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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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오전 5시 30분, 아사쿠라 죠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21세기 스마트폰 시대에 흔치 않게 휴대폰 알람이 아닌 알람 시계를 사용한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을 끄고 눈을 뜨면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생경하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찾기 위해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으면 휴대폰 대신 두꺼운 노트가 손에 잡힌다. 그 위에는 자신의 글씨체로 남겨진 메모가 한 장 붙어 있다.

 

ー눈을 뜨면 가장 먼저 일기를 읽을 것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짜고짜 일기를 읽으라니, 죠는 어색하게 아마 일기장으로 추정되는 노트를 펼친다.

 

 

 

 

오전 10시, 아사쿠라 죠는 동네의 한적한 중고 서점에 도착한다. 작업을 하면서 참고하려는 책을 찾으러 왔지만, 무슨 책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202×年11月10日

(…) 오전 진료를 본 뒤 후마상을 만나 점심을 먹었습니다. 메뉴는 텐동, 병원 근처의 가게였습니다. 병이 시작된 지 이미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는 후마군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리고 다음번에는 꼭 제가 후마군에게 밥을 사려고 생각 중입니다. (…)

오후에는 출판사에서 이마이今井 작가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대면 회의였기에 꼼꼼하게 회의 내용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책장 2번째 줄의 노란색 노트를 참조할 것) 흔쾌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원고도 한 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대에 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작업하고 싶습니다. (…)

내일은 중고 서점에 가서 참고할 만한 책을 사야겠습니다.

 

어제의 일기는 그런 내용만 있을 뿐, 어떤 책을 참고하려고 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몇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읽어도 자신이 쓴 글 같지는 않았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다. 다리를 쭉 뻗고, 느긋하게 쉬는 거지. 저녁이 제일 좋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¹

 

그 문장은 어쩐지 어제의 자신이 남기는 힌트처럼 느껴진다. 일기를 다 읽은 뒤, 휴대폰을 찾은 죠는 그 문장을 인터넷에 검색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그날의 잔영日の名残り」이라는 책이 화면에 나타난다. 대충 줄거리를 훑어보았을 때 이마이상의 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사려고 한 것일까? 죠는 우선 그 책을 찾기로 한다.

이 서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죠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바로, 아사쿠라 죠가 코가 유다이를 처음 만난 곳. 오늘도 어쩌면 그를 여기서 다시 마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가 일본을 떠난 이후로 가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쨌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죠는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떨쳐내려 애쓰며 대신 가즈오 이시구로カズオ・イシグロ, 작가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작가명이 히라가나 순대로 배열된 서가를 따라 카행カ行 섹션을 찾기 시작한다.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를 지나 카か. 아래쪽까지 꼼꼼하게 살피느라 주위를 살피지 못한 탓에 누군가와 부딪힌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죠?”

 

익숙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면 믿을 수가 없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코가 유다이다.

 

“유다이상…? 일본에 돌아오신 거예요?”

 

방금까지도 여기서 그를 만날 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은 했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 같이 첫 번째 재회도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 밖의 일로 일어난다.

 

“응. 죠는 잘 지냈어?”

 

유다이가 웃으며 묻는다. 긴 시간 떨어져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것만 같이,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기억 속의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그러나 아사쿠라 죠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시.

 

아사쿠라 죠의 하루는 오전 5시 반에 시작된다.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이른 아침에 시작되는 편이다. 프리랜서라는 그의 직업을 생각하면 더욱이 그렇다. 알람 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대는 걸 어색해할 겨를도 없이 알람을 끄고 눈을 껌뻑거린다.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뭔가를 놓친 건지 하루가 시작됐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머리맡에 충전해 두고 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옆 협탁을 더듬거리면 휴대폰 대신 두꺼운 노트가 놓여 있었다. 손에 닿는 감촉으로 미루어보아 그 위에 바스락거리는 게 뭔가가 있는데… 메모였다.

 

ー눈을 뜨면 가장 먼저 일기를 읽을 것

 

분명 자신의 글씨체였다. 그러나 이 메모를 쓴 기억은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포스트잇이 주변에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특히 침대가 닿아있는 벽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붙어있었다. 무언가의 제목 같은 것들과 페이지, 인용구인지 자신의 감상인지 뭔지 모를 것들.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이 메모가 마치 경고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죠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노트를 펼쳤다.

 

아사쿠라 죠의 기억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리셋된다.
마지막 기억은 202○년에 멈춰있다.
이 일기는 아사쿠라 죠가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죠는 이 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메모와 달리 자신의 글씨체도 아니었으니, 여전히 이 말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거의 보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페이지의 끝에 달린 all my love, K라니… 이 첫 페이지는 분명히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은 문장들이었다. K라는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지 짐작되지도 않았다.

죠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채로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제야 첫 번째 일기가 등장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명백히 자신이 쓴 글이었다.

 

202×年3月4日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제 이름은 아사쿠라 죠. 사고를 당해 기억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내려진 진단은 전향성 기억상실증.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것이 문제가 되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이 들면 기억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현재,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 일기가 시작되는 오늘로부터 약 1년간의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습니다.

 

일기는 아사쿠라 죠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점에서 거의 1년이나 지난 날로부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 일기의 내용을 믿는 것 말고는 지금, 이 익숙하고도 낯선 공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죠는 그때부터 꼼꼼하게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했고 누굴 만났고, 어떤 대화를 했고 그런 것들이 최대한 세세하게 적으려고 애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짜에 도달했다.

11월 9일. 그렇다는 건 오늘은 11월 10일이라는 뜻일 텐데.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을 무렵, 또 다른 알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휴대폰인 듯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에도 메모가 한 장 붙어 있었다.

 

ー오전 8시, 일정을 확인할 것.

 

뭘 어떻게 확인하라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잠금 화면에 미리 알림이 여러 개 표시됐다.

 

[미리 알림]

○ 오전 10시: 야마우치 대학 병원 진료
   무라카미 마사오 교수님
○ 오후 12시: 후마군과 점심 약속
   대학 병원 1층 로비에서 기다릴 것
○ 오후 2시: 출판사 미팅
   담당자: 후지와라 나오미상

 

후마라면 무라타 후마를 말하는 건가? 그 이외에는 일기장에만 나온 이름이었다. 제 기억 속에서는 후마를 무라타상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사라진 지난 2년 사이에 후마군이 되어있었다. 그제야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ー주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할 것.

 

휴대폰 옆에 놓여있던 또 다른 메모에 다시 일기장을 펼치자, 몇몇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 정리된 페이지가 나타났다. 이름이 형광펜으로 칠해진 사람들은 기억장애에 대해서 아는 사람. 그렇게 나름 사람들을 어느 정도 구분해 두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무라카미 교수와 후지와라 나오미의 사진과 기록을 찾아 내려갔다. 이름이나 행동만으로 상상한 모습과는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아닌 부분도 있었다. 이들은 아사쿠라 죠를 잘 알고 있지만, 아사쿠라 죠에게는 오늘이 첫 만남이다. 그래서였을까, 형광펜으로 이름이 칠해진 무라타 후마라는 이름을 보자 조금 안심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다는 사실은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알림에 적힌 대로 시간에 맞춰 도착한 병원에서는 별달리 특별한 게 없었다. 그저 첫 번째 일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그렇게 악의 없이 운을 뗀 교수님의 말이 아사쿠라 죠에게는 약간 잔인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일기에 적힌 이야기는 여전히 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으므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한다는 건 다른 일이었다.

1층에서 수납을 마치고 약 조제를 기다리자, 후마와 만나기로 한 12시까지는 15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대학병원은 항상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구나, 이곳에 수도 없이 왔을 텐데 여전히 처음 온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많은데, 로비에 그대로 앉아 그를 기다려도 괜찮은 건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다행히 후마로부터 라인이 도착했다.

 

죠, 1층에 있지? 금방 갈게. [11:47]

 

금방 온다는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위층에서 후마가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죠, 오랜만.”

“아, 후…마군… 오랜만이에요.”

 

그를 이름下の名前로 부르는 건 역시 조금 어색했지만, 자신과 달리 후마의 기억은 이어지고 있으므로 죠는 일기와 알림에 적힌 대로 후마를 부르기로 했다. 죠의 마지막 기억으로는 병원에서 전기견습의前期研修医 과정을 하던 무라타상이었는데, 지금은 후기견습의後期研修医에 정말로 죠와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 같았다.

 

“드디어 사람답게 밥을 먹으러 간다니까… 그래도 빨리 먹고 돌아와야 하지만.”

 

후마는 점심으로 근처에 봐둔 텐동집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죠는 여전히 후마와 처음 만난 날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 왜 그게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은 내 친구, 무라타 후마. 그렇게 후마를 처음 죠에게 소개해 준 사람은ー

 

“여기야. 주문은 내가 할게?”

 

후마는 노렌暖簾을 거두고 들어가며 바로 주문했다. 런치 세트 2개 주세요. 병원 근처인 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 건지, 가게는 사람들로 가득한 탓에 두 사람은 카운터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교수님은 뭐라셔?”

“아… 그냥… 아주 조금은 개선될 수 있겠지만…”

 

죠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기약 없이 매일 새로운 날이 된다는 것. 말로 내뱉으면 그 무게가 실감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요. 주변에 후마군 같은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우와… 나 지금 완전 감동했어. 죠.”

 

죠는 감격한 표정으로 가슴을 붙잡은 후마를 보고 웃었다. 그래도 아무한테나 말하지 말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는 사람들이ー 후마는 마치 형이라도 된 것처럼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내일이면 이 말조차도 잊을 걸 알면서도 마음을 담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죠는 약간 가슴이 벅찬 것 같았다.

 

“물론 2년이나 기억장애를 가지고 잘 지내온 죠가 누구보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2년… 이요?”

“그러니까… 1년은 기억에서 없어졌고 올해 초부터 약 1년간 매일 기억이 사라지고 있으니까.”

 

죠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때 텐동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점원에게 말한 뒤 밀려온 침묵. 갑작스레 후마와 어색해진 것만 같아 사고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후마군,”

“응.”

“저는 기억이 이어지지 않잖아요.”

“응.”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던 시절의 누군가가 보고 싶을 수 있나요?”

 

일기장에 적힌 K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그게 그리움을 느끼는 건지, 아무리 일기장을 넘겨도 나타나지 않는 K라는 인물이 궁금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음… 가능할지도 몰라.”

 

신경외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사인 후마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지는 몰랐지만. 후마는 제 이마와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죠는 말이야, 여기,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해마가 손상된 거잖아? 그치만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여기 편도체에 위치하고 있어서, 기억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뇌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지. 그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분명히 K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는데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코가 유다이였다. 기억을 잃어서 그런 것일까? 실제로 코가 유다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4년 전이지만, 기억 속에는 그다지 먼 이야기가 아니어서?

 

“유다이상은 잘 지내시나요?”

“응?”

 

갑작스럽게 유다이의 이름이 나오자 후마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아사쿠라 죠가 지금껏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던 사실: 코가 유다이는 아사쿠라 죠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정정, 특별한 사람이다. 그건 그가 코가 유다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유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이었다.

 

“유다이군 말이지…?”

 

후마는 여기서 왜 유다이의 이름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아사쿠라 죠에게 무라타 후마를 소개해 준 사람이 코가 유다이였고, 두 사람 사이의 거의 유일한 지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결론적으로 이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 전에 다시 도쿄로 돌아왔어.”

“돌아오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에 관한 죠의 마지막 기억은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것보다도 훨씬 전, 사고 전의 기억이 사라진 1년보다도 더 된 일이었다.

 

“영국이 무슨 옆 동네인 것처럼 간다니까. 가끔 보면 내가 시즈오카에 가는 것보다 더 자주 가는 것 같아.”

 

그래도 최근에 새로 책을 낸다고 도쿄에 오래 머물 것 같아. 처음 낸 책은 죠도 저번에 츠타야에서 한 권 샀다고 한 것 같은데, 아닌가? 후마가 말하는 기억은 일기장에서 본 적 없으니, 작년의 일인 듯했다. 그렇게 유다이의 근황을 전해 들으며 조금은 달라졌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죠도 오늘 출판사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

 

후마는 꽈리고추 튀김을 집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옮겼다.

 

“아, 맞아요.”

 

이런 일정까지 모두 꿰고 있는 모습에 후마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에도 표지 디자인?”

“네.”

“작가는 누구래?”

“이마이 히나타今井 日向라고… 이번이 첫 작품인 것 같아요.”

 

장르는 아동문학인데, 제법 길이가 있는 판타지 소설이래요. 그렇게 설명하자 후마가 말했다.

 

“뭔가 어울리는 이름이네. 온화한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 같은 이름이야.”

“그런데 태양의 양陽을 써서 히나타예요.”

“남자분이구나.”

 

죠는 후마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와라상이 제가 좋아할 것 같다고 추천해 주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후마는 지난번에 죠가 작업했다는 책을 산 이야기를 했다.

 

“죠는 항상 죠가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를 작업해. 그래서 어울리기도 하고.”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에요.”

 

나름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몇 얘기가 오가다가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대화 없이 밥만 먹은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 말이 정적을 깼다. 후마는 죠에게 오늘은 자신이 밥을 사겠다며 와리캉割り勘을 한사코 거절했다. 거기에 죠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늘 일, 잊지 않고 써둘 거예요, 그 정도였지만.

 

“이제 출판사로 가는 거지?”

“네.”

“조심해서 가.”

“오늘 감사했어요.”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돼. 우리 생각보다 더 친하거든.”

 

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병원 쪽으로 향했다. 이제 겨우 익숙해진 관계를 다시 잊어버린다는 것은 역시 조금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은 모두 일기에 쓰자. 그의 따뜻한 걱정과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오늘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잊지 않도록, 점점 멀어지는 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멈춤.

 

차창 밖으로는 잘 아는 도시의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사쿠라 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제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말이다. 죠는 운전석에 앉은 그에게 차마 말을 걸지는 못한 채, 어색한 듯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죠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는 웃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보여준 비즈니스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 말이다. 그 모습이 아사쿠라 죠에게는 더 익숙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아까 전의 미팅으로 돌아가야 했다.

 

– 코메츠부상, 사실 이렇게 오실 필요는 없는데…

 

일기에서 본 그대로였다. 후지와라 나오미상은 아사쿠라 죠를 코메츠부コメツブ라고 부른다. 코메츠부는 죠가 대학 시절부터 작업물을 올리는 SNS 계정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불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만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기억 속에서) 초면인 사람에게 익숙한 듯 그렇게 불리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 이마이 작가님이 첫 미팅은 다 같이 보고 하시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하며 후지와라는 죠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죠가 자리를 잡고 앉자, 후지와라는 원고의 사본을 죠에게 건넸다. 「해가 뜨는 곳으로日の昇る方へ」, 동쪽을 말하는 건가? 이전의 기억은 없지만 원고 사본을 전부 받는 것이 이례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다.

 

– 이건 사실 안 읽으셔도 되는데, 이마이 작가님이 가능하시면 코메츠부상이 읽어주시면 좋겠대요. 아시겠지만 유출은 절대 안 돼요!

 

읽어주면 좋겠다는 말이 약간은 부담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읽어도 기억을 못 할 텐데, 나중에 감상이라도 물어보시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앞섰다.

 

– 이마이 작가님도 코메츠부상의 팬이셨더라고요.

 

후지와라 나오미 역시 죠의 SNS를 보던 중 죠에게 연락을 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저희한테 코메츠부상을 추천해주신 것도 이마이 작가님이셨어요. 벌써부터 부담감이 느껴졌다. 아마 후지와라가 처음 연락했을 때도 비슷한 걸 느끼지 않았을까, 모든 건 짐작뿐이지만.

 

– 안녕하세요. 제가 제일 늦었네요.

 

그리고 때마침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등 뒤에서 인사하는 목소리는 아사쿠라 죠가 잘 아는 것이었다.

 

– 이마이 히나타… 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며 죠를 보고 웃었다. 그 이후로는 회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벌써 기억이 흐릿해진 것 같았다. 해가 뜨지 않는 세계. 태양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산サン이라는 소년. 그리고 소년을 돕는 바쿠獏. 바쿠라면 분명히 악몽을 먹는 상상의 동물이었지. 어릴 적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일본 문화가 가미된 판타지라니,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죠를 제외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책의 전체 내용에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야기했다. 이미 죠의 병에 대해 잘 아는 후지와라는 내용을 정리해 죠에게 바로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죠 역시 여러 가지 메모와 자신의 생각을 적어두긴 했다. 지금껏 몇 권의 책을 작업해 왔지만, 오늘의 죠에게는 처음인 일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한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해왔다는 과거의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 질문에 죠는 현재로 돌아왔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제 무릎만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 네.”

 

정말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일기를 자세하게 써둔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남에게 일어난 일을 읽는 것만 같이 느껴졌으니까.

 

“유다이상은 잘 지내셨나요?”

“보다시피 책도 썼고… 다른 필명으로 새로운 장르도 도전해봤고… 가끔 번역도 하고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유다이의 분위기는 제가 알던 사람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시간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더라고.”

 

핸들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돌아오시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깜빡이가 켜지고 차선이 바뀐다. 유다이는 운전에 집중한 것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일 얘기가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부터 죠의 그림 계정을 봤어. 나도 팔로우하고 있거든. 고항츠부.”

 

처음 계정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코메츠부라는 닉네임을 정하기 전에 한참 이름 설정을 빈칸으로 내버려뒀던 적이 있었다. 닉네임 대신 화면에 표시되었을 아이디 @gohantsubu를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의 그림만 올렸던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도 오래 유다이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저를 추천하신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작업하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삽화든, 책 표지든, 뭐든 말이야. 그런 말을 들으면 물론 기쁜 일이긴 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속을 뒤흔들어 놓는다. 분명히 같은 시간을 알았고 같은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는데도 코가 유다이는 여전히 제가 그를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사쿠라 죠에 대해서 아는 것만 같았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고 싶었다.

 

“뭐… 나름 재밌었어. 일본이랑 전혀 다르니까…”

 

근데 겨울에 해가 일찍 지고 늦게 뜨는 건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 난 기숙사에 있었는데, 같이 대학원생인 사람들이랑 살았거든. 해봤자 유럽에서 온 애들이니까 다들 크리스마스에 집을 가더라고… 제일 낮이 짧을 땐 하루에 8시간도 안 되는데… 그때 집에 혼자 있는 게 정말 적응이 안 되더라, 그땐 정말 일본에 돌아오고 싶었어. 긴 밤에 대해서 들으니 유다이가 이번에 쓴 책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뜨지 않는 세계.

 

“그래서 극야極夜가 무대인 책을 쓰신 건가요?”

“글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답을 중얼거리던 유다이는 덧붙였다.

 

“그래도 산이나 바쿠 중에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난 바쿠가 되고 싶은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코가 유다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사람. 장난이 많은가 싶으면서도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눈물을 쏟아내고. 상반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사람. 제 가방 속에 들어있는 유다이의 원고를 떠올렸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죠를 처음 본 게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벌써 사회인이 됐다니, 시간이 빠르네. 벌써 4년인가? 미술 전문대학에 갈 거라고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지난 4년간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아사쿠라 죠에게는 2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를 둘러싼 세상은 그만큼 더 멀어졌다.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이 얼마나 자신에게서 멀어질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외롭겠지, 분명히. 외롭다는 감정도 잊을 만큼.

 

“유다이상.”

“응?”

“혹시 나중에…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유다이는 황당하다는 듯 잠시 죠를 돌아보며 웃었다. 갑자기 사진? 무슨 사진? 지금이 아니면 고백할 수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말해야만 했다.

 

“갑자기 함께 일하기로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아까 후마는 분명히 죠를 걱정하며 기억 장애에 대해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말라고 했지만, 코가 유다이는 아무나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일로 엮인 이상 그를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야 할 것이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과 달라진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기억장애가 있어요. 내일이 되면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잊게 돼요.”

 

빨간 불. 차가 멈췄다. 유다이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구나…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나 말이지ー

 

“죠의 졸업식에 갔었는데…”

 

졸업식이라면 아사쿠라 죠의 기억이 사라진 시기였다.

 

“그래서 오늘 내가 귀국한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굴었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기억해 내고 싶었다. 졸업식에서 코가 유다이를 마주했을 때 어땠는지 알고 싶었다. 미리 약속을 잡은 걸까? 아니면, 코가 유다이는 죠를 놀라게 해 주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도 아사쿠라 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확실한 상상력만이 여러 가능성을 흐릿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이런 것이라고,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라고. 만들어낸 기억, 아니 상상이 그렇게 매분 매초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기억 못 해서 죄송해요.”

“죠 잘못이 아닌걸.”

 

마가 떴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유다이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사쿠라 죠가 아는 것은 올해 초에 어떤 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 전의 1년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사고 이후 매일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 정도였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여전히 어색하다.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제 주치의인 무라카미 교수님과 후마, 그리고… 일기장을 준 것으로 예상되는 K라는 사람 정도이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과거의 자신 역시 일부러 알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유다이는 뭐라고 생각할까? 실망할까? 아니면 동정할까? 유다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로 졸업식 이후로 그를 만난 적 없는지. 제가 얼마나 많은 만남을 놓쳤을지.

 

“혹시 또 다른 일이 있었나요?”

 

저희 사이에 말이에요. 죠는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아니.”

 

유다이는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졸업식에 간 게 전부였어.

 

“그러면 죠한테는 오늘이 처음이구나.”

 

나랑 다시 만나는 거 말이야. 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죠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허우적거려도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도랑에 빠진 것처럼, 절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더 나아질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매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을까? 혹은 오늘만 이런 것일까? 그것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일기장에 적힌 글자들은 사실의 기록에 가까웠으니까.

 

“죠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것 같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유다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매일 헤어지는 거라고 해도요…?”

 

처음 만난 이는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되고, 다시 만난 이도 헤어진 채로 남겨두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다시 만날 수 있잖아.”

 

내가 죠를 아무리 슬프게 해도 말이야. 화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슬프게 한다니, 유다이의 단어 선택의 기준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지만, 역시 신경 쓰였다.

 

“유다이상,”

“응?”

“저희 정말로 졸업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거 맞죠?”

“…어떻게 생각해?”

 

죠는 유다이의 의미심장한 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억도 기록도 없는 날들에 대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코가 유다이뿐이었다. 죠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농담이야. 난 다시 영국에 갔으니까…”

 

유다이는 계속 묻는 죠가 귀여워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다며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말을 했지만ー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건 조금 슬프네요.”

 

매일 기억을 잃는 아사쿠라 죠는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후마는 기억이 아닌 감정이 남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말에 죠는 약간의 희망을 품었지만, 여전히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다이 역시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아도…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죠가 살아온 날들은 이어지니까,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분명히 남아있을 거야. 그 말에 죠는 어쩐지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K라는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첫 페이지의 몇 줄을 적어 내려갔다는 사실만이 전부인 누군가를. 그가 건넨 노트가 죠의 나날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언가가 남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말에 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영어 제목은 The Remains of the Days… 일본어로는 그날의 잔영日の名残り라고 번역이 되었거든. 그런데 한국에서는 제목이 남아있는 나날이라고 번역이 됐대.”

 

잘못된 번역이라고 여러 가지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결국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결국 결국에는 그날이 남긴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니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다. 다리를 쭉 뻗고, 느긋하게 쉬는 거지. 저녁이 제일 좋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 부분을 가장 좋아해.

 

“저도 좋은 것 같아요.”

“그치? 저녁은 그날이 어떤 하루였는지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냥 쉴 수도 있고, 그렇게 덧붙이며 유다이는 웃었다. 그러니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ー

 

“오늘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는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실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만큼은 죠에게서 2년이란 시간이 사라진 적이 없는 것 같았고, 코가 유다이도 일본을 떠난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 유다이의 차가 결국 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아, 내 원고 받았다고 했나? 집에서 읽어봐.”

 

유다이는 웃으며 죠가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차에서 내리는 죠에게 유다이는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오늘 재밌었어. 또 봐またね.”

 

내일이면 유다이와 나눈 대화를 전부 잊어버릴 것이다. 일기장에 몇 개의 자음과 몇 개의 모음으로만 남아 건조하게 죠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유다이와의 또 다른 헤어짐이었다.

 

“네, 또 뵐게요.”

 

하지만 오늘이 내일로 이어질 것처럼 인사를 했다. 남아있는 나날이 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아, 맞다. 라인 다시 추가해 줘.”

 

다시 가입했거든. 유다이는 몸을 기울여 조수석의 창 쪽으로 제 휴대폰의 QR코드를 보여주었다. 죠는 라인을 열어 코드를 스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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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ga Yu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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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아사쿠라 죠는 샤워를 끝마치고 젖은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일기장을 펼쳐둔 채였다. 내일의 자신을 위해 적어야 할 말이 많았다. 얼마나 자세히? 어제의 일기를 참고하려 다시 읽어보자 최대한 자세히 적어두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오전에 진료를 받은 일부터 다시 오늘의 일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후마와 점심을 먹은 일, 다음번에는 제가 꼭 밥을 사겠다는 다짐까지 확실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이와의 재회에 대해 써 내려갈 때였다.

 

오후에는 출판사에서 이마이今井 작가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마이 작가님은 유다이상

 

거기까지 쓴 죠는 일기를 쓰던 펜을 멈췄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코가 유다이의 책을 읽었다. 마지막 몇 페이지가 사라진 탓에 가방을 뒤지다 우선 씻기로 했던 것이었지만. 욕조에 앉아서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해가 지지 않는 세계에서 태양을 찾아 떠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아직 알 수 없는 결말에 대해서.

 

마침내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의 구슬은 점점 높게 오르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산은 태양이 점점 작아져 사라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태양은 작아지길 멈췄다. 마침내 하늘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을 때, 더 이상 어둠은 없었다. “바쿠, 우리가 해냈어!” 산은 바쿠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태양이 내리쬐는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이 세계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메마른 산과 숲이 푸르게 우거지기 시작했고, 얼어붙은 시냇물은 경쾌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

“산,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야.” “바쿠, 그럼 너는 어디로 가?” 자신을 부르는 바쿠의 목소리에 그렇게 되물었지만, 바쿠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우리 마을에서 같이 지내자.” 산은 이제 더 이상 얼어붙지도, 어둠 속에 남겨지지도 않았을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바쿠를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게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 아닌 것처럼. “산, 네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네가 출발했던 곳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바쿠를 바라보며 물었다. (…)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때마다, 하나둘씩 잊은 거야. 원래 세상에 대한 걸.” 하지만 산은 이 세계를 몇 번이고 모험했다는 바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 속을 몇 번이고 헤매며 태양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태양에 대한 기억마저도 잊어버리면 이 세계는 다시 끝없는 어둠 속에 얼어붙게 되고,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이 세계에 갇혀버리는 거야.” 바쿠는 지금이 바로 산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산에게는 이곳이 현실이었다. (…)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너를 잊을까?” 어디로 돌아가는지, 다시 바쿠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잊어도 괜찮아. 나는,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네 곁에 있을 거야.” 그 말에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양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밝아서 빛이 주위의 모든 것을 삼킬 것만 같았다. 그리고ー

 

아사쿠라 손에 들린 원고는 거기서 끝이었다. 회의실에서 가방에 넣은 뒤 집에 올 때까지 열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인쇄할 때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쿠는 또다시 잊히는 걸까? 아사쿠라 죠는 바쿠가 되고 싶다던 유다이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한 그의 말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유다이와는 이번이 졸업식 이후로 첫 번째 재회였다. 모든 걸 알면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아사쿠라 죠가 아사쿠라 죠가 아니라면, 그를 지켜보는 누군가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아사쿠라 죠는 이마이 작가님은 유다이상, 거기까지 쓴 자신의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 일기장의 첫 번째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아사쿠라 죠의 기억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리셋된다.
마지막 기억은 202○년에 멈춰있다.
이 일기는 아사쿠라 죠가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 아래 작게 적힌 all my love, K. 사랑을 담아ー라니 낯부끄러운 표현이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찾아내지도 못할 위치에 절묘하게 적힌 누군가의 글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잠이 들어 내일 일어나면 오늘 있었던 일을 다 잊을 것이다. 내일이면 이 몇 개의 단어를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기를 보면서 여전히 사실인지 아닌지 어제의 내가 쓴 의미를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채로, 다시 질문 사이를 헤맬 것이다. 아사쿠라 죠는 이마이 작가님은 유다이상,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몇 글자를 보이지 않도록 지워버렸다. 완전히, 그 내용도 짐작할 수 없도록. 그리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21:19] 책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메시지는 순식간에 기독既読으로 바뀌었다. 입력 중이 몇 번이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도착한 것은 답장이 아니라 라인 전화였다. 전화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죠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락을 눌렀다.

 

“여보세요?”

“응. 묻고 싶은 게 뭐야?”

“저… 몇 장이 누락된 건지, 결말을 알 수가 없어서요…”

 

그래? 어디까지 읽었어? 그 말에 죠는 마지막 문장 몇 개를 읽기 시작했다. 잊어도 괜찮아. 나는,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네 곁에 있을 거야… 그 문장에서 죠는 목이 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언제든, 곁에. 부사副詞라는 게 원래 그렇게나 무거운 말이었던가?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침묵이었다.

 

“거의 끝이구나.”

 

유다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산은 어떻게 되나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바쿠를 잊나요?”

“응.”

 

돌아온 답은 너무 간결했다. 너무 간결해서 오히려 담담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동문학이라고 하더니… 주인공들이 영영 헤어져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도 못해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바쿠를 잊은 채로?”

 

다시 들려온 , 그 짧은 대답 뒤로 한참 마가 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전화가 끊어졌거나 전파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유다이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데 엉켜 엉망이 된 순간이었다.

 

“잊은 거지 사라진 게 아니잖아. 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잊었다고 해도, 분명히 경험한 것들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반드시 물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내일이 되면 전부 잊는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아사쿠라 죠는 코가 유다이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저희 정말 졸업식 이후로 만난 적이 없나요…?”

 

잊어버린 것들의 잔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죠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유다이는 겨우 그 말을 내뱉은 것 같았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죠가 몰랐으면 좋겠어. 다 잊은 것처럼. 기억이 사라지면 남는 공간은 빈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공백이 아닌, 하얀색의 글자가 적힌 기억. 모든 걸 다 알게 된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유다이상이 그러셨잖아요. 저녁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시간이라고… 제가 이 일을 쓰지 않으면, 저는 내일 다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쓰지 않을게요.

 

무라타 후마는 아사쿠라 죠가 잊어버린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오늘은 알고 싶어요.

 

잊어버리는 기억, 그러나 흘러가는 세계.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²

 

그리고 다시 만나주세요, 저를…

 

내일이 되면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사쿠라 죠의 것이었다.

 

“…그래.”

 

마침내 유다이가 긍정했다. 영국에서 석사를 끝내고 반년 정도 더 거기에 있었는데… 결국 일본으로 돌아오기로 했어. 그때쯤 죠의 졸업식이 있었고, 죠를 놀라게 해 주려고,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시간을 거슬러 아사쿠라 죠의 졸업식 날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저녁은 아직 끝이 아니다.³

 

길고 긴 밤이 될 것만 같았다.▪︎

 

 

 

 

 

 

 

 

 

 

終わり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¹ 『日の名残り그날의 잔영』, 가즈오 이시구로의 번역
²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³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김남주 ー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해설

첫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