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의 밤

・고증 오류 多

 

  

 

 

(O)

 

최근 모델스닷컴에서 선정한 올해의 모델 남자 부문의 후보였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사실 작년에도 노미된 적 있는데, 올해는 reader’s choice였어요. 밥 먹던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한 번 겪어서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새롭게 기쁘더라고요.
늘 새롭게 기뻐한다는 말에서 어떤 태도로 이 직업을 대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마음가짐인가요?
일이니까 해야지 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어요. 좋아하는 일이잖아요. 매 순간에 완벽한 결과를 내려고 열중하다 보면 그 과정이 곧 행복이 돼요.
모델이라는 직업은 늘 거절과 함께하기 때문에 멘탈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나요?
사실 저는 제 자신을 굉장히 채찍질하는 편이에요. 나태해지면 안 되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놀기 위해 이 일을 선택한 건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프로답지 않은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직업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이다 보니 제가 즐기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 버려요. 제 마음이 실리지 않은 퍼포먼스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전부 받아들이려고 해요. 꼭 저를 몰아세워야만 좋은 결과가 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적당히 휴식과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슬럼프나 번아웃을 대처하는 본인만의 노하우도 있을까요?
아직은 단 한 순간도 느껴본 적이 없네요. (웃음)

 

 

거짓말은 아니다. 슬럼프라기엔 부진했던 적이 없고 번아웃이라기엔 지친 적이 없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비유적인 표현으로는 몸이 갈려 나가는 직업이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뒤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따른 적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즐거움이 먼저였다. 정상을 목표로 삼았고 높이 올라간다는 감각이 주는 희열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나날들이었다. 쇼장에 서며 알게 된 건 자신이 무대에 서는 걸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직업을 가지려고 욕망한 적이 없다는 게 신기했을 만큼.

더 이상 국내에선 올라갈 곳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꼈지만, 쇼에 설 때의 두근거림은 여전히 기분 좋았기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 없다.

 

 

촬영에 참여한 사진작가와 스태프, 지면에 실릴 인터뷰를 맡은 에디터에게도 인사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다. 케이가 패션 업계에 뛰어들지 않았던 고교 시절에도 얼핏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었던 대중적인 패션지의 커버 촬영이었다. 지면 촬영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파급력을 미치지 못하는데도 몇십 년간 판매 부수 일위를 유지하는 대표적이고 영향력 있는 잡지이지만, 케이에게는 가장 유명한 패션지라는 사실보다도 다른 쪽으로 인상 깊은 잡지였다.

유다이가 첫 에이전시와 계약하기 전 약속 시간이 삼십 분 넘도록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던 담당자를 기다리던 때, 그가 계약서 초안과 함께 팔에 끼고 들어온 잡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늦었다는 사과보다도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는 말로 입을 뗐던 그 담당자가 책상 위에 착 소리가 나도록 잡지를 올려두고는 표지를 가리키며, 뭐라고 했더라.

“우린 너의 가능성을 봤다. 언젠가는 여기 표지 모델에 실릴 수 있을 만큼 널 키워줄 수 있어.”

계약 전엔 허황된 기대를 밀어 넣도록 입술에 꿀 바른말을 잘도 한다지만 기껏해야 모델 아카데미에서 데려온 수강생을 대하는 거치고는 과분한 말이었다. 발에 챌 만큼 많은 게 모델이 되고 싶어 하는 애들이었으니까. 더구나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에이전시의 계약 담당자였다. 유다이가 막 모델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 다른 수강생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데뷔한 모델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보석을 발굴해내는 걸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감격해 당장 도장을 찍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유다이는 생각했지만.

“전 제가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그게 누군가 저를 키워주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야망이었을까? 혹은 오만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다이에겐 욕심이라기보다도 그게 당연했다. 언제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임해왔다. 각오라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사는 법은 모른다.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고, 그러다 새로이 시작하려 한 곳이 런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트랙이라고 한 대도 마음가짐만은 항상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유다이에게는 아직 업계 물정을 잘 모르던 시기의 호승심이라는 것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기도 했었던 모양이지만, 그게 과했다거나 부끄럽다는 후회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누가 키워줘서 최고가 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여겼다. 최고가 된다는 게 마네킹처럼 수동적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표상 같은 거라면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건 의미 없으니까. 말도 안 되게 싫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유다이는 끝이 어디가 되든, 영원히 계단을 오를 자신이 있었다. 열정과 끈기는 그의 장기고 지는 것은 무엇보다 싫었으니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남자는 잠깐 침묵하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고가 되고 싶다니 킹이 좋겠어.”

그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선다는 걸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코가 유다이의 예명이 케이가 된 이유다.

 

 

누군가는 이례적으로 빠른 기간이라고 했다. 사실 케이 본인에게도 긴 시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으니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그렇게 평가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올라가는 속도가 빠른 거였겠지만 길이 짧다고 느꼈다. 아직 올라간다는 감각을 더 음미하고 싶었다. 쟁취한다는 감각에는 중독성이 있었고, 계속해서 갈망하게 됐다.

트집 잡고 싶은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모델보다 셀럽에 가까운 유명세라고도 했다. 더 이상 이름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라거나 루키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게 된 때였다. 일본을 넘어서 해외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 패션지의 표지 모델로 제안이 들어왔다. 계약을 맺은 후 쭉 케이의 전담이었던 담당자가 놀라서 단번에 전화를 걸어올 정도였다. 두 사람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는 그 패션지의 커버를 따내는 것이니 단순히 저명한 패션지 하나를 뚫었다는 것 말고도 의미가 남달랐다. 그때 케이는 주먹을 꽉 주며 됐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잡지가 횟수를 거듭해 케이의 커버로 발행될 예정이다. 표지와 수십 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해 그의 화보와 인터뷰가 실리게 되어 있었다.

아주 고된 일정은 아니다. 이른 시간부터 준비한 거치고는 오늘 촬영이 예상보다 늦게 끝나긴 했지만 이후로는 잡힌 스케줄도 없고, 집으로 돌아가 메이크업을 지운 뒤 쉬면 그만인 모처럼의 여유로운 날이다. 아, 저녁엔 지인들과 식사 약속을 잡아 두었던 것도 같고.

아직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지 않았다기엔 이런 여유로운 날들이 그리 잦지 않다. 유다이가 일 욕심이 많은 탓도 없지야 않겠으나 사실 남자 모델이라는 직업은 연초엔 S/S 시즌으로, 중순이 넘어가는 시점엔 F/W 시즌이라는 가장 큰 업계의 행사가 존재하는 데다가 그사이에도 오트 쿠튀르와 캡슐 컬렉션이 있기도 했다. 많은 브랜드가 프레젠테이션으로 갈음한다지만 크루즈나 리조트 컬렉션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화보나 광고 촬영이 있으므로 뚜렷한 휴식기라는 게 없이 연중무휴로 일감이 들어온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요 며칠이 여유로운 일정일 뿐 항상 한가한 게 아니다. 며칠 전만 해도 LA에서 열린 프라이빗 쇼에 참석했다가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귀국했다. 그런데도 왜 눅눅하게 침습한, 이 심심하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한가했다면 스스로도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에도 마찬가지라 괴로웠다. 사랑니를 오랫동안 방치해 잇몸이 곪아버리기 시작한 것처럼 오래 시달려온 감각이다. 눈 떠보면 오토바이에 실려 쇼장에서 쇼장으로 배달되거나 정신 차려보면 뉴욕에서 런던으로 도착해있고, 가끔은 쇼장의 로고를 보고서 오늘이 무슨 요일이라는 걸 알게 될 만큼 바쁜데도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이 허전한 감각은 대체 왜 사라지지 않는 건지. 그런 알 수 없는 감각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 몇 시즌 전부터는 일부러 주변에서 만류할 정도로 빼곡한 스케줄로 몸을 혹사시킨 적도 있었다. 여기서 더 바빠지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기대로 한 행동이었다. 스스로가 실험 대상이 된 그 실험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 그 기대는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한 느낌만이 그를 조롱하듯 남아 있었지만.

그러니까 슬럼프나 번아웃이 아니다. 부진했던 적도, 지친 적도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생기가 돌았다면 런웨이에서는 호흡을 했다. 살아 숨 쉬게 하는 아가미였다. 케이가 느끼는 건 오히려… 가장 가까운 것을 찾자면 외로움일 것이다. 아니면 권태거나. 입 안에서 그 단어를 굴려본 케이가 웃었다. 외로움과 권태라니.

외로움이야 그렇다 치자. 경쟁자가 없는 일본 땅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쓸쓸한 일이 맞다. 하지만 권태라는 건, 글쎄. 언제나 일이라는 느낌에 직업적 자아를 분리하기 보다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던 케이에게 권태라니? 이보다도 안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장애물이 될 줄은 몰랐다. 사소한 돌부리라고 생각했다. 매너리즘 같은 말을 가까이 여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면, 초심이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으로 해소될 가벼운 문제가 아닌데도.

그러고 보니 최근엔 모델 아카데미에 가 보지 못했다. 케이가 나온 곳은 도쿄에 위치한 모델 아카데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현역은 아니지만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대선배들이 합심해 실력 있는 모델들을 기본기부터 완벽하게 키워내겠다며 처음엔 재능기부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것이 규모가 커져 지금이었다. 케이와 마찬가지로 현직에 있는 대부분의 모델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가장 규모가 큰 데다가 에이전시와 연결된 곳도 아니고, 직원들 대다수가 이 업계의 고인물이다보니 매일 같이 원석을 찾으려는 에이전시 관계자들이 드나들며 눈여겨보고는 했다. 케이도 그렇게 계약한 케이스였다. 오래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갈 때가 됐다.

케이는 명실상부 이 업계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인물이지만 은사나 다름없는 대선배님들을 향한 존경과 성의 표시로 가끔 얼굴을 비추었다. 바쁜 시간을 내서라도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준다는 좋은 선배를 표방하기도 했지만, 마음은 염불보다도 잿밥에 가 있다고나 할까. 겸사겸사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신인이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보기도 하는 것이 그 예였다. 하지만 어른들 말에는 틀린 거 하나도 없다고, 잿밥에 관심을 두고 공양을 드릴 바에야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다. 치고 올라올 만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제로. 뭐랄까, 잠재력이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도 없고 빼어난 실력도 없었다. 피지컬이야 고만고만하다면 그 한 끗을 가르는 것은 흔히는 말하는 끼라고 하는 것일진대, 안타깝게도 그 재능은 몇 해 일찍 태어난 케이가 삼신할미의 품에서 던져질 때 모두 갖고 와 버린 모양이다. 케이의 장점이라면 신기할 정도로 특징을 잘 캐치해내는 예리한 눈을 가져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거였고, 그건 이 업계에서 성공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는데… 이렇게 말하면 몹시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애석하게도 위기감이 생기지 않았다.

이미 데뷔해 매스컴의 집중을 받고 있다고 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델 아카데미를 이런 데 드나들 시간이 있느냔 애정 어린 걱정을 들어가면서도 뺀질나게 드나드는 것이고. 그게 문제다. 위기감이 생기지 않는 거. 몸은 바쁘지만 정신은 권태롭다고 느끼는 이유. 좋아하는 일인데도 이 상황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라이벌이 부재하다니. 트랙 양옆에 아무도 없고 나만 달려야 한다니? 혼자서 독주하는 건, 물론 어느 상황이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불안감도 없는 건 너무하지 않아? 이런 건 딱 질색인데 말이지. 재미없다, 뭐든지. 따분해. 쇼에 선 순간과 카메라 앞을 벗어나면 모든 게 지루해진다.

 

“후마, 지난 주말 릴리즈된 광고 비하인드 컨텐츠 뜨는 게 오늘이던가?”

 

전방을 주시하던 후마가 흘끔,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케이를 보며 예사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다음 주라고 들었네요. 옆머리를 만지작대던 케이가 그렇단 말이지… 하며 옆자리에 엎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하던 중에 온 연락에 순차적으로 답장을 하고 최근 공개된 작업들의 반응을 찾아봤다. 반응은 꽤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다고 말하겠지만, 케이는 늘 반응에 너무 휩쓸리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세상엔 휩쓸리면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고 겉으로 보여지는 게 중요한 이 직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들의 말에 너무 귀 기울이게 되면 정말로 집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악평에 너무 울적하면 안 되는 것처럼 호평에 너무 들떠버릴 필요도 없었다. 반쯤은 선천적인 성향이었고, 나머지 반은 후천적으로 갈고 닦은 것이다. 숨 쉬듯이 들어야 하는 평가에 익숙해지게 된 것도 일종의 직업병일 것이다.

주말 릴리즈된 광고를 두세 번 더 꼼꼼히 돌려본 케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을 나왔다. 이미 완성된 작업물이라 흠집을 찾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으나 모니터링을 꼼꼼히 한다는 건 좋은 소양이다. 발전은 단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하게 야후를 열어 케이를 검색했다. 케이는 가끔, 사실 가끔이라기엔 꽤 짧은 텀으로 자기 이름을 검색해봤다. 최근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린 사복의 스타일링을 분석하거나 릴리즈된 광고 혹은 잡지, 행사 사진을 업데이트하는 패션 블로그를 보는 건 데뷔하고 유명세를 쌓은 지금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비슷비슷한 기사 내용과 다르게 사적인 감상이 붙는 경우가 꽤 있어 더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더 이상 반응을 찾아보며 일희일비하지 않기 때문도 있고 이 업계에 발을 들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던 짧은 머리의 마라톤 선수였던 시절에도 제법 겉치레에 신경 썼던 케이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다름없는 취미였다는 이유 때문도 있을 거다. 대중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반응이 궁금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일 테고.

이번에 케이는 뉴스 탭으로 들어가 스크롤을 죽죽 내리기 시작했다. 몇 개는 매니지먼트 쪽에서 뿌린 기사였으니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역시…

 

“거슬리네.”
“네? 뭐라구요?”
“아니. 후마, 있잖아. 그 녀석 말이야.”
“네.”
“이봐. 누군지 알고 네라고 하는 거야?”
“대충은요.”

 

그러니까.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는데도 후마가 곧잘 알아들을 정도란 말이지. 케이는 시선을 내려 액정에 뜬 기사의 제목을 봤다. 아사쿠라 죠. 케이의 이름 옆에 나란히 있는 낯익은 이름이다. 괴물 같은 신인이라느니, 신인 시절의 케이가 떠오르는 루키라느니 하는 기사들이 드문드문 올라와 있었다. 전엔 인터뷰에서 케이를 롤모델로 꼽았던 적도 있었던 듯하다. 사실 케이를 롤모델로 꼽은 신인 남자 모델들이라면 발에 챌 정도로 많지만, 케이가 익숙하다고 생각할 정도라면 몇 번 엮여서 기사가 난 적 있다는 뜻이다. 아마 그때 화보 같은 것도 본 적 있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기사에 실린 사진이 전부였겠지만 나쁘지 않다고 느꼈던 것도 같고. 실력도 없으면서 롤모델이랍시고 케이의 이름만 주야장천 언급해 바이럴이라도 노리려는 것보다는 기본기라도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지는 꽤 오래됐다. 얘도 아마 그 케이스일 테지. 견적이 순식간에 뽑힌다. 그만큼 흔하다는 얘기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케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드물지만. 오랫동안이라는 전제가 붙으면 더더욱 그랬다. 과연 얘는 어떻게 될까.

 

“야후에 또 이름 검색했죠?”
“나 참.”

 

붙어있던 시간이 오래되었다 보니 속일 새도 없이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게 오랜 인연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요새 자주 보이는 친구잖아요. 케이 씨와 자주 엮여서 언플하는 모양이고. 신경 쓰여서 말하신 거죠?”
“끄응…”

 

후마가 주시하고 있을 정도란 말이지. 신경이 쓰인다니. 그건 너무 의식하는 것 같고? 막상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얜 너무 신인 축이다. 케이는, 지금 패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길에서 붙잡고 물어본다면 열에 백 정도 튀어나오는 업계 탑이다. 체급부터가 다르다.

신경이 쓰인다기엔 너무나 미묘한 돌부리다. 발에 걸릴 만큼은 안 된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소속은 아니지?”
“아니죠. 데뷔한 지 이제 막… 이년은 됐으려나? 안 됐을 거예요. 최근에 뜨는 친구고… 그런데 본인이 엄청 존경해서 자주 언급하는 모양이기도 하고, 언플 내용도 그렇게 지저분하진 않아서 일단 내버려 두고 있긴 한데. 많이 신경 쓰여요? 그럼 홍보팀에서 대응하고요.”
“뭐야, 그 정도까진 아니야. 후마. 나 위기감 들지는 않는데? 하하하.”

 

케이는 능청스레 웃어넘기며 다시 액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후마는 일단은 알겠다며 때마침 바뀐 좌회전 신호에 핸들을 돌리며 운전에 집중했다.

케이는 무표정으로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아사쿠라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명백히 어려 보이는 얼굴. 그런데도 얼핏 보이는 선이 뚜렷하다. 볼살만 좀 빠진다면 굉장한 마스크가 될 거다. 젖살이라 빠지면 귀여운 맛은 사라지겠지만. 케이는 자동 반사와도 같은 분석을 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위기감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후마까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수십 개의 매트리스 아래 깔린 완두콩 때문에 잠을 설친 어느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정말 사소한 것인데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해서… 그거뿐.

 

 

 

 

 

 

……그거뿐이라고 하고 싶지만, 한 번 인식하고 나자 존재감이 무럭무럭 자라나버려 아사쿠라의 이름은 진작 거슬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자주 눈에 밟혔다.

신인치고는 여기저기 이름이 꽤 오르내리는 게 신기하다고 여겼는데, 누군가 전광판에 걸린 캠페인 일부를 찍어 올린 게 화제가 됐다는 모양이다. 그럴만한 얼굴이기는 하다. 찍었다는 촬영이 대개 커머셜 쪽이라 놀랍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하이패션도 노리기 시작하는 모양인지 국내 브랜드 위주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사쿠라는 신선한 얼굴이었고, 이곳은 언제나 신선한 얼굴을 환영한다. 아직 업계에 이름을 알리는 중이라지만 왜 그간 몰랐을까 싶은 얼굴이었고.

자리를 확실히 잡으려면 팡 터지는 한 방 정도는 더 필요하다는 게 케이의 생각이다. 조만간 큰 규모의 쇼에 얼굴을 비추는 게 좋을 텐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만, 해외에서는 첫 시즌의 성과가 승승장구로 이어지기 쉬웠다. 남성보다는 여성 모델의 수요도 높고 페이가 센 것도 맞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옆 나라에선 남자 모델 대다수가 다른 일과 병행해야 생계유지가 된다고도 하던데 일본은 그에 비해 패션 산업이 커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델이라는 게 끊임없이 뉴 페이스가 들어오는 곳이니 굳이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에스컬레이터를, 그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좋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모든 경우가 그와 같을 수는 없지만, 케이는 그것이 가능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는 재능도 실력도 상황도 운도 모두 따랐던 경우이기도 했다.

에이전시나 본인이 할 일이므로 전략의 보충과는 별개로 케이의 눈에는 하이패션보다 커머셜이 더 잘 맞아 보이긴 했다. 하이패션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키도 좀 작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표정을 잘 쓴다. 다 좋은데 이목구비가 너무 가지런하다. 시선이 자꾸 그리로 쏠린다는 게 문제다. 딱히 장점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이것도 장점이긴 하다. 잘생겼다는 건. 커머셜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다.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지만 표정을 괜찮게 쓰는 걸로 봐선 연기로 진출해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고.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도 샛별처럼 떠오르는 신인이었던 적의 케이가 섰던 쇼의 오프닝을 맡게 되었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던 때, 케이는 참지 못하고 유튜브에서 그 쇼의 풀버전을 틀었다. 런웨이를 걸으며 짓는 무표정한 얼굴을 포착한 사진이란 익숙할 정도로 많이 보았으나 케이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균형을 깨는 도톰한 입술의 꽉 다물린 모양새나 측면으로 돌았을 때 보이는 의외로 선이 굵은 하악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명백히 재능의 영역인, 사기적인 것에 가까운 프로포션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무어라 코멘트하고 싶지만 어렴풋한 느낌에 가까우니 워킹에 대한 것은 넘어가자면 그다음은…

사방이 캄캄하고 조명만이 비추는 런웨이, 작은 실수도 커다란 결함으로 보이게 하는 곳에서 모델의 덕목인 무표정을 망치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하게,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리는 악바리 근성이 보이는 눈이냐 하면. 인상 깊다는 말이 ‘가장 눈에 들어와 발바닥에 가시처럼 박혀있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면 케이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도 걔의…

 

“리허설하러 이동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최종 리허설이 아니기에 옷은 아까 입어보고 다시 벗어 둔 상태. 헤어나 메이크업은 끝난 지 오래라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며 여유작작한 행태를 부렸던 것이다.

런웨이 뒤편으로 이동해 순번과 그의 이름이 적힌 바닥 위에 섰다. 모델들이 전부 순서에 맞춰 서게 되면 무대 연출 디렉터가 나와 동선과 주의할 점을 설명해줄 것이다. 소란스러운 백스테이지를 한 번 훑은 케이가 슈 커버를 확인하려는 찰나, 누군가 시야 안으로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코가 유다이 선배님.”

 

사실 인기척을 눈치 못 챘다. 예명도 아니고 본명으로 그를 불렀다는 사실에 한발 늦게 놀란 건 그 때문이다.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케이를 보고 동그래지는 눈에 인사보다도 사과가 먼저일까 싶어 얼른 손을 들어 만류했다.

 

“저… 아사쿠라 죠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오래전부터 팬이었습니다.”

 

마치 아주 오래 그 말을 곱씹다가 수백 번은 더 연습한 것과 같이, 잔뜩 긴장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말이 간지럽히듯 퍼지는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귓가에 겨우 닿았다.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악수…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얼굴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창백했다.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최선을 다해 미소 짓는 얼굴은 오히려 무해한 것에 가까워 귀엽다는 생각이 들 뻔도 했고.

 

“…그래. 아사쿠라 군. 나도 만나서 반가워.”

 

흰 얼굴은 말간데다가 케이가 내민 손을 마주 잡는 순간 그 위로 퍼지는 웃음엔 경쟁심이나 질투 같은 게 하나도 없고 오로지 동경과 존경뿐이라서.

그러니까 케이는 그 눈이 인상 깊었던 것이다. 지금 이 남자에게선 보이지 않는 그 타오르는 눈이.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 쟁취해낸다고 여기고, 케이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곤 처음 봤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위기감일지도 모른다고. 하하. 케이가 위기감이라고? 그것도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애송이한테? 말도 안 되잖아. 그런 건.

 

“정말로, 마음을 다해 존경하고 있습니다….”

 

괜히 입가를 매만지는 척 손바닥으로 하관을 가렸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전복의 밤

 

 

 

정규 컬렉션은 아니고, 곧 있을 시즌에 앞서 크루즈 쇼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보통 메인쇼가 끝나고 세 달 뒤 진행하는 리조트나 크루즈의 경우 쇼 형태보다는 프레젠테이션으로 간단히 진행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해당 브랜드에서는 매년 5월마다 전 세계를 돌면서 크루즈 쇼를 진행했다.

케이는 지난 시즌의 밀라노에서도 해당 브랜드의 런웨이에 섰기에 이번 크루즈 쇼가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다는 소식에 캐스팅 연락을 받았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해당 쇼에서 케이는 이탈리아인 여성 모델과 함께 클로징을 맡게 되어 있었고,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자연스레 백스테이지 모니터를 통해 중간에 배치된 아사쿠라의 워킹도 전부 보았다.
역시 나쁘지 않은 워킹이다. 깔끔하다. 나쁘지 않은 의미로 거슬리는 것이 몇 가지 있고, 또 고쳐주고 싶은 것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쇼에 선 경험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큼 괜찮다.

역시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몇 년 후가 기대될 만했다.

영상으로 보기만 할 때보다도, 백스테이지 모니터를 통해 본 워킹과 얼굴이 더 강렬했다. 인상 깊었다. 롤모델로 그의 이름을 내걸어도 그렇게 불쾌하지 않은 느낌도. 후배 모델을 기억하게 된다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는 더더욱 낯설다. 거슬린다는 감각은 확실히 어색한 느낌이다. 손톱 옆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처럼. 혹은 수십 개의 매트리스 아래에 깔린 완두콩을 의식하듯.

다음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건 정규 컬렉션 기간이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빠르면 밀라노에서, 적어도 도쿄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 마주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지 같은 쇼에 서더라도 바쁘면 인사나 겨우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도 그런데 데뷔한 지 이제 일 년을 넘겼으니 케이가 얼마나 까마득한 선배겠는가? 지난번 손을 덜덜 떨다시피 하면서 깍듯하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부터가 그 애가 케이를 얼마나 존경하고 하늘 같은 선배 취급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그에게도 아사쿠라 같은 신인들은 정말 햇병아리처럼 보였다. 처음에야 대범하게 말 걸어온다 쳐도 매번 그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6월의 남성복 컬렉션을 위해 곧장 출국했다가 계속해서 일이 생겨 몇 달 내내 유럽과 북미를 순회했다. 몇 달 만에 일본으로 귀국한 참이었다. 귀국하고서도 곧장 도쿄 패션 위크가 있었던 탓에 여기저기 피팅에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

중간 피팅을 끝냈다. 피팅하며 스냅까지 찍었다. 크게 수선할 만한 부분은 없어 다음번엔 곧장 쇼장으로 오면 될 것 같다는 말과 함께였다. 활짝 웃으며 관계자들에게 인사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가 복도 한 켠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델 사이에서 아사쿠라를 발견했다. 구겨지듯 몸을 접고 있는 상태로. 익숙한 얼굴이기에 잠시 멈칫해있던 찰나 저쪽에서도 케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사쿠라는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케이를 향해 다가왔다.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케이가 조금 당황하거나 말거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온다.

 

“코가 유다이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G 크루즈 쇼 백스테이지에서 인사드렸던 아사쿠라 죠입니다.”

 

너무 극진하게 굴잖아… 군기라도 잡는 줄 알겠네. 와중에 너무 복도 한복판이라 시선이 집중되기에 손짓하며 구석으로 갔다.

 

“어, 그래. 아사쿠라 군. 지난번에 봤었지.”
“…코가 유다이 선배님께서 기억해주실 줄은,”
“아아. 나 꽤 기억력 나쁘지 않은 편이라. 근데 너무 딱딱하게 부를 필요 없어. 선배라고만 해도 충분하거든.”
“유다이 상.”

 

어라. 케이는 미묘한 얼굴로 쭈뼛쭈뼛 요비스테를 시도하는 남자를 본다. 너무 가까운 호칭이지 않나? 유다이의 활동명은 명백히 존재한다. 킹에서 따온 케이라는 알파벳으로.

 

“…아니. 케이 선배가 낫겠어.”
“…그럼 저도 편하게 죠라고 불러주셔도, 아니 그렇게 불러주시면…”
“…….”
“부탁드립니다.”

 

귓가가 붉었다. 케이가 그 귀를 보며 생각한 것은, 엄청 존경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같은 거. 되게 티가 나네. 투명한 건지 컵에 따라진 물이 넘쳐서 겉으로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때부터 케이는 경계심이 조금 낮아졌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내보이는 상대는 도무지 싫어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그것이 우정이든 애정이든 동경이든 존경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항상 그래왔다.

하나도 숨기지 못하다니. 역시 어리다. 뭐야. 완전히……. 케이는 애송이라는 단어 대신 넣을 만한 걸 고민했다. 어린애. 좋고 싫은 게 분명한 순수한 존재들. 그거 같다.

 

“좋아. 죠 군은 계속 기다리던 중이었나? 기다린 지 얼마나 됐어?”
“세 시간쯤 됐습니다.”

 

어쩐지 다들 그 좁은 대기 의자 위에서 구겨져 있더라니. 그럴만했다 싶었다. 모델은 몸이 생명이고 직업이고 도구인데 말이야. 항상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대우가 형편없다. 캐스팅을 서너 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예사고 피팅 중에도 딜레이되어 뒷 순번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예사다. 가끔은 이 업계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연료로 끊임없이 착취하며 굴러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게 업계 탑이라는 위치에 올라 극진하게 모셔지는 케이의 현재는 아니었지만, 겪어온 것이 있었고 같은 업계에 몸담은 이상 신인 모델들이 겪는 대우는 늘 비슷비슷해서 더 듣지 않아도 전후 사정이야 뻔했다. 또 꼭두새벽부터 콜타임이랍시고 전달해놓고 온종일 기다리게 했겠지. 그러자 그는 문득 자신을 존경해 마지않는 이 신인 모델이 조금은 가엾게 느껴지기도 해서,

 

“커피 마시나? 한 잔 사줄게.”

 

하고 제안했다. 죠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에게 어느 정도 남았겠느냐 물어보았더니 열 명은 더 남았다고, 빨라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내외라는 답이 돌아왔다. 좋아. 커피 마시기엔 널널한 시간이잖아. 널널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초코라떼? 마지데? 곧 피팅인데 그걸 먹겠다고?”
“하지만 저… 쓴 건 마시지 못해서요.”
“그럼 티를 마셔야지, 이 녀석아.”

 

어이가 없어 황당해하면서도 카드를 내미는 죠의 손을 밀어내고 결제하는 손은 재빨랐다. 테이블에 앉기가 무섭게 나온 음료를 다시 들고 오면서도 놀라서 헛웃음이 났다. 살다 살다 피팅 전에 초코라떼 마신다는 모델은 또 처음 봤다… 정말 어린애 입맛이다. 얼굴도 앳된 편이기는 하다만.

 

“몇 살이지? 열아홉? 스무 살?”
“스무 살입니다.”
“어리다 어려.”

 

다 늙은 노인처럼 말하며 케이는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식도를 넘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마른 모델 퇴출법이다 뭐다 해서 요즘 같은 때엔 백스테이지 케이터링이 꽤 잘 나오는 편이지만, 피팅 장엔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본사에 딸린 카페테리아인데 어지간하면 뭔가를 챙겨 먹으려고 하지는 않는 편이다. 대기시간이 길다면 가끔 샐러드나 커피 한 잔 정도. 먹는대도 칼로리가 높지 않은 것 위주로 먹었고, 어지간하면 딜레이된대도 그냥 딜레이 되는 만큼 쫄쫄 굶었다. 이건 케이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모든 모델이 다 그럴 것이었다. 아마 얘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 직업의 숙명이나 마찬가지라,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데려온 케이에게 잘못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번 마셔볼래?”

 

잠시 머뭇대더니 “괜찮으시다면… 네.” 하기에 “아, 어차피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빨대 써.” 하고 입에 커피를 물려주었다. 망설이던 죠가 입술 끝으로 빨대를 살짝 물었다. 갈색 액체가 위로 역행한다. 입에 잠시 머금더니 곧장 목울대가 약하게 움직였다. 죠의 인상도 구겨졌다가 재빨리 펴졌다.

 

“…괜찮은 것 같아요.”

 

까마득한 선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인지 대답이 나온다. 괜찮긴. 얼굴 찌푸리는 거 다 봤다고. 케이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감쳐물었다.

 

“케이 선배도 드셔보실래요?”
“난 너무 단 건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뭐 좋아.”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좋아하는데도 참는 것에 가깝지만. 케이는 초코라떼를 한 번 쭉 빨았다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달아서 놀랐다. 좋아한다는 건 취소다. 너무 달잖아. 이렇게까지 단 건 별로다. 이런 걸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먹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커피 조금 마신다고 인상을 찌푸리지. 하여튼 정말 어린 애라니까…….

 

“…그리고, 저…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연락처를 받고 싶습니다.”
“그래? 좋아.”

 

케이가 너무 흔쾌히 승낙해선지 죠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게 좀 웃기고 얼빵해보이기도 해서 귀엽게 느껴졌다. 전화를 달라고 손을 내밀자 죠가 환하게 웃으며 케이의 손 위에 전화기를 올렸다. 또 이렇게 웃는 얼굴이다. 케이에게 악수를 청했을 때 환히 웃어버렸던 것처럼.

고분고분 전화번호를 누르고 돌려주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해.”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음료도 잘 마셨습니다.”
“슬슬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어? 기다려야지.”
“가시는 거 보고 올라가겠습니다.”
“고집은.”

 

하지만 케이는 순순히 선글라스를 끼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갈 때가 되긴 했다. 어린 애랑 대거리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창문을 내려 얼른 올라가라고 한 뒤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진동하는 차체. 창 바깥으로 팔을 흔든 뒤 창틀에 팔을 올렸다. 날렵하게 빠진 차량이 유연하게 기동한다. 멀어지는 와중 백미러로 슬쩍 본 죠는 차 뒤꽁무니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얼른 올라가라니까. 케이는 공손하다는 평 뒤에 고집이 세다는 감상을 추가했다.

 

 

 

 

하지만 연락처를 받아 가고도 처음 인사를 제외한다면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건 꽤 의외다. 그냥 단순히 연락처를 받아두고 싶었던 거였나.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케이가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니 이것도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짐작이 빗나갔을 뿐이다. 그냥 문득, 어디선가 툭 굴러온 것처럼 죠라는 아이가 떠오를 때가 있었는데 아마 쇼 당일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며칠 전 피팅을 전부 끝낸 상황이었고, 쇼장 컨셉은 의상을 보고서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당일에서야 제대로 봤다. 팔찌를 받고 백스테이지로 입장해서는 곧바로 메이크업을 받았다. 사실 메이크업이나 헤어를 받는 동안은 모델이 바쁘다기보다도 스태프들이 바쁜 거라 그동안 책을 읽기도 했고 SNS에 올릴 사진을 고르거나 다음 스케줄을 정리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다른 쇼가 있는 것도 아니니 메이크업해 주는 스태프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얌전히 화장 받을 뿐이었다. 사실상 백스테이지의, 그것도 쇼 시작 전의 모델에게 주어진 것은 대개 무한한 대기의 연속이므로 케이는 메이크업까지 끝낸 뒤 마련된 모델 라운지에 앉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안면 있는 사람들과 가벼운 얘기나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거울 앞을 차지하고 선 죠의 뒷모습은 왜 이렇게 잘 눈에 들어오는지 뒤를 돌아있는데도 단번에 죠라는 걸 알았다. 고작해야 두 번 본 게 전부였는데도.

거울 속으로 무척 집중한 얼굴이 보였다. 혼자 거울을 보고서 표정 연기며 탑 포즈를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부러라도 말을 걸지 말아야겠네, 하고 생각했다. 케이의 앞에서는 매일 같이 볼우물이 파이도록 웃고 있었던 얼굴이라 실제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잘 알고 있었다. 액정으로 자주 보았던 익숙한 얼굴. 처음엔 그 얼굴이 아닌 것이 오히려 낯설었지만 지금은 웃음기가 사라진 런웨이에서의 표정이 더욱 낯설다니.

잔뜩 몰입해 있잖아.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낚아채는 눈도 그렇고 백스테이지에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쉽게 집중할 수 없을 법도 한데 자기만의 세계에 홀로 유리되어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계속 집중하도록 놔두려 했는데 어느 순간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거울로 죠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뒷모습이 비친다. 죠가 순식간에 케이가 앉아있던 소파로 다가왔다. 눈이 잘 닦아둔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케이 선배님.”
“집중하고 있던데 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
“네. 전혀요.”
“그나저나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곤 사소한 신변 잡는 이야기들 하던 도중 리허설을 하기 위해 불려 나갔다. 신발까지 갈아신고 무대의 동선을 들으러 이동했다. 케이는 엔딩을 장식하는 모델이었으므로 죠와 순서는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앞서가는 까맣고 반질한 뒤통수가 보였다.

무대 연출 디렉터가 어디로 걷고 어디로 빠져야 하는지, 어떤 느낌으로 걸어야 하는지 전부 설명했다. 런웨이는 거의 400m에 달했는데, 보편적으로 패션위크에서 걷는 길이를 훨씬 상회하는 길이였다. 쇼장이 길다는 건 그만큼 오랫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격적으로 리허설을 시작하자 백스테이지 모니터와 현장의 객석 앞 열 곳곳에서 스태프들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했다. 긴 거리이니만큼 세 번의 리허설을 했는데, 와중에 런웨이가 일직선이 아니라 동선을 잘못 찾아가는 사람이 나오기도 해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최종 리허설 땐 모든 연출가와 디자이너들, 스태프 팀까지 전부 나와 지켜봤다. 케이 역시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백스테이지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리허설이 도중 부상자가 나오자 분위기가 첨예해졌다. 쇼에 서 본 경험이 적을수록 긴장으로 바짝 굳어있는 게 보였다.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분위기를 띄우려 디자이너가 격려의 말을 누차 던져야할 정도였다. 쇼 시간이 다가왔고, 이내 관객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무표정으로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프로답게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겠지만, 케이는 모처럼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죠의 워킹에선 기시감이 느껴진다. 기시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인 워킹을 할 수는 없다. 비슷한 동작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디테일을 뜯어보면 전부 다른 동작이다. 체형이 다르고 프로포션도 다르고 절대적인 팔다리의 길이, 보폭, 발의 크기, 고개를 쓰는 거며, 하다못해 숨을 쉬는 타이밍, 몸을 움직이는 리듬감까지 전부 다르니 하물며 워킹이야 얼마나 같을 수가 있겠냐고. 아카데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워킹을 짜 맞추고 사람을 욱여넣으려고 노력해봐도 개개인의 특색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걸음걸이다. 직립보행이란 인류의 진화역사를 담고 있으며 워킹도 그 일부일 뿐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같은 워킹이란 있을 수 없다고… 아무리 최신 워킹의 트렌드가 모델 개개인보다 옷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극단적으로 치닫는다지만 완벽하게 개성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케이의 생각이다. 하지만 죠의 워킹은…

생각이 다다르기 무섭게 큐 사인이 떨어지고, 무선 헤드셋을 낀 스태프가 케이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한다. 그의 차례. 클로징이다.

잡생각을 깨끗히 비워낸다. 정면의 앵글에 잡히는 모습은 굳이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명백하게 그의 머릿속에서 구현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완벽히 몰입하기 위해 수반되는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잡티가 섞이는 건 싫다. 브랜드의 거대한 로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케이의 얼굴 위로 프로의 표정이 깔린다. 탑 존에 섰을 때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관객들이 오로지 그에게 집중한다는 짜릿함, 포즈를 취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과 발의 말단까지 완벽하게 그의 통제하에 제어된다는 감각도 전부 이 순간만은 그의 것. 살아있다는 건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이럴 때만 살아있다는 말은 이때가 아니라면 죽어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테다. 무대 위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건 그에게 천직이다. 알지 못했다면 전혀 몰랐을 감각.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허기의 원인을 찾아 헤맸겠지.

흥분으로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차분해진다. 다시 가벽 뒤로 돌아왔을 때 모니터를 보고 있던 캐스팅 디렉터가 케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칭찬에 박한 사람이었다. 후하지 않은 칭찬이라서도 있지만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기꺼웠다. 표현하는 직업이니까 노력한 만큼 누군가 알아봐 준다는 게 뿌듯하게 다가온다. 잘한다고 듣는 칭찬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아무리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평정심을 유지한대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날레까지 마치고 모델들이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브랜드의 간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간단한 소감을 전하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만 남았다. 탈의를 도와줄 헬퍼를 찾는데 죠가 들뜬 얼굴로 다가왔다. 죠의 얼굴이 코앞에서 멈췄다. 눈을 반짝이며 케이 선배의 워킹은 대단하다고 말한다. 너무… 가깝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죠가 아차하는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완벽한 워킹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였어?”
“네. 케이 선배의 워킹은 언제나 완벽했습니다.”

 

찝찝한 기분이 약간, 그리고 조금 머쓱한 기분도 약간. 교본 같다는 말도 들어봤고, 워킹에 대한 칭찬이라면 무시히 들어왔는데도 왜 멋쩍은 기분이 들까. 그건 분명 심장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재채기가 나오려고 이러나. 케이는 무심코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찜찜하다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지만 그 반대편에는 분명 기쁘다는 감정도 있었다. 미묘했다. 그러나 케이는 번민의 여지를 머리 저편으로 말끔히 밀어버린다.

 

“하하. 그래도 단점을 찾아봐. 발전은 언제나 단점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거든. 나라고 항상 완벽하지도 않고.”
“단점을 인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항상 대단하셔서…”

 

어딘지 집요한 면모까지 드러나는 일관적인 대답이었다. 단호하게 대답한 죠의 얼굴이 일순간 흐려졌다.

 

“왜 그래?”
“그냥… 이런 큰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이라 많이 걱정되어서요. 실수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케이는 죠의 워킹을 곱씹어본다. 딱히 긴장했던 티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나름대로 표정을 읽어내기 쉽다고 여기는 건 단순히 케이가 남들을 잘 파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죠가 그에게는 한 꺼풀 경계심을 내려두었기 때문이거나.

 

“많이 긴장했어?”
“네. 무척 긴장했습니다.”
“별로 티 안 났어. 사람인 이상 긴장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들 그래.”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래도 리허설 전에 케이 선배와 얘기를 나눠서 그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도움 될만한 얘기 전혀 안 했잖아.”
“케이 선배는 항상 제게 든든한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가끔은 존재만으로도…”

 

우와… 이거 거의 고백 아니야? 하여튼 엄청나게 추켜세워준다니까……. 그게 빈말이 아니라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처럼 느껴진다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걱정되는 점이기도 했다. 동경이라는 건 케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감정. 알긴 아는데, 누군가를 지켜보고 샅샅이 분해해 보다가 흡수해버리는 감정은 모른다. 그런 크기로 누군가를 동경한 적 있냐고 물으면, 그랬던 적은 없었다고 대답하게 되겠지. 케이는 고작 세 번의 만남만으로 이 소년의 동경이 어느 깊이까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느껴버렸지만,

 

“그리고… 혹시 괜찮으시다면 조금 이따가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좋아.”

 

알 수 없기에 되려 궁금해진다. 죠가 자신에게서 배워간 것들이 자꾸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쇼가 끝나고 애프터파티에 얼굴을 안 비출 수가 없었기에 잠깐 들러서 해당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인사를 나눈 뒤 자리를 빠져나왔다. 인맥 관리가 중요한 업계다. 물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안 그런 업계가 어디 있겠냐마는, 명백한 척도가 존재하지도 않고 워낙 한 사람이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도 잦았다. 처음 모델이 워킹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제법 충격을 받았던 것도 같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리지 않는 성격이라 입에 침 바르고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는 일도 금방 익숙해졌다.

 

“좋아. 무슨 일로 시간을 내달라고 한 거지? 개인적인 일이야?”
“에이전시 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어서요.”
“해외?”
“네.”
“벌써 이적하고 싶어서 그래? 아직 계약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하지 않았습니다.”
“안 했다고? 지난 S/S 발렌티노와 마리아노에 섰잖아. 국내 에이전시에서 도와준 거야?”
“네.”

 

알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죠의 뒷 말이 조용히 이어진다. 아차. 당연히 케이는 두 쇼 모두 서지 않았다. 다른 쇼의 시간과 겹쳐서 피팅부터 거절했던 상황이었기에 그랬다.

인터뷰에서도 몇 번이고 케이를 언급했던 루키가 의외의 상황에 귓가에 열을 올렸다. 케이의 말은 죠가 선 쇼를 직접 찾아봤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안 될 거야 없지만, 이런 식으로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에둘러 말하는 것도 단번에 집어내다니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술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케이만 살짝 평정심을 잃었을 뿐이다.

 

“…해외에선 같은 일본인 소식이 잘 들리거든. 계약을 안 한 상태였다면 좀 번거롭긴 했겠네.”
“네. 한 번 해보니까 에이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케이 선배님께 조언을 얻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어서 요청 드렸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이전시가 없었던 거치고는 타율이 나쁘지 않다. 나름대로 데뷔 시즌이라면 데뷔 시즌인데도. 케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와 달리 해외 에이전시는 몇 차례 이적한 적도 있고, 국가마다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한 상태이기도 했다. 일본이나 한국과 에이전시의 시스템이 달라 고려할 점도 달랐다. 어느 것부터 알려주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네가 생각하기에 넌 어떤데?”
“네?”
“어느 쪽으로 나가고 싶어? 그래야 추천을 해 주지. 하이패션보단 커머셜 쪽이 더 맞아 보이는데. 일감도 그쪽이 더 잘 들어오지 않아? 워킹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닌데, 얼굴이. 그쪽에서 딱 선호할 느낌이라.”
“그렇긴 하지만 저는 하이패션에도 욕심이 있어서요.”

 

죠가 분명하게 말했다. 단호함이 느껴졌다. 고집이 있다는 건 좋은 거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뚝심 있게 밀고 나갈 방향이 있다는 거니까. 역시 그런 지점에서라면 조금은 닮았으려나.

 

“하이패션에 욕심 있는 이유가 뭔데? 잘 될 수 있는 게 뻔히 보이는 길인데도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지? 키가 작아서 커머셜이 더 쉽다는 거 알잖아.”

 

케이는 충동적으로 그러고 싶어져서, 죠를 날카롭게 후벼 판다. 죠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기 때문인지, 정곡을 찔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삐죽삐죽한 공기를 잠시간 내버려 두다가, 케이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너 말야. 내가 선 쇼를 봤지? 다.”

 

죠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케이가 한 말의 저의를 살피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케이는 죠의 머릿속에서 전개되는 생각들이 궁금해졌다. 머뭇거리는 듯도 하던 죠가 망설임을 짧게 끝내버리고 대답했다.

 

”네. 케이 선배가 선 쇼라면 전부 구해서 봤습니다. 같은 영상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보았어요. 몸을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희소하다고, 유일무이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쭉, 존경해왔어요.”

 

롤모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오늘 확신했다. 죠의 워킹에선 케이의 방식이 녹아있다. 숨을 쉬는 것, 손을 의식하지 않으며 어깨의 움직임을 덜고, 무릎에 바운스를 주는 타이밍과 적당한 만큼의 힘, 골반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방식, 고개를 살짝 당기고 가슴을 활짝 열며 배와 척추에 힘을 준 고른 자세, 개개인마다 전부 다를 그 미묘한 방식들이 타인의 워킹에서 보였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흡수해버려 그대로 녹아든 케이가.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에게도.

타인이 과거의 자신에게서 가져간 것이 현재의 그의 눈에도 보인다는 건.

아마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할 수는 없겠지. 그런 깊이의 동경은 쉽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동경하기만 하는데도 이렇다면, 너무 잦게 존재한다면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

이게 단순히 동경이기만한 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커다래서 이제 막 성인이 된 애가 그런 깊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얼떨떨했으며, 조금은 아연했다. 찬사가 즐겁고 멋쩍었으나 동시에 이런 감정이야말로 정말로 희소한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죠.”
“네.”
“날 뛰어넘고 싶은 거지.”

 

사고 회로를 전혀 거치지 않고 툭 내뱉어진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 발화와 동시에 케이는 적잖이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죠가 더 크게 놀랐다. 그러나 동시에 케이는 이때까지 넘겼던 께름칙함의 원천을 알게 된다.

케이가 그의 워킹을 보면서 찝찝함을 느꼈던 이유. 내뱉고 나서야 출처를 찾아냈다. 죠의 워킹에서 느낀 기시감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아이의 욕심이 무척이나 커다랗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쇠붙이를 먹으며 끝도 없이 몸을 불린다는 괴물 이야기처럼. 어쩌면 도시를 집어삼킬 수도 있겠지. 케이가 읽어낸 것은 그런 거다. 똬리를 튼 커다란 갈망. 스스로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애다. 본인의 한계도 모를 게 분명했다. 무궁무진하게 성장 가능성이 존재하는 애였다. 아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서 얼마나 자랄지 나중이 더욱 기대되는 거.

그러니까 코가 유다이는 기꺼이 촉발시킨다. 도화선에 불을 붙여 폭발하게 되도록.

 

“제가 케이 선배를요?”
“…….”
“전…”

 

물감을 씌운 것처럼 목덜미에서부터 열감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한 승부욕이자 욕심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깨닫기까지 한참 걸릴 수도 있었다. 죠의 것은 동경이 먼저였으니까. 방아쇠를 당긴 건 케이의 선택이다.

 

“네. 닿고 싶습니다.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이;”

 

아무리 꾹 눌러보았다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제법 맹랑한 녀석이다. 처음엔 분명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건만, 곱씹어보면 처음 봤을 때, 만났을 때가 아니라 화면 속의 죠를 봤을 때 차분한 얼굴과 다르게 그 눈에 담긴 열정은 몹시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땐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심 억누르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기대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과연 케이가 있는 곳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일단 알겠어. 당연하지만 회사마다 다르고 담당자마다 달라서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할 수는 없어. 몇 군데 추려서 보내줄 테니까 얘기해보고 괜찮은 곳으로 미팅 잡아봐. 내가 추천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거 아니고, 당연히 네가 잘해야 하는 거야. 무엇보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케이 선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역시나 깍듯하다. 이쯤 하면 대화가 슬슬 마무리된 것 같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다음은 일본일지 다른 곳에서 보게 될지 모르겠네. 미리 영어 공부 열심히 해 둬. 필요해질 테니까.”
“그러겠습니다.”

 

그게 작별이었다.

다른 곳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두기도 했고 직접 몇 군데 추려서 알려주기도 했지만 같은 에이전시로 계약했다는 걸 듣고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인터넷에 찾아보기만 해도 전부 나오는 거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였겠거니 하고 말았다.

 

케이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 뒤로 연락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언젠가는 그를 뛰어넘고 싶다고 말한 애인데도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며 연락에 답장해줄 마음이 드는 게 신기했다. 오늘 연락들이란 게 죄다 식사는 했는지, 어딜 가다 전광판에 걸린 케이의 광고를 보았다든지, 서점에 들러서 잡지를 샀다든지 인터뷰를 읽었다든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 얘 뭐지 싶으면서도 꼬박꼬박 답장했다. 하찮은 것들이었지만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시답잖은 연락을 주고받던 와중엔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신나서 전해오는 일도 있었다. 사실 문자 자체는 항상 그렇듯이 지나치게 차분했고 깍듯했지만, 케이는 화면 너머로 신났을 거라는 확신을 했다. 케이는 그 연락을 받고, 함께 나갈 수도 있다던 같은 에이전시 소속인 신인 모델 몇 명을 떠올렸다가 이내 그 자리가 죠에게 갔구나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선 크루즈 쇼가 꽤 화제 되었다는 건 안다. 케이가 그 쇼의 클로징을 맡았기 때문에.

“이 정도 메인스트림 방송에 나오는 건 처음이에요.”
“너무 긴장하지 마. 엠씨 분들께서 잘 이끌어주실 테니까. 대본 훑어봤지?”
“네.”
“전체적인 흐름만 알고 있으면 따라가기 어렵진 않을 거야.”
“실은 어제…”
“음?”
“조금 긴장되어서, 케이 선배가 나온 편을 다시 돌려보고 왔습니다.”
“에, 그때 나도 처음이라 긴장 했어서 별로 재미없지 않아? 그 편.”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좋아해요. 여러 번 봤습니다.”

 

여러 번이나 볼 만큼 재미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꽤 옛날에 찍었던 거라… 케이는 앞머리를 헤집으려다가, 곧 세팅된 상태라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이건 부끄러움에 가까운 건지, 좀 계면쩍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촬영이 시작됐다. 스튜디오 내에서 충실히 토크로 분량을 뽑기만 하면 되는 형식의 방송이라 크게 부담될 것도 없었다.

 

“케이 군, 오랜만에 봐도 너무 크잖아~”

 

진행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죠 군은 앉아있어도 다리가 너무 길어서 한참 삐져나오는 거야?”

 

옆에서 다른 진행자가 세 사람이 나란히 서보라며 부추겼다. 진행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앵글에 잡혔다.

 

“아니 잠시만, 두 사람 키가 너무 크잖아! 옆에 있으니까 내가 완전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데 이게 맞는 거야? 아유미 상, 뭐라고 말 좀 해줘!”
“작다.”
“어이어이!”
“키는 작은데 얼굴은 크네!”

 

곤란한 듯이 손을 내젓는 케이와 죠가 모니터링용 화면에 담겼다. 패널석에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그만, 두 사람 키가 어떻게 돼?”
“187입니다.”
“아직 185입니다.”
“아직? 아직이라면 최근에도 컸다는 건가?”
“네. 최근에도 2cm 자라서… 더 크고 싶습니다.”
“여기서 더 큰다고?!”
“아직 성장기라 더 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죠 군 몇 살이지?”
“스무 살입니다.”
“정말 아직은 더 크겠네… 아니, 지금도 큰데 노력까지 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란 거야. 죠 군!”

 

모델이라지만 너무 큰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더 이어지고서야 화제가 넘어갔다. 죠를 보고서 처음에 한국인인줄 알았다던가, 지난 시즌 케이가 선 쇼의 백스테이지 일화라던가, 해외 체류 중 겪었던 일들, 화제가 되었던 최근 크루즈 쇼의 일, 신인 모델이 으레 겪을 법한 고생의 일화 같은 것들이 토크 주제가 됐다. 본업이야 모델이라지만 방송 쪽에도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얼굴을 비추는 터라 어떤 식으로 리액션하고 살려야 분량이 나오는지 아는 케이와 달리 새파랗게 어린데다 이런 곳이 익숙하지도 않고 방송물은 더더욱 들지 않은 이 신인이 통편집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으나 다행이기도 하고 의외롭게도 곧잘 분량이 나오지 싶었다. 옆에서 서포트해준 케이와 진행자들의 영향도 없지는 못하겠지만, 마냥 수줍어할 줄로만 알았는데 은근 잘 받아먹었다. 영 쑥맥은 아니다. 물론 잘 받아먹는다는 거지 그렇다고 입 터는 길로 나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고.

그러던 와중 토크 주제가 다시 넘어간다. 근래 릴리즈된 하이엔드 캠페인에선 케이가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남자 중에선 유일하게 동양인이기도 했다. 동양인은 잘 쓰지 않기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촬영을 끝내고 와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허들을 또 하나 넘는다는 기분이었지. 오랜만에 겪는 즐거움이었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캠페인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정말 영광이에요. 늘 기쁩니다.”
“정말 유명한 브랜드잖아. 케이 군, 솔직하게 말해 봐.”
“…무엇을요?”
“케이 군은 정상에 섰는데 부족한 거 없어?”

 

정상이라… 높이 올라간다는 희열을 향수처럼 온몸에 감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목표로 삼은 것들을 하나씩 그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마다 느꼈던 쾌감. 분명 마약보다도 더한 중독이었다. 그런 것들이 귀하지 않을 리 없다.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런 성취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코가 유다이란 인간은 무언가를 그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분을 꺼리지 않았다. 오히려 간절하게 원했다. 그럴 때 진심으로 심장이 박동한다고, 피가 전신을 타고 순환한다고, 살아있다고, 러닝 트랙이 아닌 곳에서도 온전히 코가 유다이로 살아있을 수 있다고 느꼈다.

 

“솔직히… 없습니다.”

 

다른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입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먼저였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자리가 있으면 제가 가장 먼저 차지하고 싶습니다. 매번 그런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케이의 단단한 눈빛이 죠와 스치듯 마주친다. 케이는 죠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럼 힘든 점은?”
“뭐든지 응당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고독한 점이랄까요.”
“그럼 내려오면 되잖아~~~! (笑) 죠 군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 자리가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롭지 않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저 결연하고, 도발적인 눈빛은… 강렬하고 악바리 근성이 보이는 눈이다. 또 저 눈이다.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리는 거. 꽉 옭아매고 놔주지 않는 거.

케이는 이 새파랗게 어린 녀석의 패기가 어딘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한참 남았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바짝 쫓아오리라는 것도 분명하게 느꼈다.

살짝 열이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내달렸다. 신인의 패기에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지만 케이는 속이 좀 복잡해 그저 웃기만 할 수도 없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죠 군은 케이 군이 롤모델이라고 하던데, 언제부터였지?”
“저는 처음에 쇼핑몰 모델로 시작했다가 모델 에이전시에 캐스팅 당하게 된 경우인데요. 기본기가 없는 상태다 보니 너무 어설퍼서 혼이 많이 났습니다. 배우면서 스스로의 부족함도 많이 느껴서 탑 모델들의 쇼를 많이 찾아보았어요. 처음 본 것이 케이 선배의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을 처음 봤을 때 유일무이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몸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 이후로 쭉 케이 선배가 저의 롤모델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본 순간부터였습니다. 무척이나 동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표도 있겠네?”
“언젠가는 저도 업계탑을 찍고 싶습니다. 케이 선배의 뒤를 잇는다면 저였으면 좋겠다는 목표입니다.”

 

이 자식. 전혀 숨길 생각이 없잖아. 천진난만해 보이는 얼굴로 말이야.

 

“그러니까 케이를 끌어내리겠다는 거잖아?”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어이, 오마에!”

 

잔뜩 당황한 얼굴로 죠가 손사래를 쳤고, 꽁트처럼 웃으며 삿대질하는 케이를 마지막으로 토픽이 넘어갔다.

 

그 뒤로는 전부 무난했다. 촬영이 끝난 뒤 죠와도 인사하고 나오면서 문득, 나 요새 엄청나게 들뜨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밑에서 이렇게나 치고 올라오는데, 올라오겠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즐거운 걸까…

권태롭다고 여겼다. 어쩌면 매너리즘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잃어버린 적도 없는 초심을 찾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 맥을 추리지 못하는 동기와 후배들에게서 눈을 돌려 시야를 내리기도 한참. 잠재력 있어보이는 신인도 부재한 상황에서 진심을 다해 맞붙을 수 있는 적수가 부재하다는 건 외로움과 가장 직결되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지겨울 정도로 탄탄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던 삶에 긴장감이 불어넣어지는 감각이 생경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말단까지 도는 건, 분명 무언가를 방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데서부터 오는 스릴이다. 온 힘을 다해 격차를 벌려야 하는 때가 올 거라는 예상에서부터 오는 짜릿함. 박동하는 심장과 혈관을 따라 전류처럼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혼자 달리는 것은 재미없다. 발을 붙이고 선 그의 왕국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오히려 기껍다. 이제 내일이 두려웠다. 진짜 진심을 보여야 하는 때가, 온 힘을 다해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마지막 순간의 스퍼트처럼, 오히려 다리의 무거움을 모두 잊고 훌훌 달려야 하는 때처럼.

살아있다는 기분.

그러니까 지금에야말로 드디어, 드디어 기대가 된다. 이 두려움이 오히려 기대가 된다. 죠라면 그런 위협이 될 것 같았다.

 

 

 

 

 

 

(C)

 

뉴욕행이 정해졌다는 걸 떠들썩하게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짧게 출국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가깝거나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았다. 주변에서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도 했고, 딱 적기라고도 했지만 그런 말들에 휩쓸리거나 명백한 청사진을 그려두고 있다기보다도 긴장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새로운 환경, 낯선 언어, 미처 겪어보지 못한 것들이 그의 발밑에 펼쳐져 있었고 남은 것은 오직 발걸음을 떼는 일뿐이다.

롤모델의 말에 따르면,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지극히 진심으로, 부족함이라는 후회가 없게끔 죽을 만큼 노력해보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인터뷰를 얼마나 뜯어보고 곱씹어보았는지, 그 페이지가 닳아버릴 정도였고 그가 한 말들이라면 전부 외워버린 것도 같았다.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살던 고달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하고 있으니 매일매일이 정말 즐거운 날들이었다고 말하던 그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긴장은 사그라들고 다른 의미로 동기부여 되곤 하니까. 더 큰 세상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긴장감이 가실 때면 그 자리를 조용히 타오르는 전의가 채웠다. 즐겁고 잘하고 싶은 일. 지기 싫지만 동시에 추월해버리기보다도 그 선 위에 함께 서 있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 지기 싫은 마음이 단순히 승부욕으로 멈춰 있지 않은 걸 깨달을 때마다…

 

“죠?”
“…케이 선배?”

 

사실은 이게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공항 라운지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쪽에 가깝겠지만. 반무테안경을 쓴 케이는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놀란 얼굴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공항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야? 어디 끌려가기라도 해?”
“아니요, 아니에요.”

 

방금까지 그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에 조금 속상해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죠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저, 한동안 뉴욕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응? 당분간은 나도… 패션위크 주간만 그런 게 아닌가 보네?”
“네.”
“에이전시 계약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잖아. 비자며 영어며 엄청 바빴겠네.”
“비자는, 그래도 계약하자마자 준비하던 거라 괜찮았는데 영어가 힘들었습니다. 어려워서…”
“그러게 영어 공부 미리 해두라고 했잖아. 가면 엄청 정신없을걸.”
“…….”
“생각보다 말하는 게 훨씬 빨라서 힘들더라고.”
“그런가요…”

 

먹구름처럼 걱정이 밀려온 죠의 얼굴을 보더니 케이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너무 겁줬나?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가서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다 늘게 돼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도 매일 영어 공부한다고 생각해야 해. 그러면 좀 나아. 고향이 그립다고 일본인들이랑만 어울리면 더 안 느니까 그러진 말고.”
“조언 감사합니다…”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타지에 있으면서 힘들 텐데. 나도 겪어봐서 알거든.”
“감사합니다. 정말로…”
“물론 내가 머무는 동안이 한계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미국도 꽤 자주 가는 편이니까.”

 

당사자는 별 의미 없이 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말이, 이상하게 정말로 위안이 됐다. 괜히 의미 부여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럼에도.

 

“아, 당연히 금전적인 부분도 포함해서 말하는 거야. 알지?”

 

케이가 활짝 웃었다. 죠는 그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고.

 

“뉴욕이라니. 아직은 그래도 병아리 같은데 말이지. 쑥쑥 자라라. 자라서 얼른 올라와. 알겠어?”
“저를 인정해주시는 건가요?”
“라이벌로? 너 아주 꿈도 크다. 야망 있는 코도모구나?”
“…….”
“아직은 한참 멀었어.”

 

아직은… 그러나 그 말은 곧 언젠가는, 이라는 말과도 동의어가 되지 않겠느냐고. 단어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뻤다. 꿈꾸는 다음 장면이 비슷하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걸 롤모델로 삼은 이의 인정으로 확인했다면 더욱 그럴 테다. 아직은… 소리 없이 되뇌인 단어가 가진 힘은 무지막지해서, 한참이라는 간격을 메우고 옆에 서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뛸 힘이 생겼다. 여전히 올라가야 할 곳은 너무 멀고, 그만큼 아득하지만 그래도 그 옆을 가늠하기 위해 뻗은 팔에 초점이 잡힌다고, 그러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탑승하는 비행기가 달랐기에 케이와는 공항 라운지에서 작별했다. 도쿄에서 뉴욕까지는 열세 시간 남짓. 오랜 시간의 비행이었다. 도착해서는 곧장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살기로 계약한 쉐어하우스로 이동했다. 살인적인 집세도 놀랍긴 마찬가지였으나 구하기도 마땅치 않아 모델 한 명과 학생 두 명이 사는 아파트가 그의 거처가 됐다. 다행이라면 케이의 조언대로 세명 모두의 국적이 달랐던 탓에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일까. 첫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차에 적응하느라 내내 자기만 하다 깼더니 피자를 시켜두고 죠를 기다리고 있기에 솔직히 좀, 감동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다닌다는 패션 디자인 전공의 유학생과 교환학생으로 일 년을 보내기로 되어 있다는 스포츠 물리치료 전공의 대학생, 그리고 죠보다도 두 살이 어리지만 커머셜을 주 무대로 모델로 일하고 있다는 남자애까지 세 사람 모두 죠를 환대했다. 전부 친절해 보인다. 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짐을 풀었다.

며칠 뒤 맨해튼 한복판의 모델 에이전시에 방문해 매니지먼트의 담당자인 부커와 만났다. 계약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는데,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나누던 도중 걸려 온 전화를 받더니 곧바로 죠를 향해 캐스팅 오디션을 안겨주었다. 사실 문자 그대로 안겨준 것은 그가 살펴본 죠의 포트폴리오 북이다. 나쁘지 않다는 평을 내렸던 것을 죠의 가슴팍에 떠밀듯 얹은 뒤, 직접 죠를 엘리베이터로 배웅했다.

 

“구글 지도 찍어줄 테니까 지하철을 타든, 택시를 타든, 아니면 뛰어가도 좋으니까 얼른 출발해. 베이비, 행운이 함께하길!”

 

아직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틈도 없이… 쫓겨나다시피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고개를 들자 마천루가 끝없이 담기며 시야를 빽빽하게 채웠다. 사람을 위축시킬 만큼 빼곡하게 들어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건물들이지만 이런 곳을 무대로 삼을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라고. 자유와 기회의 땅이다. 아직은 실감 나지 않지만. 얇은 코트를 추스르며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낯선 곳이고 영어는 너무 빨라 듣는 걸 따라가기도 벅차고 모델들은 정말 발에 챌 만큼 많지만…

오르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옆자리를 오래 비워두고 싶지 않으니까 더 잘하고 싶었다.

 

 

 

 

영어로 디렉팅 받는 건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몸만 긴장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이해하려고 정신까지 긴장시키고 있어야 해서 더 그랬다. 캐스팅 오디션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있었고 그걸 전부 갈 수 없다고는 하나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잡지 않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싫어서 최대한 체력이 닿는 데까지 포트폴리오북을 들고 뛰어다니다 보면 집에 돌아올 즈음엔 언제나 녹초가 되어 있었다. 먹는 것 보다도 체력 소모가 더 커서 체중 감량은 커녕 유지하기 위해서 잘 챙겨 먹어야 할 정도였다. 땀도 많고 붓기가 잘 빠지는 체질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체중 감량으로 이어지기도 쉬웠다. 멋대로 살쪄오는 것만큼이나 빠져 오는 것도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가? 다음날에도 캐스팅 오디션이 세 개나 있는데 전날 오후에 피자를 먹는 모델은 죠가 유일했을 것이다.

그런 일상들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매번 겪는 거절도 다채롭게 힘들었다. 언제나 고요한 물의 표면 같은 태도로 침착함을 고수했고 평가를 가장한 타인의 비난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잘 다독이기도 했지만 가끔은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도 가장 싫은 건 생각만큼 쉽게 늘지 않는 영어나 마음처럼 쉽게 표현되지 않는 표정, 스스로의 눈에도 보이는 미숙한 워킹 같은 것들이었다. 이역만리 타지라는 생각, 이방인이라는 외로움보다도 선행하는 건 그런 거였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아슬아슬하게 한 계단 오르기가 쉽지 않아 자꾸만 매달리게 되는 거 말이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은 언젠가의 케이가 알려준 것이었지만…

자신을 자꾸만 몰아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땐 가까운 공원을 가서 한참을 걷거나 그러고도 안 될 때는 허드슨 강변을 찾아갔다.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고 머문 지 몇 달이 되었대도 당연히 집이라고 느껴지지 않은 데다가 어쩌면 한참은 더 그럴 테지만, 그래도 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이 뛰거나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강변을 따라 걸을 때면 요코하마가 생각이 났다. 고향의 추억이 생각났고 남겨둔 가족이 생각났고 그리운 것들이 생각났다. 유선 이어폰을 꼽고 한참을 걸으며 생각하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차분해지게 되었다. 남겨두고 온 것들이 후회되거나 그리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한 것들이었으므로 가끔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들이었다. 자주 떠올린다고 해서 쉬이 닳아 없어지는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아껴두고 드문드문 떠올리려 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떠들썩하게 자랑하지 않고 마음 한 켠에 가만가만 새겨두었던 어린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그런 건 타고난 성격 탓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선 케이의 영상을 다시 봤다. 워킹을 처음 배울 때보다도 절박했다. 그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 보였다. 무언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 있다면 반대로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도 있다는 게 우주가 평형을 맞추는 방식인가 보다.

 

아침엔 가장 먼저 출근했고 저녁엔 가장 늦게 돌아갔어요.
둘은 분명히 닮았다.
저는 스스로를 레벨업시키려는 마음이 강해서, 제가 워킹한 걸 찍어둔 동영상을 보면 굉장히 억울해지기 시작했어요.
욕심이 많은 점이.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게 스스로를 믿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점이.
저는 지는 걸 아주 싫어해서요. 그게 저 자신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요.
승부욕이 닮았고. 그게 예외랄 것 없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도 그랬으며.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저에겐 연습의 결과가 지금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의 힘을 믿는다는 점이 닮았다.

 

그렇게 깎아낸 워킹은 완벽했다. 그 순간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액정 너머의 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몇 해 전, 케이의 워킹을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 없이. 그때나 지금이나 죠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세계에 유일하다고… 희소하다고 느꼈다. 갖고 싶어서 유일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희소하기에 가지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로서 고유하다는 사실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죠를 맹목적으로 만들었을 뿐.

눈을 깜박이는, 숨을 쉬기 위해 폐를 부풀리는 찰나마저도 흡수했다. 타인의 신체에 맞춰진 리듬감, 밸런스를 욱여 삼키며 케이를, 코가 유다이를 지독하게 분석했고 샅샅이 분해했고 받아들였으며 죠의 내부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무엇 하나라도 그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멋대로 이정표로 삼았고 마음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했다.

아사쿠라 죠는 몰랐고 코가 유다이는 더더욱 몰랐으나 그렇게 흡수된 것들은 코가 유다이의 흔적으로 시작하여 아사쿠라의 안에서 아사쿠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사쿠라 죠가 코가 유다이를 가졌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칼날처럼 살갗을 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출퇴근길 사람들의 옷깃이 더 단단하게 여며지고, 길거리에선 시야를 살짝 내리깐 채 목적지를 향해 빠른 걸음만을 장착하게 된 지 오래였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은 아무래도 매서운 추위가 한몫했다. 아직 한참 남은 크리스마스를 위해 거리 곳곳이 꾸며져 있어 연말 기운이 물씬 났다. 평소라면 멈춰서서 잠깐이나마 구경하고 다시 걸음을 바삐 재촉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촬영이 계속해서 딜레이 되는 탓에 한참은 늦었다. 원래라면 삼십 분 전에 이미 짐을 챙겨 나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거리 구경은 커녕 땀이 삐질삐질 나도록 아파트까지 뛰어가고 있는 것이었지만. 며칠 전 미리 짐을 싸두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다음 티켓을 찾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널널하게 계획해두어 집에서 곧장 짐만 들고 내려온다면 그다음 공항버스를 타고 어떻게 시간을 맞추어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그런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인지, 출국과 입국 과정은 무탈했다.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밀라노는 뉴욕과 확실히 달랐고, 새로웠으며 그만큼 설렜다. 몇 주 뒤, 밀라노를 시작으로 맨즈웨어 가을-겨울 패션위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브랜드마다 다르겠지만, 젠더리스로 진행하거나 남성복을 가장 늦게 빼는 뉴욕과 다르게 밀라노는 여성복과 두 달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남성 패션위크를 진행했다. 밀라노 컬렉션이 끝난 뒤엔 그 뒤에 있을 파리 맨즈웨어 패션위크를 위해 곧장 파리로 넘어갈 예정이었으므로 오래 머물 테니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사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가져온 짐이 적지 않았다. 사람 한 명은 거뜬히 들어갈 더플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구해둔 숙소로 이동했다. 당연하지만 패션위크 기간의 해외 체류 비용은 모두 모델 개인 부담이기 때문에 에이전시 측에서 구해준 룸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지만, 청결에 아주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니 괜찮았다.

뉴욕에 조금은 적응됐으려나 싶은 차에 다시 타지에 뚝 떨어진 기분은, 솔직히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다. 또 낯선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그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들떴다. 밀라노였고. 쇼장에 서는 걸 상상해본 브랜드도 많았다. 긴장과 기대, 설렘과 걱정 같은 것이 다채롭게 혼재되어 뱃속을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뉴욕 회사의 부커가 밀라노에서의 일을 맡아주고 있지만, 이번 패션위크의 상황을 보고서 밀라노에서 따로 계약을 하는 게 나을지 말지도 생각해야 했다.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탑 모델의 경우엔 국가별로 부커를 두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워낙 일이 많이 들어오기에 그렇다고. 솔직히 그런 날이 오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정말 먼 미래의 일 같지만…

트램이 멈췄다. 내린 곳은 캐스팅을 보게 되어 있는 디자이너 사무실 근처의 정류장. 이미 건물 외부에 모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방문 허가받아 들어가 보면 또 건물 내부에도 모델이 어림잡아 수백 명은 있고. 오디션장은 포화 상태에 가까웠지만 사실 질릴 만큼 꽉꽉 들어찬 이마저도 익숙했다. 죠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비스듬히 멘 채 방금 자리가 난 구석에 앉았다. 가방엔 오디션을 볼 때 신을 신발과 포트폴리오 북을 항상 넣어 다녔고, 그 외엔 대기시간 동안 읽을 책이라던가 그림 그릴 만한 연습장 같은 걸 넣고 다녔다. 그림 그리는 건 패션보다는 풍경이나 인물이 많았지만, 대기하는 라운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델은 확실히 많지 않아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이 스몰토크하는 걸 받아주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도 하고 그랬다.

 

“좋아요. 걸어봅시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까지가 한 번이에요. 고!”

 

워낙 바쁘다 보니 포트폴리오를 제대로 훑어보기보다도 컴카드를 받아든 채 바로 워킹부터 시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그래도 어깨 빠져라 포트폴리오 북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게 을이 된 입장이다.

죠는 세로로 길쭉한 사무실의 끝까지 걸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처음엔 다른 인종이라 아리송하기만 하던 캐스팅 담당자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익숙해졌다. 눈치가 는 것이다. 저 표정은 살짝 애매하다는 뜻.

 

“빠른 음악을 들을 때처럼 걸음을 빠르게 해서 다시. 리듬감이 느껴지도록 걸어봐요. 강렬하게. 다시.”

 

죠는 턱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곧게 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수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직업이다. 사무실을 다시 걷고 돌아왔다. 그 뒤에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일차 관문을 통과한 모델들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때그때 브랜드마다 캐스팅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간단히 옷을 피팅해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담당자가 면접 당시의 모습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오디션 당시의 모습을 촬영하면 그 캐스팅은 끝난다.

물론 워킹을 하고도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워킹하기도 전에 돌아가라는 최악의 경우도 있긴 했다. 거절은 보통은 돌아가 봐도 좋다거나, 다음번에 연락하겠다는 말들로 이루어졌다. 모국어가 아닌 말인데도 계속되는 거절에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사이에 얻는 기회와 칭찬이 좋았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과 자신을 믿는 힘이 없었더라면 분명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외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직업이었다. 멘탈 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매일 느꼈다. 실수에 매여있기 보다도 더 나은 모습을 위해 매진하는 편이 아니었더라면, 버티기 어려웠겠지.

캐스팅 합격에 기뻐하기 무섭게 다음 캐스팅 스케쥴이 잡혔다. 하루에도 열 개씩 캐스팅 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숙소에 돌아와서는 씻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다 보면 다시 아침이었다. 또 캐스팅 장에서 무한대기하는 하루. 패션위크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때에는 캐스팅 스케줄이 피팅 스케줄로 바뀌었을 뿐이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나요?”
“피팅하러 왔습니다.”
“성함이요?”
“아사쿠라 죠입니다.”
“방문객 카드 발급해드릴게요.”

 

프라다 로고가 박힌 방문객 카드를 받아들고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바로 전날 피팅이 앞에서부터 딜레이되다가 새벽 두 시에 겨우 끝나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서 더 현실감이 떨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오전 여덟 시까지 도착해야 하는 일정이라 네 시간은 겨우 잤던가… 기다리는 동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서 잠깐이나마 졸고 있을 만한 곳이 없으려나.

 

“어어, 죠?”

 

그런 생각도 곧,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케이 군?”
“오마에, 너도 피팅하러 온 거냐?”
“네…. 케이 군도 계실 줄 알긴, 계실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긴 했지만…”
“하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단 말이야? 너 엄청 심심했나 보구나? 뭐. 기다리는 동안 무지 지루하기는 하지. 대기시간도 너무 길고. 가만히 있는 거 싫어서 스트레칭을 하는데도 너무 길어서 좀이 쑤실 정도라니까. 오늘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뭐랄까, 오늘따라 말이 많으신 것 같다는 건 죠의 착각인가. 죠는 케이의 옆을 걸으며 아리송하게 생각했다.

 

“다섯 시간 뒤에도 스케줄이 있어서 얼른 끝나면 좋겠는데. 그치, 죠?”
“네.”
“일본어 쓰는 거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 사카이 같은 곳은 디자이너도 캐스팅 디렉터도 일본인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이 훨씬 많으니까. 가끔은 잠꼬대도 영어로 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
“저는 영어를 들으면 가끔 입력이 제대로 안 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요.”
“어떤 느낌인지 알아. 나도 그럴 때 있다구. 안 들리지? 막 귀가 튕겨내는 것 같아. 몇 년씩이나 됐는데도 피곤하면 그렇게 된다니까. 뭐 먹을래? 여기 카페테리아 음식이 괜찮아. 그래도 난 샐러드랑 커피… 죠 너는?”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커피인데?”
“커피도 괜찮습니다.”

 

케이는 커피를 마시게 된 거냐며, 본인은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커피를 마시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잔뜩 신이 났다. 처음 밀라노에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에스프레소를 마셨을 때 충격 받을 정도였다고. 그러더니 곧장 커피를 마신다는 건 어른이 된 기분이 들게 하지 않느냐고, 어렸을 때 형이 마시는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 마시기 시작했는데 마시다 보니 정말 좋아져 버렸다고, 매일매일 마신다고도 했지만…

사실 죠는 여전히 커피가 맛있는지 모르겠고 심장이 빨리 뛰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케이 군과 함께 있으면 항상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빠르게 뛰니까. 거기에 커피를 마신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라서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막상 그렇게 대답하니 너무 즐거워하시기에 그러길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드레싱을 최소화한 샐러드를 퍼먹으면서는 새로 산 트렁크 얘기를 했다.

 

“너도 곧 트렁크 엄청나게 쌓아두고 살게 될걸. 우리 집에도 사이즈 별로 있거든.”
“그렇게 될까요.”
“아무래도 출장 나가는 일이 잦으니까. 전에 뉴욕에서 살 땐, 모델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얘기했었나? 아무튼, 그땐 베란다에 트렁크 산을 쌓아 뒀다니까. 그나저나 드레싱 더 안 필요해?”
“네. 채소 본연의 맛이 잘 느껴져서 충분합니다.”
“…….”

 

나도 샐러드 좋아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중얼대는 케이의 말엔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서 눈만 깜박였더니 화제를 돌렸다.

 

“부커는 좀 어때?”
“친절하고 다정하세요. 항상 잘해주려고 노력하시고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달라서 적응하기 어렵긴 하겠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있어. 에이전시도 있겠다, 욕심을 크게 가지고 잘 해봐. 여기선 첫 시즌에 얼마나 빵 뜨느냐가 커리어를 좌우하기도 해. 여기까지 큰맘 먹고 온 건데 잘 되면 좋잖아.”

 

맞다. 길은 잘 찾고 다니는 거지? 케이가 물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온 마음을 다해 존경하고, 닮고 싶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그를 뛰어넘기 위해 사활을 걸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에게 닿고 싶다. 그 옆자리에 서고 싶다. 마주보고 싶었다. 적수가 없던 그의 런웨이에 우뚝 나타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케이의 너그러움이, 오히려 불가사해한 것이 된다. 정말로 한참 남았다고 생각해서? 견제할 만한 사람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는 뜻일까? 그건 가망이 없다는 뜻이었을까?

인생이 우상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오기가 생길 것 같았다. 조금은 슬프기도 하겠지만. 포기하기 싫은 것만큼이나 지기 싫은 건 죠의 천성이다. 바뀌지 않는 기질이다. 사람을 이루는 뿌리고. 그렇게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왔다. 살아가면서 무뎌지는 성질도 있겠지만 이런 건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
맹랑한 말에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케이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거 크게 비밀도 아닌데? 어이, 오마에. 너무 의미부여하는 거 아니야?”

 

멀리서 직원이 다가와 피팅 장소로 케이를 불렀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케이가 웃으며 죠의 어깨를 두드렸다.

 

“요새 매일매일 너 때문에 즐겁다구. 네가 얼른 위협이 되어야 내가 진심이 되지. 얼른 커서 와라.”

 

너처럼 나를 뛰어넘겠다는 애는, 그게 진심으로 두려워질 수 있을 만한 애는 처음이니까. 케이의 생략된 말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다음 죠의 말은 엉뚱했다.

 

“저도 케이 군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으응??”
“그러니까 어서 크겠습니다. 위기감을 느끼실 수 있도록.”

 

오마에, 지금 선배는 어디다 떼먹은 거야?!
앗…
그런데 그보다도… (생각해보니 어처구니 없음) 그래. 마음대로 불러. 아, 정말 갈 때 됐네. 다음에 보자.

 

 

 

 

밀라노 맨즈 패션위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예상은 했지만 경황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나마 패션위크 주간이 아닐 땐 휴일에도 케이와 만나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있었는데, 밥 먹기는 커녕 같은 쇼에 서더라도 알아볼 정신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첫날 쇼를 끝내고 애프터파티에 갔다가 새벽 한 시에서야 겨우 빠져나온 뒤로 애프터파티엔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날 콜타임이 오전 9시여서 정말로 힘들었다. 지난번엔 쇼를 많이 서지 않아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널널한 거였다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케이에게로까지 튀었다가, 곧 아득해졌다. 아무리 타임을 잘 조율하더라도 하루에 쇼를 네다섯 개씩 서는 건 아직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쇼장에서 다른 쇼장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되는 경험을 한번 해봐서 더 힘들다고 여기는 건지도 몰랐다. 하필 전 타임의 쇼가 딜레이되어서 다음 쇼장에 도착했을 땐 시작까지 고작 삼십 분 남은 상황이었다. 스태프들이 입구에서부터 발을 동동대며 기다렸다가 뛰어 들어가는 죠의 옷을 탈착시키고, 스태프 네 명이 붙어 헤어를 급하게 바꾸고 메이크업과 네일을 동시에 하던 그런 웃지 못할 경험이었다. 그 와중에 리허설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걱정이 되어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듣기로는 이것도 나중에 흔하디흔한 경험이 될 거라고 했지만.

그런 초조함도 런웨이에 발을 내디디면 깨끗하게 사라졌다. 한없이 긴장한 것 같은데도 정면의 프레스 존을 응시하고 렌즈와 눈을 마주치며 걸을 때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진심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생생히 알았다.

더 많은 쇼에 서고 싶었다.

그러니까 역시… 멀었다. 아득하게 높았다. 그가 정말 커 보인다. 이럴 때 상상도 못 할 만큼 멀리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이 난다거나 위축되는 게 아니라 간절히 닿고 싶었다. 최고가 되었다는 기분을, 정상에 섰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공유하고 싶다. 경험해보고 싶다. 그가 느낀 것들을, 죠도 알고 싶다.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런웨이를 걸을 때 훨씬 즐거웠고 매 순간 크기를 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즐겁기만 하다는 말로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온몸 위로 누군가의 혀가 지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늑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찬 축축한 혀의 감각처럼. 진득하게 폐를 핥아 눅진하게 만드는 감각을. 손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기분이다. 세상으로 밀려 나와 우렁찬 첫울음을 토해내며 살아있음을 보고하는 것과 같이… 가벽을 지나 런웨이를 밟을 때, 탑 존에 서서 포즈를 취할 때, 수많은 플래시가 그를 향하는 걸 느낄 때.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모델이 런웨이에 서는 것도 퍼포먼스라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매일 같이 들었다.

언젠가 케이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어떻게 감을 잡게 되었느냐고 질문했을 때 영화를 많이 보고 표정을 잘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답을 얻었던 걸 기억한다. 타이타닉이나 개츠비를 많이 봤다는 말에 따라 보기도 했었다. 가끔 익숙한 표정을 느낄 때면 신기했고, 거울을 보며 쉼 없이 연습하고 있을 때면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 숨겨진 노력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흥미로 시작했지만 알게 될수록 더 잘하고 싶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기 싫은 마음을 계속해서 되새기고는 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찾다가 발견한 완벽한 롤모델이 케이다. 처음엔 방향키로 잡겠다고 생각했으나 이정표가 되었고 길잡이 별도 되었다가 결국은 그곳이 목적지가 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지고 싶은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직업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지.

 

 

 

 

파리로 넘어가면서는 쇼에 서지 않는 날도 있었다. 속상하긴 했지만 하루 정도는 쉴 수 있겠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는데, 새로운 옵션이 생겼다며 연락이 왔다. 중요한 룩을 맡은 모델 한 명이 비자 문제로 본국에 송환되어 생긴 공백을 급하게 구하는 옵션이었다. 마침 비어있던 날이 그 옵션의 쇼 하는 날이라고. 그날 연락을 받고 쇼가 끝나자마자 바로 피팅을 위해 살인적인 요금을 감수하고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옵션은 말 그대로 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라, 가능성일 뿐이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현실을 생각하더라도 마음으로는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게 기회란 것이 아니던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브랜드였다. 원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착한 피팅 장소엔 죠를 제외하고도 스무 명 남짓한 모델이 더 있었다. 백여명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스무 명 정도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옷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납득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럴 자신이 있어야만 했고, 있기도 했다.

 

워킹을 보겠다며 이십 미터 남짓한 거리를 열두 번은 더 걸었다. 횟수가 추가될 때마다 긴장한 얼굴 밑으로 어떻게 해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팽팽 돌았다. 피팅장에서 간단한 스냅까지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에이전시를 통해 연락해주겠다고 했지만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거절의 말이었지만 표정이 나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기대를 해봐도 좋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자연스레 기대를 하기 때문에 자꾸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드는 걸지도 모른다는 뾰족한 생각들이 바늘처럼 부푼 기대를 찔러댔다.

그리고 다음 날 백스테이지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도중 부커에게서 연락이 왔다. 옵션이 확정되었다는 소식, 그래서 비어있던 목요일에 일정이 생겼으니 잊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축하한다는 인사도 함께였다. 유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지휘하는 브랜드로, 모델에게 요구하는 부분도 많고 깐깐하기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옷도 물론이지만 신발도 원하는 실루엣이 있어 특정 사이즈로만 제작해 모델에게 발 크기를 맞추어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발이 맞지 않으면 모델을 떨어뜨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큰 규모의 쇼에 서는 건 처음이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있었더니 메이크업해 주던 스태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얼결에 다른 쇼가 확정났다고 대답하자 옆에서도 축하한다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밀라노에서도 그랬지만 패션 하우스의 컬렉션에 서는 건 조금 더 긴장됐다. 명단 체크를 하고 손목에 팔찌를 두른 채 백스테이지로 입장할 때도, 쇼 시작 전 간단히 리허설하고 드레스업한 채로 백스테이지에서 여러 매체에 홍보용으로 돌릴 촬영을 하면서도 실감이 난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필이면 그 착장이 쇼의 메인룩 중 하나였던 탓에 디자이너까지 붙어 디렉팅을 넣어가며 추가 촬영을 했는데, 쇼의 메인룩 중 하나라면 이렇게 사진이 많이 찍힌다는 것을 몸소 알게 됐다. 항상 지켜보던 입장이었는데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가며 디자이너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쇼 시작까진 그러고도 시간이 꽤 남아 있었던 탓에 환복하고 잠깐 그림도 그렸다가 먼저 인사해오는 다른 모델들과 통성명도 했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쇼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 누가 봐도 방금 쇼장에서 나온 사람 같은 몰골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캐스팅 보드와 피팅 보드에서 본인의 얼굴보다도 빠르게 찾았지만 내내 백스테이지에서 보이지 않아 홀로 의문을 품고 있었던, 케이였다. 눈두덩이에 미처 지워내지 못한 펄들이 백스테이지 조명을 받아 그가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현란하게 반짝였다.

헬퍼 두 명이 행거에서 그의 옷을 들고 백스테이지를 가로질러 뛰어가 그 자리에서 옷을 탈착시켰다. 갈아입혀진다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옷을 갈아입히는 와중에도 진지한 얼굴로 왁스가 잔뜩 발려 고정된 그의 머리를 본 헤어 팀장이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된다며 화장실에 데려가 머리를 감고 오게 하는 것이 입장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러고 또 몇 명의 스태프가 붙어 헤어와 메이크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두 파트의 헤드가 즉석에서 컨펌하는 방식이었다. 이미 쇼 시작 전까지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라 이미 관객들이 입장 중이고 탑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프레스 존에도 기자가 쫙 깔린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리허설을 위해 내보낼 수도 없어 무대 연출 디렉터가 무대 도면을 들고 동선을 설명했다. 야외 랜드마크를 활용하는 비중이 다른 곳에 비해 꽤 높았던 밀라노와 다르게 실내 쇼장이 대부분이어서 다행이었다. 무대 자체는 심플했지만 피날레 동선이 독특한 탓에 그 부분만 따로 빼서 리허설을 했을 정도였다. 몇 번 질문하던 케이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죠는 옷만 다시 갈아입고서, 자리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던 탓에 몇 순번 앞인 케이의 모습을 전부 봤다. 적당히 포마드로 넘긴 머리, 죠와 달리 아이웨어는 없었고 루즈하게 떨어지는 핏의 매끈한 수트 위로 광택이 도는 롱코트를 걸쳤다. 이번 시즌의 컨셉을 그대로 표현하듯 묵직하고 시크한 80년대 테일러링을 그대로 옮겨온 모습이다.

앞뒤로 안면 있는 모델들인지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죠를 발견했다.

 

“죠! 피팅할 때나 캐스팅 보드에선 못 봤던 것 같은데?”
“아…… 원래 이 룩을 맡으셨던 분이 쇼에 참석하실 수 없게 되어서, 며칠 전 피팅했다가 어제 오후에 확정되었습니다.”
“우와, 엄청 떨었었겠는데. 그런데 죠. 이 옷 되게 잘 어울리네.”
“그런가요…. 케이 군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십니다.”
고마워. 그런데 진짜 잘 어울려. 안경 쓰니까 금욕적으로 보이잖아. 섹시한데?”
“…….”
“하하. 귀 빨개졌다. 호감을 사고 싶은 상대가 생기면 그대로 입고 나가라구. 안경도 쓰고 말이야.”

 

제가 호감을 사고 싶은 상대는 제 눈앞에 있습니다… 그 말을 삼키며 죠는 손으로 새빨간 귀를 덮으며 조언 감사하다는 말이나 했다.

 

“그런데…”
“응?”
“케이 군은 긴장하지 않으신 건가요. 저는 어제부터 긴장되어서…”
“나도 긴장이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엄청 창백한 얼굴로 날 보고 있길래.”
“…….”
“도와줘야 할 것 같았지. 어때. 아직도 많이 떨리나?”

 

케이가 심장 소리를 가늠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죠의 가슴팍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죠는 수트 위로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을까. 느꼈다면… 그리고 죠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뗐을 때, 연출 스태프가 돌아다니며 곧 시작 시간이니 제자리로 서라며 목청을 높였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아. 너무 긴장하면 안 좋으니까. 이미 잘하니까 떨진 말고.”

 

그 말엔 마법처럼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백스테이지가 무척이나 북적거리는 틈을 타 쇼의 인트로가 시작됐다. 일순간에 소음이 멎었다. 쇼장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백스테이지까지 울렸다. 전부 나와 백스테이지의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컬렉션을 발표하는 자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노고가 담긴 결실이다. 모두가 이 쇼를 실수 없이 끝내리라는 사명감을 가졌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출전 직전의 장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결연한 얼굴들. 전운과도 비슷한 것이 감돌았다.

인터컴을 착용한 스태프가 카운트다운을 하더니 오프닝을 맡은 모델을 내보냈다. 원형의 쇼장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면 됐다. 앞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백스테이지 모니터 정면으로 케이가 보일 때, 어깨를 두드리며 큐 사인을 주었다. 가벽 앞으로 돌아나가며 어둠을 지나 환한 황금빛 조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건너편에선 한 바퀴를 이미 돌고 돌아오는 케이의 얼굴. 여느 때와 같이 교과서보다도 더 교과서 같고,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극찬하고는 하는 흠 잡을 데 없는 워킹. 그가 옷에 맞춰진 모델이 아니라 옷이 그에게 맞춰진 것 같다는 감상이 들게 했다.

그러니까 가끔 일하며 마주치는 케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닿으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올라가야 하는 곳은 얼마나 먼지 매일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를 위축시킨다기보다도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게 했다. 죠는 갈 길이 멀다고 해서 시도하기도 전에 좌절하는 군상의 인간이 아니다. 죠를 이루는 건 푸른 불꽃, 고요해 보이고 언뜻 무해하게도 보이지만 가장 위험하게 타오르는 것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쇼까지 끝났다. 인맥으로 일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걸, 그러니 부지런히 애프터파티를 참석해 요주의 인물들과 안면을 트고 눈도장을 찍어둬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부커도 신신당부했었고. 하지만 몇 번 참석해도 그런 자리가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는 속도가 느리더라도 마음에서 불편한 건 없었는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입에 꿀 바르고 비위를 맞추려고 들어야 하는 건 조금 거북했다. 쇼가 오후 3시에 끝났으니 굉장히 이르게 끝난 건데도 숙소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애프터파티에 참석하지 않아서.

돌아오자마자 씻고 침대에 누워 노트북으로 영화를 돌려보며 느릿느릿 감상을 떠올리는 느긋한 오후. 며칠 뒤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지난 몇 주간 바빴으니 그동안은 잠깐 휴식이 주어진 셈이다. 해가 이르게 지는 겨울 오후의 창밖으로 에펠탑의 상부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상태로… 잠깐 졸았던가.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간 지도 한참이라 꺼진 노트북 화면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 액정이 반짝반짝 빛나며 진동하고 있었다. 전화 벨소리에 깬 것이다. 죠는 잠겨 있는 목을 푼다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케이 군?”
– 죠. 많이 바빠? 문자 보냈는데 답이 없길래. 혹시 지금 파티 중?
“아니요. 숙소입니다. 피곤해서 깜박 조느라… 확인을 하지 못했는데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는지…”
– 아. 그게 말이야…

 

부커와 식사하려고 레스토랑을 예약해뒀는데 일이 생겨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숙소라면 잠깐 나오지 않겠냐는 거였다. 죠는 냉큼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곧 머뭇대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

 

“…저 준비하고 나가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괜찮나요.”
– 나도 쇼 방금 끝나서 잠깐 얼굴 정도는 비추고 와야 해. 예약은 아홉시 반이라 넉넉한데, 어때?

 

냉큼 좋다고 대답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문자로 주소를 알려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덜 깨서 그런가. 잠시 손에 쥔 전화기를 내려보았다. 일곱 시를 막 넘긴 시점. 넉넉하다 못해 여유로웠다.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으니 알아서 화면이 까매졌다. 뭔가 좀 다른데… 그러니까 평소에도 사적으로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오늘은 뭔가…

 

[ 복잡하면 우버 타고 와. 내줄게. ]
[ maps.app.goo.gl/wyzpdWkd….]

 

다른 것 같다고…

다시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으니 또 꺼진다.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밝히면 여전히 잠금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당탕, 전에 없이 침대에서 급하게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질 뻔했다. 자느라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빗으며 캐리어를 열었다.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는 일식 레스토랑이었다. 먼저 도착해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롱코트 자락에, 목뒤를 살짝 덮는 기장의 뒷머리를 휘날리며 케이가 도착했다. 프라이빗한 룸으로 안내받아 식사했다. 해외 나온 뒤로 퓨전도 아니고 정통 일식을 먹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무아지경으로 먹을 뻔했다. 스시나 캘리포니아 롤만 넙죽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한 국물 요리가 나왔을 땐 반가워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셰프가 엄선했다는 주류도 곁들였더니 식사가 끝날 즈음엔 살짝 기분 좋을 정도로만 취기가 올랐다. 디너 코스를 끝내고 나왔을 땐 이미 늦은 시각이라 거리의 상점들은 거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콜타임이 아침 이른 시각이었던 데다, 패션위크 내내 강행군이었던 터라 이만하고 들어가서 푹 쉬자는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밥도 먹었으니 돌아가자는 말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산책… 하실래요.”
“어디까지?”

 

죠는 알 수 없는 얼굴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에펠탑?”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만 한 게 안 보이냐고 헛소리하지 말자고 할 법도 한데 케이는 흔쾌히 그러자 했다. 산책을 좋아한다고, 처음 외국에 나왔을 때 얼른 이곳이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란 걸 익히려고 집 근처를 참 많이 돌아다녔다고 했다. 옷을 입고 벗는 게 일이라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 것처럼 워킹도 따지고 보면 일이기는 했지만, 산책은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만 있는 건 아니다. 홀로 하는 것과 둘이 하는 산책도 다르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강의 전경을 따라 에펠탑까지 한참을 걸었다. 돌아가는 길이 힘들겠다고, 내일이면 다리가 퉁퉁 붓겠다고, 내일은 쉬는 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들이 머리를 휘감았지만 사실은 즐거웠다. 다리를 빛내는 조명,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 막연히 상상하기만 하던 낭만적인 파리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요한 공기 중의 들뜸에 함께 걷는 사람의 지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구태여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다리 한 켠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멈춰서서 잠깐 감상하기도 했다. 악기 하나쯤은 배워뒀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을 했으면 어땠을까. 모델이 아닌 음악이었다면. 그 세계에서도 그를 존경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그를 길잡이별로 삼았을 테다. 우상으로, 스승으로, 넘어서고 싶은 지표로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갖고 싶었겠지. 누구나 한 번쯤은 별을 손에 쥐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까.

언젠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보았던 것처럼 어떤 세계에서도 그랬을 거라고.

 

“재미있지 않아?”
“뭐가요?”
“모델이라는 직업 말이야.”
“즐거워요.”

 

즐겁다. 쇼장에 서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감각을 모를 자신이 안타까워질 만큼.

 

“너, 쇼핑몰 모델로 시작했다고 했었지?”
“네.”
“캐스팅이었어? 아니면 원래부터 모델이 꿈이었나?”
“형 아는 분이 쇼핑몰을 한다고 하셔서… 바이토처럼 하다가 에이전시에 캐스팅되었습니다.”

 

뭐야. 쇼핑몰 모델 바이토 하는 고교생이라니… 잘 어울리잖아. 케이가 조용히 감탄했다.

 

“인기 많았겠는데. 그치?”
“아니요.”
“…….”
“…….”
“……조금은, 있었습니다…….”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죠가 실토했다.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던 케이가 표정을 풀고 웃었다.

 

“모델이 아니었다면 뭘 했을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진학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머니가 거듭 권유하신 대로 쥬논보이 콘테스트에 나가봤을지도 모르고요.”
“캐스팅이 아니었대도 모델이었을지도 모르는 거구나.”

 

케이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모델은… 글쎄. 잘 모르겠어. 키가 크니까 해보면 좋겠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었지만. 원래는 운동을 했으니까 계속 그걸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인생이 튀는 게. 야경을 그대로 담은 시선이 먼 곳을 훑었다. 한때 진지하게 마라톤 선수를 꿈꾸었다는 그의 인생사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공개되었고, 또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고교 시절 관동의 가장 뛰어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는 그가 불현듯 트랙에서 내려오기를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본인은 그것을 더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그게 처음부터 쇼장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겪어보니까,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거야. 신기하지?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인데도 말이야.”

 

왜 무대에선 그렇게 반짝거리는 걸까? 아주 잠깐 타오를 뿐인데도 다들 그곳으로 가고 싶어서 안달인 걸까. 촛불처럼 금방 꺼져버린 대도 괜찮은지, 그게 계속 궁금했어. 처음 런웨이를 걸으면서 알았지. 한 번 무대에 선 사람은 영영 이 아래로 돌아갈 수 없는 거구나. 런웨이를 밟은 사람은 그 순간을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어버리더라. 그때 알았어. 그 조명 아래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걸.

 

사랑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그의 얼굴이 참 반짝거렸다. 저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는 것만큼이나 이게 희박한 일이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죠는 투명해 맑은 물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거나 남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군상의 인간은 명백히 아니었다. 그가 느낀 것들을 타인에게 확인받는다거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었는데, 자꾸만 그러고 싶어졌다. 증명해 보이고 싶다기보다도 어린아이처럼 독점욕을 부리고 싶다는 것에 가까운 걸지도 몰랐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지도 몰랐다. 이 관계는 타인과 구별된다는 차별성을 구체화하고픈, 관계의 유일함을 욕망해 발화함으로써 사실을 공고히 하고 싶은 욕구인 걸지도 몰랐다.

사실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을 뿐이지만 그게 전부 진실로 욕망한다는 마음이라는 걸 안다. 처음 발을 들일 때만 해도, 더 이전으로 가 길지 않은 생의 전반을 통틀어서도 사람을 욕심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죠. 너도 잘할 거야. 우린 닮은 구석이 있고…”

 

케이가 옆을 돌아봤다. 부지런히 걸은 탓에 에펠탑이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아주 오래 걸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라면 곧 도착하겠다. 역시, 직접 걸어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지루하도록 평탄하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에 아사쿠라 죠라는 소년이 난입해버린 것처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위크 마지막 날인데 그대로 숙소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보폭을 맞추어 걷는 케이의 옆얼굴. 키가 비슷한 탓에 올려다볼 필요도, 내려다볼 필요도 없이 곧장 가 닿는 시선은 직선으로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이 좋다. 케이가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열어 보인다는 사실도 좋았다. 이런 순간이라면 영영 끝나지 않아도 좋을 거라고 여겼다.

죠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욕망은… 번듯한 라이벌이 되고 싶은 동시에 그를 품에 끌어안을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연인,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관계.

 

“…오래전부터,”
“응?”
“케이 군을 지켜봐 왔어요.”

 

뭐야, 그 말은? 조금 무섭잖아. 케이가 민망한 분위기를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케이 군과 시간을 보낼수록 더 많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사적이고 내밀한 모습들까지요.”
“…….”

 

연인으로서의 그도 알고 싶다. 전부 알고 싶고, 전부 보고 싶다. 그 욕심이 점점 몸집을 부풀리다가 지금처럼 펑 하고 터져버릴 거라는 것도,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 필사적으로 무시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뭘?”
“저를 교제 상대로 삼는 것에 대해서요.”

 

정중했고, 간결했고, 그래서 더 당황했다.

사실 내지른 당사자인 죠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라, 이따금 강변을 따라 지나가던 행인들이 몹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땅에 발을 붙이고 선 것 같은 두 남자를 흘끗댔다. 뭐가 됐든 잘 차려입은 차림에, 여행객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여기 산다거나, 또 일반인도 아닌 것 같은 남자 둘이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딴 세상인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데 시선이 안 가는 것도 이상한 거다. 두 사람 다 그런 시선에는 익숙하기도 했거니와 신경 쓸 여유도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가고 인적은 드문데다가 야경은 금방이라도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했지만… 냅다 던져진 고백과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케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있었다. 방금 들은 게 이제 막 미성년자 딱지를 뗀 애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막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화제성으로 고참 선배들의 시기질투와 애정없는 눈총을 한 몸에 받았던 같은 나이의 자신을 떠올려본다. 그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나 했던가?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단순한 업계 후배라기엔 좀 많이 신경 썼다. 인정한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대하는 정도를 조금 넘어섰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죠를 곁에 둘 때 조급한 마음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위기의식을 느끼니까. 그것들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언젠가 코앞까지 다가온 전복의 수순을 마주한다면 그건 분명 지겹게 해왔던 거울 속 나 자신과의 줄다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즐거울 거라고. 아찔한 스릴감을 느끼고 싶다는, 그런 마음들이 계속해서 생기니까.

 

“…죠, 너 말이야. 내가 왜 좋은 건데?”

 

여지를 줬다고 느끼니까 마음을 받아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헷갈리게 굴었던가? 전혀 모르겠다고…

하지만 돌아온 죠의 대답은 또 예상과 달랐다. 하여간 예상을 따라가는 일이 없는 애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하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감정의 증명을 원하시는 건가요.”
“하나를 선택하면 답이 달라지나?”

 

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달라지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곧았고 확신이 있었다. 그럴만한 이미지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목소리 때문에라도 충동적으로 내지른 고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 타이밍을 노려온 것 같기만 했다.

 

예전부터 키가 크니 모델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들어왔다. 워낙 얼굴이 작아 비율이 좋고 잘생겼으니 모델 선발 콘테스트를 권유받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면 케이가 없어도 이 일을 했을 것이다.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세계를 열어준 경험도, 꿈이 더 넓어진다는 경험도 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뚜렷한 이정표 없이는 괜찮지 않을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걸 끌어안고 허전한 공간이 있다는 걸 느끼며 그곳에 무엇이 필요한지 골몰하느라 시간을 낭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이라면 살고 싶지 않았다. 아사쿠라 죠라는 사람이 목표 없이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안 이상은.

 

“케이 군이 제 세계를 넓혀주셨습니다. 만난 것으로 인해 꿈이 더 넓어졌고, 닿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세계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고백이 아니라 라이벌 선포나 다름없는 말 아닌가? 그런 웃지 못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면 거짓일 테다. 그러자 조금 긴장이 풀리기도 해서, 우뚝 멈춰선 발걸음은 한참 뒤에야 재개되었다.

 

“승부욕과 사랑이 양립 가능하다고 믿어?”
“가능합니다.”

 

이것도 증명해 보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험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케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죠. 나는 좋아하는 상대라고 해서 순순히 져주고 그러지 않는데?”
“케이 군이야말로… 저도, 좋아하는 상대라도 진심으로 승부합니다.”

 

살짝 발끈한 티가 났다. 그게 느껴져서, 아 맞다 아직 어린애긴 했었지 하는 생각이. 그러나 이 자리는 너무나 고독하기에, 이렇게 어린애한테 기대를 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양보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죠, 최선을 다해서 나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해라. 절대 넘겨주지 않을 테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절대로 뛰어넘을 수 있도록.”

 

여유 부릴 수 없게 위협해오는 도전자를 맞아주는 것은 일인자의 미덕. 하지만 그게 사랑이라면?

자신을 보는 눈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언제부터 그랬는지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래도, 뭔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Finale

 

어쩌다 보니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롱디였다. 죠는 다시 뉴욕에, 케이는 여권 출입국 도장 잉크가 마를 새도 없이 바쁘게 온 세계를 쏘다녔다. 못해도 대여섯 시간씩은 시차가 나는 서로의 일상이 금세 익숙해졌다. 자려고 누웠어요 할 때 난 이제 나가보려고 그런데 일어나기 싫다는 말이 오가는 게 평범했다. 휴일에도 서로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나마 패션 위크 동안에는 같은 나라 같은 시간대를 보낼 수 있다. 일부러 같은 숙소를 잡았다. 그러면 같은 침대라도 쓸 수 있었다. 온종일 오디션을 보거나 피팅하고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면, 중간에 옆구리를 데우는 온기가 느껴졌다. 깨어났을 때도 둘 중 하나가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적어도 자는 상대방의 모습을 볼 수 있기라도 하니까 좋았다.

이듬해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이 얼추 공개되었다. 젠더리스로 진행하는 쇼들을 제외하고는 위크가 끝났다. 내달이면 파리에서 오트 쿠튀르가 열린다. 어차피 다시 돌아와야 하니 죠는 그때까지 파리에서 머물기로 했다. 케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에서 의류 광고를 촬영해야 했기에 잠시 귀국해야 했다. 그랬던 탓에 하루하루가 소중한 이 롱디 커플에게 다시 떨어짐의 순간이 잠깐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멀어짐 같은 것은 이제 재회의 순간을 더욱 갈망하게 하는 조미료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불이 붙기도 금방이었다. 길쭉한 두 남자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툭툭 떨구며 침대로 이동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적어도 몇 시간 전의 일은.

격렬한 운동이 끝난 뒤 찝찝한 건 못 참는 케이의 성미에 욕실로 들어갔다가 한 번 더 하고, 씻고 돌아온 참이었다. 깨끗한 몸으로 함께 누운 뒤엔 다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느긋하게 했다. 일본에 다녀온 건 세계적인 스포츠 웨어 브랜드의 광고 촬영 때문이라 함께 합을 맞춘 건 지난 올림픽에서 메달을 안겨주며 단숨에 인기를 얻었던 유도 선수였다. 죠보다도 어렸는데 여러 방송에 나오며 한참 주가를 올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흥미로웠던 건 다른 거였는데.

 

“연기요?”
“가벼운 시트콤이라고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되겠지.”
“대단하네요…”
“논의 단계고 아직 확정 나지도 않았어. 해봤자 카메오 정도겠지. 엑스트라거나. 그때 즈음이면 크게 바쁘지 않기도 할 테고.”

 

대단해 보이는 것도 그랬거니와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연기는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잘하실 것 같은데요.“

 

죠가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넌 어떤데? 관심 있어?”
“연기 활동이요? 해보고 싶기는 해요. 아직은 이 일이 더 좋아서 나중의 일이겠지만요.”

 

꿈도 크고 야망도 많단 말이지. 음… 어디 한번 보자.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얼굴을 괴고 있던 케이가 손을 뻗어 죠의 턱 끝을 가볍게 쥐었다. 얼굴을 돌려보는 체한다.

 

“넌 잘되겠다. 배우 마스크야.”
“케이 군은요?”
“난… 그러게.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전부 질려서 말이야…”
“…….”
“그런데 널 만나고 나서 달라졌어. 하나도 안 지겹고, 오히려 무서워.”
“…설마… 제가 케이 군을 무섭게 만든 건가요?”
“그래.”

 

목덜미에서부터 붉은 기가 점점 번져갔다. 이러다 애가 완전히 토마토가 되어버리겠잖아.

 

“어이. 너무 좋아하진 말라고. 하여간 취향…”

 

그래도 기분이 좋은걸요. 그렇게 말하는 죠는 꽤 기뻐 보이는 기색이다. 케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기뻐하지 말라고 면박을 줬다.

예전이라면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텐데, 관계가 바뀌면서 수반된 변화 중 하나다. 그런 변화들을 나열하기 위해서는 지면이 부족할 테다.

 

“런웨이에 설 수 없을 때가 오면… 글쎄.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춤을 좀 배울까.”
“춤이요?”
“나를 표현하는 거니까, 그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래 봬도 나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그건 알고 있어요…”

 

어째 말꼬리가 부자연스럽게 길어지는 게 수상하다.

 

“이봐, 이봐! 귀가 또 빨개졌잖아!”
“그런 상상 안 했어요…”
“‘그런 상상’이 뭔데?”
“…….”
“거봐, 말 못 하겠지?”
“……”

 

살짝 삐진 표정이다. 케이는 본격적으로 놀릴까 하다가, 연인 사이에 너무 애 취급하는 것도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아 말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삐진 표정까지 구분할 수 있게 되다니 역시 신기했다. 그냥 다. 그렇게 얼굴을 들여다본 것도, 알게 될 만큼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그에겐 전부 보여주는 것도 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다. 물론 새삼스럽게 놀라기엔 진도야 이미 끝까지 뺀 지 오래고 둘이서 별걸 다 하고 난 다음이지만.

귀여운 모습들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새롭게 사랑스러웠다.

 

“…제 말은 잘 어울린다고요. 보고 싶어요. 케이 군이 춤추는 모습도. 물론 모델일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케이 군이 다른 일을 할 때 어떤 모습일지도 알고 싶어요. 보고 싶습니다.”

 

재미없다고 여겼었다. 전부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홀로 있어 고독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적수로 키울 수 있을 가능성을 찾았다. 가르친 적도 없지만 멋대로 그에게서 배워간 것이 있는 제자이자 도전자이고, 경쟁자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시에…

 

“오마에…”

 

사랑스러운 그의 어린 연인.

 

함께 있으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매일 받게 될 거야. 그렇지? 너는 나를 전복시키려 하고 나는 방어하려 하니까.

그러니 우린, 쇼장의 찬란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영원히.

첫 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