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이 씨의 쌕쌕거리는 호흡에 맞춰 늑골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나는 그의 가까이에서 몸을 숙여 엎드려 가만히 그 모습을 구경한다. 아주 평평하게 보이는 상체의 선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지평선처럼 아주 약간 둥글다. 지평선이 오르락내리락. 숨의 박자에 맞춰 고동이라도 치는 것처럼 움직인다. 내게는 익숙하고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모양새다. 힘겹게 어둠을 헤치고 무거운 발을 움직여 거칠게 이어진 길을 내달리던 눈앞에 펼쳐지던 구불구불 울렁이던 땅의 끝.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흐르고 아프지 않아도 숨이 벅찼던 순간에 당도한 풍경. 그 모든 것을 그린 선과 닮은 그의 늑골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나의 호흡에 맞춰 내 시선도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그의 호흡과 같다.
*
이렇게 설명하면 될까. 차갑고 외로운 골목에서 운명처럼 그와 만났다고. 그날의 유다이 씨는 조금 취한 상태였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인공적인 알콜의 냄새가 났다.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어설픈 폼으로 주택가의 담을 짚고 서 있었다. 잠깐 멈췄다 걸음을 옮겨 집으로 가고자 하던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선 채 하늘을 봤다가 허리를 잡고 깊은 숨을 내쉬다가 푹 고꾸라져 주저 앉았다. 주저 앉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던 걸까 갑작스럽게 꺼지는 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빠르게 거리를 좁혀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말보다 팔을 먼저 뻗었고 그는 허공에 손사레를 쳤다.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가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의 손목을 잡을 것 같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다이 씨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휘청거리며 내게 쏟아지던 체중은 무게보다도 뜨거운 온도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나는 다양한 브랜드의 산악용품을 취급하는 작은 가게의 점원이었는데, 최근 들어 등산과는 전혀 연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자주 방문했다. 바로 코가 유다이 씨였다. 보험 영업 사원이었던 그가 가게의 물건들을 사다 모으게 된 이유는 갑작스럽게 생긴 취미나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영업을 위해 근처 산을 새벽부터 등반하기 위해서였다. 등산가들이 선호하는 험준하거나 풍경이 아름다운 산은 아니지만 아주 옛날부터 좋은 기운이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고 그 소문 때문에 지역의 유지들이 매일처럼 새벽에 기도를 올리러 찾아왔다. 유다이 씨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가지고 있는 보험이 아무리 많아도 두어 개는 거뜬히 더 가입할 수 있고 기분 좋으면 지인까지 소개해 줄 수 있는 고객. 단 한 명만 친해져도 투자한 값이 나온다고 생각한 그는 뜨내기 등산가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뻔질나게 가게에 얼굴을 비췄다. 덕분에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던 가게의 매출이 3배가량 늘었다.
재잘거려. 수다쟁이의 냄새가 난다. 동시에 좀처럼 주눅들지 않는 기운이 나의 시선을 그에게 이끌었다. 미끌미끌 알록달록 옷들로 옷장이 가득해. 투덜거리고 울상이 된 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가게를 찾아왔고 빙빙 돌며 시간을 축냈다. 사지도 않을 옷들을 여러 번 입고 고민하는 편인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나는 시착한 뒤 아무렇게 매대에 올려진 옷들을 정리했다. 난 심플한 게 좋은데! 대답하기 애매한 외침.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구나. 상대의 반응이나 대답보다 일단 표현해야 하는 그런 사람.
유난히 오전에 안개가 많이 껴 몸이 무거웠던 어느날 나가사키에 출장을 다녀왔다면서 치즈 카스테라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과자를 잔뜩 카운터에 올려 둔 그는 달리 뭘 사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장님을 부르려던 나의 움직임을 만류하던 손. 그때 처음 알았다. 체구에 비해 손이 작다. 힘은 강하지만 손은 작다. 손이 작은 사람은 발도 작을 것 같은데 확인할 날이 언제가 될까. 유다이 씨가 카운터에 올려 둔 기념품들은 모두 날 위한 거라고 했다.
“전에 달달한 걸 좋아한다고 해서.”
“아… 이렇게 많이는 받을 수 없어요.”
“에에에! 일부러 사서 왔는데도?”
“일부러?”
면역이 없다. 상상은 해 본 적 있지만 경험해 본 적 없었다. 먼저 꺼낸 이야기도 아니었고 사장님이 지나가듯이 아사쿠라는 단맛을 좋아한다고 한마디 했던 게 다였다. 그마저도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희미한 대화인 게 분명했는데 그가 두 손 가득히 사서 온 간식들의 주인이 전부 나라니.
“어! 얼굴이 빨개졌어.”
“아…”
“귀도 빨갛다!”
사람들이 저마다 주고받는 선물은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있고 가볍기도 하고 때로는 무겁기도 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선물할 맛이 나는 스타일이야.”
“아…”
“순수 소년! 설마 발렌타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든가?”
“아니요! 절대 그런 적 없었어요… 받아 본 적도 없고…”
“엥.”
“정말이에요.”
“거짓말!!!!!!!!!!!!!!!!”
고단수야! 거짓말쟁이야! 완전 사기꾼! 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말들을 쏘아대던 그는 이 모든 선물이 완전히 공짜는 아니라고 했다. 잘 보이기 위한 일종의 뇌물이라고.
“먹으면 사르르 녹아지는 디저트 뇌물이지만 말이야.”
검지로 내 코를 콕 찌르면서 윙크 하는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그가 올려 둔 선물들을 나는 천천히 손으로 쥐어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지만 민망해서라도 무를 수 없었고 그에게서 나를 높게 사는 인정의 냄새가 났기 때문에 실망시킬 수도 없었다.
“뭘 해 드리면 되나요?”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언제가 좋아?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
한적한 카페의 구석 테이블. 나는 카페오레를 시켰고 그는 라떼를 시켰다. 나는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해 멍하니 우리 앞에 놓인 잔을 구경했고 그는 바쁘게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패드 속에 잘 정렬된 글자들은 내게 생경한 단어들 투성이. 어린 나이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손해에 가까운 적금이나 예금보다는 종신보험이 훨씬 이득이라고 산뜻하게 나를 설득하는 그는 어엿한 세일즈맨이다. 스위치 온 상태의 그가 떠들어대는 말을 나는 정말이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만기라던가 납입이라는 말의 뜻은 당연히 알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내가 주문한 카페오레에 시럽을 넣고 싶었다.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를 음료의 맛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아사쿠라군, 듣고 있어?”
“아… 네.”
요컨대 세일즈란 내가 잘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는 나에게 보험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다. 뇌물이라고 했던 건 이거 때문이었구나.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팔고 실적을 쌓아 멀리 날아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유다이 씨.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트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타고난 승부사 기질이 강하다는 거였다. 달마다 확실한 목표 금액을 설정해 두고 채우기 위해 캘린더 빼곡하게 약속을 잡고 지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월초와 월말이 무척 달랐다. 시달리는 표정의 월말과 달리 월초는 상쾌한 표정이었다. 또렷한 냄새. 그에게서 알 수 없는 냄새가 난 적은 거의 없다.
재산을 축적하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불운한 일을 대비해 방파제를 마련하는 게 통상적인 인간들의 방식이나 나는 좀 달랐다.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안전망을 만든다는 건 전부 부질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다이 씨의 말을 제대로 담아 듣지 않았다. 이상하다. 손에 쥔 것은 아주 자그마한 것들밖에 없는데 몸을 비틀어 지키는 게 정말 지혜로운 방법일까.
“아무튼 사회 초년생이니까 한 달에 많이는 넣어선 안될 거고…”
유다이 씨는 패드를 능숙하게 만지며 두 가지 설계를 보여 줬다. 20년 만기. 지금으로부터 20년 뒤라니. 다시 아득해진다.
“20년 동안 넣어야 되는 건가요?”
“앗. 역시 부담스러운가? 그치만 보통 20년으로 많이들 해. 많이 하는 거에는 이유가 있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
“20년 동안 저를 보실 건가요?”
“에?”
내 질문에 설렁설렁 패드를 만지며 기간을 조정하던 그가 고개를 홱 들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 놀란 낯빛. 웃기는 실력이 전혀 없다고 혼났다. 별로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고 대답을 얻지 못해 아쉬웠다. 보험을 설계해 주고 나를 가입시키고 나면 그는 나를 다이어리에 써붙이고 달성 완료 도장을 찍고 잊어버리는 건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의욕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는 쓰고 나면 버려질지도 모른다. 사냥감으로 노려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나는 그냥 물어본 것 뿐이라고 둘러대며 20년 만기 납입으로 설계된 보험을 선택했다. 나에게 좋은 조건인 건 둘째 치고 그래야 그의 기운이 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먼 내일을 신경 써 본 적 없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나는 20년 뒤 연애를 하던 상대와 결혼해 자식을 둘 키우는 평범한 아버지가 반드시 되는 운명이 정해진 것만 같았다. 그때가 되면 큰 돈이 들 거라고 하고… 본인도 살아 본 적 없는 중년의 삶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이런 보험은 무의미한가? 아니면 이 사람에게 무의미한가?
코타키나발루 알아? 그는 서명을 끝낸 내 글씨를 보며 칭찬을 하다가 휴대전화 속 색이 옅은 아름다운 바다 사진을 꺼냈다. 고개를 가로젓는 내 뺨을 콕 건드리며 그는 말을 꺼냈다. 상사 중에 말이야. 여름마다 코타키나발루를 가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자랑을 해대니까 늘 상상만 했었거든. 그러다가 다녀왔어. 그렇지 말이야.. 결론은 햇빛을 피하다가 사흘을 다 써 버렸다는 어마어마한 결말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그는 마지막 남은 카페라떼를 빨대로 다 빨아 마셨다. 그래서 다음엔 아주 추운 곳으로 갈 거야. 그렇게 말하는 코가 유다이 씨. 아주 추운 곳… 문득 나는 어느 장소라고 명시할 수 없는 드넓은 대지를 떠올렸다. 내게는 익숙하고도 그리운 곳이었다. 광활한 땅 위로 베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풍경에 유다이 씨가 가만히 선 모습을 상상해 봤다. 1분 정도 꼿꼿하게 서 있다가 이내 구부러지며 바들바들 떨지 않을까. 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고…
“추운 곳이라…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요.”
“가고 싶은 여행지 없어?”
“음… 글쎄요.”
예상밖의 대답을 하면 재미있고 신기하다고 까르르 웃어대는 그는 조금의 적막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데…
“저는 그냥 비행기를 타고 싶어요.”
의미 없는 대답이었다.
*
가을이 무르익는 짙은 새벽, 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린 날이었다. 길이 미끄럽고 위험한 이런 궂은 날을 골라 산을 오르는 걸 마다하지 않는 나는 무거운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그리 넓은 산이 아닌지라 대부분의 길과 통로를 꿰고 있어 퍽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길을 잘 외웠다.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했기에 칠흑처럼 깜깜한 시야에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뭐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닥쳐온 일에 집중하는 편인 나는 요즘 속이 어지럽다. 생각 정리가 필요할지도.
유다이 씨는 과할 정도로 친절하다. 몇 줄의 메시지면 끝날 이야기를 지나가다 가게에 들러 내 얼굴을 보며 설명하거나 아주 가벼운 이야기를 들려 줬다. 일전에 말했던 상사의 고객 이야기나 매주 월요일마다 하는 아침 회의에서 화두에 오른 가십거리 같은 것들. 그간 내 세상은 무에 가까웠기 때문에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수다스러운 친절함에서 외로움의 냄새를 맡았다. 이 사람은 외롭구나. 외로워서… 외로워서 자꾸만 대화 상대를 찾는 거야. 나는 그의 무모할 정도로 적극적인 접근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면서 이게 사람의 습성이라는 걸 이내 깨닫고 받아들였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은 힘들지 않나요?”
나는 계산을 도와주고 물건을 추천해 주는 그것도 정말로 관심과 흥미가 이 가게와 일치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교류가 전부였기에 그가 신기했다.
“흠, 적성이랄까?”
“잘 맞는단 말이네요.”
“그보다 난 심심한 게 싫어.”
그가 말하는 심심함이라는 건 아마도 정적일 거다. 군중 속에 있어도 금방 외로워지는 게 그라는 종의 천성이고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그를 훌쩍 이해하게 됐다.
노려지는 입장에서 노리는 입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는 어떤 인간일까.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나는 어떨까.
“아사쿠라는 심심할 때 어떻게 해?”
“산을 간다든가…”
“재미없다.”
“실례예요.”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카운터에서 투덜대는 그는 예전에는 아주 짧게 나와 도란도란 떠들었지만 언제부턴가 아예 의자를 끌고 와 눌러 앉아 있었다.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 정도를.
“예전에는 라인이 아니라 메일을 썼어. 메일 알아?”
“전 바보가 아니에요.”
“죠가 어리니까… 혹시나 했지.”
어느새 아사쿠라라는 나의 성은 사라지고 죠라는 이름만 짧게 그의 입에서 머물렀다 뱉어졌다. 그렇게 불러 달라는 요청 없이도 그는 자연스럽게 나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역시 타고난 승부사의 기질이 있었다.
“메일을 쓰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난 그때도 이모티콘을 즐겨 썼어.”
“네… 지금도 즐겨 쓰시니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어. 답장이 돌아오는 시간 말이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른 채로 그대로 흐르는 시간이 좋았다구.”
“기다리는 시간은 심심하지 않았나요?”
“낭만이지. 낭만을 모르는 죠. 아직 애야.”
라인과 메일의 차이점은 다른 것보다도 결국 낭만이라는 모호한 감성에 있는 듯 보였다. 데이터로 치환되어 날아가는 감정과 언어의 혼합체. 그래서 알록달록 스티커를 붙이는 모양이다.
“지금도 메일은 쓸 수 있어요.”
“아무도 안 써.”
“저에게 써요.”
같이 있으면 무방비 상태가 되고 그러다가 그를 달래게 된다. 어른스러운데 왜 이렇게 응석받이 같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태풍의 눈 속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바로 겁 없이 말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메일을 교환했다.
와쿠와쿠. 와쿠와쿠. 첫 메일은 그렇게 한 줄이었다. 그는 그렇게 라인과 메일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막상 받아 보니 나에게는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 다만 뭔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유다이 씨가 아주 멀리 있고 우리의 거리는 시차가 생길 정도로 멀어서 중대한 사안보다 사사로운 것이 훨씬 궁금해지는 느낌.
대화보다는 아주 짧은 쪽지를 주고 받는 것처럼 우리의 메일은 이어졌다. 나는 주로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날씨는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주제지만 그건 그런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나 그랬고 나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나는 미리 알 수 있었다. 화창한 날에도 소나기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걸 새나 벌레처럼 쉽게 알아차렸다. 죠는 캐스터 같네. 누구보다도 정확하잖아? 어제 덕분에 우산 챙겨서 럭키였어. 그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뿌듯했다.
많은 글자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조바심이 일었다. 매일매일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는 세일즈맨이 답장을 늦게 보내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는 못내 서운했다. 이틀 전에 본 얼굴을 그리워한다니 낯설고 무언가 어긋난 기분.
나는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즐겼다. 그가 낭만이라고 포장한 기약 없는 기다림에. 내리는 역을 착각해 20분을 지각했다거나 기대 없이 시킨 라멘이 맛있었다거나 하는 불면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먼지 같은 일상을 엿보는 게 좋았다. 내가 정한 나의 영역은 집과 가게 그리고 뒷산이 전부였기에 그가 직접 발로 뛰며 가지고 오는 장면들이 사진처럼 영화처럼 싱그럽게 읽혔다.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세 번을 찾아오던 그가 거의 매일 찾아오게 됐다. 나의 메일은 하루가 어땠다는 이야기보다 언제 올 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등의 친근한 내용으로 바뀌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텐데 내게는 어색하다 못해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져 버겁기도 했다. 유다이 씨는 출장에서 복귀가 늦어져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하자고 메일을 남겨 놓고 나를 실망시킨 뒤 가게 앞의 전봇대 뒤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때 본능적으로 알았다. 코끝에 스쳤다. 이 사람은 나를 아끼고 있다는 걸. 다시 노려지고 있다. 마음에 들었다. 두근댔다.
맥주 네 캔과 편의점 오뎅을 여러 통 비운 날이었다. 좁은 멘션, 나의 집 거실에선 티비에선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고 우리는 들뜬 상태였다. 평소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일대기를 늘어 놓던 유다이 씨가 말이 없었다. 취기에 졸린 눈을 한 그는 한 쪽 팔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경계 태세를 푼 무방비의 유다이 씨. 새삼 그의 체구가 나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몸이지만 내부의 근력이나 골밀도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잘 빠진 목빗근이 선명했다. 나는 충동을 억눌렀다.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인내할 수도 있다.
“죠는… 자기 이야기를 통 안 하네.”
“설명이 서툴러요.”
“죄책감 들어.”
“뭐가요?”
“그냥 눈이 마주치면 그래.”
“어떤가요?”
“질문이 너무 많아. 영업 종료야.”
“너무해요.”
그는 기다렸다. 내가 언젠가 말을 꺼낼 때까지. 과묵함으로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지 오래였고 그저 나의 마음을 억지로 열어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덮어 두고 지금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맴돌기만 하는 것을 꺼내지 않고 꾹 다물고 있다. 조금 더 팽창하면 터지고 말겠지만… 이 평화를 만끽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 손을 펼치고 그의 얼굴 앞에 가까이 했다. 이미 늘어진 그의 몸은 미동이 없었고 나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가장 긴 중지의 끝부터 손바닥의 끝까지 그 속으로 그의 얼굴이 들어갔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적수다.
그는 내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적수다.
그 사실이 나를 아주 복잡하게 만들었다. 처음 인식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불청객으로 느껴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에게 불不을 느낀 적 없었다. 요란하게 다가오는 날도 소문처럼 조용히 다가오는 날도 나는 그를 경계한 적이 없다. 단순한 나의 삶에 궤적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코가 유다이. 관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현장에 불러 들이는 코가 유다이.
그게 나를 빗속의 산으로 끌어 들였다. 단순한 추위와 축축함만이 복잡다단한 이 생각을 잠재울 수 있었다. 폐부까지 스미는 투명한 냉기는 사고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내 세계는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나와 나의 의식주 그리고 더 늘어나지도 더 짧아지지도 않을 주어진 만큼의 행위와 생. 나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겁이 많아졌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통증이 많아지리라 예감했기 때문이고 또한 내 앞에 놓인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난폭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고도 나는 이제 내 속에서 나는 악취를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산에서 미끄러지듯이 빠져 나왔고 푹 젖은 몸을 숨기며 지름길로 향했다. 보통 등산객은 잘 모르는 어지러운 통로였는데 나만 알 수 있도록 일전에 만들어 둔 표시를 따라가면 수월했다.
허무에 찬 마음으로 길을 따라 하산하던 나는 마주쳐선 안될 사람과 마주쳤다.
샛노란 우산을 손에 쥐고 남은 한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있는 남자, 유다이 씨였다. 그가 든 손전등의 불빛은 괴로울 정도로 눈이 부셨고 그는 그 자리에 붙은 것처럼 서 있다가 이내 아주 짧은 비명을 지르고 기절했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안색, 그 감정을 잘 이해하면서도 힘들어졌다. 찰나의 만남 속 아주 많은 것들이 뒤틀리고 재정비되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쓰러진 유다이 씨에게 다가갔다. 호흡을 확인하고 쓰러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을 뜨면 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착잡하고도 아득했다.
그러나 간곡히 요청해야만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을…
나는 늑대고 아주 긴 여행을 통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
어디서부터 물꼬를 트면 좋을지 망설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그는 노곤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표정.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긴 부분이 워낙 현실성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나는 뜨거운 우유에 꿀을 한 스푼 풀어 그의 앞에 대령했다.
“죄송합니다.”
“응?”
“그렇게 놀라실 줄 몰랐어요.”
“죠… 미안한데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무슨 말이야? 전부.”
유다이 씨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어 어쩌다가 자신이 내 방에서 깬 건지 잘 모르는 눈치였고 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의 기억부터 상기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유다이 씨는 친한 고객의 손녀가 선물로 달아 준 인형을 등산로에서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 와 찾아 보는 중이었다고 했다. 솔직히 듣고 있자면 본인의 손녀가 준 선물도 아니고 고객의 손녀가 준 선물을 제3자인 유다이 씨가 그 캄캄하게 어두운 밤 비까지 뚫고 찾아야 하는 이유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고 긴장하고 있던 차에 들은 그 사실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아…”
“기억이 났나요?”
“응…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뭔가 나타나서 놀랐어. 진심으로 놀랐는데.”
“뭘 봤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웅… 엄청 커다란 개였던 것 같은데… 에, 혹시 늑댄가?”
말도 안되는 겁쟁이는 아니라는 건가. 그는 자신이 마주친 것의 모양과 크기를 제대로 떠올렸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서야 천천히 상황 파악을 하는 모습. 옷걸이에 걸린 유다이 씨의 옷은 아직 세탁을 맡기지 못해 어제의 사태 이후로 별로 달라진 게 없었는데 그 걸린 모양새를 자세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내 옷!!!!!”
“앗…”
“구멍이 나 있어!!!”
“네에…”
“나 물렸나 봐!”
“그럴지도요…”
“죠! 내 팔! 내 다리! 멀쩡한 걸까?”
“아마도요…”
아까 전까지 아픈 것처럼 기운이 없던 그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팔과 다리가 멀쩡히 몸에 달렸는지를 확인하고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고 움직임에 문제가 없는지 이리저리 휘둘러 댔다. 그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체에 열을 올리며 꼼꼼히 관찰하고 만지작거리는 동안 내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해도 변명할 수 없는 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상처가 그의 몸에 있었기 때문이다. 와, 럭키! 팔과 다리가 멀쩡한데? 그가 기운차게 나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눈이 제대로 닿지 않는 목을 나의 입으로 새벽에 한번 물었다 놨기 때문이다.
“저…”
“응?”
“상처는 여기에 있어요.”
나는 내 손으로 나의 목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그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목을 만졌다. 심한 상처는 아니니 금방 낫겠지만 아직은 시큰거릴 시기다. 시무룩한 표정.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죽다 살아났다는 얼굴. 그렇게까지 슬퍼할 줄 몰랐다. 하지만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는데… 그리고 난 유다이 씨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다. 난 정말 유다이 씨를 도와주고 싶었다. 유다이 씨에게 조금의 흠도 내고 싶지 않았고 그저 어떻게든 집에 데리고 가려고 하다 보니 목을 잠깐 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결국 다시 돌아와 나는 설명을 해야만 했다.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뭔데?”
그는 손가락으로 계속 상처가 생긴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자꾸 만지면 덧나고 흉터가 오래 갈 텐데 마음이 성급해진다.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자꾸 만지면 안돼요. 아파요.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돌아왔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는 러시아에서 왔어요.”
“오… 교포?”
“아, 그게 아니라…”
“아니야?”
“네…”
나는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몸집으로 태어났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던 시기에는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되는 게 나일 거라고 모두가 생각할 정도로 약해 빠진 자식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몇 개월 뒤 가장 크게 자란 것은 나였다. 어머니는 나의 정수리를 핥으며 내가 가장 아버지를 닮은 자식이라고 했다. 우리 종족은 일반적인 늑대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으로도 살 수 있는 돌연변이 종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개체들보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갈래길이 더 많았다. 어린 시절, 늑대의 정체성이 더욱 강했던 시절 우리 형제들은 꼭 붙어 다니고 힘을 겨루고 늘 싸우고 사고를 쳤지만 몸집이 크고 부모님의 살핌이 필요 없게 됐을 무렵에는 저마다의 터를 잡고 싶어했다.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
일찍이 집을 벗어난 형제들은 네 발로 걷는 모습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인간 사회에 잘 녹아 들었다. 그들은 고달플 때 고향이 그립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과 함께 살던 나는 다락방에서 발견한 숙부의 일기를 자주 펼쳐 읽었다. 숙부는 일본에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지 않고 러시아 남부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의 숙모를 만났다고 했다. 숙부의 일기는 아주 어릴 때 써 둔 것이라 지금의 숙부와는 꼭 다른 사람인 것처럼 판이했다. 그는 어릴 때 우두머리 수컷이 되고 싶었구나… 무리를 지어 나는 새들의 대형을 망쳐 버리고 싶어하고 욕심 많은 형을 미워하고 그런 평범한 어린 늑대였다.
나는 그다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가장 힘이 넘쳐야 할 시기였지만 잠수하고 있었다. 숙부의 어린 시절은 그때의 나와 거의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내게 우두머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나의 마음은 헤매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어머니와도 같지 않다. 숙부에게 편지를 써 붙였다. 나는 하루 종일 뛰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기운이 넘실대지만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고 그저 타오르는 마음을 가지고 괴롭기만 하다고. 세 줄을 채 넘지 않는 편지였는데 답장은 아주 빨리 왔다. 조금 위험한 길이지만 보름 뒤 알려 준 항로를 따라 배를 타고 오라는 조언이었다. 그의 글자는 여전히 못생겼고 투박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해 엔화와 그가 수중에 남겨 둔 루블을 봉투에 따로 담아 보냈다.
항구까지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트럭을 탔다. 나는 처음엔 조수석에 탔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짐칸으로 옮겨 탔다. 짐칸엔 아버지가 마치 예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우리는 들키면 안되는 사람인 것처럼 짐칸의 바닥에 납작하게 몸을 말아 나란히 누웠다. 아버지는 인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종속되는 느낌이 싫다고 했다. 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몸집은 아주 컸다. 떠나기 전에야 알게 된다. 나는 그의 몸에 살짝 기대고 두 팔을 뻗어 목을 껴안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울 냄새가 났다. 빳빳하고 두꺼운 털의 감촉과 비릿한 체취 그리고 나무의 물기 있는 향기. 나는 그 목덜미에 얼굴을 잠시 묻었다. 잘할 수 있을까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동이 트기 막 시작하는 바다, 익숙한 추위였다. 아버지와는 일찍이 인사를 끝냈고 나는 단촐한 짐을 챙겨 짐칸에서 내렸다. 어머니는 운전석에서 내린 뒤 나의 얼굴을 골똘히 살폈다. 늑대의 마음으로는 아무렇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으로는 쓸쓸하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 것만 같아서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재빨리 소매로 훔쳤다. 나는 자라는 동안 말을 잘 듣는 막내였고 그래서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어머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연락할게요. 안녕.
살면서 본 적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배에 탔다. 나는 합법적인 루트로 배에 몸을 싣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객실이 아니라 일반 물류들이 선적되어 있는 칸으로 올라탔다. 나흘 동안 심한 열병을 앓았다. 전에 겪어 본 적 없는 멀미 때문에 토악질을 했고 속이 괜찮아지면 열이 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빨리 이 고통의 시간이 가시길 간절히 소망했다.
지옥 같은 바닷길이 끝나고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들과 함께 육지에 내렸을 때는 흘릴 눈물이 없었다. 나는 몹시 고단했고 그저 편안해지고 싶었다. 숙부에게 소개받은 출입국 심사관은 배 안에서 꼬박 굶은 나의 식사를 챙겨 주며 거의 다 왔다고 달래 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은밀한 통로로 안내하며 행운을 빈다고 했다. 이런 험난한 여정일 줄 몰랐다. 가장 빠르게 가려면 네 발로 뛰는 게 좋을지도 몰라. 등 뒤로 그런 말을 남긴 그 사람은 어쩌면 동족일지도 모르겠다.
입국이 다가 아니라 숙부가 마련한 거점까지 다시 육로를 통해 가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늑대의 모습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아, 조금 더 편한 방법은 없는 걸까? 원망하기도 잠시 나는 고른 흙과 풀의 내음이 반가웠고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땅의 온도가 마음에 들어 다른 모든 걸 잊어버렸다. 짐을 등에 얹은 채 열심히 달렸다.
흐리면서도 짙은 색이 이어져 있던 고향의 평원과는 달랐다. 좀 더 다양한 색깔이 옅게 뿌려져 있었고 시끄러웠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란 나의 귀에는 아직 낯설고 어려웠다. 이 모든 소리가 익숙해지는 순간이 언젠가 오겠지. 나는 박차고 내달렸다. 폐가 맵고 발이 피로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나의 길이었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땠나요.”
“죠…”
“네.”
“너무 슬프다.”
뜻밖의 감상이었다. 슬프다는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닌데 도대체 어떤 부분이 슬프다는 것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없고 타인이 아는 나의 감정이 있는 건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그가 슬프다는 것인지. 그는 팔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무방비한 상태다.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니 슬프잖아.”
“아… 별로 울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야.”
앗, 운다. 그가 아니라 내가 운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나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짙어지는 그의 냄새. 나와 몸을 포개 안았다. 울 정도로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났다. 그때 내보내지 못한 눈물을 이제라도 흘려보내기라도 하듯이 눈은 계속 촉촉하게 울컥거렸다. 그는 나의 등을 토닥거리고 쓸어내렸다. 별로 괴롭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슬프지 않아요. 그렇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요. 그의 대답 소리는 숨소리처럼 희미하다. 나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무섭지 않나요?”
“응? 뭐가?”
“늑대잖아요, 저. 인간은 보통 큰 육식 동물을 무서워한다고 배웠어요.”
“보통 무서워하긴 하지…”
“그렇지만 저는 괜찮나요?”
“괜찮다기보다는…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없어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에요.”
엥? 그의 의아하다는 반응은 무시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해요. 이렇게 상처가 날 줄 몰랐어요. 구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비에 익사하는 걸 보는 건 싫어서. 응? 죠, 인간은 비에 익사하지 않아. 모르는 일이에요. 세상엔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요. 나는 웅얼거렸다. 나의 칭얼거림은 무한정이었고 그는 하나하나 대꾸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제가 늑대인 것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유다이 씨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숙부는 숙모를 만났을 때 한눈에 알았다고 했다. 평소보다 들뜨고 실수하고 바보처럼 굴게 된다고. 자연스럽게 내비치고 싶은 감정이라는 것이 샘솟는다고. 나에겐 유다이 씨가 그랬다. 유다이 씨 생각을 하면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다가 빨라져 금방 밤이 되어 버리고 물리적 거리가 몹시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한달음에 달려가 오늘은 어떤 고객을 만났고 어떤 보험을 팔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마음은 내게 인고를 가르쳤다. 나와 비슷한 체구, 어떤 면에선 나보다 잘 자리 잡은 골격 그리고 그가 몸으로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힘은 정말이지 매력적이었다. 그는 주눅들거나 겁을 먹는 법이 없고 빈틈을 잘 노린다. 한마디로 우수하다. 짝으로 손색이 없다.
“정말로 좋아해요.”
“어?”
“유다이 씨를 매일 생각해요. 유다이 씨를 매일 기다려요.”
“응…”
“당신도 나를 아낀다고 느끼고 있어요.”
나는 조금 힘을 줘 그를 밀어 눕혔다. 그는 살짝 견디며 버티다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으며 넘어갔다. 봐준다는 것, 나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할 때부터 눈 여겨 봤다. 그의 향기를 기억하고 어쩌다 스치는 날에는 면밀하게 살펴봤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고. 숙부가 숙모를 만났을 때와 내가 느끼는 모든 부유한 감정이 같을 것이라고.
“아주 오래 사는 늑대는 20년을 살아요.”
“짧잖아…”
“물론 저는 그보다 오래 살겠지만 20년 만기라는 게… 제게는 정말로 큰 도전이에요.”
“죠, 나 무서워.”
“그때는 많이 울어 주세요.”
정말로 20년이야? 그는 나의 아래에서 자꾸만 묻는다. 진실을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싶은 기분. 나는 20년보다는 훨씬 오래 살고 인간인 그보다는 일찍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다이 씨의 곁에서 계속 그를 기다리고 맴돌고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이의 마음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고 나를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냄새가 났다. 그에게선 그런 냄새가 난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을 우연으로 포장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절대 숨길 수 없다.
물면 놓치지 않는다. 물기 전까지 사력을 다한다. 그는 밀려 들어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속도로. 그렇게 나의 안에서 찰랑거릴 정도로 채워지다가 넘쳐 버린다. 목덜미를 물었을 때 일순 익숙한 본능이 끓었지만 다시 모든 것이 옅어졌다. 그는 나의 적수일 수도 있지만 나의 짝일 수도 있다.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당황케 한다. 지루하지 않은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 나는 그를 아끼고 무척 소중하게 대할 거다. 내가 선택했다. 그래서 아주 먼 미래에 대해 잠깐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고 갖고 싶지 않았던 나를 또 한번 진화시켰다. 미래를 무서워하되 겁 없이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해서 강해지면 좋겠다. 나를 패배하게 하고 다시 나에게 복수 당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짝은 그래야만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를 달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많이 연습했다.
“유다이 씨는 강하니까요.”
*
이튿날 오전, 아침잠이 많은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따끈한 그의 품을 빠져나와 사고처럼 마주쳤던 길목으로 향했다. 그가 설명한 인형의 모양을 떠올리며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나는 눈과 발을 바삐 움직였다. 움직이는 길목마다 밤 사이 빗물을 머금은 풀들이 보였다. 시원하고 훌륭한 녹음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중간 거점으로 삼는 쉼터에 도달했다. 인형은 거기 있었다. 사람이 잃어버린 거니까 당연한 건가. 물기를 가득 머금어 풍선처럼 동그랗게 변한 채. 원망스러운 인형. 유다이 씨가 필사적으로 찾겠다고 고생하게 한 주범. 그냥 두고 갈까, 싶기도 했지만 그가 고맙다고 하는 걸 듣고 싶기도 했다.
아침엔 커피를 마신다고 했지…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며 나는 카페의 점원에게 카페오레와 카페라떼의 차이점을 물어봤다. 우유와 에스프레소 넣는 순서가 다르다고 했다. 결국 내용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구나… 어쩐지 허무했다. 아주 작은 차이로 이름이 달라지다니 신기했다.
“와, 어떻게 찾았어?”
“이 산은 그리 넓지 않아서 저는 금방 다녀요.”
“오… 야생의 죠다.”
“이건 커피예요. 좋아한다고 해서 샀어요.”
“감동이야… 대단한데.”
나는 그를 빤히 본다. 그는 커피를 마시려고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더 칭찬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커피를 다시 내려 놓더니 크게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의 코를 건드리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체온은 어제부터 줄곧 뜨겁다. 좋아. 나는 정말 길들여지고 있구나.
자전거를 사야겠다. 그러면 그가 함께 빠르게 달릴 수 있을까. 돈을 모아야지. 알래스카를 가야지. 나의 형제들을 만나게 해야지. 설원을 보여 줘야지. 나는 그의 가족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그는 막내라고 했는데… 그런 점은 나와 같다. 반가운 사실이다. 언젠가 나는 정말로 그의 곁을 떠나게 될 거다. 그건 자의이기도 하고 타의이기도 하다. 내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들시들한 유다이 씨는 생각만 해도 괴롭고 싫다. 이런 말을 하면 극단적이고 어둡다고 하겠지만… 인간들이 터무니없이 해맑은 것뿐이다.
“앞으로 이런 건 제가 다 찾게 해 주세요.”
“응?”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조금 미련해지기로 했다. 어리석은 채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유다이 씨의 칭찬을 받고 싶다. 귀여움을 받고 싶다. 종속되고 싶다. 마침내 야성을 삼키고 본능을 숨기고 멍청해지기로 한다. 이 의지는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음이면서 내일로 나아가는 욕심이기도 하다.
이윽고 다음으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