나가기 직전 그가 방금 전에 했던 것처럼 문고리를 잡아 문이 닫히지 않게 고정 시켰다. 그걸 보고 그의 눈이 조금 가늘가늘 해진다.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저 문을 잡고 있었을 뿐이니까. 죠는 그가 이내 집안에 걸어 들어올 것을 알았다.
“유치원생을 데리고….”
“…….”
그 정도로 보이나? 이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원래 제 나이보다 두 세 살 정도 어리게 보긴 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죠는 당연히 그의 습관성 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죠는 문이 닫히지 않게 잡고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그를 쫓았다. 남자는 뺨에 갖다 댔던 수화기를 금방 내렸다. 아마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가 그 이후에도 몇 분에 걸쳐 몇 통의 전화를 걸어대는 동안 죠는 얌전히 기다렸다. 어차피 죠는 그 통화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건 오직 남자 뿐이었다. 끝내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화가 난 건지 남자의 입매가 일자로 꾹 다물렸다. 죠는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잠시만.”
“……”
“너 이름이 어떻게 돼?”
드디어 남자의 관심이 다시 죠에게로 향했다. 죠는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사쿠라….”
거기까지 말하고 죠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죠의 말을 끊은 뒤 엑! 하고 짧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역시 말할 줄 알면서!
“왜 안 말 했어? 나 진짜 오해 했잖아.”
“…무엇을…….”
“오마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파트 복도를 잠시 메아리처럼 매웠다가 흩어졌다. 죠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 박자 늦게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집 주인… 아니다. 코가 유다이야. 들어가도 되겠어?”
사실 유다이는 그 집의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한 번도 안 틀리고 치고 들어와서는 멈춘 현관 앞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애 허락을 받았다. 죠는 단박에 마음이 당겨지는 경험을 하였다. 생소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으로 들어온 유다이는 신발을 벗고 그것을 발로 슥슥 밀어 구석으로 대강 정리했다. 현관에서 몸만 빗겨 서 있는 죠를 먼저 지나쳐 거실로 간 뒤 외투를 벗어 소파 팔걸이에 가볍게 얹어두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소파 아래에 무릎을 대고 꿇어 앉았다. 까만색 양말 신은 두 발이 허벅지 아래에서 눌리며 사라지는 게 보였다. 죠는 여전히 서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유다이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유다이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되었다.
“…뭐해?”
탁상 위에 리모콘을 집으려던 유다이가 그런 죠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오이, 뭐하고 있냐고. 와서 앉아. 죠는 그제서야 삐걱삐걱 발을 움직였다. 무슨 입력을 넣어줘야 허락이라 여기고 출력값이 나오는 코드 같았다. 그럼 더 구체적으로 일러줘야 하나. 방금 건 너무 개한테 지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죠에게 조금 친절해지기로 의식한 유다이는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친히 가리켜 주었다. 그러자 죠가 유다이가 지정해준 곳으로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리고 자세 까지 그대로 카피하여 유다이와 똑같이 바닥에 앉았다. 결국 그 모습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긴 무릎이 제대로 접히지도 않았다. 뼈가 딱딱하게 눌리는지 인상까지 연하게 찌푸렸다. 으하학 뭐야, 너? 나 따라하지 않고 그냥 네 마음대로 앉아. 나는 이게 편해서. 네에… 이 자세는 항상 불편해서……. 그러자 기어들어가는 음성을 한 죠의 귓바퀴가 색종이 마냥 새빨개지는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꾸물꾸물 다리를 풀었다. 그걸 보고서 헛웃음이 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이 뭐야? 성은… 아사쿠라니까….”
“…죠 입니다.”
“아사쿠라 죠.”
유다이가 죠의 이름을 느린 템포로 발음한다. 죠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전보다는 미미해진 동작이었다. 왜인지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제 성과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후에도 유다이는 세 번이나 더 죠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아사쿠라 죠. 네가 아사쿠라 죠 구나. 그래. 아사쿠라 군…. 이렇게 부르는 건 조금 별로인 거 같아. 그냥 죠 군이라 부를게. 괜찮아? 감사합니다. …뭐가? 그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래….
“동생이 있는지 몰랐어.”
잠시 동안의 침묵 뒤 다시 입을 연 건 유다이 쪽이었다. 그의 말에 죠는 그저 유다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잃어버린 거. 어쩌면 채워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까부터 너무 바보 같지만. 그리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게 좋다. 또 그런 생각. 더 다정하게 불러줄 수 있나? 처음 보는 사람 이니까 그 정도 생각은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직 나를 잘 모르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당신을 몰라.
“사실, 저도…….”
“에?”
“몰랐습니다.”
“…으엑?”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이럴 때는 말주변이 없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유다이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여태 모른 채로 살았던 건 어느 정도 맞으니까. 만날 일도 없었고. 유다이는 적절한 티비 채널을 돌려보다 말고 고개를 돌린 채 죠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아까 전 문을 열고 죠를 처음 보았을 때와 표정이 비슷했다. 미간이 살짝 찌그러진 얼굴이 조금 희었다. 너 그게 정말 진심이야? 다시 진지하게 되묻는다.
“그렇습니다.”
“…….”
“처음 만나는 거니까요….”
죠는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묻는 말에 최대한 성실히 대꾸한다.
2.
코가 유다이는 대학 학부생이다. 원래라면 졸업을 해야 하는 나이이지만 남들보다 진학을 늦게 하였다. 대입 시험에 낙제하고 방황하다가 다시 시험을 봤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지만 뒤늦게 생각이 바뀌었다. 부랴부랴 시험을 준비해 턱걸이로 커트 라인에 들었다. 고작 2년 정도 가지고는 장벽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코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어린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나이 덕을 본 것도 있었다. 그가 재수를 한 걸 알고 오히려 과에서 형님 대우를 해줬다. 1학년 때부터 선배들과 눈치 보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그 이유 탓인진 모르겠으나 연상의 여자들이 유다이에게 꽤나 호감을 느끼고 다가온다는 것들 정도. 물론 전자나 후자가 학교에 좀 다니다 보니 다 귀찮아 졌지만.
대학 생활은 대부분 평탄했고 적응할 수 있을까 하던 걱정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이전까지 많이 방황하기도 했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진득하게 앉아 공부를 하는 게 유다이가 안정을 느끼도록 해줬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어딘가에 속해 정상 범주에 드는 게 좋았다. 가벼운 주제로 힘을 들이지 않고 잡다한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곳에서 걱정이라고는 시험 대비 정도 뿐.
학교를 반절 무렵 다녔을 무렵. 새 학기 개강을 했다. 후덥지근 했던 여름이 끝나고 드디어 바람이 차고 건조해졌다. 해가 지면 꽤 쌀쌀하기도 했다. 유다이는 구매해두고 어쩌다 보니 한 달간 손을 대지 않던 카멜색 스웨이드 자켓을 꺼내 입었다. 아직 새 옷 냄새가 나 탈취제를 뿌렸다. 너무 가을 타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되기도 했는데 유다이는 자신의 몸이 그 정도 유려한 핏을 구현할 수 있는 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렸다. 허벅지까지 꼭 맞게 달라붙는 까만색 진을 입고 전체적인 톤을 맞추기 위해 브라운 빛이 도는 로퍼를 신었다. 막 나가기 전 신발장에 거울로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러다가 번호가 따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혼자 생각만 하고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새로운 계절과 새로운 학기. 이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진 공기를 폐 속에 담으며 길가를 걸었다. 이따금 길가에 떨어진 마른 잎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밟히기도 하였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 탓인지 뭔지 번호는 따이지 않았다. 강의실에 착석하여 간만에 만난 동기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아직 정각이 되기 십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동기들과 서로의 시간표를 비교해 보고 이전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는 걸 깨닫고 웃었다. 간만에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음성이 유다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일상이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일시적이지만 불현듯 안정을 느꼈다. 유다이는 일상을 사랑했다. 단순함은 생각보다 제 형태로 유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그게 늘 도망갈까 살피는 게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다. 오늘은 학기 첫날이니까 수업을 조금 짧게 끝내주지 않을까 대화를 하던 중에 강의실 앞쪽 문이 덜컹거리더니 조금 어렵게 열렸다. 유다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나 소란스럽던 공간이 잠시 웅성거리더니 이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에 따라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아. 또 새로운 인물. 정말 여태 못 보던 얼굴이었다.
잠시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애매한 사람이었다. 학생이라기엔 착석해 있는 이들과 기류가 묘하게 다르고 또 강의자라기엔 너무 젊어 보여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새로 전임한 조교수 였다. 그는 보이는 대로 젊었고 나이에 비해 유능했고 얼굴마저 반반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아. 저는 신경 쓰시지 마시고 편히 계셔도 괜찮습니다. 수업은 정각에 시작할게요.”
표준어를 구사하는 말투는 느리고 부드러웠다. 유다이는 잠시 시계를 살폈고 아직 정각까지 7분이 더 남아 있다는 걸 읽어냈다. 그러나 교수가 들어온 이상 다들 대놓고는 떠들지는 못하고 이곳저곳에서의 자판 소리만 빨라졌다. 어떻게 저런 나이로 교수가 된 거지. 우와 신발 예쁘다. 어디 거지. 유다이는 그저 그런 게 궁금할 뿐이었다. 옆에 동기도 유다이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건지 짧게 구시렁대며 교수 자질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강의실은 곧 완전히 잠잠해졌다. 교수는 제 등장으로 학생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망친 것 같은지 어색하게 웃었다.
수업은 정말 딱 정각에 시작 되었다. 아직 새 학교의 프로그램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지 출석부를 반으로 펼친 채 듣기 좋고 단조로운 톤으로 학생들을 호명했다. 유다이는 본인의 순서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눈이 깜빡이던 순간 잠시 마주쳤던 것 같다. 스치지 않고 몇 초간 그대로 멎었다. 얼굴과 이름을 외우려고 하나. 아무리 나이스한 교수라도 첫날에 그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유다이가 다른 곳으로 시선 처리를 하며 먼저 눈을 피했다. 그러자 강의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일정한 속도의 목소리가 멎으니 사람들이 조금 당황해하는 듯했다. 유다이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사유인지 솔직히 눈치채지 못했는데 교수는 여전히 유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목 당하니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닌데다가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냥 눈만 몇 번 깜빡거렸다. 그게 저도 모르게 불편하다는 신호로 넘어간 건지 한 겹 너머의 시선이 이내 끊어졌다. 교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마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곧 시작한 강의나 들었다. 예상대로 이번 학기부터 전임 되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초임이고.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학생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조금은 뻔뻔스레 말했다. 자연스레 보드에 적힌 성을 읽었다. 朝倉. 부르게 될 일이 있긴 할까 싶었다. 강의실 온도가 적당하고 교수의 나른한 목소리에 금방 잠이 왔다. 원래 유다이는 어린 시절부터 책상에 앉기만 하면 수면 모드에 들어가는 특기로 유명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코 앞에 앉아 조는 건 좀 그래서 턱을 반대 손으로 바꿔서 괴며 졸음을 최대한 참았다.
사실 첫인상이 그리 좋았던 건 아니다. 그건 강의실 안에 앉아 있던 모두가 해당될 것이다. 왜냐하면 첫날 오티임에도 교수가 수업을 일찍 끝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발심이 들어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자꾸만 교수와 눈이 마주치는 건 기분 탓이겠지 생각하며 앞을 봤다.
“코가…라고 했나?”
그리고 나가는 순간에 교수가 그를 붙잡고 이름을 물었다. 당시에는 공포스러웠다. 내가 자네를 지켜보겠어 그런 의미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그렇게 하는 건가 살피고 싶었는데 인파에 밀려 강의실을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동기들에게 은근히 물었으나 하나같이 그런 적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코가는 아사쿠라를 처음 보았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아사쿠라가 어떤 이인지. 어떻게 코가의 마음을 엉망으로 부셔 놓을지. 더 나아가 무엇으로 코가를 괴롭게 할지.
*
과거에 깊게 좋아하던 이들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하나뿐이던 누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며칠 내내 비가 내리던 흐린 날이었다. 그런 날의 교통사고. 축축해진 아스팔트에 바퀴가 미끄러지며 중앙선을 넘은 반대쪽 차량과 피할 새도 없이 충돌했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어디 하나가 불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나가 타고 있던 차가 헛돌며 뒤에 오던 차량과도 한차례 더 부딪히고 나서야 바퀴가 완전히 멈췄다. 차제가 형체도 몰라볼 정도로 심하게 찌그러졌다. 현장에서 죽은 건 오직 한 명이었다. 유다이의 누나. 더 끔찍하던 건 그 이후의 일이다. 부상의 정도가 심각하여 입관 시킬 때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결국 수습하지 못해 수의 속에 얼굴을 가려야 했다.
유다이는 자라나며 일 때문에 바쁜 부모보다 누나에게 애착을 느꼈다. 이혼 가정으로 달에 번갈아 양육자가 바뀌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게 일상화 되었다. 이해했다. 바쁘니까. 원래 어른들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들이 바빴기 때문에 좋은 걸 입고 좋은 걸 먹는다는 알았다. 그리고 누나가 있었기에 애정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서로 뿐이었던 남매는 세상 그 누구보다 의지했다. 그래서 유다이는 누나의 소식을 접한 날 누군가가 어딘가 몸의 일부를 강제로 도려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부정했다. 그래서 눈물도 안 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겨우 정신을 차리자 뇌가 몇 갈래로 찢어지듯이 고통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 까만 상복을 엄마가 아빠 품에 기대 숨죽여 울고 있었다. 몇 년 만에 하나로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짙은 슬픔이 한 겹 지나고 나니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크는지 다 지켜봐 주기로 했잖아. 빈 자리가 멍울처럼 남았다. 다시 같은 피로 이어진 무한적인 지지를 받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상실이었다. 극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가끔씩 그녀 생각이 나는 건 여전했다. 계절 바람이 스칠 때.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그럼에도 유다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 제가 죽어서 다른 세상에서 가 만나지 않는 이상. 불안이 멎을 때까지 이와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그러면 어떻게든 어둠이 저물고 해가 찾아와 날을 밝혔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이겨내진 못하고 어느 정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변명이라도 해. 제발… 정말 이렇게 끝낼 거야?”
“미안해. 하지만 네가 본 게 전부일뿐이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화장기 없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화도 안 났다. 어차피 화를 내 봤자 비참해지는 쪽이 더욱 저명해질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 시들해졌다는 건 알았다. 데이트를 삼아 멀리 나가지 않았고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연락하거나 찾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더 노력해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힘들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봤자 원인 제공일 뿐이지 않을까.
“끝내자.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나름 오래 사귀었던 여자였다. 집안끼리도 왕래를 해왔다. 누나의 장례에도 당연히 참석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조용히 찍어내고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다이를 배우자처럼 안아주려 했다. 그런 여자는 십 대 끝물부터 알고 지내던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다. 상대는 유다이도 아는 이었다. 가끔씩 섞여 만나기도 하였다. 유다이는 이틀 전 그녀의 맨션 복도에서 그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 누가 봐도 떨어지기 싫어 아주 애틋한 연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꿈인가. 한참 멍해 있다가 둘이 서서히 떨어지길래 복도 사이로 몸을 숨겼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발이 먼저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그 복도에서 불청객이 된 건 유다이 쪽이었다. 거기서 알고 있지 못했다고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나. 나의 마음을 멋대로 단정 짓고 일방적으로 끝내버렸다. 단순히 연인 사이의 이별보다는 너무 잘 알고 있던 이에게 배반을 당한 느낌이 들어 타격감이 더욱 심했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힘든 거 알면서 나를 버리다니. 이제 나는 정말 혼자야. 머리가 아팠다. 배 안 쪽에 깊은 멍이 든 것 같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혼자가 되는 건 이미 겪어 봐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다. 또 버려지는 걸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싶은 상태가 되었다.
그 이후에 생물학적으로 다른 성별이 조금이라도 성애적으로 다가오면 급격히 속이 안 좋아졌다. 오래간 친구로 잘 지내오던 이들도 유다이에게 무언가 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 그 즉시 멀어지고 싶었다. 이상했다.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 같았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기에 이별 후유증임에 분명했다. 원래 둘 중 바람을 피울까 봐 늘 불안해하던 건 여자 쪽이었다. 그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이런 짓을 벌인 걸까? 유다이에게 아무 이유도 듣지 못하고 차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야 거짓 지어내는 건 능숙하지 않았고 그 이유를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아. 이렇게 멀쩡한 허우대에 여자 공포증을 겪고 있다고 말할 바에는 그냥 개걸레라고 소문 나고 학교를 불명예스럽게 그만두는 게 낫다. 사실 그걸 진심으로 원한 건 아닌데 실제로 얼굴값 하는 유다이의 이상형 기준이 너무 높다는 소리가 돌았고 그에 괘씸해진 이들이 말을 조금 부풀려놓으니 결론은 ‘코가는 걸레다’로 귀결되었다. 뒤지게 고마웠다. 그래도 학교 그만둘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언젠간 다시 여자를 사귀어야 했지만 결심이 들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 남의 일을 전해 들은 것 마냥 희미했다. 어떻게 여자를 만나고 여자의 살결을 만지고 키스하며 몸을 섞었는지 기억 잘 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정말 남성성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나 불안해졌다. 그래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혼자 푼 게 언제인지 물었다. 아마도 몇 달 전? 그마저도 가물가물했다. 비뇨기과에 가보라는 굴욕스러운 소리나 들었다. 개소리 하지 말라고 질색했으나 그날 집에 가서 씻으며 수음해 보았다. 다행히도 생식기관이 불구가 된 것 아니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관건은 이걸 어떻게 여자 앞에서 다시 세우나 였다. 또다시 우울해 졌다. 혹은 이렇게 된 이상 다 털어놓고 여자에게 기대는 수를 쓰는 것인데 그건 또 싫었다.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것 정도는 좋아도 누나가 되어줄 이를 찾는 게 아니었다.
됐어. 뭘 기대해. 그냥 이렇게 혼자 살다가 죽는 거야.
사주 팔자에 독수공방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하여튼.
가을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쯤 되었으려나. 유다이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허가 찔렸다. 정말 불시에 당했다. 훨씬 더 황당한 곳이었다. 새로 온 조교수의 연구실. 그 사람을 제하고는 지난 학기와 학교의 구성원이 거의 흡사했다. 지나갈 때마다 빈칸으로 남아 있던 연구실에 그의 성이 적힌 새 명패가 달린 걸 보았다. 수업에 빠지게 될 일이 있어 미리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방문한 찰나였다. 유다이는 연구실 앞에서 노크를 하기 전 잠시 망설였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고민 끝 노크를 하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그가 유다이를 반겼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리 잡은 상담 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남들에 비해 훨씬 젊은 나이에 가지게 된 번듯한 직업 탓일지는 몰라도 그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은 이미 보는 순간에 알았다. 유다이만큼이나 장신이었고 옷을 매번 깔끔히 입었다. 은은하게 맺힌 까만 눈매는 단정하고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익살스러웠다. 언제든지 가늘게 눈을 휘고 웃어줄 것 같았다. 실제로 학생들의 인사를 잘 받아주고 누구에게도 항상 친절하다고 하였다. 동기들이 한 달 내내 그의 이야기를 했기에 강의실에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있잖아, 코가 군을 보고 내 학부생 시절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노골적이라면 노골적이었다. 의도가 담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흔히 건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수법인가? 거기서 관건은 유다이의 반응이었다. 당연히 이런 류의 호감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팍 늙은 변태 할아버지 교수나 띠동갑을 두 번 돈 중년의 여자 교수였다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조금 애매했다. 젊은 남자 교수. 둘의 나이 차는 기껏 해봐야 열 몇쯤. 게다가 그는 이십 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심하게 젊어 보였다.
“여자에게 데인 적 있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근데 이거 성희롱 아닌가? 같은 남자라고 이래도 되는 건가. 어디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기어코 유다이를 뒤돌아 보게 만들었다.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가가지도 않을 것이고.”
유다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을 연 뒤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딱 삼주 뒤 유다이는 아사쿠라의 오피스텔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다. 모노톤의 신축 건물. 인기척 없이 조용한 복도와 높은 층고. 집 안에는 가구나 살림살이랄 게 거의 없었다. 방 안에는 필기구 몇 점, 책이 성의 없이 서너 권 꽂혀 있는 책상과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른 방은 아예 새것처럼 비어 있었다. 누가 봐도 주 거주지가 아니었다. 유다이는 더 둘러볼 것도 없는 집안을 대강 둘러보고는 거실 바닥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도 없고 카페트도 없는 썰렁한 회색 집안. 그는 그리 내보일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머쓱해진 건지 이곳은 강의 때문에 전날 와서 하루 정도 묵기만 하는 용도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 나갔다. 유다이는 눈썹을 까딱하고는 말았다. 아무렴 상관있나. 내 사정도 아닌데. 그래도 갈 때마다 냉장고는 채워 놓는 건지 끼닛거리는 항상 있었다. 혼자 오래 살아서 요리를 잘했다. 매번 바질잎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와 선홍빛이 도는 두툼한 스테이크용 고기 같은 걸 구워서 유다이 앞에 내놓았다. 유다이도 혼자 사니 어느 정도 요리를 해 먹고 살았으나 도전하기 조금 힘든 류의 음식들이었다. 요리 실력 이외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하니까. 밖에서 먹고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근처 식당에 갔다가 다른 학생들 눈에 띄면 둘 다 곤란하니까. 아무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냥 직감 상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언젠간 지나가는 말로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고 한 적이 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잊고 있다가 어느 말 한 쪽 벽면의 반절을 덮는 신형 티비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았다. 저녁에 그 티비를 켠 채로 같이 웃다가 잠들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는 데에 마음이 놓여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조금 곤란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아사쿠라는 유다이가 여자와 헤어지고 정확히 유다이의 연해진 점을 파고들었다. 네 마음 알아. 나는 상처 주지 않을게. 아사쿠라는 말했다. 유다이는 그의 고백 아닌 고백에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그런 식으로 헤어진 이야기를 했던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렴 상관있나?
두꺼운 등을 껴안으면 미지근한 체온이 옮겨온다. 앞쪽으로 팔이 뱀처럼 옭아매며 유다이를 마저 끌어안아 준다. 품이 넓어 안길 때 항상 따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체향이 났다. 향수 때문인가. 그걸 깨달은 날은 그의 오피스텔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였다. 향수뿐만이 아니라 같은 바디워시를 썼기 때문이다. 옷 사이즈가 같아 옷장에 두고 구별 없이 갈아입었다. 때로는 좁은 샤워 부스에 두 사람의 몸을 구겨 넣고 서로의 등을 문질러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거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인간은 원래 어느 정도의 동성애적인 기질을 타고난다는 어느 기사 대목이 떠올랐다. 그동안 노출되지 않고 살았을 뿐이다. 그럼 나는 발현이 아니라 발견이었던가. 생각보다 더 덤덤했다. 금방 헤어나리라 여겼으니까. 아사쿠라와 자는 걸 다시 여자를 만나기 위한 수습 정도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 사람도 진심이 아니야. 인지할 때마다 늘 되뇌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일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유다이의 자취방은 갈수록 온기를 잃어가던 반면에 아사쿠라의 오피스텔에는 점점 물건들이 늘어갔다. 매번 사 먹던 커피 머신과 아침을 위한 토스터기를 들여놓았고 거실에 넓은 목재 테이블이 생겼다. 무거워서 웬만한 힘으로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 테이블이 생겨 나란히 노트북을 펼쳐놓고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며칠 사이 보관에 신경 써야 하는 신선식품을 배달 시켜 먹었다. 마침내 칫솔걸이를 샀다.
그냥 더 잘 지내기 위해서. 칫솔 머리맡에 자꾸 물이 고이는 게 비위생적이라 항상 신경 쓰였으니까. 정말 그뿐이었다.
3.
곤란하다. 곤란해.
“왜 계속 여기에만 있는 거야. 너 친구 없어?”
“네.”
1초 만에 대답한다. 설마 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오늘도 같은 그림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문 앞에 와있던 건지 문고리를 열자마자 죠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유다이를 보고 고개를 꾸벅였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가버릴 수 없어졌다. 확인하러 온 거긴 하지만 정말 확인만 하고는 시합 하는 것 마냥 반환점을 향해 뒤를 돌 수는 없으니까. 유다이는 그 인사를 대강 받아주고는 신발을 꾸물꾸물 벗었다. 먼저 거실에 가서 앉았는데 죠가 바로 안 따라왔다. 또 이리로 오라고 말을 해줘야 하는 건가. 고개를 빼고 바라보니 죠는 유다이가 막 벗어둔 신발을 정리하고 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 단 한 명도?”
“네.”
또 곤란하다. 이거 어린애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친구가 좀 없을 수도 있는 건데…. 유다이는 제가 물어놓고도 슬쩍 죠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죠는 그리 상처받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샘물처럼 투명했다. 누군가와 달리 거짓말 같은 거 하는 눈이 아니다.
“그럼 네 오니짱한테 가서 놀아달라 해.”
“형은 저를 달가워하지 않아요.”
“…왜?”
코앞에 있는 애가 어린 탓인가. 자꾸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헷갈렸다. 네 형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하는 말. 언뜻 보면 누구에게는 아주 평범하다 못해 평범한 말뿐이지만 괜히 눈치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태 죠가 먼저 형 이야기를 한 적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이가 먼저 한 적도 그다지. 아사쿠라의 서로에게 모두 불편한 주제였다. 그저 네 형 언제 들어오니, 네 형 어디서 뭐 한다니 둥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질문을 허공에다 던졌을 뿐이다. 죠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으니까.
“제가 불청객이니까요.”
“…….”
유다이는 입을 다물었다. 불쌍해 보이려고 의도하고 한 말 같지는 않았으나 불쌍해 보였다. 대체 누가 누구를? 안타깝게도 애먼 곳에서 공감 능력이 피었다.
죠에게 그는 껄끄러운 존재다. 존재도 모르고 살던 동생이 십여 년 만에 뚝 떨어졌으니까. 죠가 이 집에 있던 시기 상 복지센터에서 처음 연락이 왔을 때가 아마 한 달여 전이려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전화 같은 건 매번 잘도 숨겨와서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부모를 몇 년 간격으로 모조리 잃고 갈 곳 없어진 당신의 이복동생을 데려가세요. 그걸 어떻게 잘 포장해서 전했을까.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이니 뻘뻘 대며 소식을 전하는 공무원의 모습이 잠시 그려진다. 그리고 그 통화를 받는 아사쿠라의 모습 또한. 그가 유다이에게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유다이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듯 자연스러웠으나 이건 작정하고 숨겼다기에는 조금 애매한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모른 척하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오피스텔 문을 열어젖혔을 때 죠의 얼굴. 자꾸 생각났다. 들어오기 직전까지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는데 죠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마음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럴 일 없었지만 차라리 잘 못 들어온 것이길 잠깐 바랐다. 그 애는 주인 잃은 개 같았다. 주인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할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현관에 주저앉아서 주인이 오기만 몇 시간이고 기다릴 것 같았다. 그 애가 정말 개가 아님에도. 며칠을 그 착각에 휩싸여 괴로워하다가 결국 다시 갔다. 그 집의 명의인인 아사쿠라를 찾는다는 자신만의 속 핑계로. 학교에서는 만나 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유다이를 버러지 보듯이 쌩하니 지나쳐 가니까. 그가 인간 말종이긴 하오나 유다이도 공개적으로 망신당하고 싶지는 않아서 여태 참아왔다.
“…에휴. 밥은 먹었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애가 멀쩡히 밥을 해 먹고 씩씩하게 바깥에 나가 혼자 맛있는 걸 사 먹을 리가 없다. 사정을 알고 나니 더 딱하게 보였다. 아사쿠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새로운 부모와 자신이 꾸린 새로운 가정이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인생에 끼어든 이만 남았다. 십여 년 만에 나타난 이복형제. 불명예스러운 동성의 외도 상대. 모조리 불청객들.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 먼지 같은 것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애는 유다이의 거울 같았다. 그걸 매일 같이 들여다보거나 참지 못하고 깨트리거나. 후자가 맞다는 걸 알았으나 왜인지 자꾸 전자가 될 것 같아 또다시 괴로웠다. 아사쿠라 씹새끼를 죽여패고 싶었다. 일부로 유다이를 괴롭게 하려고 이곳에다가 그 애를 데려다 둔 것이 분명했다. 자꾸만 속에서 뭐가 치밀었다. 알 수 없는 먼 학교의 교복을 입은 죠. 이곳에 어떻게 왔다 갔다 하는 거지? 학교를 다니긴 하는 건가? 그럼 식사 같은 건? 한참 클 애가 왜 이렇게 말랐어? 친구가 없다는 게 괴롭힘 같은 걸 당해서 그런 건가? 나쁜 놈의 자식들. 할 수만 있다면 찾아가 혼내주고 싶었다. 그런 공상 따위로 머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어차피 물어본다 해도 죠가 거기 대답하는 데에만 이틀 정도가 걸릴 것 같았다. 과부하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속의 이야기를 생판 남에게 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내가 정말 누군지 알면 경멸할 거야. 유다이는 그저 한숨을 내쉬는 걸로 수많은 단어들을 삼켰다. 정말 끼니를 굶기라도 하는 건지 턱뼈와 셔츠 아래 어깨 같은 곳이 말랐다. 신경 쓰였다. 그 덕에 옷태가 좋긴 하다. 그런 게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런 생각이 들어 혼자 놀랐다. 그와 닮은 점을 빼어보다가는 밑도 끝도 없을 것을 알았다. 그냥 생각하기를 매운 유다이는 죠의 넥타이 매듭을 바라보다 주방 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물기 없는 싱크대와 열어본 지 한참 전인 냉장고. 뭐가 썩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그냥 건들기 싫었다. 애초에 단 한 순간도 내 것이었던 적 없으니까.
“외식할까?”
나오는 건 그 말뿐. 그 말에 그 애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것. 봐 버렸다.
애써 못 본 척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애초에 잘못된 접근이었다. 코가 상이 원하는 거면 뭐든 좋다고 했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메뉴를 단일로 선정할 이유가 없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행선지를 택했다. 괜찮지? 좋아요.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 거기 조심해. 얼른 가자. 배고프다. 해봤자 이런 가벼운 말들. 모조리 유다이 쪽이 했다. 두 번째 횡단보도에 나란히 멈추어 섰을 때 스니커즈를 신고도 죠의 다리가 꽤나 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직 십 대 끝물이니 아마 더 클 테다. 자꾸 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았는데 기럭지가 그 집안 내력인가 보다. 신호가 바뀌었다. 죠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식당에 들어가 반짝반짝 코팅 된 메뉴판을 보던 유다이는 금방 식사류를 골랐다. 죠가 먼저 결정하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정도는 파악했다. 예의가 바른 건지 고집이 있는 건지. 유다이의 예상대로 죠도 유다이와 같은 것을 골랐다. 드링크는 커피. 이것도 따라 할까 티 나지 않게 살피니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조금 고민한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 웃음을 참았다. 나눠 마시자. 오렌지 쥬스 어때? 좋아해? 일러주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자동으로 귓바퀴로 시선이 간다. 역시 붉었다. 계절 단풍처럼.
죠는 잘 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식성이 훨씬 더 좋았다. 생긴 것 마냥 먹는 것도 얌전했다. 씹을 때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유다이가 말을 걸면 물로 음식물을 깔끔하게 삼키고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부스러기를 전혀 흘리지 않고 긴 손가락으로 티슈를 가지런히 접었다. 그런 사소한 것이 모이고 모여 전체적으로 가정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났다. 죠가 접시를 다 비워갈 때쯤 유다이는 메뉴판을 다시 밀며 음식을 더 시켜도 된다고 말했다. 고민하다가 함바그 세트를 골랐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뜨끈한 채로 잘라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고 접시가 유다이 쪽에 더 가까웠다. 나이프와 포크를 거두고 다시 죠에게 밀어주었다.
“코가 상은 더 안 드시나요?”
“배가 찼어.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많이 먹어.”
눈앞에 음식이 있어도 무작정 입에 집어넣지 않고 남을 위할 줄도 안다. 맛있게 먹어. 죠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가 올라왔다. 그걸 보니 커피를 모아 넘기는 유다이의 입안이 돌연 까끄러워 졌다. 아무리 헹구고 헹구어도 자꾸만 모래가 버석버석 굴러다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죠가 식사를 하는 내내 그랬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역시 동정인 건가? 왜? 사정을 모르고 본다면 티끌 하나 없는 아이다. 평범한 고등학생. 소년.
“죠, 나 뭐 물어봐도 되나.”
“네.”
“혹시 형 기다리는 거야?”
그 새끼 기다려도 안 올 텐데. 물론 그건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자 포크를 쥐고 있던 죠의 시선이 올라온다. 그대로 유다이의 것과 마주친다. 유다이는 그 순간 의자 끄트머리에 대강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걸 약간 후회했다. 그 탓에 죠의 눈동자가 너무 가까이서 보였기 때문이다. 한계 없이 짙은 호수가 유다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왜인지 더 들여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피할 수 없었다. 넋을 놓고 그 애의 심연을 들여다봤다. 입을 열 때까지. 어떠한 말을 해서 유다이를 그곳에서 꺼내주기 전까지.
“기다리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계속 거기에 있어?”
“…….”
“아… 내가 혹시 말실수 한 거라면 방금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미안해.”
유다이는 죠가 부모를 연달아 잃었다는 사실을 잠시 간과하였다. 그리고 뒤늦게야 만난 적도 없던 이복형제에게 연락이 갔다는 것도. 유다이는 속으로 멍청한 자신의 주둥이를 탓하며 급히 고개를 내젓고는 실수의 주둥이를 다물었다. 어째 말을 할수록 마이너스이다. 안 그래도 상처받은 애한테.
“코가 상을 기다렸어요.”
“어?”
“다시 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
“네.”
그 말을 끝으로 죠는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식기를 부딪히거나 씹는 소리 없이 아주 조용히. 그 테이블에서 커피잔을 쥔 채 굳은 건 유다이뿐이었다.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잔을 내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죠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내면을 들여다보이게 된 건 어째 그쪽이 아닌 것 같았다.
당차게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실은 그 뒤로 어떻게 할지는 생각보지 않았다. 깊은 생각을 걸치지 않아도 단박에 이상한 관계였다. 껄끄러운 상대의 형제. 올려다보는 눈이 검고 깊었다. 확실히 덜 여문 얼굴이라는 건 알았다. 성숙해 보이지만 속은 아직 애라는 것도. 그러나 어찌 보면 형 되는 쪽보다 더 서늘했다. 눈매에 익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웃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게 교복이라는 걸 잠시 잊을 지경이었다.
코가 상.
바닥에 잠시 앉아 있다가 불현듯 바쁜 일이 있다며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두고 가버렸다. 허둥대는 유다이의 모습에도 죠는 그 이유를 묻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추궁 따위 하지 않았다. 그저 도망이라도 치듯이 급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유다이의 모습을 시선으로 그림자처럼 쫓을 뿐이었다. 그곳을 나서는 내내 뒤통수가 계속 따끔거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본인조차도 몰랐다. 그 오피스텔로 제 발로 기어갈 줄은. 그런데 다시 올 줄 알았다니.
코가 군.
아사쿠라는 유부남인 걸 숨기고 유다이의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그냥 섹스만 했으면 나았을 텐데 자꾸만 곁을 내주게 만들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가정을 두고 있는 인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언제나 자유롭게 만났고 네 번째 손가락에는 어떠한 자국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 강의를 나간다는 건 집에 돌아가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거짓에 속아 넘어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멀쩡하게 헤어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일주일에 세 시간은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어야 하니까. 나를 보는 게 힘들면 나오지 않아도 돼. 점수는 신경 쓰지 마. 너에게는 좋게 줄 수 있어. 그걸 듣고 나니 안 그래도 더럽던 기분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내가 그깟 점수 때문에 만난 줄 알아? 네가 먼저 다가왔잖아. 반발심이 생겨 꾸역꾸역 모든 수업에 나갔다. 제일 가까운 곳에 앉아서 웃는 낯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니 이제 제발 나오지 말아 달라고 먼저 빌더라. 손목을 이끄는데 힘이 꽤 실려 있었다. 얼얼하다고 느낄 지경이었으니까. 내버려 두면 자국이 날 것 같았다. 내려다보니 부들부들 볼품도 없이 계속 떨린다. 유다이는 어렵지 않게 그의 상태를 알아냈다. 헛웃음이 났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멀쩡하게 내버려 두기 싫었다. 문도 잠그지 않은 연구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불안해하며 머리통을 밀어내는 손길은 금방 멎었다. 이내 목구멍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거기에 숨이 잠깐씩 막혔다. 거기서 그냥 좆을 물어뜯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그건 너무 비위가 상했다. 역겨운 걸 참으며 그가 제대로 느끼기 직전에 입을 뺐다. 입가를 거칠게 닦은 뒤 구두 굽에 침을 모아 뱉었다. 그대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던 중 뒷덜미를 틀어 잡혔다. 그때는 헛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음이 피어났다. 때려준다면 그야 땡큐였다. 선빵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이십 대 남자 얼굴에 기스 나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니었다. 볼 캡 눌러쓰고 다니면 멍도 금방 다 빠진다. 그러나 평판을 그리도 중요시 하는 유부남 교수의 안경다리가 부러지는 건 다른 강도의 문제였다.
‘때리세요.’
‘뭐?’
유다이가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손이 떨리고 있다. 그는 유다이를 끝내 때리지 못하였다. 차라리 맞은 그대로 돌려주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형을 보긴 봤어?”
“네.”
“언제?”
잠시만. 혹시 또 막 십년 전 이런 거 아니겠지. 그럼 또 조금 곤란한데.
“처음 이곳에 올 때….”
“그럼 네 진짜 집은?”
“있어요. 그대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때 죠의 뺨에 슬픔이 돌연 반쯤 스몄다. 집 이야기를 하니 부모님 생각이 난 건가. 유다이는 당황했으나 죠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내버려두었다.
“후견인이 없다면 혼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상속 문제가 아직 남아있는 걸요.”
유다이는 문득 떠올려 냈다.
“내가 도와줄게.”
그에게 복수할 방법을 말이다.
4.
유다이와 죠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만났다. 거의 저녁 시간 때였다. 바깥에서 밥을 먹고 소화를 핑계로 길을 걷다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조금 더 걷다가 역 근처에서 자연스레 헤어졌다. 혹은 유다이가 먹을 것을 포장해 죠가 있는 오피스텔로 갔다. 함께 볼 예능을 틀어놓고 포장 용기를 깨끗하게 비웠다. 죠는 유다이가 올 때마다 현관문 앞에서 유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몇 번씩 똑같이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나를 반기지 않아도 된다고 솔직히 이야기 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러나 죠는 잘 지키지 않았다. 늘 유다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기고 그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유다이가 거실로 가 앉으면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신발 정리를 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다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할 때 그 애의 뺨에 산뜻한 활기가 돌았다. 잘 익은 사과를 보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시험 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죠에게 낼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생도 어차피 시험 기간이 아닌가? 주변에 다른 고등학생이 없어서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포털창에 검색해볼 정도는 아니고. 죠에게 물어보면 직빵이겠지만 무언가 공부 하라고 부추기는 꼴이 될 것 같아 묻지 않았다.
번호는 진작에 교환해 가끔 라인을 나눴다. 학교가 바빠 당분간 만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읽는다. 너무 빠르다. 놀라서 금방 핸드폰을 뒤집어 버렸다. 바로 답장이 오리라 여겼는데 오지 않았다. 읽은 상태로 반나절이 흘렀다. 조금 신경 쓰다가 유다이는 까먹어 버렸다. 그리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저녁에 출출해질 때쯤 갑자기 그게 떠올랐다. 아직도 읽음 처리 된 상태로 남아 있다. 실수로 눌러버려서 온 지 조차 모르는 건가. 거기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에 대화창이 떴다. 타이밍이 무서울 정도로 교묘했다. 이상하네. 유다이는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네.]
…지금 이거 보내려고 하루 꼬박 고민 한 건가. 멍하니 채팅창을 내려다보았다. 죠라면 느린 아이니 그럴 수도 있나…. 어쩌다 보니 유다이도 죠의 답신을 1초 만에 읽어버렸다. 거기에 답장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 그냥 채팅창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보고 싶을 거예요.]
미간이 절로 찌푸려 졌다.
뭐야?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사이인가. 러브레터라도 보내는 듯한 어투다. 몇 초간 잠잠하게 내려다 보았다.
일주일 정도 죠에 대해 신경 끄고 살았다. 대신 그의 형을 보았다. 맨눈으로 유다이를 보기 껄끄러운지 요새는 자꾸 안경을 쓴다. 어차피 뭘 해도 꼴불견인 건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중에 죠도 저 만큼 커서 저렇게 재수 없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되었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고 거의 평생 만나지 않고 살아왔어도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인간들이니까. 그렇게 되는 건 너무 끔찍하단 말이다. 오피스텔이 무슨 쓰레기통도 아니고. 처리하기 귀찮은 인간들을 한 곳에 몰아둘 수 있는 발상을 한 뒤 거기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한 인간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거기에 뻗대기 위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인간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고 사는 게 나을 뻔했다. 아주 타인인 코가가 봐도 그랬다.
[유우,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줘.]
[마음이 아파.]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한 시간 뒤 스팸 메시지가 왔다. 또 새롭게 판 계정인가. 이니셜로 된 닉네임이었으나 누군지 알만 했다.
그 대화창 바로 아래에는 작은 아사쿠라의 [보고 싶을 거예요.]가 있었다. 둘 다 지울까 하다가 위의 것만 읽지 않은 채 지웠다.
도서관과 카페를 오가며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살았다. 자취방은 겨우 씻고 나오는 여관으로 전략 해버렸다. 일주일에 세 시간 이상 침대에 편히 누워 마음을 놓고 자본 게 언제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었다. 쉬고 싶었다. 그날은 유독 더 피곤 했던가? 정신이 잠시 다리에 달렸던 건지 걷다 보니 그 오피스텔 앞에 와 있었다. 술도 마시지 않고 그럴 수 있는지…. 가로등 아래에 선 유다이는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 끝은 5층. 아사쿠라. 아사쿠라의 동생이 있는 곳. 아사쿠라 군이 있는 곳.
초인종이나 노크도 않고 다짜고짜 도어락 커버를 열었다. 처음부터 외울 필요도 없었던 네 자릿수 비밀번호를 쳤다. 1021. 코가의 생일. 죠는 알 리가 없다. 제가 매일 누르고 있는 숫자가 형의 불륜 상대의 생일인 거. 알면 어떤 반응이려나? 놀라려나? 그 애가 놀라는 건 아직 본 적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도 소리 하나 내지 않으니까.
“…….”
분명 자고 있을 시간이다. 평소대로라면. 이제 해가 지기 보다는 뜰 시간에 더 가까웠으니까.
“…뭐야. 안 잤어?”
“네, 네…….”
필히 거짓말이다. 문을 여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죠가 현관에 서 있었다. 흐트러진 잠옷 차림. 눌린 머리. 누가 봐도 자다가 뛰쳐나온 좀비 같은 꼴. 말이 평소보다 더 늘어진다. 죠는 역시 놀라지 않았다. 둘 다 잠시 아무 움직임 없으니 얼마 지나니 않아 센서등이 픽 하고 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어둠이 드리웠다. 거실에 듬성듬성 가려진 커텐 틈으로 들어오는 약한 달빛에 마르고 긴 몸이 슬쩍 비칠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희미해 졌다. 어두우니까. 피곤했고.
“당분간 못 오신다고….”
그 애는 유다이 때문에 억지로 깨어난 잠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손등으로 눈가를 마구 비비며 물었다. 안 그래도 낮고 작은 목소리가 아예 저 아래에 잠겨 있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 재워 줘.”
“…….”
“집이….”
“…….”
“집이 너무 멀어.”
“…들어오세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집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다.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아사쿠라에게 속았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오직 피해자라고 보이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그래봤자 불륜남이다. 똑같은 새끼가 되기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러나기도 싫었다.
“아사쿠라…….”
유다이는 어깨에 손에 쥐고 있던 걸 모두 놓아버렸다. 길게 맨 가방과 종이 더미 같은 게 바닥으로 모조리 추락했다. 무언가 쿵 하고 찧는 소리에 죠가 바로 뒤를 돌아봤다. 마른 몸이 젖혀지는 순간 팔을 붙들었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더 생각할 힘이 없었다.
“…….”
“……아,”
그러니 그 이후의 일은 제 탓이 아니다. 순식간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몇 초 정도는 되었을까? 죠가 유다이의 어깨를 부여잡고 입을 맞춘 것은. 약간 까끌까끌한 입술이 스치듯 다가와 그대로 다른 입술에 붙었다. 자연스러웠다. 그게 본래의 자리에 있던 것 마냥. 그대로 찍어 내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코 앞에서 일었다. 타인의 체온이 살갗을 주무르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죠의 것이 닿는 족족 모두 뜨거웠다. 살 안쪽까지 깊에 들어와 녹을 것 같았다. 입매가 벌어지기도 전에 고개가 옆으로 부드럽게 꺾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더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지. 왜 이리 능숙한지. 왜 이딴 짓을 벌이는지. 자각은 있는지. 그딴 걸 하나도 물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너무 지쳤다. 누군가를 기를 쓰고 미워하는 일. 사실 그리 밉지도 않은 사람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죠를 이용해서 복수에 성공 한다고 치면? 그 이후는? 그렇다면 잃어버린 내 마음이 보상 돼?
그럼 그 애는?
그저 밤이 어둡고 피곤했다. 그렇게 떠올렸을 뿐이다. 밤이 어둡고 육체가 피곤한 건 괜찮다. 그러나 길어진 밤이 정신을 온통 짓누르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걸 멋대로 읽어낸 건 죠가 벌인 짓이다. 어떻게 했는지 조금 무서워 지려 했다. 고작 밥 몇 끼 같이 먹은 것 뿐이잖아. 딱한 사정의 애새끼를 보며 그래도 얘 보다는 내 처지가 낫지 정신 승리하며.
방심한 사이에 누군가가 입을 맞춰오니 그 사이가 그대로 벌어졌다. 상대의 본능에 그대로 응했다. 아랫입술을 물고 괴롭히던 혀가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서로의 입안은 뜨겁고 좁았다. 유다이는 죠가 입안을 더 벌리는 걸 받아주다가 몇 발치 조금 뒤로 밀렸다. 한 팔을 뻗어 본능적으로 뒤를 더듬었다. 벽이 바로 뒤에 있었다. 그 와중에 주도권을 단 한 뼘도 빼앗기기 싫어 밀려난 만큼 밀어냈다. 죠는 그대로 밀렸다. 다시 유다이를 밀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배가 맞닿았다. 어깨를 세게 껴안은 손이 등을 타고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허리 쯤에 닿았다. 막 자다 깬 몸은 온통 뜨거웠다. 자꾸. 자꾸…. 뇌 속으로 전기가 직행으로 꽂힌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군.
유다이는 있는 힘껏 죠의 팔뚝을 쥐었다. 그리고 공간을 벌려 떼어냈다. 끊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거부하지 않고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힘을 최대치로 실었으니 그 종잇장 같은 몸이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게 용할 수준이었다. 죠는 그로 인해 멀어진 만큼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한 가운데. 유다이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 아래가 언뜻언뜻 빛났다. 아무리 어두워도 볼 수 있었다. 드물게 물기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빛을 잃은 건 유다이의 것이었다.
“따라오지 마. 죽여버릴 테니까. 진심이야.”
“…….”
“이제 볼 일 없을 거야.”
진심으로 문장 사이사이에 온갖 살기를 담아 말했다. 번들대는 죠의 눈을 보고 말하는 내내 폐가 가파르게 부풀었다 꺼졌다. 그 안에 자꾸 불순물이 담겼다. 어서 이 공간을 벗어나 지워내고 싶었다.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웠다. 죠가 더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는 이상한 짓을 벌일 같았다. 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부서져라 닫고는 죠가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다시 열린다면 봐주지 않고 칠 생각이었다. 더 혼쭐 내지 않은 게 후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복도에 서서 십분 가량 문을 노려봤다. 내려가는 순간 조차에도 미친 새끼 마냥 거기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눈알에 핏발이 돋은 느낌이 났다. 여태 준비해온 전공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몇 시간이라도 자고 어서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수십 개의 추를 매단 듯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뇌를 통채로 빼버리고는 그대로 봉합해버려 오직 겉에서 보이는 껍데기만 멀쩡한 상태였다.
메세지가 왔다. 기어코 지우지 않아 제일 상단에 떠 있던 대화창이다.
[死ぬほどの罪を犯しました。]
정말 어디가 고장 나기라도 한 건지 사과하는 말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고. 당연히 보고 클릭조차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집어던지려다가 온몸의 힘이 빠져 그저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연이어 온 것은 더 가관이었다. 그 사이에 30분이 지나 있었다. 무려 30분 동안 타자를 친 것이다. 짐을 두고 갔는데 시험에 필요할 것 같으니 이곳에 오기 싫다면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 메시지였다. 너무 길어 미리보기 조차 잘려 있었다. 30분이 더 지나니 더 이상 안 왔다. 시험에 제시간에 응시하려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왜 화가 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죠가 보인다.
죠가 옷장 앞에 서 있다. 죠의 키보다 한참 큰 거대한 옷장이다. 그 앞에서 죠는 손을 뻗으려 한참을 망설인다. 얼굴이 평소보다 더 희어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죠는 마침내 옷장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 평소에는 입을 일이 거의 없기에 손을 거의 타지 않아 새것 같은 새까만 정장. 죠는 손을 뻗어 한참 뒤에나 느릿느릿 그것을 꺼낸 뒤 재킷을 감싸고 있던 의류 케이스를 가르고 그 사이로 옷을 끄집어낸다. 구김이 전혀 없는 하얀색 셔츠 위에 그것을 걸쳤다.
죠가 옷장 한쪽에 달린 전신 거울로 향한다. 셔츠 아래로 한 겹 쌓인 정장 소매가 완벽히 떨어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다. 그 탓에 단정해 보였다. 왼쪽 팔을 들어 오른쪽 팔꿈치 위의 옷감을 더듬었다. 다시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죠의 손에 들려 나온 건 까만색 긴 넥타이다. 맬 줄 아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걱정 따위가 무색하게 완벽한 검정의 매듭이 지어져 나온다. 머리에는 헤어 제품을 쓰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 그냥 단정하게 드라이를 하고 빗은 것으로 그쳤다. 어두운 머리칼이 조금 길어 이마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아 눈을 살짝 가렸다.
죠가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옷장 한 구석의 정장과 마찬가지로 잘 신지 않아 신발 안에 습기제가 들어간 구두를 꺼내 그 안에 있던 습기제를 빼고는 신었다. 딱딱한 가죽에 닿는 발가락 끄트머리가 살짝 아린지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게 모든 채비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난다. 엘리베이터 대신에 수많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탄다. 일련의 동작이 외우기라도 한 듯 매끄럽게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에 중심의 들어 있는 죠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말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차가 부드럽게 정차 하자 문을 열고 내릴 뿐이다.
죠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차에서 내리면서 바짓단 끄트머리가 구겨진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거기까지 살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사이에 언젠간 보았던 얼굴이 되어 있다. 반쯤 슬픔이 스민 뺨.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이내 지워냈던 것. 변함없이 똑같은 생각이 든다.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 하나 없다. 그곳을 죠가 혼자 걷는다. 걷고 걷는다. 그 누구도 죠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왜인지 그곳에서 달큰한 향이 난다. 착각이 드는 걸까? 어느 순간 죠의 두 손이 새하얀 장갑으로 감싸져 있는 게 보인다.
현실의 뒤편을 전개해낸 이는 곧 깨닫게 된다. 상영된 꿈에는 색이 없었다. 구별해낸 건 오롯이 어둠의 정도. 색이 없는 그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이었다. 그곳에 가본 적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죽여버릴 테니까. 진심이야.
눈이 떠졌다. 다시 아침이 되었나. 유다이는 본인이 몇 시간에 걸쳐서 긴 꿈을 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꿈은 금방 아득해지고 있었다. 혼자서 까만색 옷을 입고 장례를 치르러 가는 죠의 모습이 나오는 꿈. 악몽임에 틀림없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원래 꿈에는 색이 없었던가?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죽을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유다이가 깨어나기 아주 직전, 마지막에는 그렇게 말하는 죠가 나왔다. 그 애의 눈이 젖어 있었다.
5.
“나 들어갈게.”
결국 다시 그 집 앞에 가 있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말한 것도 그러나 다시 보러온 것도 모조리. 거짓말 같지만 혼자만의 짓이다. 쪽팔리지만 이번에는 또렷한 정신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나 전날에 잠도 충분히 잤고 아직 해가 짱짱한 낮이다. 자연스레 그냥 열고 들어가려다가 직전에 예의 상 노크를 몇 번 한 뒤 도어락을 쳤다. 이제는 죠의 집이니까. 자꾸만 오락가락한다. 어린애 앞에서 적성에도 맞지도 않고 실제로도 별로 해본 적 없는 어른 노릇을 하려니 쉽지 않은 탓이다.
“저녁 아직이지? 내가 초밥 포장해 왔어. 학교 근처에 꽤 괜찮은 가게가 있거든. 넉넉하게 주문을 했으니까 많이 먹어.”
이른 저녁 식사는 유다이의 화해 신청과 같았다. 오피스텔에 들리기 전에 분위기를 풀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넉넉하게 초밥 세 판을 주문했다. 알록달록한 꽃다발이나 손편지를 써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낱개도 몇 개 더 추가했으니 60 피스 정도 되려나. 아마 그중 2/3는 죠가 커버처럼 모조리 다 먹어 치울 것이다. 아직 죠는 음식 가리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다이가 끌고 간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도 늘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맛있게 잘 먹었다. 실은 유다이가 남긴 것도 가져가서 먹고 싶은 눈치인 거 알아차렸으나 뭔가 먼저 먹으라고 하기 뭐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허락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게 분명했다. 나중에 더 가까워 지면 그래도 된다고 말해야지.
“…죠?”
오늘은 죠가 현관 바로 앞까지 와서 유다이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런 거에 실망하면 안되는 건데. 매일 같이 반기던 강아지가 없으니 조금 이상했다. 실은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선 유다이는 현관의 센서등을 제하고는 집안에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다는 것을 곧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신발을 벗으며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씻고 있는 건가. 혹은 아직 오기 전인가. 생각해 보니 죠가 아직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첫날을 제하고는 거의 실내복 차림이라 무슨 교복인지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고. 유다이가 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그저 아사쿠라의 친동생인 것. 어느 학교인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것. 조용한 편이고 꽤 수줍음을 타 곤란하다면 귓바퀴가 금방 붉어진다는 것. 그리고 아무 음식이나 다 잘 먹는다는 것… 모조리 실질적인 정보라고 할 수 없는 단순한 것들이었다.
“어… 방 안에 있어?”
그리고 유다이는 문득 욕실이 아닌 늘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걸 보았다. 식탁 위에 포장해온 음식 포장 꾸러미를 올려두고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침실은 아니고 서재 용도로 내버려두고 잘 쓰지 않던 작은 방이다. 안에 침대는 고사하고 가구 같은 게 있었던가? 들어가본지 오래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사쿠라가 신경을 써서 침대와 가구를 들여줬을 것 같지도 않았고.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있는데 없는 척을 하는 게 아닐까 귓가를 가져다 대었다가 금방 떨어져 나왔다. 죠가 혹시라도 문을 열고 나왔다가 부딪히는 사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죠. 거기 있어?”
여전히 무응답.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안의 기척을 숨죽여 살피고 있자니 괜히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대체 뭐라고? 네가 자고 있는 곳에 내가 멋대로 쳐들어갔는데 네가 붙잡고 나에게 키스한 거에 대해서 사과할게? 당연히 이상하다. 아직 그 느낌이 생생하다. 끈적거리는 혀가 섞이고 허리께에 감기던 단단하던 팔. 이런 표현 뭐 하지만 당한 건 내 쪽이라고.
착각한 거야? 대체 어떻게? 그럼 누구와? 너 진심 아니었지?
그날 결국 시험을 치러가지 못했다. 당연히 F 확정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도 나가지 않았다. 포기하니 편했다. 동기들이 왜 열심히 공부 해놓고 정작 시험은 보러 나오지 않았냐 미친거냐 물어봐서 조금 곤란하긴 했는데 그냥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시험 한 번 보러 가지 못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나중에 졸업 학점을 계산할 때 조금 곤란해질지는 몰라도.
“내가 심하게 말한 건 사과할게. 하지만 너도… 네 행동은 별로 적절하지 않았어.”
그러나 못되게 말한 건 사과하는 게 맞다. 다시 볼일 없을 거라는 말. 사람 마음에 얼마나 깊게 들어가는 말인지 안다. 죠가 그것 때문에 상처받아서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른 건 물지 못했다. 죠가 유다이의 머릿속 예상 답변을 벗어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그와 별개로 더 이상 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나 오늘은 이만 가볼게. 식탁 위에 있는 거 꼭 먹어.”
유다이는 그 말을 끝으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집을 나섰다. 자꾸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어 참고서는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일 층에 내려와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왔던 방향을 거슬러 갔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취방에 들어오니 자정까지 제출해야 하는 레포트를 마무리 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걸 가까스로 끄집어냈다. 어떻게 이런 걸 잊고 있었지? 알아차리고 나니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마저 포기해버리면 정말로 학점의 상태가 굉장히 곤란해진다. 정신을 차려야지. 애써 고개를 털어내고는 랩톱을 펼쳤다. 두 시간가량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뒤늦게 허기가 느껴졌다. 배고프다. 밥을… 아. 먹으려다가 말았지. 식탁 위에 두고 온 초밥 세 판이 떠올랐다. 아무리 죠라도 그 정도 양은 혼자 먹기 힘들 텐데. 남은 건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라는 말도 해주고 올 걸 싶었다. 관상이나 손끝에 생활력이 전혀 없어 보였기에 혼자 산다는 것 자체가 조금 성립되지 않는 개념 같은 탓이다. 그나저나 왜 또 그 애 생각이지. 유다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잊어버리자.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는 것쯤은 어제 갓 태어난 유치원생도 다 안다. 내 끼니나 챙겨야지. 배달이나 시켜 먹을까 해 별 생각 없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제일 상단에 떠 있는 알림을 보고 잠시 숨이 턱 막혔다. [안녕,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사쿠라에게 온 것이었다.
유다이가 노쇼해버린 시험이 하필이면 아사쿠라의 수업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경이 쓰일만한 짓을 해버린 건 사실이다. 게다가 이주 연속으로 수업을 빠져버렸으니 아사쿠라의 관심을 끈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답장할 의향은 역시 없었다. 최근의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인간이 담당 지도 교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는 게 훨씬 더 귀찮아졌을 것이다. 물론 삶을 더 간단하게 살고 싶었다면 애당초 그를 만나는 게 아니었을 테지만. 메시지를 무시하고는 다시 배달 앱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핸드폰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학기 첫날 정갈한 흰 글씨로 처음 읽어냈던 것이 보였다. 순간 고민 되었다. 그가 하던 대로 무시할 것인지 받고는 후회할지.
-왜 시험 보러 나오지 않았어?
유다이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정말 지쳤다. 수신 거부를 하는 것조차. 몇 주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 생각한 것보다 그리 끔찍하지도 않았다. 체념했는지 별 기분 안 들었다. 아직은 교수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정도의 질문이었으니 늦잠을 잤다는 간단한 대꾸와 함께 스피커폰으로 돌려버리고는 배달 시킬 메뉴를 골랐다.
-정말 그게 이유야?
왜인지 의심하는 투라 거기에는 조금 웃겼던 것 같다. 왜. 내가 그쪽을 피하려고 낙제를 택했다고? 착각도 유분수다. 그럴 리가.
“낮은 점수를 받아도 상관하지 않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잠시만,
그때 자꾸만 초밥 생각이 났다.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걱정되어서……,
더 들을 것도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
수업에 나가지 않으니 그 이후에도 아사쿠라를 제대로 볼 일이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작정하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눈에 들지 않으니 마음이 잠잠해진 것 같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마음에서도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한심하지만 사실 죠를 이용해 그에게 복수를 할 계획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애당초에 실현 가능성도 전혀 없었지만.
그날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린 뒤 마음을 먹은 김에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 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또 라인을 보낸 지는 몰랐다. 보지 않아도 내용을 알 것 같았다. 그걸 지우고 나니 단톡방 아래에 한참 밀려 있는 대화창 하나가 떠올랐다. 죠와의 대화창. 화면을 한참 내려다 보고 있자니 제일 깊은 곳이 자꾸 답답해졌다. 이내에는 갈증이 느껴졌다. 그게 다 한숨으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그날 거절 당했다고 여긴 건지 연락 같은 게 다시 오지 않았다.
고작 그거 본 거 가지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유다이는 죠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밤낮 상관없이 부표처럼 떠올라 괴로웠다. 다음날과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딱 한 번만 다시 가보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초밥을 다 먹었는지 확인은 해야겠으니까.
“죠. 또 나야. 내 얼굴 보기 싫은 건 이해하지만… 나와 봐.”
지겹다. 이 현관 앞에 서는 것. 이 지긋지긋한 외딴섬 같은 곳에 그만 오고 싶었다. 만약 그날 문을 열었을 때 죠가 없었다면. 이곳이 빈집이 되었음을 알았다면. 이렇게 몇 번이고 발길을 이어 나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들어갈게.”
결국 참지 못하고 비밀번호를 친 뒤 들어갔다.
“…….”
집안은 온통 검었다.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반겨주는 개 또한 없었다. 알아차리니 단박에 기분이 구려졌다. 이제 서운하고 말고가 아니다. 죠는 분명히 유다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꼬리가 삘 지경으로 흔드는 걸 하지 말라고 한 것이지 매번 들어오는 사람 무안하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곧바로 신발을 벗고 방문이 여전히 닫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쯤 하고 그만… 뭐야?”
집이 어두운 건 둘째치고 너무 고요하다는 걸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식탁 위에 유다이가 일주일 전 포장해온 초밥 꾸러미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유다이는 입을 다물었다. 부름에 응하지 않는 이유였다. 어둠.
6.
이치로의 가족은 둘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두 명.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게 이치로에게 주어진 세상이었으니까. 이치로는 늘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유년 시절 단편적으로 남은 기억은 오로지 엄마와 함께 하는 것들뿐이다. 끼어드는 다른 이는 그 누구도. 항상 보호자 칸에 반쪽만 글씨를 기입하였고 작은 식탁에 놓이는 젓가락은 두 세트였다. 엄마는 매번 이치로의 눈높이만큼 몸을 굽혀 키를 재 주었다. 그러나 이치로는 고등학교를 입학하기도 훨씬 전에 엄마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제 더 이상 키를 잴 필요가 없었다. 이치로가 크는 만큼 엄마가 줄어들었다. 그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자주 이사를 다녔다. 그럴 때마다 무거운 짐 같은 걸 이치로의 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잦은 이사의 이유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학원에 많이 다니지 못했으나 열심히 공부를 해서 매번 상급의 성적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온갖 대회와 성적 상장을 타서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우수 학생으로 발탁 되어서 입학식 날 매번 단상 위에 오르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학교와 집을 옮기는 동안에도 키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났다. 젊은 시절 엄마를 완전히 빼닮아 얼굴도 반반했으며 공부까지 잘하니 자연스레 평판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동네로 전학을 가도 금방 친구를 사귀었다.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넘쳤다. 반 안의 모두가 이치로를 우러러보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 자만할 수준이 되었다. 심지어 키는 스무 살을 넘기고도 컸다. 싼 옷을 아무거나 입어도 매우 비싼 것 같이 보였다. 하나하나 모두 새어보진 않았으나 나이 수 만큼 애인을 사귀었던 것 같다.
집이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 어렸을 때 금방 깨달았다. 영특했으니까. 그래서 가족의 형태에 혼자 대해 고찰한 적이 많다. 그 당시 이치로가 정리한 바는 이러하다. 우리 집에는 아빠의 역할을 하는 이가 없다. 느낌 상 죽었을 것 같지는 않고 엄마와 사이가 틀어져 헤어진 채로 사는 것 같다. 정말 이치로가 아주 어린 시절에 사별했다면 그를 기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치로는 엄마에게 왜 나는 아빠가 없어? 가 아니고 왜 그 인간의 성을 따랐어? 로 아버지에 대한 의문을 처음으로 내보였다. 꼴랑 성만 남긴 친부는 자라나는 동안 양육비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엄마는 아들의 발언에 충격을 받았는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거잖아. 남편 잃은 엄마에게 그게 엄청나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어버렸다. 학창 시절 내내 지겹도록 이치로의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엄마는 이치로에게 사실을 고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이치로 내면의 무언가를 더욱 자극 시켰을 뿐이다. 예쁘지 않게 꼬아져 있어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다. 너에게 아버지의 흔적을 남겨주고 싶었어. 우리를 흠처럼 버린 인간의 흔적을 대체 왜? 그것을 제하고는 전혀 남긴 게 없잖아? 그마저도 그저 불쾌한 꼬리표 같아서 싫었다.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이 성을 가지고 제 부인과 자식에게 물려줘야 했으니까. 그 순간 속에 있던 게 꿈틀거렸다. 이치로는 금방 그녀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그날 이후 엄마 앞에서 친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알아보기로 했다. 친부가 어떤 인간인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엄마와 이치로를 스스로에게 분리해내는 걸 택했는지.
원래 지랄맞게도 한쪽이 구질구질하면 다른 한쪽은 유복한 게 법칙이다. 세상살이에도 질량 보존이 되어야 하니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으나 친부는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새로운 젊은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그냥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접하는 것의 차이는 꽤나 컸다. 돈이 그렇게 많은데 여태 이곳에는 한 번을 보태지 않았다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나니 더 기가 찼다. 본인이 직접 싸질러 놓은 아이니 존재 자체를 망각했을 리는 없잖아. 그저 편한 대로 잊고 사는 것이지. 그때부터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가 더욱 뚜렷해 졌다. 이제 더 이상 엄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치로 자신을 위해.
마코토가 도쿄에서 제일 가는 명문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길 앞두고 무렵이었다. 두 사람의 삶은 여전히 빡빡했으나 성적 우수 전형으로 첫 등록비를 전액 면제받았다. 엄마는 그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나중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돈 때문에. 학기 도중에 학비를 수납하지 못해 학교를 돌연 관두고 싶지 않다면 일등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혹은 그를 염려하지 않을 대신의 돈. 아주 작은 돈도 궁하던 때 시간당 이만 엔 단위로 돈이 나가는 사설 업체를 통해 친부의 건강 이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인간이 잘 살았으니 비밀 유지 때문에 더 비쌌다. 그 소식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말 환자가 되어 완전히 병상에 드러누웠다. 돈 쓴 것도 있으니 엄마에게 알려주려다가 말았다. 알고 나면 그 인간이 불쌍하다고 분명 눈물을 글썽일 게 분명했다. 그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친부의 투병 소식은 이치로에게는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일 뿐이었다. 필히 그래야 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을 보고 희미하게 놀라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친부는 예상대로 모조리 환자들의 돈으로 운영되어 관리가 삼엄한 VIP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들어가려면 미리 약속을 잡은 뒤 기록을 남겨야 해서 결국 만나진 못했다. 그러나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사실 얻어걸렸다는 느낌도 있었으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어떤 애가 자판기 앞에서 손이 닿지 않아 혼자 애쓰고 있었다. 거기까지 고작 한 뼘이었다. 스낵류까지 들어있는 자판기가 조금 큰 탓도 있었다. 평소였다면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쪽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그냥 중력에 따라 그대로 몸이 당겨지는 느낌.
‘도와줄게.’
‘…….’
말을 건네니 대답하지 않고 올려다보는 애의 눈이 유독 검었다.
순간 알았다.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그냥 알아차리게 되더라고. 아사쿠라였다. 그 애도. 같은 성씨의 한참 어린 이복형제. 반쪽짜리의 피가 흐르는 사이.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드디어 마주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라난 환경은 천지 차이였다. 안에 든 것도.
이치로는 죠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자판기의 버튼을 눌러 녹차를 뽑았다. 제일 상단에 있던 것. 그 옆이 오렌지 쥬스였다. 그는 쓴 찻잎 때문에 어린애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음료를 쥐여주고는 웃었다. 다시 보자는 말. 하려다가 그냥 웃는 걸로 대신했다. 재회가 몇 달 내로 금방 일어날 건 아니었으니까. 죠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멀어지는 이치로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을 뿐이다. 그 당시에는 누군지 몰랐으나 잊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죠의 가정에 금이 갔다. 여태 사정은 사적으로 돈과 힘을 들여 알아볼 것 없이 모조리 관련된 과에서 전해 들었다. 이치로의 정보는 친부가 노화와 지병으로 인해 오늘내일한다는 것 까지 업데이트되고 말았다. 잠시 그쪽에 관심 가지는 걸 쉬던 사이 죠의 친부모가 몇 년 간격으로 모두 사망했고 친척들은 양육을 거부했으며 후견인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고지를 하는 것이라고. 후견인이라는 단어에 그만 웃음을 흘릴 뻔했다. 동시에 그 애가 아주 어렸을 때 딱 한 번 보고 보지 못한 허여멀건 한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원치 않던 녹차를 멋대로 안겨주던 순간. 약간의 기쁨. 이치로는 그 애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는 공무원에게 동생을 찾아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티끌도 전혀 모르고 살던 인생에 시커먼 먹구름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뒤덮었다. 그 먹구름의 이름은 불행이었다. 아무리 비로 내리고 내려도 이제 절대 씻겨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알아차리는 새도 모르는 순간 머리 위에 금방 드리울 테니까. 이제 그 애에게 남은 것을 더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친부의 재산. 누리고 살 나머지 인생. 원래 내 것이었던 것. 결핍은 무서웠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인간을 욕구에만 의해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죠를 데려온 것이다. 후견인 등록과 거주 문제로 삼아 죠를 보증처럼 매어두기 위해서. 죠는 후견인이 없다면 보호자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자신의 허락 없이는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것을 일러주었다. 그렇게 말하니 꼼짝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조용히 있어. 또 끄덕끄덕. 애비가 돈을 많이 남겼으니 알아서 먹고 살 돈은 있지? 역시 고갯짓의 방향은 같았다. 생각해 보니 만나고 나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들은 적 없는 것 같았다. 피해자 마냥 굴고 있는 게 묘하게 재수 없었다. 네 부모를 내가 죽인 것처럼 행동 하지 말라고! 윽박을 지르고 그냥 나가버리려다가 지갑을 젖혀 집히는 지폐들을 모조리 꺼낸 뒤 식탁에 흩뿌리듯 올려두었다. 입을 열지 않으려면 끝까지 지켜. 이치로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고 다시는 그곳에 발 들이지 않았다.
분노에 몸이 반쯤 잡아먹힌 이치로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그의 전 애인. 이런 건 살아생전에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친부를 닮아버린 걸까? 유감스럽게도. 결혼은 일부로 일찍 했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데에 조금 집착했기 때문이다. 부인은 결혼 전부터 이치로의 복잡한 성질을 알았다. 그래도 남자 만나는 건 아직 모르는 눈치였지만. 언젠간 집에 학생을 초대해도 되냐 물으니 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뒤에나 이상한 짓 하지 말라는 짤막한 대답을 했다. 그녀 식의 거절이었다. 그래서 오피스텔을 얻었다. 어차피 그 집은 몇 달 뒤 처분할 예정이었다. 접점이 없었으니 죠와는 전혀 상관 할 바 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게다가 아직도 그 집에 코가가 가는지조차 몰랐으니까. 그에게 이제 만날 일 없다고 말하자 상처 받은 눈을 한 걸 분명 확인했다. 틀어진 건 역시 본인이 불륜하는 쪽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이다. 의외로 양심 있는 타입이었다. 괴로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태 결혼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 분개하는 눈치였으나 점차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딱히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한동안 오던 전화가 슬슬 멎었다. 물론 유다이가 가끔 원망을 한가득 담은 채로 강의실에 그림처럼 앉아 이치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전히 가슴이 울렸다. 그걸 즐겼다. 역시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에 보람이 있었다. 연구실로 따라오면 또다시 만나자고 해볼까 싶었다. 그 말에 때린다면 맞아줄 의향이 있었다. 그의 주먹이라면 사랑스러웠거든. 물론 그건 제대로 맞아보지 못했을 때의 경우였고.
강의실 문이 열리는 순간에 유다이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잠시 쳐다봤다. 어차피 금방 흩어질 테니까. 조금 보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저 그 앞을 지나는 찰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조리 빠져나갈 때까지 유다이가 계속 보였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또 다시 열리고 닫히고. 그의 얼굴이 형광등이 점멸하듯 자꾸 깜빡깜빡.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쯤 이치로는 깨달았다. 유다이가 오직 본인을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말 안 해? 어떻게 했냐고.”
“유, 코가 군, 여기 학교야. 잠시 착각을 하는 거 같아서….”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 걸어 들어오는 유다이의 표정이 너무 차분했다. 그래서 거기에 주의를 모조리 빼앗겼다.
“다 알고 있어, 어서 말해. 네 말대로 학교에서 개쪽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치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유다이는 자세히 보니 차분한 게 아니라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분노를 마구 쏟아내는 유다이의 말을 이해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머리로는 어떠한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러나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상했다. 왜 네가. 그 애를? 도대체 왜?
“너… 네가 그 애를 왜 신경 쓰는데?”
“뭐? 설마 진짜, 어떻게 한 거야?”
“내 말에나 대답해, 유우. 설마 나 몰래 둘이 무슨 정이라도 나눈 거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씨발!”
그 순간 턱이 얼얼하게 푹 패이는 느낌이 들었다. 유다이가 참지 못하고 이치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다. 방심한 새 얻어맞은 터라 이가 빠각 하고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갈렸다. 내린 시선 아래로 저 멀리로 떨어진 안경테가 보였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이치로의 목덜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슬슬 열이 오르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럼에도 자꾸 웃음이 피었다. 웃겼다. 유다이가 이렇게 이치로를 찾아온 이유가 죠라는 게. 다시 만나자고 할 때도 이런 표정 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 너도 때려. 진짜 꼭 때리고 싶었으니까.”
이치로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유다이는 살이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쥔 채로 이치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다시 그 주먹을 휘두를 듯 보였다. 유다이는 이치로와 이렇게 마주 보고 섰을 때 시선 하나 차이가 나지 않는 장신의 남성이다. 그의 마른 팔다리를 처음 만져본 날 속으로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그의 전신이 모조리 촘촘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유다이의 주먹 맛은 하나도 달지 않았다. 오히려 썼다. 입안에 금방 피 섞인 가래가 들끓어 오른 탓이다. 목이 텁텁했다. 이전에 연구실에서 구두 굽에 유다이가 침을 뱉은 순간이 떠올랐다. 똑같이 하는 건 시시하고 까부는 걸 봐주는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뺨 같은 데 뱉어주려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이곳을 지나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이치로가 그것을 모아서는 대신 평범하게 바닥에 내뱉었다. 그러자 유다이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내보였다.
“내가 어떻게 우리 유우를 때려.”
“아직 덜 맞았지….”
나야 더 때려준다면 영광이지. 사실 유다이가 이런 식이라도 만져주는 건 좋았으나 두 대는 맞아줄 의향이 없었다. 그의 주먹이 꽤 아프기도 했고 이전의 한대 정도는 그를 속인 값 정도라고 쳐도 그 이상은 더 맞아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제 마냥 귀여워해 주는 건 끝났다. 유다이가 장전이라도 하듯 말아 쥔 주먹에 더욱 힘을 싣는 게 보였다. 그에 입꼬리에 간지러운 웃음기를 매단 이치로는 허리를 굽혀 유다이가 떨어트린 안경을 주워 왔다. 어디가 하나 부러지진 않았으나 다시 쓰지는 않고 빈 테이블 위에 안경다리를 벌린 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쳐서는 가볍게 앉았다. 유다이는 앉지 않고 팔짱을 낀 뒤 뒤로 물러났다.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었다.
“왜. 내가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뭐… 뭐?”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우리 코가 학생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뭐 그렇게 이렇게 놀라. 사람 무안하게. 당연히 농담이지.”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줘요. 그럼 이제 정말 그만할 테니…….”
유다이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힘만 빠지고 얻어낼 게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건지 순식간에 태도를 유순하게 바꾸었다. 갑자기 존댓말을 썼다. 최근 들어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치로는 꿈쩍하지 않았다. 본래에도 그런 건 코가 타입이 아니다. 물론 속에서 열이 들끓어 오르는 걸 참느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유다이가 죠에게 집착하는 이유. 이치로의 머리로는 역시 단 하나로만 귀결되었다. 정말 모르는 새에 그 침대에서 둘이 뒹굴었을 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떨치기 어려웠다. 왜 잠시 유다이를 간과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죠를 방안에 두고 목줄이라도 채워두는 건데. 조금 후회되었다. 유다이가 몸 잘 쓰는 걸레인 건 알았으나 그 이상은 좀 곤란하다. 그럼 이제 어떤 식으로 협박을 할지 고민되는 것이다. 몇 번 더 자자고 할까. 아니면 홀딱 벗은 채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고 할까. 다 너무 유치한가. 그럼 셋이 하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무래도 비위가 상한다. 얼굴도 제대로 익지 않은 이복동생의 좆이라니. 그걸 유다이가 빨고 있는 걸 보다가 눈이 돌지도 모른다. 그럼 제일 아래 깔려서 이치로에게 목이 졸리고 있는 건 죠의 쪽일 것이다. 그것까지는 아직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잃게 되는 것이 너무 많잖아. 귀찮고. 내 돈도 사라지고.
“아, 아!”
이치로는 뒷짐 진 자세로 들고 있던 교재로 유다이의 턱을 순식간에 후려쳤다. 적절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속이 조금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척에 유다이가 바로 알아차리고는 손으로 붙들었으나 손가락과 입술께를 빗겨 맞았다. 잠시 멍했다가 몇 초 뒤 알싸한 통증이 살갗에 얼얼하게 퍼졌다. 유다이는 얻어맞은 쪽에 손가락을 말아 쥐고는 혀로 볼 안쪽을 훑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공평하지 못하게 무기나 쓰고. 그게 뭐 대수라는 듯이 이치로는 그저 눈썹을 들썩이고는 말았다. 일부로 빗나가게 교재를 휘둘렀다는 걸 알았다. 그걸로 제대로 맞았다면 최소 뇌진탕이나 이빨이 몇 개 쯤 우수수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7.
손가락에 못생긴 흰색 애벌레가 생겼다. 유다이는 그것을 골똘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못 볼 거야.’
‘뭐?’
‘내가 보내줬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뇌진탕이 오고 영구치가 빠지진 않았으나 손가락 뼈가 골절 되었다. 처음에는 아픈지도 모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해가 질 때 쯤 피멍이 살벌하게 올라왔다. 맞을 때 괜히 굽혔나. 내버려두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지나니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제 살이 거의 보라색으로 변해 살짝 걱정되었다. 힘을 주려다 느껴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에 가니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냐며 당직 의사가 엄청나게 놀라는 얼굴을 했다. 부러진 채로 장기간 방치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소리와 턱에도 멍이 들었다는 소리도. 그러나 그런 게 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제 걔랑 잘해보게? 나랑 닮은 것 같아서?’
‘…….’
‘너는 어차피 다른 사랑 못 할 텐데 말이야.’
비아냥대던 말투. 손가락의 모든 마디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으로 그 인간이 걷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고는 나오는 거였는데. 실은 살짝 부딪힌 것에 운이 나쁘게 뼈가 부러진 지도 몰랐다.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치로의 문제적 발언 몇 개들은 유다이를 심란하게 하는데 아주 제격이었다. 죠에 대해 누가 봐도 신변에 이상에 생긴 사람을 떠올리며 말하는 듯하였다. 이제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었다. 식은땀까지 마구 흐를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왜? 그런 속내를 이치로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죠가 있는 곳을 말해주지 않을 게 뻔했다. 이치로가 쓰레기 같긴 해도 살인마는 아니니 죠를 죽이거나 유사하게 청부업체에 맡기진 않았겠지만 불안한 건 여전했다. 이치로에 대한 신뢰는 그가 여태 본인을 속여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이미 지반이 한 번, 그리고 그 섬 같은 곳에 죠를 혼자 버려두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아예 무너졌다. 다시 쌓아 올릴 방도는 절대 없었다. 이치로를 믿을 바에는 길가에 기어다니는 벌레 따위를 따라가는 게 더 나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에 유다이는 대화를 중단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이는 역시 뚜렷했다. 죠가 아니라 이치로 였다. 때로는 죠가 보고 싶다는 소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라진 건 죠였다.
마치 처음부터 만난 적 없던 것처럼.
유다이에게는 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어떤 지역 출신인지. 부모님과 원래 살던 곳은 어디인지. 그중 하나만 알아도 조금 수월했을 텐데. 이렇게나 아는 게 없어서는. 유다이를 제하고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죠를 몰랐다. 그 사실이 유다이를 미치게 했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죠에 대해 털어놓거나 물을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증발해 버려도 이상한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니.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언제나 당해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족도 연인도 아닌 그 애가 사라진 것에 나는 마음이 이리도 아플까? 부러진 손가락 보다 아픈 건 상처가 보이지 않는 내면이었다. 유다이는 그 통증을 알았다. 언젠간 겪은 것과 끔찍하리 만큼 흡사했다. 더 심해지기 전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눌러버려야 했다.
죠는 사라지는 걸 미리 작정하고 준비 해둔 사람 같았다. 번호를 죽였는지 알아차린 순간부터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메시지도 전송이 불가 상태였고 라인은 아예 탈퇴 유저로 처리되었다는 문구가 떴다. 이제 남은 건 대화창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죠가 보낸 짐을 가져다드리겠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장문의 사과문과 죽을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날 밤 바로 다음 아침 죠는 정말 유다이의 짐을 가져다주었다. 유다이에게 직접 전해 주진 못하고 학과 사무실에 짐을 맡겼다. 가방과 안에 든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도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지금에야 꺼내어 보니 유다이가 떨어트리며 섞인 종잇장이 모조리 목차 순서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에 담긴 내용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종이를 쥐자 혼자 집에 남아 그걸 몇 시간이고 정리했을 죠의 모습이 그려졌다. 눈을 감아도 보였다. 이내 색이 없는 꿈속에서 상복은 입은 그 애의 모습과 하나로 겹쳤다. 괴로웠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종이 뭉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다시 질서가 무너지며 섞였다. 결론은 그저 검었다. 엉망이 된 유다이의 마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하고 점심을 먹고 비슷한 일과를 보냈다.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약속을 나가고 또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거의 다 지나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 일주일. 보름이 지나갔다.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냥 일상 속 죠가 아무 소리 없이 사라졌을 뿐. 그리고 죠가 없으니 함께 먹을 식사를 포장할 일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 정도. 그러는 동안 턱의 멍 자국이 다 빠졌다. 손가락에 감았던 붕대를 풀고 지지대를 아예 제거했다. 이전에 그러하듯 원래처럼 자유롭게 손가락을 접었다가 필 수 있었다.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로부터 또 보름 가량 지났을 무렵 왜인지 그 집에 가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사쿠라의 오피스텔. 미련하지만 죠가 혹시라도 돌아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연스레 발길이 닿았다. 죠가 안에 있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원하는 걸 잔뜩 시켜주고 가운데에 하나의 메뉴를 두고 함께 나눠 먹기도 하고. 식사를 마치면 바깥으로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서 쥐어주고 밤산책을 해야지. 그리고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어야지. 우리는 또 볼 거니까. 모르는 새에 헤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유다이는 도어락 커버에 손이 닿는 순간 뭔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한 점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보니 도어락의 생김새가 눈에 익은 게 아니었다. 첫날처럼 애먼 층에 잘 못 올라온 건가 호수를 확인했으나 틀리지 않았다. 잠시 멍했다. 아무리 봐도 도어락은 뜯어내고 새것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사실 유다이가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이 이사 온 것이었다.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어락 커버를 그대로 열었다면 남의 집에 침입하려는 괴한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순간 뒷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뒤를 돌아 복도를 빠져나갔다. 조용한 밤거리를 걷고 걸었다.
다시 집. 색이 없는 익숙한 어둠. 그래. 나는 원래 혼자였지. 깜깜한 방 한가운데 앉아 유다이는 생각했다. 그냥 잊으면 되는 거야. 누나도 잊고 세이도 잊었다. 그 외에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도. 못할 것 없다. 원래 사는 건 유실의 연속이다. 영원히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의 몸을 제외하고. 마음을 잃고 기억을 잊어도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것들을 따라 소멸할 수 없으니까.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러니 고작 밥 몇 번 정도 먹은 남자애 따위 잊지 못할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도. 반대로 그냥 잊어버려야 하는 이유는 밤하늘의 별보다도 훨씬 많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가 되는 존재였다. 이치로의 얼룩 취급을 받으며 그가 숨기고 싶은 곳에서 서로를 안타깝게 여겼을 뿐이다. 둘이 모여 미래라고는 단 일 그램도 그릴 수 없었다.
유다이는 잊었다. 키스라고 하기도 뭐 한 찰나의 입맞춤도. 나란히 앉으면 늘 부딪히던 왼손잡이의 젓가락질도. 수심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떨리는 진실의 음성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모조리 잊는다.
학기가 마칠 때가 다 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곧 방학이 다가온다. 죠가 사라지며 이치로는 더 이상 유다이를 괴롭게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공평하게 한 대씩 얻어맞은 게 마지막이었다. 수신은 유다이 쪽에서 모조리 차단했으며 두 사람 모두 학교에서 스쳐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다른 사유들이 아니어도 유다이가 늘 동기들과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에 다가올 수 없었다. 유다이는 이치로를 보면 다른 동기들처럼 묵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가 가끔은 뒤돌아서 유다이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끼기도 하였으나 무시했다. 이제 그를 보면 화가 나거나 무너질 것 같은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이치로가 또 어딘가로 숨겨버린 죠의 생각이 나서. 자고 일어나면 죠를 잊기로 했는데 그 다짐에 방해가 되니까.
그렇게 하루. 일주일. 또 보름. 한 달. 겉옷과 머플러 없이는 외출하기 쌀쌀한 계절이 되었다. 날씨 탓에 두꺼운 것으로 침구를 교체하고 작년에 넣어두었던 코트 몇 개를 꺼내 옷장에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잠들기 전 제일 괴로운 건 고작 밥 몇 번 정도 같이 먹은 남자애 따위의 부재였다. 자꾸 생각났다. 수많은 밤들을 지나와도 하나도 잊히지 않았다. 그 애의 입맞춤도. 그의 젓가락질도. 죠의 눈동자도. 너의 음성도.
방학을 했다.
날이 더 추워진 탓인지 아침에 눈 뜨기가 싫었다. 며칠 동안 자꾸만 누워 있었다. 그날도 같았다. 알람이 울리는 것에 때맞춰 일어나긴 했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 시간을 보냈다.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없었다. 물론 다가오는 졸업을 준비하고 취업에 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으나 실천하기 어려웠다. 그냥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만 하는 무기력증이 찾아온 것 같았다. 다 지긋지긋했다.
결국 결정적으로 유다이의 몸을 일으켜 세운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한동안 울릴 일 없던 초인종 소리였다. 집주인의 방문이나 가스 점검 따위 였다면 초인종을 누른 뒤 용건을 말하는 게 보통이지만 울리는 목소리가 없었다. 초인종만 한 번 울리고는 다시 사방이 고요 해졌다.
“…….”
그 고요에 갑자기 심장이 뻐근할 강도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유다이는 고개를 뻗은 채로 숨을 들이마신 뒤 내보내지 않고 단단하게 삼켜 모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설마. 아닌 거 알면서. 그저 택배를 놓고 갔다는 신호나 용건을 얼굴 보고 전해야 하는 느긋한 성격을 가진 경비의 방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 하도록 애썼다. 몇 번이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한 번 피어난 의문을 재빠르게 몸집을 부풀려 나갔다. 유다이는 침구를 짚은 뒤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조용했다. 초인종은 다시 울리지 않았고 방 안에서는 아직 현관 앞에 사람이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나가보는 수 밖에 없다. 유다이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방을 벗어났다. 현관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물었다.
“…누구시죠.”
문은 말이 없었다. 유다이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치며 넘실댔다. 그는 맨발로 현관의 차가운 타일을 밟았다. 거리를 좁힌 뒤,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시죠. 상대는 여전히 과묵했다. 왜인지 대답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문고리를 잡고 도어락의 잠금장치를 해제하였다. 그러자 바깥의 빛이 제일 중간에서부터 틈을 가르고 급히 들이쳤다. 유다이는 살짝 눈가를 찡그리고는 다시 치켜떴다.
“잠시 눈 돌린 건 용서해 줄게.”
“…….”
“그럼 우리 둘 다 같은 거야. 그렇게 하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건 존재 자체의 이유였다. 누구인지 미리 밝혔다면 이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을 테니까. 유다이의 눈앞에 그려진 건 이치로였다. 그가 유다이에게로 들이닥치는 빛을 막은 채 등지고는 서 있었다. 순간 두통이 안개처럼 훅 피었다가 깨졌다. 이어지는 가관의 발언에 유다이는 순간 대꾸할 언어를 잃고는 그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하기도 아까웠다. 그래서 아무 대답하지 않고 문고리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치로가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막았다. 그걸 보니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그냥 다시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을 뿐이었다.
“손 빼세요. 닫을 거니까.”
“그때 때린 거 미안해. 다치지는 않았어? 내가 감정 제어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당신에게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웃음도 안 나왔다. 그에게 꺼내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모조리 소진해버린 뒤였다. 유다이는 다시 한번 한숨 쉬듯 말을 전했다. 문 닫을게요. 이미 두 번이나 경고했다. 닿기 직전에 반사적으로 빼버리겠지 싶어서 정말 문을 당겨왔다. 틈이 줄어들며 손이 정말 끼이기 직전에는 약간 망설였으나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대화가 통할 상대도 아니었고. 그리고 정말 문에 이치로의 손이 끼었다. 이치로가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결국 문을 당기던 유다이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곳에 낀 게 이치로의 손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학적인 장면을 더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유다이는 급히 문고리를 놓아버렸다. 그러자 이치로가 연하게 웃으며 희게 질린 손을 거두어 갔다. 그 와중에 웃음을 내보이다니. 기가 찼다.
“하, 정말 미친 거야? 나한테 대체 왜 이래?”
“미안해. 이렇게라도 당신의 마음이 풀린다면….”
“뭐? 이제 그딴 게 아니라고!”
“유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머리가 깨어질 듯하였다. 이치로는 순식간의 유다이의 사고를 어지럽혔다. 그가 이렇게 찾아와 뒤흔들지 않아도 이미 마음이 너무 유약해져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반복하여 말할 힘도 없었다. 유다이는 두 손에다가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게 엄청나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 순간 이치로가 벌어진 문틈 사이로 구두 신을 발을 단단하게 끼고 고정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얼굴을 뒤덮은 유다이의 손등 위로 이치로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에 소름이 끼친 유다이가 급히 손을 내렸다. 이치로의 얼굴이 다가온 건 순식간이었다. 다시 밀어내려는 순간에 잠시 굳었다. 입을 맞추리라 판단했으나 틀렸다. 손목이 틀어 잡힌 건 아주 찰나였다. 손이 떨어져 나가고 이내 목덜미에 무언가가 닿았다. 이치로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알아차리자 연이어 반대 쪽 손도 올라왔다.
“지금 무슨, 허, 컥,”
“마음을 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어. 알잖아. 내가 당신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거.”
이치로의 열 손톱이 여린 피부 새로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양쪽 엄지가 목젖을 강하게 찌르고 깊은 곳의 뼈를 어루만졌다. 같이 틀어 잡힌 아래턱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 탓에 입이 벌어졌으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핏발이 선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였다. 유다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치로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몇 초가 지나니 지금 밀어내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연타했다. 지난번처럼 싸움을 하는 것이라면 유다이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았으나 이런 식으로 습격하는 것은 놓인 상황 자체가 다르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방심한 새에 가장 약한 곳을 틀어 잡혔다. 게다가 이치로 쪽에서 체중을 월등히 누르고 있다. 그 힘에 이제 몸까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조금 전에 그의 손이 문에 끼었을 때 그냥 고기 따위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닫아 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손마디가 나가서 이딴 개짓거리를 벌이지도 못했을 텐데….
유다이가 고개를 양옆으로 젖히며 그의 어깨와 팔뚝 따위를 내리쳤다. 이치로는 정말 정신이 나간 건지 꿈쩍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발을 이용했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마구잡이로 때렸다. 그러니 조금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밀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목을 졸리며 반항을 하느라 힘이 평소보다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내가 이딴 놈팽이 자식 손에 뒤진다니. 말도 안 된다. 그냥 자살을 하고 말지. 이렇게 불리한 자세로는 맨손만 가지고 버티기 힘들다. 주변에서 급히 손에 집히는 걸 찾았으나 신발 따위만 늘어져 있는 현관이라 그 어느 것도 닿지 않았다.
“정말 사랑해. 당신이 더 나은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떳떳하지 못한 불온한 상대를 만난 일? 그걸 밀어내지 않은 일? 그 이후에 깔끔하게 끊어내지 않은 일? 다 그쪽에서 시작한 일인데. 당연히 이렇게까지 미친놈인 지도 몰랐다. 억울했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나온 뒤다. 지금에 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모든 게 이렇게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할 지 막막해 졌다. 순간 다른 생각하느라 잠시 반항하길 포기하니 이치로가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더 세게 목을 내리눌렀다. 이치로는 유다이의 귓가에 바짝 붙어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빛을 등진 그의 눈이 흉흉하게 흔들렸다. 끔찍하게 사랑한다면서 뭔 사랑하는 사람을 질식 시키냐? 하, 뭐 이런 쓰레기 새끼가…. 그냥 입이라도 다물고 있지. 온갖 쌍욕이 치밀었다. 그러나 이치로가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어 나오는 게 뭐 하나 제대로 나오는 게 없었다.
“헉, 허억…. 우욱…….”
그 순간 힘이 탁 끊어지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났다. 그러나 하나도 상쾌하지 않았다. 막혀 있던 숨구멍이 열리며 밀린 산소가 마구 들어왔다. 그게 너무 아팠다. 머리뼈를 짓누르듯이 앞이 팽팽 돌았다. 이번에는 질식이 아니라 익사를 하는 것 같았다. 산소를 들이마시는 게 그리도 따갑게 느껴진 건 태어나 난생처음이었다. 쓰레기 더미 버려지듯 넘어진 채로 정말 물에 잠겼다가 떠오른 것처럼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엉망으로 쉬는데 눈물과 침이 섞여 계속해서 줄줄 새어 나왔다. 속이 시큼하여 바닥을 짚고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나오는 건 없고 대신 안구가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진짜로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이딴 짓을…. 겨우 진정한 건 한참이 지나서이다. 화끈대는 목덜미의 살갗을 붙든 유다이는 캑캑대며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유다이의 동공이 무언갈 목도하고 최대치로 확장되었다.
이치로가 유다이를 소리 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눈에서 검은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흰자만이 그의 눈알에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시끄럽게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치로? 유다이가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목에 감긴 검은 줄이 보였다. 유다이는 잠시 멍하게 이치로에 목에 감긴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영원 같던 찰나의 몇 초 뒤. 까만색 넥타이였다. 아마도 급히 풀어온 것의 매듭을 묶지 않고 길게 늘어트린 채로 목에 감았다. 그것이 살을 감싸 짓눌렀다. 이치로는 그걸 풀어내지 못하고 헛손질을 몇 번 하다 그대로 눈을 까뒤집은 상태였다. 이치로의 몸이 몇 등분으로 잘려 나간 생선 조각처럼 튀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넥타이일 뿐이지 방금 전 유다이가 당하던 것과 모양새가 흡사했다.
신이었을까? 신이 그리 빨리도 알아차리고 이치로에게 벌을 내리러 찾아온 것일까?
“아… 안 돼…….”
“…….”
“그, 그러면 안 돼….”
그럴 리 없다. 연이어 이치로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이 있었다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었을 리도 없다.
“죠, 안돼. 죠! 하지 마!”
형제가 넥타이로 올가미를 만들어 손위의 형제 목을 조르는 일 따위 말이다. 이치로의 뒤에서 그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고 있는 게 죠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치로에 의해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유다이가 번뜩 떠올린 얼굴.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그리고 지금 그 얼굴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죠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에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때부터 유다이의 뺨 위에 흐르던 것은 단순히 생리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혼비백산해서는 몇 번이나 죠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에 눈물이 마구잡이로 흘렀다. 하지 마. 죠, 제발. 응? 그만하라고! 제발…. 이내에는 빌었다. 그러나 죠는 유다이의 외침에도 넥타이를 옭아맨 손길에 힘을 풀지 않았다. 죠의 손등에 핏줄이 잔뜩 돋아 솟아오른 게 보였다. 그만큼이나 힘을 싣고 있었다. 점점 이치로의 버둥거리는 몸짓이 굼떠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유다이는 바닥을 기어가 이치로의 다리를 붙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죠가 말을 듣지 않으니 이치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이치로는 유다이에게 대답하거나 그를 걷어차지 않았다. 밑에 유다이가 붙들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두려워졌다. 내가 죽는 것 보다 더. 정말 이치로가 그대로 죽어버릴까 봐. 이치로가 죽어서 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남길까 봐. 죠가 형을 죽인 살인자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만해, 아사쿠라.”
“…….”
“놓아.”
“…….”
“놓아. 그거 다 놓고…….”
그 순간 유다이는 차분해질 수 있었다. 유다이는 마지막으로 죠에게 명령했다. 그의 짓눌린 입술 새로 볼품없이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아 줘.”
그리고 말했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들이 만들어낸 수단이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언어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뛰어난 효과가 있다. 유다이의 말이 죠에게로 가 심장에 닿는 순간. 언어가 아니라 진심이 되어 가슴을 울리는 순간.
“그렇지, 죠. 잘했어.”
“…유다이 상.”
“이제 이리 와.”
죠의 손에 힘이 풀어졌다. 이치로의 무릎이 스르륵 내려앉아 접혔다. 그의 몸을 타고 까만색 넥타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스스로 목을 감싸 쥔 이치로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복도에 드러눕는 게 보였다. 그러자 이치로에게 가려 있던 죠의 모습이 드디어 완전히 드러났다. 바들바들 불안하게 떨리는 두 손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희게 질린 얼굴. 그게 다 눈물 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단박에 마음이 미어졌다.
안아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죠의 몸을 끌어안고 달래줘야겠다. 이제 다 끝났으니 무서워 할 것 없다고 말해줘야겠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네가 가버린 줄 알았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그랬다는 듯 현관문이 멀쩡하게 닫혀 있었다. 문이 닫힌 탓에 이제 더 이상 이치로의 발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죠의 목덜미와 어깨에 젖은 뺨이 짓눌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죠가 품을 내어서 유다이를 크게 감싸 안아준 탓이다. 원래는 내가 안아주려 했는데…. 유다이는 손을 들어 죠의 등허리를 희미하게 감싸 쥐었다. 그러자 죠가 더 세게 유다이를 끌어안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전화번호…… 외었는데…. 죄송합니다. 마지막 두 자리가 자꾸 헷갈려서….”
“…괜찮아.”
“모르는 사람이 받아서는 다 코가 상을 모른다는 말만…….”
“정말 괜찮아.”
죠의 몸이 연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거렸기 때문이다. 이내 깨달았다. 그런 것이 좋았다. 그 애가 늘 얌전하게 하는 고갯짓. 그 애가 하는 서툰 포옹. 그 애가 매 순간 온몸으로 전하는 고백. 가지고 싶었다. 나누어 주었으면 했다. 유다이가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나가자 죠가 아주 조심스레 유다이의 목을 어루만졌다. 분명 심한 손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아직 조금 쓰러렸으나 유다이는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에 죠를 향해 웃었다. 어서 병원에 가요. 유다이를 살펴보는 것을 마친 죠가 유다이의 손을 약하게 잡아끌었다. 유다이는 그것을 힘을 주어 맞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죠가 잡아끌어 와 뺨에 갖다 댔다.
“혼자 죽는 건 싫어요. 그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요.”
그리고 죠가 입을 다시 열었을 때 유다이는 굳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아무 말도 돌려줄 수 없었다. 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충격 그 이상의 것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애는 이미 유다이의 마음을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였다. 아니면 눈만 보고도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유다이가 일평생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사실 혼자 죽는 거 싫어. 무서워. 너무 외로워. 옆에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 세상을 버틸 수 있도록. 그런 게 필요해.
“같이 살까?”
마주 보는 유다이의 눈에 한가득 그 애의 얼굴이 찼다. 상아색 두 뺨. 열매처럼 붉은 귀 끝. 턱 산홋빛을 띄는 입술. 피부 아래 푸르스름한 핏줄. 그 모든 것이 또렷해지며 색이 밀려 들어왔다. 잠시 앞이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떴다.
“네.”
드디어 찾았다.
티끌 하나 없는 공간. 언제든지 돌아갈 곳. 비로소 내가 처음으로 지어낸 나의 집.
매일 행복을 따르지 않아도 돼.
행복을 좇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그저 그런 세상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걸 느끼는 거야.
너와 나.
오직 둘만 볼 수 있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