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파도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마다 파도가 주어지진 않지만 일렁여본 것에는 반드시 붙는다. 그래서 아사쿠라 죠는 물살을 탔다. 사계가 여상한 미야자키의 바다에 더께로 기어들었다.
미야자키. 일본 본토 최남단에 위치한 서핑의 메카. 미약한 수신호와 철도로 아날로그식 정서를 자극하고 빗줄기는 연일 자리를 깔고 뻗댄다. 여름이면 몰려든 관광객들이 개미 떼만큼 드글댔다. 죄다 서핑 보드에 배를 붙인 채 개구리처럼 팔을 저었다. 목덜미부터 등까지 새빨갛게 익어가는 줄도 모른 채.
때마침 먼장에서부터 파도가 일었다. 검질기게 달라붙은 물방울들이 줄지어 역류했다. 드높이 치솟는 와중에도 고요했다. 인위적인 비명들이 늘어지고 심해는 바닷물을 거꾸로 토했다. 변죽을 시작으로 파도가 부서져만 갔다. 낱낱이 흩어졌다. 징그러운 거품으로 형태를 고쳤다. 진창이 된 몰골이지만 줄기의 시절보다 억셌다. 끓듯이 부글대며 몰아쳤다.
유다이는 해변을 밟았다. 달궈진 모래알이 샌들 새로 굴러들어왔다. 바다에 다가설수록 색이 짙었다. 물길이 스며든 부위만 끈적했다. 한 번 디딜 때마다 깊숙이 무게가 실렸다. 맨발이 새카매지도록 걸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뒷덜미를 희롱했다.
흘러온 인파가 해변과 바다의 경계를 메웠다. 하나같이 저가형 서핑 보드를 품에 안고 수면을 찰박였다. 유다이는 보기 드문 맨손이었다. 더는 옆구리에 낄 보드가 없었다. 조각난 파도는 전성기인데 유다이는 부서진 뒤 멈춰 섰다. 파도든 인간이든 깨지고 나면 납땜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유다이는 여전히 금이 간 채 여기 섰다.
수평선이 태양 빛을 머금고 눈가가 무덥다. 또다시 귀 따가운 고성이 울렸다. 파질이 소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유다이는 폐가 아릴 만큼 숨을 삼켰다. 그 애의 이름을 붙여줄 파도가 없었다.
じょー、波に乗ってるの?
나미니 놋테루노. 파도를 타고 있느냐고 물었다. 실은 묻기보다 들려주고 싶은 게 많았다. 서핑을 관뒀고 천둥이 무섭고 매일 익사 직전의 누구를 구한다고. 웃긴 일이었다. 걔만 빼고 전부 닥쳐왔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간추려보자. 부서진 것은 파도와 서핑 보드와 유다이. 개중 죠만이 이을 수 있는 게 있다. 금이 가서는 안 되는 것이 그렇게 됐다. 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만큼을 견딜 수 있게끔 재단되지 않았다.
수박 무늬의 비치볼이 유다이의 뒤통수를 후렸다. 하는 둥 마는 둥 한 고멘 소리 뒤로 멀찌감치 달아났다. 축축한 열기가 점액질처럼 전신을 주물럭댔다. 쓰나미 같이 밀려드는 해수와 소금에 절여진 낯짝들. 비릿한 함성은 이내 숨과 함께 익사한다. 잡아먹힌다. 유다이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
미야자키. 귓가에 아지랑이가 타오르고 발치로는 빗방울이 낭자하는 곳. 폐가 잠기고 파도에 휩쓸리고 비로소 바다에 삼켜진다. 물가를 타고 서핑 보드가 떠내려온다.
이곳에 통째로 여름이 박혔다.
죠는 1년 전 실종됐다.
바이 마이 보이
혼다
나 그리고 있었던 거야?
그날은 소년이 해변에 개근한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응?
유다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태양을 등진 얼굴이 깜깜했다. 짧은 바짓단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졌다. 소년의 시선이 서서히 들렸다. 모래가 묻은 무릎부터 땀이 묻은 쇄골뼈까지. 유다이는 키가 컸고 그래서 맞닿는 궤도가 길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입술을 떨었다. 한 마디를 꽂아 넣을 때마다 모래에 파묻힌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세운 무릎에 가지런히 얹혀 있던 스케치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 그게. 소년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한참의 공백을 씹어내고 버겁게 목젖이 울렁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 아래켠에 도톰한 입술이 뻐금댔다. 한동안 말씨를 고르는 듯하더니 끝내는 끄덕임이 돌아왔다. 기름칠을 미룬 깡통 로봇처럼 뻣뻣했다.
가만히 소년을 기다리던 유다이가 분수처럼 끓어올랐다. 뱃구레를 힘주어 당기더니 허리가 홀딱 뒤로 넘어갔다. 단전에서부터 웃음이 터졌다. 와하하 대박! 그늘졌던 얼굴이 환하게 빛을 받았다. 앞머리가 호선을 그리며 나부꼈다. 연한 모질 말단을 따라 바닷물이 탄산처럼 따끔댔다.
자세히 보여주면 안 돼?
웃음기가 혀끝에 간지럽게 매달려 있었다. 소년은 떨궜던 스케치북을 주워들었다. 단정한 움직임을 따라 유다이가 무게 중심을 낮췄다.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어깨로 금방 머물러있던 페이지를 펼쳤다. 두 갈래의 초점이 한 데서 뭉쳤다.
연필 한 자루로 담아낸 유다이의 순간. 단색의 그림 속에는 파도를 타는 유다이가 있다. 미야자키의 눈부신 바다에서 가장 역동적인 남자. 물비늘만큼 자유롭고 뙤약볕보다 반짝인다. 소년이 훔친 유다이의 열이 여실히 옮겨져 있었다.
큰 기대를 않았던 모양인지 유다이는 거의 튕겨지다시피 했다. 뭐야 엄청 잘 그리잖아! 눈두덩이가 뻐근할 만치 눈썹을 추켰는데 동공이 워낙 커서 검은자가 남았다. 허리를 굽히다 못해 스케치북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이거 오히려 그려진 쪽이 영광이랄까. 높이가 엇비슷해서 대놓고 눈이 맞았다.
……몰래 그려버려서 죄송합니다.
응?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완전 마음에 드니까.
소년의 정수리로 유다이의 손이 얹혔다. 내 팬은 언제나 환영이야. 한쪽 눈이 느긋하게 감겨들며 능글맞은 얼굴이 됐다. 소년은 이제 터지기 직전이다. 안면은 고사하고 귀 끝까지 벌게져 곧 피를 토할 것 같았다. 고마워. 내 이름 알아? 네 코가상……. 에! 불공평하네. 나는 네 이름 모르는데. 소년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헝클어졌다. 끓는 물을 떠안은 주전자처럼 김이 샜다. 소년은 두텁게 침을 삼켰다.
불볕이 머리꼭지를 무덥게 데웠다. 두피를 뒤덮은 체온은 그보다 한 겹 더 뜨겁고 물에 젖어 습했다. 유다이는 상쾌한 손길로 소년을 헤집었다. 엉켜든 건 더는 머리칼 뿐만이 아니었다. 바다가 테두리 밖으로 넘칠 것처럼 찰랑였다. 이상하리만치 아득하고 생경했다. 소년의 입술이 벌어졌다. 마음이 범람했다.
아사쿠라 죠입니다.
둘은 6월에 처음 만났다.
–
불꽃이 역류하듯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찰나의 방심에도 구역질이 차오르는 열기. 만개한 물꽃 아래 남자가 파도를 흩뿌렸다. 바싹 젖은 민소매가 살갗에 입을 맞췄다. 구석구석 갈라지는 근육을 따라 꿈틀댄다.
헤에, 스게! 케이군 각코이!
케이. 본명 코가 유다이의 열도 제일가는 파도 메이트. 바다에도 주인이 있다면 현재 미야자키는 그의 것이다.
사인이 박힌 커스텀 보드가 하얗게 번쩍거렸다. 백팔십을 너끈히 넘긴 장신에 훌륭한 비주얼. 스포츠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팬서비스까지 더해져 루키 시절부터 수시로 입소문을 탔다.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 유다이는 전국 단위의 대회에서 줄줄이 입상했다. 매번 탁월한 센스로 파도를 골랐다. 실력이 받쳐주니 금방 코어 팬이 모였다. 케이는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육상으로 밥벌이를 꿈꾸던 시절은 전생 같고 지금은 전세계의 바다를 나돌며 서핑을 한다. 매 순간 쪼개지려 들던 기도가 이젠 흠뻑 물러터지기 직전이었다. 적당히 호흡하는 법을 몰랐다.
얼마 전에는 큰 건의 대회를 마쳐 한 달 만에 귀국했다. 교토의 두 배가량 되는 오아후. 개중에서도 가장 명소로 칭송되는 와이키키였다. 집채만 한 물결이 들썩이는 곳에서 해수면 위를 달렸다. 잔물결이 발끝을 타고 심장까지 요동쳤다. 불가항력의 재난을 교감했다. 바람을 깨뜨리며 달리던 때와 비슷했다. 단지 안달 내기 바빴던 숨을 버리게 되었을 뿐이다.
저와 속도가 맞는 파도를 찾아 고르고 떠미는 대로 부유했다. 안정적인 테이크 오프 뒤로 화려한 턴이 이어졌다. 여백 없이도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콧잔등 위로 날렸다. 막판엔 동그랗게 말린 배럴을 탔고 우승했다. 골인점 없는 스포츠에 완주가 습관인 남자가 붙었다. 이역만리의 하와이에서도 징그럽게 빛나는 게 당연했다.
캘리포니아가 아닌 이곳 규슈로 돌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가빴다. 십년 간 태울 줄밖에 모르던 폐에 바닷물을 들이부었다. 삶이 침수될지 모르는 도박이었다. 때문에 물살에도 작열하는 불씨를 만들어냈고. 아마 서핑을 시작하고 마신 물이 육상부 시절 흘린 땀의 곱절은 됐을 것이다. 유다이는 쉼 없이 달려본 만큼 균형의 중요성을 익히 알았다. 한 마디로 미야자키는 유다이의 갓길. 다음 바다를 위한 선착장이었다.
케이군 팬이에요!
수상 스포츠는 불모지 수준인 이곳에 나타난 마린 왕자가 아니던가. 유다이는 쇄도하는 사인 요청과 플래시를 스포트라이트 쯤 여겼다. 그럴 때면 바다가 꼭 제 삶의 독무대처럼 느껴졌다. 환호성이 앙상블이 되어 발치를 띄워 올린다.
이런 유다이에게도 유별하게 느껴지는 씬이라면 하나가 있었는데,
아사쿠라! 뭐 하고 있어?
이름하야 백사장 위의 고흐. 고흐와 바흐를 헷갈려 하는 유다이에게 정숙한 가르침을 내어주면서부터 별명이 붙었다. 스케치북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벗겨졌다. 스케치 중이었어요. 종일 자외선에 노출된 것 치고 뽀얀 볼이었다. 또 나야? 그렇습니다. 입술이 야무지게 다물렸다. 죠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일전에 도둑 크로키를 들켰을 땐 곧 발사라도 될 것처럼 달뜨더니 이젠 어떤 자세를 그려보고 싶은지 종알댔다. 유다이는 난무하는 셔터보다 죠의 필압을 좋아했다. 수천만 화소의 카메라가 개발되는 시대에 연필 한 자루로 뻗대는 기세와 정성스레 눌러 담긴 시선이 유독 그랬다. 파도를 나란히 한 어깨보다는 바다 위 질주를 자주 그린다. 얼굴의 디테일보다는 머릿결과 몸선을 공들여 묘사한다. 순한 인상과는 다르게 선의 질감이 거칠다. 주체는 모두 아사쿠라 죠. 거기서 성격이 전부 보였다. 죠는 매일 보여주는 그림으로 백 마디 대화보다 조잘댔다.
제대로 된 용건을 공유하게 된 건 엊그제였다. 해가 잠겨 들기 직전이었고 바닷물이 제법 식은 때였다. 죠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귀가했다. 일몰 언저리였다. 햇빛으로 시야를 텄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였다. 스케치북과 코끝의 거리가 당겨지더니 얼마 안 가 연필을 놓았다. 모래가 정신없이 발린 엉덩이를 털어내고 사장을 가로질렀다. 동태를 살피던 유다이가 금방 말린 샌들을 구겨 신었다. 죠의 발자국 뒤로 짙은 밑창이 연이어 새겨졌다.
은밀한 스토킹은 죠의 대문 앞까지 이어졌다. 유다이는 들키지 않게 멀찍이 물러났다 가까이 따라붙기를 반복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스타일이라 걱정했는데 죠가 한 꺼풀 더 둔했다.
죠는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다리가 길어 보폭이 컸고. 늘 드나드는 골목 어귀를 두리번댔다. 가끔 하늘도 올려다봤다. 허공에 알아볼 수 없는 손장난을 치다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따분한 기색조차 없이 걷는데 문득 시선이 아래로 꽂혔다. 삼색 털의 길고양이였다. 죠의 몸이 풀썩 꺼졌다. 잔뜩 구겨진 채로 앉아서는 익숙하게 손짓했다. 고양이 좋아하나. 유다이는 귀퉁이 너머에서 죠를 관찰했다. 슬쩍 보이는 광대가 방긋하게 솟아 있었다. 확실히 좋아하는구나. 바닷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대여섯번 지나갔다. 죠는 껌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그즈음 허리를 세웠다. 아쉬운 기색을 뒤로 하고 다시 걸었다. 아까와 같은 속도였다.
해변에서 집까지는 20분이채 안 걸렸다. 딴짓을 않고 걷는다면 절반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대문 앞에 선 죠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열쇠가 나왔다. 단단히 묶인 자물쇠에 열쇠 밑동을 밀어 넣었을 때였다.
죠군 잠깐 시간 돼?
죠는 번개라도 맞은 듯 바들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쇠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어, 코가상……. 등 뒤에 선 유다이가 손짓으로 인사했다. 잠시간 눈동자를 굴리던 죠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많이 놀랐어? 이번엔 작은 정수리가 좌우로 오갔다. 놀래켜주고 싶어서 몰래 따라왔는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괜찮습니다. 말하는 새 어느덧 신발코가 마주 볼 만큼 가까워졌다.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죠의 눈꺼풀이 굼뜨게 깜빡였다. 빽빽한 속눈썹이 눈가를 간지럽히다 달아났다. ……알겠습니다. 마침표가 떨어지자마자 유다이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응?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 죠가 어벙하게 입을 벌리며 탄식했다. 유다이는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옆구리가 동파된 수도처럼 사방으로 호흡이 튀었다.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죠는 삽시간에 투명해졌다. 살갗이 모조리 투명해지는 바람에 피가 그대로 비쳤다. 귀 끝부터 목덜미까지 푹 익은 과일처럼 물러졌다.
이 집 나 줄래 아니면. 별 좀 따다 줄래? 유다이가 검지 끝으로 죠의 어깨를 찔렀다. 죠는 건드리는 대로 밭은소리를 냈다. 완전 풋내음 덩어리였다. 입에 넣으면 혀끝이 아릴 만치 떫을 것 같다. 발열하는 귓가에 대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 부탁이었으면 어쩌려고. 사근사근하게 접힌 눈꼬리가 얕게 감겨들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에, 농담도 참.
기분 좋은 손길이 점진적으로 거둬졌다. 있지 죠군, 그림 무척 잘 그리잖아. 발그레한 뺨이 묘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말인데.
내 보드에 그림 그려줄 수 있어?
희미한 태양 빛이 바람결에 경로를 바꿔 죠에게로 꽂혔다. 유다이의 목소리가 거기 섞여 고막에 맺혔다. 보드가 하도 오래돼서 금이 갔고, 그 위에 덧칠을 해주지 않겠느냐고. 그런 지엽적인 설명이 이어지기도 전에 죠가 승낙했다. 고민의 낌새도 없어서 민망할 정도였다.
해가 철근처럼 내려앉았다. 시소라도 탄 듯 달이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둘은 그즈음 헤어졌다. 고마워, 잘 부탁해. 시작도 마무리도 유다이의 몫이었다. 죠는 해와 달을 인 저울처럼 기울어만 갔다.
바이바이. 내일 봐!
그 순간 죠는 아주 기우뚱했다. 떨어진 열쇠가 한참이고 바닥을 뒹굴었다.
–
연일 물갈이되는 객실. 숨만 쉬어도 숙박비가 밑 빠진 독처럼 새는 성수기의 미야자키. 유다이는 이곳의 유별난 장기투숙객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커튼에 가로막혔다. 유다이는오늘 아침 새로 간 침대보에 배를 대고 누웠다. 귀에는 재즈 플레이리스트가 반복 재생되고 코로는 엄격하게 선별한 디퓨저 향이 났다. 탁자 옆에는 서핑 보드가 종류별로 늘어져 있었다. 제 집이 아닌 것치고는 유다이의 취향만이 남은 공간. 뭉근하게 기지개를 켠 유다이가 침대 위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조악한 볼펜 한 자루를 쥐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죠군, 나 한 번 봐봐.
처박혀 있던 고개가 발딱 들렸다. 유다이는 팔을 뻗어 볼펜으로 비율을 쟀다. 한쪽 눈을 감자 자연스레 윙크하는 모양새가 됐다. 창작물 속 뻔한 클리셰였다. 오케이 대충 알겠어. 다시 시선이 스케치북으로 옮겨갔다. 바람을 넣은 볼이 볼록하게 올랐다. 죠는 제 얼굴 그리기에 열중한 유다이를 응시하다 슬며시 웃었다.
웃긴 건 웃긴 거였고, 죠는 현재 골치가 아팠다. 유다이의 보드 리모델링 요청을 승낙했으며 숙소로 부르길래 거기까지 왔다. 유다이가 내민 보드는 이미 닳도록 목격해 익숙한 것이었다. 대회는 물론이거니와 해변에서도 매번 끼고 다니던 보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핑을 시작하고 처음 장만해 애착이 어지간하다고 했다. 5년도 넘게 쓰는 동안 금이 간 것을 몇 번이고 보수했다. 수명이 거의 다 해 말끔하던 에폭시에도 흉이 졌다. 그 흉터 위로 물감을 덧대는 것이 죠의 임무였고.
유다이가 스케치북 한 바닥을 전부 칠해갈 때 즈음에서야 죠는 처음 연필을 들었다. 도화지라 여기고 마음껏 그려. 유다이 쪽이 몇 번을 어르고 달랬는데도 망설임을 못 거뒀다. 그러고도 한참 뜸을 들이더니 구석진 부분부터 스케치를 시작했다. 두더지처럼 바닥으로 꺼질 기세였다.
사각대는 소리가 이어지자 유다이가 고개를 갸웃대며 죠를 봤다. 납작 엎드린 채 집중한 모습이 어린 애 같았다. 가만 생각하니 어린 애가 맞았다. 시원찮게 웃고 있자니 죠가 금세 진도를 뺐다. 어느새 러프한 형태가 얼추잡혀 있었다.
음. 역시 예술은 이해하기 어렵달까.
여태 인물화만 봐서 몰랐는데 죠는 그림관이 독특했다. 종종 해골과 외계인이 등장했고 피인지 눈물인지 하여튼 뭔가가 자꾸 쏟아져 내렸다. 유다이는 약간 당황했고 이내 수긍했다. 저런 게 바로 예술의 세계구나. 죠, 벌써 아티스트적인 식견까지 갖추다니. 대단해. 일반인은 범접불가의 천재일지도. 거기까지 이르니 다소 난해해 보였던 스케치가 예술의 정수로 보였다. 이를테면 해골이 흘린 눈물 위에서 서핑하는 외계인 같은 거. 유다이는 참지 못하고 각코이 소리를 냈다. 그러면 죠가 빨개질 걸 알면서도.
열중한 죠가 더워 보이길래 에어컨 온도를 쭉쭉 내렸다. 리모컨이 연신 기계음을 냈다. 기세를 탄 유다이가 마저 스케치북을 끄적였다. 눈은 착하게 앞머리는 정갈하게 귀는 부채만 하게. 나름 죠의 이미지를 살리려 용을 썼다.
도구를 바꿔가며 색칠까지 끝낸 유다이가 양손으로 스케치북을 들었다. 셀카봉보다 긴 팔을 쭉 뻗어 완성된 그림을 찬찬히 훑었다. 곧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에에! 완전 최악이잖아.
초등생 수준의 결과물에 유다이가 석연찮은 얼굴을 했다. 맞은편 죠의 얼굴과 스케치북을 교대로 쳐다보다 자기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이 터졌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 소리를 냈다. 아 진짜 안 닮았어. 대박이야. 하도 리액션이 커서 죠의 주의도 함께 돌았다. 고개를 갸웃대길래 유다이는 말 대신 스케치북을 돌려주었다.
……제 그림인가요?
응. 미리 말해두지만 나 원래 그림 솜씨는 빵점이야. 놀리지 마.
죠는 거리 때문에 잘 안 보이는지 끙끙대다 몸까지 일으켜 다가왔다. 유다이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돌탑처럼 멎었다. 고개를 수그린 탓에 표정을 구분할 수 없어점점 열이 올랐다. 그, 너무 못 그렸다고 화내면 안 돼.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진짜 최선을 다한 거라고. 말꼬리가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죠는 여전히 그림 속 자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그림 제가 가져도 될까요.
응? 이걸? 유다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당황한 눈치였다. 비웃음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죠가 연거푸 뒷목을 쓸었다. 코가상이 그려주신 저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기뻐서……. 말이 맺어지지 못한 채 밤안개처럼 흩어졌다. 이불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유다이가 침대맡에 선 죠를 올려다봤다.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반짝거렸다. 콘텍트 렌즈도 이 정도로 구현하려면 신기술이 필요하지 싶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든 거야?
이거 멧챠 감동이잖아.
어느 포인트에서 감동을 받은 건지. 종국에는 기분이라며 저녁밥까지 사주겠다 선포했다. 무슨 음식 좋아해? 얼마든지 쏠게. 죠는 쑥스럽게 웃으며 한술 더 떴다. 흰쌀밥 좋아해요. 잘 지은 솥밥마냥 지글거렸다. 오키. 열 그릇 사줄게. 남기지 않겠습니다. 끓는점이 같은 분자 세트가 따로 없었다.
–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화려한 미장센이 그치고 엔딩 크레딧이 내렸다. 재밌네. 유다이가 명료한 감상을 내뱉었다. 멋지네요. 죠는 녹색 등대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두 사람분의 무릎을 덮은 이불이 구물댔다.
편의점 갈래?
그 한 마디에 둘은 호텔을 등지고 걸었다. 죠는 벌써 일주일째 유다이의 방으로 출석했다. 처음엔 착실히 그림만 그리다 가는 듯하더니 이틀째부터 샛길이 났다. 기다림에 재주가 없는 유다이가 대부분 먼저 말을 붙였다. 죠오. 안 지루해? 잠깐 산책 다녀올까? 배 안 고파? 밥 안 먹을래? 그도 그럴 것이 구경하는 걸 빼면 마땅히 할 짓이 없었다. 유다이가 찌르면 죠는 움푹 꺼졌다. 좋아요. 뭐만 하면 예스만 외쳐대는 바람에 어느덧 그림은 뒷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죠가 슬슬 물감을 꺼내 들던 차였는데, 유다이가 쿡 찔렀다. 영화 같이 보자. 그대로 두 시간을 1920년대 뉴욕에서 때웠다.
걸어서 10분 거리엔 잡화점이 있었고 5분을 더 걸으면 편의점이 나왔다. 금방 본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잡화점 불빛을 지나쳤다. 유다이는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집었다. 컵라면도 두당 하나씩 담았다. 죠가 주먹밥을 가져오는 동안 아이스크림 취향을 물었다. 나오는 길엔 나란히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문 채였다.
와 이제 해 져도 덥네.
유다이가 더운 숨을 뱉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바다 근처라……. 응. 좀 낫지? 발치로 조약돌이 굴렀다. 걸음마다 비닐봉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어스름한 귀뚜라미 울음과 섞여 제법 운치가 있었다.
바다에는 진짜 나 때문에 나왔던 거야?
파도 비린내에 물음표가 실렸다. 죠는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유다이가 기침하듯 웃었다. 진짜 너무 열성이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좋은 눈치였다.
평소엔 취미가 뭐야? 농구 좋아해요. 에 진짜? 잘 어울린다. 죠 키 크니까. 코가상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요. 소다 맛 같은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왜, 나보다 커지고 싶어? 죠는 대답이 없었다. 잔웃음을 털어내던 유다이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여름날 맥주캔처럼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새 불 꺼진 잡화점 앞을 지나칠 때였다. 오늘은 7월이었고, 몹시 더웠으며, 가는 길 목이 말랐다. 마침 유다이의 손바닥으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렸다. 참다못한 유다이가 비닐봉지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죠에게도 의사를 물으려는데 도중에 흐름이 끊겼다. 관절이 떫은 열매처럼 멈칫거렸다.
근데 죠, 술 먹을 수 있나?
죠의 반응이 굼떴다. 눈꺼풀이 힘주어 뜨이더니 눈동자가 빙글 굴렀다. 수상쩍은 반응에 유다이가 눈매를 좁혔다. 안 되는구나. 그러면서 내밀었던 캔맥주를 거두었다.
……모레부터 가능합니다.
에? 본능적인 되물음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죠는 어딘지 수줍어 보였다. 때마침 가로등 불빛이 죠의 콧잔등을 밝혔다. 제 손톱 끝을 무질서하게 갉아내던 죠가 고스란히 목도됐다. 유다이는 그 순간 아주 설마 했다. 모레 생일이야? 말끝이 붕 떴다. 캔맥주는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건넸다가 그쳤다가 어물쩍 맴돌았다. 그렇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다이만 난리가 났다. 뭐야 진짜! 뱃구레서부터 거름망 없는 호흡이 샜다. 말을 하지 그랬냐는 꾸지람부터 선물 걱정까지. 유다이는 급속으로 부산스러워졌다. 그러다 마지막엔 내키는 대로 결론을 냈다. 그럼 뭐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겠다. 고래 사이에 껴든 새우 같던 캔맥주를 다시금 디밀었다. 죠는 어쩐지 아쉬운 눈치였는데, 그제야 낯빛이 밝아졌다. 두 손으로 술을 받아들더니 고개까지 수그렸다. 그 모습에 또 유다이는 골 아프게 웃었고.
맑게 갠 밤하늘에 캔 따이는 소리가 뱄다. 간빠이! 캔 모서리가 탄력 있게 맞닿았다. 턱을 위로 들어 올린 유다이가 장난기에 젖은 눈을 했다. 아임 개츠비. 캔 끝에 찰랑이는 맥주를 내밀다이내 들이켰다. 죠의 눈가에 칼집 같은 주름이 졌다. 뒤집어져라 웃는 바람에 아스팔트 위로 술이 질질 흘렀다. 유다이는 캬 하고 혀뿌리를 터뜨렸고, 어때? 디카프리오 같아? 물었으며, 죠가 더 멋져요, 말했다.
편의점에서 5분, 잡화점에서 10분. 둘은 그날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어디를 걷는지도 모르고 호텔을 추 삼아 오래도록 돌았다. 고작 맥주 한 캔으로는 둘 다 취하지 않았는데 꼭 꽐라처럼 그랬다. 알코올을 대신한 미지에 취한 것처럼. 간지러운 파도 소리와 생생한 로맨스 영화와 멍해지도록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 같은 거.
–
삶이란 자고로 기브 앤 테이크.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고 유다이는 오는 것 없이도 보내기를 좋아하는 기브의 남자였다.
말해보라니까.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그런 유다이에게 생일 선물을 거부하는 아이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였고.
안 그래도 무급으로 착취하는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단 말야.
……그치만 매번 밥 사주시잖아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아침부터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방 한 칸이 통째로 뒤집혔다. 주제는 죠의 생일 건. 뭐라도 사서 쥐여주고 싶은 유다이와 웬일로 예스를 넣어둔 예스맨이 맞부딪혔다. 그림은 맡겨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고 얻어먹은 끼니가 너무 많은 걸요.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은 목소리로 잘도 말대꾸를 했다. 어이어이. 내가 시켜놓고 밥도 안 맥이면 학대잖아……. 유다이가 답답한 듯 입김으로 앞머리를 붙어 넘겼다. 반질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원래도 핑퐁이 잘 되는 편이긴 했는데, 이날은 유독 남달랐다. 탁구 경기라면 기네스를 넘볼 만큼 희대의 랠리가 이어졌다.
원래 선물 받는 거 안 좋아해? 부담스럽게 안 여겨도 된다니까. 하지만 받은 게 이미 너무 많아요. 죠…… 내가 누군데. 그 정도는 그냥 당연히 해주는 거라고. 그즈음 가니 일부러 이러나 의심까지 갔다.
부끄러운 거면 종이에 써서 줘도 괜찮아.
이렇게 된 이상 유다이도 그냥은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바보 같은 우리 죠의 품에 억지로라도 쑤셔 넣을 참이었다. 유다이가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스케치북을 집어 들더니 기어코 한 장을 북 찢었다. 이렇게 귀한 기회가 오면 써먹을 줄도 알아야지. 아리송한 얼굴을 한 죠에게 종이를 건넸다.
죠는 얼떨결에 종이를 받아들었다. 백지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울상이 된 얼굴로 유다이를 봤다. 어어 소용 없어. 유다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풀 죽어도 어림 없거든. 다시금 고개를 숙인 죠가 또 한동안 시간을 죽였다. 길게 내린 속눈썹 뒤로 통통한 입술이 보였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유다이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시선을 내리깔며 죠의 동태를 살폈다. 죠는 펜을 쥔 손을 꾸물댔다. 그러다 침을 꿀꺽 삼키고. 목울대가 커다란 파장을 그리며 일렁거렸다. 숨을 한가득 들이켰다가 속에서 낱낱이 사그라뜨린다. 망설이나? 꼭 그렇게 보였다.
결심을 한 듯 죠가 어깨를 뒤로 당기며 일어섰다. 품에 안겨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유다이의 눈을 봤다. 면접관 앞의 사회초년생처럼 긴장하면서도 똑바로 봤다. 그런 점이 특이한 아이였다. 떨림마저일부러 겪어내는 것 같았다.
서핑을 배우고 싶어요.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유다이가 발을 차며 웃었다. 왈칵 터졌다. 난 또 뭐라고. 진작 말하지. 죠가 작게 너털거렸다. 바쁘신데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맨날 너랑 놀기만 하는데 뭐가 바빠. 말해놓고 보니 괜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 왜 죠랑 놀지. 의문스럽게 눈을 굴리는데 멀찍이 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다에서도 놀아주세요. 소파가 들썩일 정도로 깔깔댔다. 잔잔하다가도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점이 재밌다.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파도 같다. 가끔 놀랄 만큼 당돌한데 기본값이 수줍어서 귀엽고. 내일부터 다시 해변으로 나와. 그러면 투명하게 기뻐한다. 발목께로 차오른 바닷물처럼. 건조한 모래알을 누그러뜨린다. 그런 점이 좋아서였을까.
밥 먹으러 나가자.
유다이가 죠를 쿡 찔렀다.
–
수요일은 유난히 해변이 한적했다. 주말을 끼고 여행을 온 관광객들도, 휴일을 늘려가며 잔류하던 사람들도 저마다의 일상에 복귀했다. 해가 어중띠게 뜬 오후는 더 그랬다. 온도로만 따지면 가장 나가 놀기 좋았는데 어쩐지 미지근한 인상 탓에 인기가 없었다. 바다야말로 유다이에게는 일상이지 않은가. 익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때 만나자고 시간부터 던졌다.
가볍게 민소매를 걸친 유다이가 모랫바닥을 가로질렀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걸음 소리가 축축해졌다. 옆구리에 낀 보드 두 개가 마구 부대끼며 덜그럭거렸다. 뿌연 햇빛에 시야가 번졌다. 이마에 손을 붙인 유다이가 그늘을 내고 주변을 살폈다.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죠!
작은 머리가 뒤로 돌았다. 코가군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렸어? 죠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5분 정도 있었어요. 대충 수긍한 유다이가 해변에 보드를 내려놓았다. 근데 그 보드 네 거야? 시선이 죠의 보드를 향해 있었다. 네 어제 샀어요. 에? 어제? 유다이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확실한 리액션에 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 같이 밥 먹고 돌아가는 길에 서프샵에서 급하게……. 너무 얼척이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바로 보드를 사 왔다고? 그제야 방수 재질의 토시와 레깅스로 팔다리를 무장한 죠가 눈에 들어왔다. 오마에 진짜 대단하네. 순수한 감탄이었다.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여준다면야 유다이도 질 수 없었다. 간만에 꺼낸 롱보드를 멀찍이 밀어두고 죠의 스케치가 새겨진 보드를 들었다. 시작하자. 돌연 목소리가 한없이 깔렸다.
대신 나한테 배우는 한 대충은 없어.
괜히 놓은 으름장이 아니었는지 첫날부터 제대로 스파르타였다. 해변에 보드를 깔고 누워 패들링부터 일어서는 법까지 쉬지 않고 교육했다. 다행이랄지 죠는 의지가 충만했고 제법 운동 신경이 좋았다. 백날 백사장에 죽치고 앉아 그림만 그리던 지구력이 겹쳐 보였다.
얼추 노 젓는 폼이 나자 둘은 장소를 옮겼다. 해변에서 바다로. 고작 바닷물의 경계를 넘어서는 게 다면서 무대와 객석을 넘나드는 것만큼 엄중했다. 착실히 준비 운동도 시키고 심장에서 먼 곳부터 물도 묻혀줬다. 먼저 바다에 뛰어든 유다이가 죠의 보드를 동동 띄웠다.
보드에 엎드려서 누워봐.
죠는 시키는 대로 보드에 배를 대고 누웠다. 고개를 가누지 않으면 코로 물이 들어왔다. 등을 뻣뻣하게 세운 죠가 반쯤 물에 잠긴 채 떠올랐다. 몸에 힘 풀고. 아까 배운 대로 천천히 움직여. 죠가 어설프게 팔을 휘저었다. 손바닥으로 바닷물이 밀려나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잘 하네! 뜀을 기준으로 한다면 걸음마 수준이었지만 뿌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죠를 따라 이동하던 유다이가 이번엔 입 주변에 양손을 대었다. 소리가 한 데 모여 우렁찼다. 이제 일어서! 가슴팍 옆으로 손을 짚은 죠가 힘을 주어 일어났다. 정확히 하자면 일어나려 시도했다. 한순간에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며 보드가 통째로 뒤집혔다. 유다이가 아쉬운 탄성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애교 많은 강아지처럼 배를 까고 누운 보드가 웃겼다. 죠오. 빨리 나와서 저거 뒤집어. 바닷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죠가 물 밖으로 상체를 세웠다. 속눈썹 끝에 방울방울 바다가 맺혀 있었다. 보드를 뒤집은 죠가 다시 한번 위로 올라탔다. 가슴 옆 말고 앞에 손 짚어. 유다이의 조언을 비책 삼아 대여섯 번 가까이 더 시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글히 젖어 들었을 때, 마침내 일어서기에 성공했다.
얏따! 빠칭코 당첨이라도 된 듯 잔뜩 신이 난 유다이가 죠에게 다가섰다. 바닷물이 걸음마다 발목을 붙잡았다. 발등에 찰박이는 소리가 채였다. 그 사이 죠는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타이밍 좋게 유다이가 보드 옆에 다다랐다. 어, 오마에! 죠가 파도처럼 유다이 위로 쏟아졌다. 말이 좋아 파도지 덮친 모양새였다. 가슴팍으로 죠를 받아내면서 유다이가 뒤로 넘어갔다. 마주 본 얼굴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죠가 유다이의 허리를 잡고 일으켰다. 난데없이 물을 먹은 유다이가 잔기침을 했다. 젖은 얼굴을 상쾌하게 쓸어올리고는 죠에게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잘 했어! 죠가 손바닥을 맞춰 하이파이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스며들며 찰박이는 소리를 냈다. 퍽 물장구치는 소리 같았다.
할당량을 채웠는지 그 뒤로는 농땡이였다. 해변에서 보드를 들고 온 유다이가 파도를 탔다. 죠가 처음 마주했던 유다이의 모습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보드에 죠의 그림이 있었다. 영광, 꿈, 동경. 이름자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단어들이었다. 멋져요 코가군. 웬일로 끝까지 목소리가 올곧았다.
서핑을 마친 유다이가 바다 위에 보드를 깔고 누웠다.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떠올랐다. 죠는 말없이 따라 누웠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태양이 반사되며 바다가 빨갛게 타올랐다. 유다이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서핑하는 거 어때? 재밌어? 죠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콧잔등을 따라 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네 너무 행복해요. 유다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진짜 못 당하겠다고. 한쪽 팔로 눈을 가리자 부드러운 턱선이 보였다. 왜 코가군이 서핑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작게 감탄하던 유다이가 문득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언제까지 성으로 부를 거야?
말해놓고 저도 놀랐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생긴 궁금증인지. 자기는 말 놓은 지 한참인데 선 긋는 느낌이라 싫었더라든지. 그런 시원찮은 이유겠거니 싶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묻고 싶었던 것 같다. 나랑 노는 거 재밌어? 아까보다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죠는 한동안 유다이의 입술만 봤다. 가만하고 도톰한 입술을 한참이나. 파도가 끊긴 바다는 고요했다. 잔잔한 호수 같았다. 느리게 물 위를 부유하던 죠가 말씨를 뗐다.
유다이군과 있으면 즐거워요.
유다이는 반응이 없었다. 유다이군이 저를 봐주시면, 기쁘고. 제 그림을 밟고 서핑해주시면 감사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어이. 죠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붉게 내린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유성우보다 뜨겁고 닿으면 망가질 것처럼 예뻤다. 발치로 바닷물이 일렁이는데 살이 더웠다. 그만큼 쪄 죽을 날씨. 관상용의 하늘 아래 유다이를 봤다. 닿으면 망가질 것처럼. 그래도 괜찮을 만큼……. 뒷말을 삼키는데 유다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붉은 살이 늘어지게 붙었다 눅진하게 갈라졌다. 초점이 밀도 있게 뭉쳤다. 유다이를 보던 시선이 1픽셀만 밀려났어도 이렇게까지 아릿하진 않았을 터.
나도 너랑 있는 게 좋아.
숨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의 더위. 가려진 눈이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다. 무슨 감정이 떠오르고 있을지. 가열찬 공기는 종종 그런 걸 몽땅 끓여버린다.
눈을 맞추지 못해도 좋다고. 단지 유다이의 열을 모조리 옮겨담을 수 없는 그림처럼. 연필로 새길 수 없는 향기처럼. 저무는 해와 물러지는 여름이 아쉽다고. 그렇게 아사쿠라 죠를 망각시킨다. 아사쿠라 죠를 얼근하게 만든다. 열병 같은 유다이의 목소리.
생일 축하해.
–
7월은 중순을 지나 말미. 그러니까, 죠의 생일로부터도 열흘이 넘게 흘렀다.
그간 둘은 장난 없이 헤엄쳤다. 처음엔 점심이 소화될 때 쯤 만나 해가 지기 전에 마쳤는데, 죠가 또 막무가내로 굴었다. 아침 일찍부터 해변에 나와 내도록 보드를 탔다. 조깅을 하던 유다이에게 딱 걸려 그날부로 시간이 대폭 당겨졌다. 어떤 날은 일출을 같이 보고 일몰도 봤다. 중간에 유다이의 호텔 방에서 낮잠도 잤다. 그때마다 유다이가 틀어주는 재즈 플레이리스트는 훔쳐서 집에서까지 들었다.
맹연습의 결과였을는지. 죠는 기간 대비 급속으로 늘었다. 역시 연습량을 이기는 건 없다는 유다이의 한 줄 평까지 들었다. 보드 위에 서지도 못했으면서 이제는 능숙하게 파도를 탔다. 아직 적당한 파도를 볼 줄은 몰라서 유다이가 자주 도왔다. 지금! 유다이의 목소리가 신호탄이었다. 발을 딛고 일어나 파도의 굴곡을 따라 들썩였다. 죠 멋지다! 스승님의 주책맞은 리액션은 필수 옵션. 하루도 빼지 않고 둘은 바다를 데웠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때문에 연습을 펑크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연간 2435mm 강수량의 섬에서 비가 내렸다. 여름이 오면 울어대는 매미보다 뻔한 이야기였다.
새벽부터 살인적인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서핑이고 나발이고 바닷물이 불어 해안가를 넘실댈 지경이었다. 유다이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티브이에서는 위대한 개츠비 대신 촌스러운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웃기게 생긴 얼굴들이 전기 의자에 엉덩이를 고문당했다. 만신창이로 일그러졌다. 어이없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마땅히 둘 곳이 없어 허공에 머물렀다. 원래 같았으면, 그래. 그 애를 봤을 것이다. 이불보에 엎드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죠. 에어컨 온도를 낮춰주면 그제야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죠. 후진 예능의 개그맨보다도 신기하게 생긴 그림을 그리는 죠. 종일 느껴지던 어색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단 것까지.
죠.
연락처도 교환한 적 없잖아!
뭐랄까 그랬다. 없을 땐 당연히 몰랐고 있을 때도 몰랐는데 있다 없으니 티가 났다. 뭔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건 알았다. 처음엔 해변, 그다음은 호텔, 다시 해변. 중간중간 열댓 개의 식당과 카페를 껴가며 매일 봤다. 연락처가 없는 게 당연했다. 바다에 가면 파도가 있듯 습관처럼 걔를 봤다. 해변에 가면 볼 수 있었다. 먼저 가지 않아도 방으로 찾아왔다. 창밖으로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했다.
창가에 팔을 올린 유다이가 그 위로 턱을 괴었다. 디퓨저 냄새 위로 비릿한 냄새가 얹혔다. 비의 것인지 바다의 것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한참 바깥을 내다 보다가 문득 시계를 봤다. 정오였다.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간만에 비가 오니 온몸이 축축 처졌다. 누가 머리채를 바닥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미야자키에서 가장 잘 나가는 호텔답게 점심 때에도 룸서비스가 빨랐다.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미소와 인사를 잊지 않고 건넨 유다이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솔직히 입맛 꽝이다. 대충 끼니만 때울 셈으로 포크를 들었을 때였다.
……엥.
벌어진 입술 새로 얼빠진 소리가 새었다. 샐러드와 오일 파스타. 거기까지는 맞았다. 늘 먹던 메뉴였으니 익숙하게 주문했다. 문제는 그 옆이었다. 김이 포슬포슬 올라오는 흰쌀밥. 카레와 가라아게까지 제대로 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유다이가 헛기침을 터뜨렸다. 요새 행보가 기이하다 싶긴 했는데 드디어 회까닥 한 모양이었다. 와, 나 지금 죠 것까지 주문한 거야? 너무 얼토당토않아서 허파가 들썩였다. 졸지에 2인분의 식사를 혼자 먹게 되지 않았는가. 이건 식사를 때운다의 개념이 아니라 푸드 파이트였다. 음식을 해치우다 못해 싸운다고. 유다이가 지금 누구를 아주 닮은 밥알들과 전쟁을 치루게 생겼다는 뜻이다.
한숨을 내쉰 유다이가 힘없이 포크질을 했다. 숟가락도 썼다. 지금 먹는 게 카레인지 토마토인지. 그걸 떠나서 코로 들어오는지 입으로 들어오는지부터가 모호했다. 단지 하나만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진짜 맛 없다.
–
그 다음 날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유다이는 점심을 거의 다 남겼다. 체도 한 것 같았는데 그 정도는 자가 치유로 뻐겼다. 하루가 불에 그을린 종잇장처럼 흘러갔다. 모서리부터 살살 녹더니 통째로 증발했다.
이틀을 그렇게 보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빗발이 약했다. 하늘이 무슨 색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유다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을 가로지르고 얼추 디자인이 완성된 보드를 들었다. 죠가 그린 보드였다.
날이 날이니 만큼 수트까지 껴입고 해변에 도착했다. 어제는 물이 불어 난리도 아니더만 오늘은 상태가 괜찮았다. 대충 스트레칭을 마친 유다이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전례 없이 한적한 바다였다.
정수리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물과 섞여 말끔해진 파도가 비단처럼 일렁였다. 사실 비 오는 날이라고 서핑을 못할 건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적고 파도결이 좋아 평상시보다 안정적이었다. 어제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은 예외지만, 어릴 땐 부러 장마 시즌에 맞춰 장소를 고르기도 했다.
부지런히 서핑을 하니 잡생각이 덜 들었다. 한 차례 종목을 뒤엎기까지 한 유다이가 스포츠 밖으로는 발도 내밀지 않는 이유였다. 할 땐 죽을 만큼 힘들어도 생각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럴 겨를이 없다는 것에 더 가깝긴 했지만. 뭐가 됐든 지금은 밀려드는 파도에 집중하기만 했다.
생각을 죽이면 시간이 잘 갔다. 꼬박 두 시간을 물속에서 지웠다. 쉰답시고 온 바다에서 강행군을 펼쳤다. 누가 보면 대회라도 앞둔 사람 같았다.
적당히 떠오른 물결 위로 보드를 밟은 유다이가 노련하게 중심을 잡았다. 발을 교차해가며 보드의 앞으로 이동했다. 파도와 속도를 맞추고 노즈에 도달했다. 물길이 파여 들며 속도가 붙었다. 발치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다시금 보드의 중앙으로 돌아온 유다이가 다음 섹션을 물색했다. 금방 했던 것처럼 라이딩을 시도했다. 그리고 한순간 파도를 뒤집어썼다. 그래. 천하의 유다이가. 보드 위에서 엎어졌다. 정강이를 얻어맞은 송아지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멋없게 양 팔을 허우적대고 물을 한가득 먹었다. 토하듯 액체를 뱉었다. 코와 입이 매웠다. 눈만 떴다. 고꾸라지는 순간에도 시선은 한 데 있었다. 벽에 박힌 못처럼 굳건하게 붙었다. 눈에 익은 디자인의 보드. 길게 뻗은 몸과 어린 얼굴. 꼭 종류를 착각한 조립 로봇 같은. 거기에 눈길이 감겼다. 로봇 주제에 심장 마비는 질색인지 팔부터 물을 적신다. 팔이 길어 그것만 해도 한참이었다. 심장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입수했다. 정직한 패들링과 테이크 오프. 서핑을 연습한다. 비와 물을 겹겹이 껴입은 탓일까. 유다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귀신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죠. 죠가 있었다.
–
유다이군.
…….
……화 풀어주세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죄송해요. 잘 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했습니다.
죄송할 일도 아니었다.
역시 비 오는 날은 위험한 거겠죠. 특히 저 같은 초보자에게는……. 안 그래도 목소리가 작은데 말끝이 기어들어 가니 한없이 무력했다. 근방의 라멘 집 차양이 빗살을 떠안았다. 죠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연거푸 사과하는데 그럴수록 수심이 깊어갔다. 놀란 마음에 나간 언성이 높았고 곧장 자리를 옮겼다. 접때 아침 연습으로 들썩인 경험 때문인지 죠는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 크게 다르진 않았다. 비를 맞으면 체온이 떨어지기 쉽상이니까. 물론 어제도 연습을 했다는 고해에서 끝장이긴 했다. 미쳤다고 그 날씨에 연습을 해. 그렇다고 그게 풀 죽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죠는 그런 부분에서 한참 더뎠다. 집 앞까지 따라붙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던 성미였으니 말 다했다. 너 걱정돼서 이런다는 걸 몰랐다.
그런 와중에도 유다이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까고 말하자면 걱정은 나중에서야 들었다. 하루 건너 죠를 봤을 땐 그냥, 좀 반가웠다. 반가워서 보드 째로 뒤집힌 건 아니었다. 찔렸다. 온종일 죠 생각을 했는데 죠가 나타났다. 하루가 통째로 발가벗겨진 것 같았다. 그 기분이 유다이를 바보로 만들었다.
얼굴을 문지른 유다이가 텁텁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렇다 쳐도 어젠 진짜 좀 아니지 않아? 앞도 제대로 안 보이던데. 죠는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오실지 안 나오실지 몰라서 일단 나가봤습니다. ……. 연습은 한 번 도전 삼아. 어땠어? 죠가 작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네?
성공했어? 뭐…… 재미는 있었고?
따지는 눈치는 아니었다. 궁금해 보였다.
아니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파도를 걸러내는 건 고사하고 죠는 테이크 오프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며 어깨를 매만졌다. 죠는 어딘지 분해 보였다. 성공하는 게 이상할 만치 악천후였는데 승부욕이 굉장했다. 유다이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죠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러는 사이 정수리 위로 빗발이 거세졌다. 둔탁한 물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차양막이 들썩였다. 곧 귀가 멀 정도로 쏟아졌다. 이제 어쩔래! 목소리가 돋보기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빗방울에 담겨 고막 째로 적셔지는 것 같았다. 죠는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휴무의 라멘집, 붉은 차양막, 조밀한 먹구름. 손에는 우산 대신 보드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달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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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린 것이 실은 눈이었을까.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이 오는 날엔 파묻히고 비가 오는 날엔 또렷해진다는 말소리. 죠는 반대였다. 꼭 반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폭우의 복판에서도 유다이는 되물었고, 죠가 재차 소곤거렸고, 달렸을 뿐이었다.
보드를 머리 위에 쓰고 달렸다. 팔이 무거웠다. 유다이가 먼저 보드를 겨드랑이 사이에 꼈다. 남은 손으로 죠의 손을 낚아챘다. 그제야 죠도 팔이 편해졌다.
이틀을 끈질기게 내린 비에 인기척 하나가 없었다. 개미도 매미도 지렁이도 없었다. 죠랑 유다이만 흠뻑 젖었다.
빗물이 속눈썹을 짓밟고 갔다. 가슴께로 둥둥. 그건 비인지 박동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유다이가 죠를 돌아봤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애쓰는 게 웃겼다. 죠는 유다이보다 발이 느렸다. 속도를 따라잡는 것만 해도 벅차 보였다. 그래서 유다이가 느려졌다. 아니 그냥 아예 등을 돌렸다. 죠를 마주 본 채 뒤로 걸었다. 훅 떨어진 속도에 죠가 억지로 미간에 힘을 줬다. 어쩌지. 비, 막아주고 싶은데. 생각 뿐이었다. 남은 손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인 유다이가 죠에게로 다가갔다. 무지하게 큰 보폭이었다. 한 걸음 만에 코앞까지 다다랐다. 고개를 기울여 이마를 맞부딪혔다. 코끝이 아슬하게 스쳤다.
나 봐봐.
이제 눈 뜰 수 있어.
죠의 눈꺼풀이 느직하게 들렸다. 속눈썹이 서로 엉킬 것 같았다. 그만치 가까웠다. 빗속에서도 유다이 냄새가 났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느껴졌다. 죠는 꿈결에 잠긴 어린 애처럼 깜빡거렸다. 후더운 숨이 몇 번 오가다가 잠자코 멎었다. 숨은 왜 참아. 유다이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죠는 따라 웃을 여유도 없었다. 마음이 버거웠다.
유다이가 스쳐 간 자리마다 움푹 길이 난다. 심장이 아주 뜨거워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불길처럼 흔적을 새기고. 폭우도 거기까진 식히진 못했다. 그야 빗물이 파도를 손에 쥘 순 없는 법이니까. 파도는, 바람에게만 밀려난다.
힘들어? 버릇처럼 다정한 말투. 목소리가 산들산들 불어온다. 힘들면 천천히 가고. 죠의 등을 마구 떠민다. 물결치게 만든다. ……빨리 달리고 싶어요. 그래서. 유다이가 죠를 일렁이게 만들어버려서. 죠는 파도가 되고 싶었고.
내가 막아줄 수 없으니까. 눈 똑바로 뜨고 따라와.
공전 주기가 엇갈린 위성처럼 멀어간다. 해변에 차례로 발자국이 났다. 유다이가 새기고 간 곳 위를 죠가 똑같이 밟았다. 그 바람에 자국이 깊었다. 깊고 징그러웠다. 빗줄기가 득달같이 투신하고 모래알이 분사하던 날. 죠는 서퍼의 등을 봤고, 어렴풋이 꿈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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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장마였다. 가을 모기 만큼 때늦은 우기. 이따금 해안가에서 쑥대밭이 된 집채들이 보였다. 이젠, 그간 미룬 빨래들이 잔뜩 널려 있었고.
간만에 평화로운 하늘이었다. 반대로 해변은 다시금 인파가 들어찼다. 심지어 이전보다 사람이 배로 불었다. 현대인들은 이게 문제였다. 노는 것도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했다. 멀리서 보면 단내를 맡고 몰린 개미 떼 같았다.
오늘은 개중에서도 특히 피크였다. 기상 문제로 죽죽 미뤄지던 불꽃 축제가 마침내 성사되었다. 말이 좋아 축제지 저예산 불꽃놀이였는데,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게 분명했다. 보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 유다이에게도 약속이 잡혔다. 보나 마나 죠였다. 일곱 시 반이 시작이라 일곱 시에 보기로 했다. 장소는 저번에 차양을 빌려 썼던 라멘 집 앞으로 정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 라멘 집은 휴무가 아니라 폐업이었다. 오가는 사람이라곤 쥐뿔 없다는 뜻이었다.
창밖으로 어스름한 빛이 내려앉았다. 해가 길어 완연한 저녁 같지는 않았다. 유다이는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남기고 나갈 채비를 했다. 하얀 민소매에 연청 데님을 입었다. 말끔한 셔츠도 걸쳤다. 이너로 입은 것과 같은 색이었다. 머리도 매만지고 향수도 뿌리고 하니 시간이 금방 갔다. 문득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닌가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데이트라도 나가는 사람 같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만나는 목적도 어딘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단둘이 불꽃 축제. 어감만으로도 혀끝이 달았다. 그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귓전이 홧홧했다.
스니커즈에 발을 욱여넣은 유다이가 호텔을 나섰다.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바다가 있었다. 변방에 폐업의 라멘 집도 있었다. 유다이가 도착했을 때 죠는 없었다. 정각까지 10분 남짓이 남은 때였다. 죠를 기다려보긴 또 처음이었다. 늦은 적은 없지만 죠가 매번 더 빨랐다. 한 번 역전할 때도 됐지 싶었다. 앞코를 연거푸 내리찍으며 해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가족 단위보단 연인으로 보이는 듀오가 많았다. 축제는 시작도 않았는데 살을 맞붙이고 쪽쪽거렸다. 한참일 때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웃은 유다이가 워치를 확인했다. 어느덧 일곱 시였다. 웬일로 지각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늦는 건 상관 없었다. 단지 생전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 신경이 쓰였다. 왜,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답도 없는 상상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금방일 거라 생각했다. 얼른 헐레벌떡 달려오는 죠를 놀려주고 싶었다. 그럴 셈이었는데, 수가 단단히 틀렸다. 무차별적으로 날이 흘러갔다. 슬금슬금 축제가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이쯤 되니 이상했다. 아주 아주 이상했다. 손끝에 초조함이 일었다. 심장이 빠르고 거세게 요동쳤다. 마침내 하늘로 불꽃이 튀었다. 폭죽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유다이는 망설임 없이 열기를 등졌다.
그리고 내달렸다.
연락처는 몰라도 어디 사는지는 알았다. 몰래 쫓아가던 길을 되짚으며 질주했다. 열어젖힌 셔츠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급기야 어깨를 드러내며 넘어갔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털었다. 잘 세팅한 앞머리가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신경 쓰지 않았다. 달리면 생각이 없어진다고.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머릿 속이 온통 죠로 가득했다. 물밀듯이 소란스럽던 인파보다 집요했다. 그냥 늦잠 좀 자는 걸 수도 있었다. 불현듯 나랑 놀기 싫어진 걸 수도. 그래서 바람맞히고 모른 체 딴청 피우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허벅지가 저릿할 만큼 발을 구르던 유다이가 낯익은 골목 어귀에 도달했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숨을 가다듬었다. 폐가 아플 만큼 간지러웠다.
유다이가 천천히 모퉁이를 돌았다. 낮은 건물들이 키 맞춰 박혀 있었다. 눈에 띈 것은 골목의 끝자락이었다. 담장을 옆에 두고 고양이가 하나 있었다. 키가 유다이보다 살짝 작고 귀가 컸다. 유다이가 건드리면 분명 빨개질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고양이가 아니었다. 고양이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죠였다.
죠 뭐해!
삽시간에 담장까지 다다른 유다이가 죠를 내려다봤다. 흠칫 몸을 떤 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다이군……. 어쩐지 울상이었다.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약간 괘씸했다. 괜한 심보는 잠시 미뤄두고 유다이는 상황 파악부터 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죠의 주변으로 갔다. 아래로 작은 틈이 난 담장. 틈새로 팔을 찔러넣은 죠. 죠의 입술 새로 밭은소리가 새었다.
……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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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말은 그러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더랬다. 어딘지 불편해보이는 기색이라 지나치지 못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어디에도 고양이가 안 보였다. 소리를 따라 이동하니 담장 옆이었고 아래께의 구멍을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아스팔트와 한 몸이 되었다.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구멍 사이를 내다봤다. 좁은 틈 너머로 고양이 한 마리가 불편한 모양새로 끼어 있었다. 꺼내주려고 팔을 넣었는데 뜻대로 안 풀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를 엎어진 채로 끙끙댔다.
거기까지 듣고 유다이는 죠를 따라 바닥으로 꺼졌다. 눌어붙은 껌처럼 바짝 몸을 깔았다. 죠의 말대로 고양이가 하나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타이어 더미에 꼬리가 밟힌 것 같았다. 직접 치워주는 것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어 보였다.
사이좋게 정수리를 맞대고 궁리하다 유다이가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더니 담장의 높이를 가늠했다. 생각한 것만큼 높지는 않은데 생으로 오르기엔 영 무리였다. 심각한 얼굴로 골몰하는 유다이의 발치에서 문득 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를 밟고 가세요.
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빈말은 아닌지 죠는 자세까지 고쳐가며 등을 내놓고 있었다.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가 판판하게 펼쳐졌다. 다른 거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밟아. 곤란한 말투로 말하는데 죠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몇 번을 더 실랑이하다 결국 유다이가 백기를 들었다. 부러지면 안 돼. 죠는 결연한 말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배려라고 신발을 벗은 유다이가 죠의 등을 밟았다. 살이 없어 딱딱했다. 밥을 좀 더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이 먹는 것 같긴 한데. 양손으로 담장 끝을 쥐고 힘을 실어 몸을 당겼다. 최대한 발에는 무게가 안 가는 쪽으로 애를 썼다. 뜀틀을 넘듯 올라선 유다이가 이내 건너편에 도달했다. 반동으로 셔츠가 날렸다.
유다이는 곧장 고양이가 있는 쪽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타이어 아래로 꼬리가 눌려 있었다. 아스팔트, 타이어, 고양이. 모두 색이 같았다. 얼핏 보면 모른 체 지나칠 법도 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하악질을 해대는 게 안쓰러웠다. 옅게 미간을 구긴 유다이가 타이어를 들어 옮겼다. 무게가 꽤 나갔다. 해방감에 펄쩍 뛴 고양이가 순식간에 담장 아래로 사라졌다.
죠! 고양이 나간다!
반박자 늦게 탄식 소리가 들렸다. 도망가버렸어요……. 유다이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담장 너머로 시무룩한 죠의 어깨가 비쳐 보였다. 급하게 갈 곳이 있었나 보네. 그제야 죠는 마음을 좀 놓았다.
옮긴 타이어를 밟고 올라선 유다이가 가볍게 점프했다. 다시 한번 벽을 쥐고 금세 넘었다. 맨발이 땅에 닿기 직전이었다. 순간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며 삐끗했다. 벌떡 일어난 죠가 유다이의 손을 잡았다. 빈틈없이 단단히 겹쳤다. 아, 고마워. 신발을 고쳐 신으며 유다이가 눈을 찡긋했다. 죠는 쑥스럽게 웃었다. 동시에 유다이를 향한 눈이 초롱초롱했다. 또 반했나. 유다이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팔을 당겼다. 팔꿈치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득히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얼른 가자. 하늘에 밤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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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치솟던 불꽃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데 대충 보면 핵전쟁 같았다. 사람은 인산인해. 해변의 색깔을 까먹을 만치 혼란했다. 불꽃놀이를 처음 경험한 아이가 폭성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맞은편에선 헐벗은 연인들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굉장한 풍경이었다.
둘은 삼십 분을 훌쩍 넘게 지각했다. 입성조차 포기한 채 해변 밖에 덩그러니 섰다. 언제는 바다를 소유한 양 하더니 지금은 먼 나라의 일 같았다. 유다이는 중간중간 죠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같이 보자며! 더는 불꽃놀이가 목적이 아니었다. 끝내 인파에서 빠져나와 산책을 했다. 근처에서 파는 슬러시를 하나씩 사 들고 걸었다. 죠는 파란색의 소다, 유다이는 초록색의 수박이었다. 날이 더운 데에 반해 얼음이 달고 찼다. 마주 잡은 손은 뜨거웠고 어딘가에서 철 지난 가요가 울려 퍼졌다. 죠의 손을 고쳐잡은 유다이가 팔을 앞뒤로 흔들었다. 열대야는 종종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바보 같아졌으니까.
얼마나 바보였냐면, 축제가 끝나도록 걷기만 했다. 슬러시는 얼마 가지 않아 전부 녹았다. 음료수를 들이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얼음과 섞여 맛이 밍밍했다.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한참을 있다가 해변이 비자 그리로 갔다. 가는 길에 잡화점도 들렀다. 얇은 막대로 된 폭죽 한 세트를 구매했다. 열 개가 한 묶음으로 된 구성이었다.
전력을 다한 바다는 어느덧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이 시끄러웠던 순간들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때도 타지 않은 날의 것처럼.
유다이가 간간이 바닷물이 드리우는 경계에 섰다. 주머니에서 아까 함께 결제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폭죽 하나에 불을 붙여 죠에게 건넸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불꽃이 여과 없이 눈동자에 비쳤다. 죠는 잔뜩 신나서 방글거렸다. 하늘을 들쑤시던 불꽃은 쳐다도 안 보더만 유다이가 준 스파클라는 별똥별인 줄 알았다. 한 번 더 라이터를 켠 유다이가 이번엔 폭죽을 제 손에 들었다. 막대기의 끝을 따라 불꽃이 타올랐다. 그러게. 별똥별 내리는 밤을 겪은 것처럼 설렜다. 왜인지 기분이 생경했다.
여기엔 얼마나 더 계시는 거예요?
불쑥 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맥락이라곤 쥐뿔 없는 물음이었다.
여기? 글쎄.
답이 모호한 질문이었느냐 하면, 아니었다. 호텔에 얼마나 머무르는지, 가지고 온 옷이 몇 벌인지, 남은 디퓨저가 몇 개인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명확한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유다이는 대답을 미뤘다. 정말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사이 죠의 스파클라가 빛을 잃었다. 유다이는 다시금 막대기에 불을 붙였다. 직접 죠의 손에 쥐여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가슴께에 시선을 놓았다.
원래 이번 여름까지 있으려고 했어.
아, 그렇군요.
대답이 티가 나게 어색했다. 목소리에서 녹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유다이의 웃음보가 터졌다. 왜? 아쉬워? 죠는 당연하게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물었다. 왜냐면, 유다이도 아쉬웠으니까.
가을에 캘리포니아에서 대회가 있거든.
묻지 않았음에도 술술 불었다. 대회의 규모부터 참가 자격, 향후 계획까지 레포트라도 쓰듯 읊었다. 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끄덕거리만 했다. 바다 근처라서 그런지 눈망울에 습기가 가득 찼다. 비 맞은 강아지 같기도 하고 짝 잃은 오리 같기도 하다. 설익은 얼굴이 오늘따라 애련해 보였다. 그냥 좀, 안아주고 싶었다.
유다이는 안는 대신 라이터를 켰다. 벌써 네 번째 스파클라였다. 죠가 어설프게 막대 끝을 받아들었을 때였다. 느닷없이 해변이 새까매졌다. 깜짝 놀란 유다이가 죠의 품에 기댔다. 뭐야? 정확히 하자면 등이 나간 거였다. 근방의 가로등이 통째로 혼을 잃었다. 원래도 썩 밝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젠 시야가 불편할 정도로 어두웠다. 곳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감쪽같이 사라졌다. 또 바다가 둘의 것으로 전락했다.
처음엔 당황한 듯하던 유다이도 금세 적응했다. 적응하다 못해 신까지 났다. 운치 있는데? 그치. 핸드폰을 꺼내 앞을 밝히려는데 배터리가 바닥이었다. 얼빠진 사이 전원까지 꺼졌다. 허탈한 와중 눈이 맞자 하여간에 웃겼다.
바닷물이 발코를 건드리자 둘은 자리를 옮겼다. 해변의 중앙이었다. 모래를 깔고 앉았다가 졸지에 하늘을 보고 누웠다. 머리칼 사이로 자갈이 스쳤지만 상관 없었다. 밤바람이 가슴께를 지나쳤다.
유다이는 죠를 보고 옆으로 누웠다. 멀리 불 켜진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죄다 높고 값비싸 보였다. 아마 유다이가 묵는 호텔도 그 어딘가 있을 터였다. 유다이가 자세를 고쳐 잡고 폭죽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온도가 오르며 죠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대 끝을 해변에 박아넣고 아까처럼 바로 누웠다. 하늘이 그을린 것처럼 까맸다.
나 없으면 죠 어떡해. 못 사는 거 아냐?
목소리에 장난기가 넘실댔다. 아마 그럴 겁니다. 죠가 진지하게 답해버린 바람에 사고가 됐지만.
오마에. 내가 뭐라고.
그치만 진심이에요.
모를 리가 없잖냐. 유다이는 말을 씹어 삼키며 웃기만 했다. 꺼진 스파클라 대신 새 것을 꺼내 들며 으쓱했다. 마음만 같아선 다 데리고 다니고 싶은데. 가능성은 없어도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죠랑 있으면 재밌고, 외롭지 않다. 올곧은 눈은 어딘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고.
기뻐요.
죠가 손가락으로 흙장난을 쳤다. 빛이 미약해서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지만, 붉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으니까.
캘리포니아 다음으로는 발리에 갈 거야.
아, 그때 발리도 유명하다고.
맞아. 그리고 나면 다시 귀국해.
여기로 오시나요?
아니. 아마 오키나와로 갈걸.
……아.
여기도 들르긴 하겠지! 아쉬운 티 내버리면 어떡해.
역시 바보다. 불꽃 축제를 떠나보내고 맹물 슬러시를 먹은 것보다 바보다. 너 보러 당연히 올 거라는 걸 아직도 모른다. 골 아프게 웃던 유다이가 스파클라를 갈았다. 벌써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종일 하늘을 응시하던 죠가 조심스레 고개를 틀었다. 엎드린 채 라이터를 만지작대는 유다이를 봤다.
그래도 기뻐요.
뭐가 자꾸 기쁘단 거야.
계속 서핑을 하신다니까…….
또 말끝이 흐렸다. 파도가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유다이군이 오래 파도를 타 주셨으면 좋겠어요. 꾸밈없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 꼼짝 없이 갇혔다. 점점 눈꺼풀이 감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졸려? 죠는 슬그머니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여기서 잠들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마찬가지로 피곤기에 젖은 얼굴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비 온대. 무어라 대꾸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응? 폭죽을 새 것으로 갈고 다시 보니 졸려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기침하듯 웃은 유다이가 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잘 자. 바다 냄새가 진득하게 났다.
자그마히 불씨가 작열하는 소리에도 죠는 져버리곤 했다. 빗줄기가 쏟아지면 오물대는 입술이 언어가 됐고. 그래서 그런 날이면, 세상이 아주 소란스러워 죠가 잠겨 드는 날이면. 유다이는 죠에게 입수했다. 고막을 간지럽히는 작은 목소리를 왈칵 들이켰다. 피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시선에 온몸을 들이박았다. 숨을 수 없어서 그냥, 추돌했다.
남은 폭죽을 전부 태우는 동안 유다이는 가만히 죠의 얼굴을 봤다. 그렇게 암전. 암흑 속에서 유다이가 죠에게로 다가갔다. 모래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잠든 뺨을 톡톡 건들다가, 자세를 낮췄다. 입술이 코끝에 닿았다.
오야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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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댓바람부터 해변이 난리였다. 밤새 등이 나간 걸로도 모자라 웬 멀끔한 노숙자 둘이 모래 위를 뒹굴었다. 사색이 된 관리인이 반쯤 우는 얼굴로 달려 나왔다. 눈을 비비며 기상하는 모습에 거구 한 쌍을 한꺼번에 껴안고 방방 뛰었다. 시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했다.
유다이의 말대로 그날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이번엔 장마가 얼마나 갈지. 기약 없는 예보가 울려 퍼졌다.
나날이 습해지는 공기와 정도를 모르고 심화되는 폭우. 티브이에서도 기상 이변을 운운하는 가운데 죠와 유다이는, 한바탕 다퉜다.
시작은 죠의 고집이었다. 일전에 비바람 속에서 파도를 타다가 도게자를 박을 뻔 했으면서 미련을 못 버렸다. 아무래도 일어서기조차 실패했다는 것에서 속이 제대로 끓은 모양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유다이가 죠의 입장이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입수했을 것이다. 다만 죠가 위험한 건 딱 질색이었다. 어느 정도 보슬보슬 내리는 거면 모를까 폭우였다. 길 가다 비 맞고 자빠지는 사람만 한 트럭이었다. 안 된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두 번 그러면 포기할 줄 알았다. 다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밀려드는 파도를 전부 읽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때처럼.
독불장군, 고집불통, 제멋대로. 설마 착하디 착한 죠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이게 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죠는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의외로 주관이 강하다는 건 알았어도 일주일을 내리 버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오기 부리는 방식이 정숙해서 더 머리가 아팠다. 호텔 방으로 부르면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드를 끼고 왔다. 두고 오라면 두고 왔는데 다음 날에 보디 수트를 입고 왔다. 그러면서 기어코 허락 없이는 서핑하지 않았다. 누구한테 배운 건지 시위가 고단수였다. 그래서 오늘 집중 호우 가운데 파도 앞에 서지 않았는가. 어느 쪽이 두 손 두 발 들었는지는 뻔했다.
우려와 달리 큰 사고는 없었다. 파도가 거셌고 수위가 높았고 종종 빗물로 눈앞이 멀었지만 멀쩡했다. 유다이도 이런 날씨에 파도를 타는 일은 흔치 않았다. 간만에 훈련한다 치고 직접 노즈를 밟았다.
예기치 못한 일은 잠시 뒤에 벌어졌다. 매끄럽게 파도를 탔으며 기세를 몰아 턴을 시도했을 때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보드가 박살 났다. 반년 전 리페어를 맡겼던 부분을 따라 그대로 동강이 났다. 머리 끝까지 물을 뒤집어쓴 유다이가 눈썹을 비스듬히 꺾었다. 죠가 그린 그림이 갈라져 있었다. 기분이 제대로 잡쳤다. 하는 수 없이 해변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유다이가 저만치에서 연습 중인 죠를 봤다.
죠! 나 이것만 빼놓고 온다?
턱짓으로 부서진 보드를 가리키니 죠가 놀란 얼굴로 끄덕였다. 유다이가 조각난 보드를 쥐었다. 바다를 제치며 해변으로 나아갔다. 빗줄기에 정수리가 따끔댔다. 간신히 옮기기에 성공한 유다이가 죠를 돌아봤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건지 형체가 흐릿할 만큼 멀었다. 암만 봐도 위험해 보였다.
어이, 오마에!
언성을 높이며 정강이로 바닷물을 찰박이던 찰나였다. 예쁘게 말린 파도 위로 죠가 둥실 떠올랐다. 물길을 내며 두 발로 섰다. 유다이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성공했네! 날이 갰다고 생각할 만큼 세상이 환했다. 독주회 속 주인공처럼 죠만 반짝였다. 귓전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내 죠는 금방 잠겨 들었다. 뒤이어 솟아오른 파도에 휩쓸렸다. 꼭 바다에 잡아먹힌 것 같았다.
정말로 푹 빠진 것 같았다.
십 초, 이십 초, 삼십 초. 죠는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파도의 시작점이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다를 거슬러 잠수하려 한 걸지도. 혹은 우리가 파도를 고르듯이, 파도가 죠를 몰고 가버린지도 모른다. 영영. 바닷물에 젖어 녹아버린 불씨처럼. 끓고 나면 터져버리는 기포처럼.
순간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서늘한 감각.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한 유다이가 바다를 휘저었다. 죠가 어디쯤 있었더라. 정신이 멍해졌다. 물이 가슴께까지 차오르자 숨이 막혔다. 처음으로 바다가 무서웠다. 수면이 유다이를 거꾸로 떠미는 것 같았다. 도무지 전진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자꾸만 발이 헛나갔고 엎어졌다. 고막에 물이 가득 차 온 세상이 먹먹했다. 하도 물을 먹어 폐가 무거웠다. 더는 발이 닿지 않았다. 그때부턴 헤엄쳤다. 수영하는 법을 까먹은 애처럼 버둥대다가 꾸역꾸역 발길질을 했다.
죽겠다. 이러다간 죠를 보기도 전에 죽겠다 싶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을 수반하던 순간, 시야에 죠가 들어왔다. 힘없이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죠. 해파리처럼 둥둥. 우주를 떠도는 인공위성 같은 죠. 바다에 끼얹은 건더기 같은 죠. 영원히 추락할 것처럼 구는 죠.
유다이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물장구치는 다리에 힘이 빠져들었다. 뼛조각들이 몽땅 재가 된 것처럼 그랬다. 팔 근육을 찢어서라도 닿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코와 입으로 짜디짠 물이 쉼 없이 넘쳤다. 끝내 죠의 손끝이 맞닿았다. 물에 젖은 휴지처럼 흐물거렸다. 손가락을 겹치며 체온을 깨물었다. 유다이의 폐가 해수를 토했다. 잘 감은 태엽을 놓친 것처럼 눈동자가 뒤로 돌았다.
그렇게 손을 놓쳤다.
죠가 침몰한다.
–
눈을 뜬 건 물을 게워내면서였다. 심장이 분당 100회씩 압박당하고 있었다. 여전히 초점이 흐렸고 호흡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유다이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몸부터 일으켰다. 발작하듯 튀어 오른 것에 가까웠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죠만 찾았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죠는 없었다. 구조대원에게도 물었다. 죠는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구조대원은 죠가 누군지 몰랐다. 아니, 그냥 유다이가 아닌 누군가가 해일에 쓸려나간 줄도 몰랐다. 유다이는 저도 모르게 멱살을 잡았다가 맥없이 놓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신까지는 없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숨만 붙었다 뿐이지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수색 끝에 죠는 실종 처리 됐다. 아사쿠라 죠, 20세, 실종. 이름만 남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죠의 보드만이 해변으로 떠밀려 왔다. 둘 다 이 세계에서 끔찍하게 말라붙었다.
죠가 사라지고 보름은 해변에서 지새웠다. 언제 돌아올지 몰랐으니까. 신식 장비를 투입하고 최고급 인력이 나서도 찾지 못했지만 유다이는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유다이는. 유다이라면. 죠는 유다이를 모른 체 할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좀, 다르지 않았던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죠를 봤고, 죠도 유다이를 봤고, 우리는 서로를 알아버렸고, 살을 맞댔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죠는 오지 않았다.
그 뒤로는 엉망이었다. 동강 난 보드를 고치고 죠가 남긴 스케치북을 뒤졌다. 애석하게도 개츠비 따위를 보며 지운 시간이 너무 많았다. 죠가 몰래 그린 초상화는 몇 장 발견했다. 소중하고 비통했다. 네 그림을 그리게 할걸. 사랑하는 것을 눈에 담고 입술을 짓누르고 손끝으로 옮겨 담던 너를 알려줄걸. 단조로운 해변에 돌뿌리가 되었던 순간과 어느새 무릎이 벗겨진 나를 보여줄걸. 숨 막히게 가열되던 너를. 아사쿠라 죠를. 녹아내리는 아지랑이 속의 소년을. 소년이. 물에 젖은 도화지처럼 연약하다, 흩어졌다. 왜 죠를 꺼내주지 못했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슬퍼할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죠가 없었다.
유다이는 그날로 서핑을 관뒀다.
예정된 날짜보다 이르게 체크아웃을 했다. 곧장 미야자키를 떠나 도쿄로 갔다. 거기서 워터파크의 라이프 가드로 취직했다. 더는 바다가 보고 싶지 않았다. 마주할 자신은 없지만 회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십수 번 호루라기를 불며 입수했다. 이젠 누구도 빠져들게 둘 수 없었다. 밤낮을 안 가리고 눈 밑이 퀭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살 수 있는 게 이상했다. 그냥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산송장인 채로 계절을 겪었다. 여름이 끝나면 캘리포니아, 발리와 오키나와. 유다이는 그 어디도 가지 못했다. 당장 여름 밖으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다. 여전히 파도를 닮은 죠와 그 애를 받던 계절에 머물렀다. 더 이상 직사광선 따위를 추앙하지 않는 세계가 들이닥쳐도. 뙤약볕 아래서 장대비를 견디는 골목길은 없는데도. 유다이는 계속 금만 갔다.
다시 미야자키로 돌아온 건 죠의 실종으로부터 1년 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과 달리 볕이 뜨거웠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유다이는 넋 나간 채 바람을 맞았다. 삶이란 직접 신발을 고쳐 신고 바퀴를 굴려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유다이는 빈 깡통이 구르듯이 나부꼈다. 시기를 잘못 알고 내린 눈발 같았다.
유다이는 한참을 내리 그렇게 있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체향을 나눴던 바다가 이토록 낯설었다. 조금씩 주변이 한산해졌다. 늦은 해변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까. 머리 위로 새들이 울어제끼는 소리가 났다.
한순간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점등됐다. 다시금 눈을 뜬 유다이가 숨을 삼켰다. 침을 함께 들이키자 목젖이 일렁였다.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남았다. 두꺼비집을 거꾸로 쌓은 것만큼 깊었다. 버겁게 바다를 등지고 섰다. 앞코에 자갈이 밟혀 산산이 부서졌다. 얼핏 들으면 치아가 갈리는 소리 같았다.
유다이는 앞을 바라보고 섰다. 시야가 프레임처럼 순간을 가뒀다. 등 뒤로 김이 피어올랐다. 거짓말. 유다이가 끓어오를 리 없었다. 유다이를 치열하게 만드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는데. 유다이의 눈꺼풀이 크게 들썩였다. 멍청하게 입이 벌어졌다. 턱뼈를 조이고 있던 나사가 통째로 빠진 것 같았다. 늦은 해변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까.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병에 든 거였다. 마음이 곪아서, 정신이 좀먹혀서. 머리에 지독한 열병이 눌어붙은 거였다.
오랜만이에요.
유다이군.
소년이 계절을 몰고 왔다. 죠가 있었다.
–
벌어진 어깨를 따라 각 잡힌 흰색 티. 종종 기장이 모자라곤 하는 청바지의 밑단. 맨발에 검은 샌들. 한 차례 시선이 떨어졌다가 역행한다. 병변을 검사하는 방사선이 된 것 같다. 온몸을 분해하고 낱낱이 훑는다. 길게 뻗은 다리.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 싱그러운 목덜미. 거짓말이 아니었다.
잠기에 폭삭 안겼을 때 짙어지는 쌍꺼풀. 그래서 유독 녹아내리던 눈매와 엉겨 붙던 속눈썹. 가벼이 부은 눈두덩이와 웃으면 보이지 않던 눈동자 같은 거. 있을 때도 좋아했지만 없으니 눈이 도는 것들. 아주 아끼고 사소해서 그리운 것들. 그래서 쉽게 잊혀지려 드는 것들.
이야기의 첫 장으로 돌아간다. 죠는 유다이에게 닥친 쓰나미 같다. 탈 수 없다. 유다이를 물장구치는 어린애로 만든다. 삶이 잠겨 드는 것이래도 멋대로 역류하던 유다이를. 바다에 대고 터뜨린 폭죽처럼 무모하고 질깃하던 유다이를.
죠의 등 뒤로 조명이 뿌옇게 반사된다. 망막에 물방울이 맺힌 것 같다. 파도 소리가 들렸고, 죠가 웃는다.
–
누가 뺨아리를 때리고 간 것처럼 정신이 깼다. 유다이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다른 근육은 움직일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너.
어디 있었어. 개미만 한 목소리였다. 파도와 타이밍이 겹쳐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죠는 용케 대꾸했다. 여기 있었습니다. 무어라 대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유다이가 물었고, 죠가 답했다. 죠가 정말로 있었다.
유다이는 철근 같은 발걸음을 뗐다. 죠에게로 다가섰다. 심장이 가슴뼈를 향해 세차게 발길질 했다. 터질 것 같았다. 귓전을 타고 박동 소리가 들렸다. 죠에게도 들릴 것이었다. 그만큼 가까이 섰다. 유다이가 벌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동그란 죠의 머리께를 스쳤다. 그리고 죠는 고개를 숙였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유다이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죠의 머리를 통과해 우주의 먼지처럼 허망하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번엔 죠의 뺨에 손을 댔다. 역시나 만질 수 없었다. 물을 쥐려다 실패한 애처럼 뻐끔댔다.
뭐야?
졸지엔 말까지 더듬었다. 손을 마구 휘저어봤지만 죠는 뚫리기만 했다. 홀로그램 형상을 보는 것 같았다. 형체만 있고 닿지 않았다. 금방 어금니를 발치한 사람 같이 입이 벌어졌다.
귀신입니다.
정지. 유다이의 전원이 아주 꺼졌다가 재부팅되었다. 폐를 고무줄로 꽁꽁 묶어 잡아당긴 것 같다. 굴러다니는 체리를 밟아 과육이 터지듯이. 유다이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여전히 유다이를 웃게 만드는 건 죠였다. 귀신이라고?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유다이는 이제 막 나갔다. 두 팔 벌려 죠를 품에 가뒀다가 마구 뭉개뜨렸다. 물론 소용 없었다. 죠는 허공에 부유했다. 헛것을 보는 게 아니고서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다이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순간 눈썹이 아래로 푹 꺼졌다. 분명 웃는데 슬픈 눈이었다. 입 안이 썼다.
죽은 거였구나.
마지막으로 기대던 퍼즐 조각이 무참히 비틀어졌다. 영영 한 피스가 빈 채 남게 되었다. 혹시나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실종 사건이 남은 이에게 건네는 총열이었다. 눈앞에 유령으로 나타났으니 명쾌는 해졌다만. 유다이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죠는 연신 사과를 거듭했다. 죽어버려서 죄송합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구해주지 못해 미안한 건 유다이였다. 해를 건너 만났는데 속만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침울한 재회는 질색이었다. 유다이가 죠의 손가락에 모양을 맞춰 겹쳤다.
좀 걸을까.
반쯤 반신반의했다. 이승과 저승을 뛰어넘어 만나리란 상상은 해본 적 없었다. 다만 눈앞의 죠를 환각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를 가짜라고 여기기 싫었다.
유다이는 죠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핑을 관두게 된 순간부터 도쿄에 새로 구한 일자리까지. 말하다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환각이 보일 거라면 진작 보였어야 했다. 지금보다 더 건조하고 덜 웃을 때. 하루가 멀다하고 죠가 동동 떠다닐 때.
서핑을 관뒀어. 거기서 죠는 거의 세상을 잃은 표정이었고. 도쿄에서 라이프 가드…… 그 부분을 들을 때 재차 살아났다. 여전히 멋지시네요 유다이군은. 변한 게 없어 더 생경했다. 난 너랑 있을 때 제일 좋지. 쿡 찌르면 빨개지는 것도 같다.
어설프게 겹친 손이 자꾸만 엇갈렸다. 손끼리 관통되는 모양새가 어색했다. 그래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너는. 여태 어떻게 지냈는데.
죠는 자기도 모르는 구석이 많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되어있었는데, 그게 전부라 뒷말이 비었다. 유다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그런 거 말고. 뭐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 산 적은 없지만 죠는 기억을 되짚어갔다.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서 재밌어요. 유다이는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진짜 그게 다야? 죠가 털을 쭈뼛 세웠다.
……유다이군도 많이. 기다렸습니다.
뭐야아. 유다이가 말끝을 늘이며 어깨를 건드렸다. 웅덩이를 파고드는 빗방울처럼 퐁당. 무력하게 빠졌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해변의 끝과 끝을 오가게 되었다. 포장도로를 밟은 유다이가 멀찍이 시선을 두고 말했다.
잠은 어디서 자는 거야? 안 자도 되려나. 죠는 대답이 없었다. 응? 대답이고 자시고 돌아본 곳에 죠가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유다이가 부산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죠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허탈감에 몸이 축 처졌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정신이 벼랑 끝에 내몰렸나 싶었다. 허전한 오른손을 매만지며 해변을 내다봤다. 적막하고 쓸쓸했다. 홀린 것처럼 다시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밑창이 모래사장을 사각거린 순간이었다.
유다이군.
눈 앞에 죠가 나타났다.
……아니, 뭐야 대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방금까지 무엇도 없던 곳에 죠가 번듯하게 서 있었다. 누가 장난질이라도 하는 건지. 그렇다면 대체 어떤 한가한 존재인지. 이쯤 되니 그냥 실성이었다. 눈만 비비적댔다.
해변 밖으로 나가시면 안 돼요. 귀신 돌쟁이답게 죠는 꽤 박식했다. 지박령과 비슷한 것인지 해변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저가 보이지 않는 줄은 몰랐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애초에 죠를 볼 수 있는 게 유다이가 처음이랬다. 만지지도 못하는데 여기서만 볼 수 있단다. 세계를 초월한 만남이란. 역시 영 까다로운 것이었다.
유다이는 별수 없이 해변에 드러섰다. 바다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위성처럼 끊임없이 돌았다. 달빛이 가로등 빛과 겹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곳곳에 할로겐 라이트를 든 관광객들이 보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새벽이 되도록 발자국을 수놓았다. 저들이 보는 유다이는 어떤 몰골이려나. 혼잣말을 하고, 발치로 주인 없는 발자국이 새겨지고, 허공에 깍지를 꼈으니 영락없는 정신병자려나. 상관 없었다. 해변 한복판에 멈춰선 유다이가 문득 무릎을 구기고 쪼그라들었다. 해변에 아사쿠라 죠의 穣. 히라가나로 じょ를 적었다. 유다이가 죠를 올려다봤다. 눈이 달처럼 휘어 있었다. 작게 소리내어 웃은 죠가 허리를 숙였다. 손가락으로 유다이를 새겨 넣었다. ゆうだい. 남들이 보기엔 심령현상일 테지만. 유다이는 뽕 맞은 것처럼 헤롱거렸다. 상기된 얼굴로 두 히라가나 사이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아 이건 좀 아닌가? 민망해하며 글자 위로 모래를 덮었다. 죠가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댔다.
아침이라기엔 이르고 새벽이라기엔 까마득한 어둠. 잠기에 젖은 얼굴로 유다이가 하품했다. 열두 시간을 내도록 해변에서 보냈다. 체력이 다하는 게 당연했다. 불현듯 죠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하시면 주무세요.
응? 아…… 싫어. 여기 있을래.
걸음까지 꼬일 만큼 졸렸으면서 고집을 부렸다. 왜인지 오늘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저는 늘 여기 있어요.
죠가 단단한 말씨를 꺼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유다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줄 수 있는 만큼만 건넸다. 유다이가 여기저기 흩어졌던 시야를 조각했다. 한 데 모이니 아사쿠라였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죽은 사람 같지 않았다. 이렇게나 반짝거리는데. 점멸하는 네온사인보다 환하고 기우뚱한 유다이를 떠받쳐준다. 그만큼 사는 게 적성인 아이. 죽고 삶을 논하기 이전에 새빨갛게 새겨져 버린 아이.
밤하늘은 배경이오, 피사체는 아사쿠라 죠 뿐이었다. 바다 냄새는 안 나도 죠가 쓰던 비누 냄새는 났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믿었다. 설명하기도 입 아팠다.
잘 자. 해변이 점처럼 작아졌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바람개비처럼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죠가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 있을 것이다. 적도 만큼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
유다이는 곧장 주변에 숙소를 잡았다. 이전에 묵었던 호텔에 같은 호실이었다. 형에게 짐을 택배로 부쳐달라 메시지 했다. 전송이 확인된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서는 곧장 해변으로 달렸다. 죠의 말이 맞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유다이를 반겼다.
하루도 빼지 않고 출석 도장을 찍었다. 동이 틀 때 찾아와서 다음 해를 보고 돌아갔다. 매번 들고 오는 물품이 달랐다. 어느 날은 스케치북, 어느 날은 카메라. 그림은 남았지만 사진은 남지 않았다. 죠는 유다이를 쥘 수 있었지만 유다이는 아니었다. 어디에도 죠를 묶어둘 수 없었다. 크게 미련 가지진 않기로 했다. 당장 눈에 담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오늘은 유다이가 맥주를 한 보따리 들고 찾아왔다. 말보다 마음이 쉬운 탓에 시답잖은 대화만 오갔다. 시간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손 까딱하고 눈 깜빡하면 저녁이 찾아오는 하루. 이날도 예외는 없었다. 아직 맥주캔은 뜯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날이 저물었다.
모래를 깔고 앉은 유다이가 옆자리를 통통 쳤다. 캔을 따는 사이 죠가 엉덩이를 붙였다. 맥주를 건네받은 죠가 고개를 수그렸다. 건배 하자 건배! 알루미늄이 맞부딪히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목구멍을 타고 시원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건배 소리보다 짜릿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죠는 두 손으로 캔을 받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가에 주름이 지며 진득하게 감겨들었다. 으아……. 여전히 가득 차 있는 음료가 입구를 찰랑거렸다. 하나도 안 줄어드는구나! 바닥을 차며 웃던 유다이가 문득 손바닥을 맞대며 물었다.
혹시 남들한테는 떠다니는 걸로 보이려나?
턱짓으로 죠의 손에 들린 맥주캔을 가리켰다. 아마도 그렇습니다. 정말인지 이따금씩 유다이를 곁눈질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으스스하네……. 사실 그냥 즐거웠다. 멀리서 빠른 템포의 록 음악이 들렸다. 리듬을 타며 까딱댔다. 가사도 멜로디도 몰랐지만 흥얼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원을 맹세한 두 사람이.
영원히 안녕.
그것도 여기 있었던 두 사람.
바이 마이 보이!
빈 맥주캔이 쌓여 들다 발 옆으로 굴렀다. 죠는 줄지 않는 맥주를 연이어 들이켰고.
언제까지 그것만 마실 거야.
발음이 묘하게 어눌했다. 품에 가득 싸 들고 온 맥주를 혼자 모조리 해치웠으니 그럴 법도 했다. 죠가 뒷목을 긁적였다. 대신 마셔줄까? 손에 들린 마지막 캔을 구기며 물었다. 캔 끝에 입술을 붙이고 홀짝이던 죠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다이는 한 번에 원샷했다. 아주 취해서 끝장 보고 싶은 사람 같았다. 눈을 세게 감았다 눈알 째로 떴다. 아이홀을 따라 깊게 쌍꺼풀이 졌다.
자. 내가 대신 마셨으니까 소원 들어줘야 돼.
옆나라 청춘들이 자주 쓰곤 하는 고약한 수법이었다. 혼자 번쩍이다 사그라들던 불꽃 축제만큼이나 치사했는데, 바보 같은 죠가 수긍해버렸다. 한 자릿수 덧셈의 답을 내놓는 것처럼 의연했다. 알겠습니다. 뭐든……. 당연한 걸 들은 듯 고개까지 까딱였다.
순간 술기운이 훅 올랐다. 숨에서 맥주 냄새가 났다. 유다이가 비스듬하게 정수리를 기울였다. 입술이 바짝 말라 침을 적셨다. 죠가 꼭 이뤄줬으면 좋겠는데. 엄두가 안 난다. 그만치 머나먼 꿈이었다. 아는 신을 총동원해서 빌다가도 결국은, 죠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던 네잎클로버, 소원을 이뤄준다던 별똥별. 걔들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죠에게만 속삭이고 싶었다. 여린 성대가 벗겨진 채로 알코올에 잠식당했다. 나른한 음성이었다.
한 번만 안고 싶다.
삽시간에 죠의 눈이 슬퍼졌다.
아주아주 닿고 싶어.
죠가 세차게 팔을 뻗었다.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다이를 품에 가뒀다. 심장이 완전히 겹쳐졌다. 유다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명을 나누어서라도 죠를 겪고 싶다. 죠는 넘칠 것처럼 끓어올랐다. 뜨거웠다. 서로의 불씨가 옮겨붙었다. 크고 허술한 유다이의 물잔이 파편을 튀겼다. 마음이 줄줄 샜다. 죠는 작고 견고하게 뭉쳐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쏟지 않았고. 다만 지금은, 잔이 융해될 만큼 무더운 밤. 매미도 혀를 내두르는 지독한 열대야. 녹아버린 유리와 엎질러진 시선이 옭아매였다. 울었나. 잘 모르겠다. 눈물이 날 정도로 사무치기만 했다.
투명한 죠의 위로 유다이가 명징하게 펼쳐졌다. 이대로 하나가 되어도 좋았다. 귓전에서 노랫소리가 진동했다.
겨우 운명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안녕.
그리고 여기에 있었던 두 사람.
바이 마이 보이!
–
죠는 나의 산타클로스.
그리고 네잎클로버.
어쩌면 별똥별이자 우주 같다.
소원이 이뤄진 건 얼마 후의 일이었다.
죠와 닿고 싶다. 부탁하면 죠는 해냈다. 오기로 폭우 속에서 보드를 타던 날처럼. 뒷일을 겁내지 않았고, 로켓보다 무모하다. 버튼 하나에 행성을 뚫고 나아가듯이.
인생은 꿈결의 연속체라.
–
유다이의 발끝이 바다에 닿았다.
볕이 뜨거운 여느 때였다. 다시금 바다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죠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는 걸 넘어서 두려웠다. 언제부턴가 유다이에게 바다는 유령보다 서늘한 존재였으니까. 시간을 단위로 망설이다 마음을 먹었다. 죠 앞에서 모양 빠지고 싶지 않았다.
바지를 무릎께까지 걷고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해수면에 발을 담갔다. 와 바닷물 진짜 오랜만이야. 홀가분한 얼굴로 죠를 봤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닿지 않을 것을. 맥없이 통과해버릴 것을. 허무하게 떨어질 것을 알면서 그랬다. 죠의 손바닥을 쥐었다.
……어?
소리가 겹쳤다. 동시에 멍청한 감탄사를 뱉었다. 유다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뒀다. 뭐야? 인상을 구기며 손바닥을 응시했다. 죠도 번갈아 가며 봤다. 죠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랬다. 어지간히 놀란 표정이었다. 방금 분명……. 말끝은 흐렸지만 기억은 명확했다. 분명 닿았다. 유다이의 조금 높은 체온이 덥석. 죠를 감싸 쥐었다.
유다이가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죠가 냉큼 움켜쥐었다. 살집 없는 손이 딱딱했다. 여전히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맞잡기 위해 조형된 것처럼.
동시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정수리 위로 햇살이 반사됐다. 자석처럼 이끌렸다. 심장을 충돌시키며 껴안았다. 죠는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러면 유다이가 두 배로 박동했다. 대신 피를 뿜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숨이 막힐 만큼 세게 안았다. 아니, 그냥 부서져라 안았다. 먼지 한 톨. 빛 한 자루 껴들 틈 없이 끌어당겼다. 유다이가 죠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냄새도 나지 않는구나. 그래도 들이켰다. 옷자락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죠를 맡았다. 죠가 슬그머니 유다이의 뒤통수를 쥐었다. 힘이 거의 실리지 않아 간지러웠다. 그래도 맞춰줬다. 고개를 들어 올린 유다이가 이내 죠의 양 볼을 잡았다. 입술에 키스해. 전신의 세포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렇게 보챌 것 같았다. 유다이가 죠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입술이 포개어졌다. 죠의 눈꺼풀이 떨리는 게 보였다. 양손으로 유다이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유다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질끈 감겼다 뜨이는 눈부터 움찔대는 코끝까지 전부 봤다. 숨, 울음, 열기. 모든 게 차오를 때까지 그랬다. 삼키는 호흡이 닿을 만큼. 죠는 체한 것처럼 긴장했다. 멀미하는 아이 같다.
한참을 뒤엉키던 입술이 떨어졌다. 손을 잡고 바다 깊은 곳으로 달렸다. 심장이 첨벙. 물결친다. 다시금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
여름이 깊어갔다. 수 번의 우기와 해일을 지나치고 바다를 덥혔다. 나란히 누워 태닝하는 커플. 비치볼로 하는 수구. 물장구를 배우는 어린이. 미야자키는 부지런히 흘러갔다.
유다이는 개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으리라 자부했다. 매일 해변에 출석하다 못해 이제는 머리 끝부터 발목까지 안 젖은 구석이 없었다. 종일 살았다. 아가미가 달린 생물처럼 바다에서 숨 쉬었다. 물과 죠에 닿았다. 볕을 더듬듯 죠를 어루만졌다. 버릇처럼 끌어안았다. 바다와 맞닿으면 죠와 연결될 수 있었다. 받아주다 못해 이젠 스스로 파도가 됐다.
숨이 차게 키스하면,
죽을 것 같아요…….
죠가 익은 채 말 했다.
너 이제 안 죽잖아.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단말마의 탄식이 새었다. 바보. 어깨를 쿡. 찌르면 찔렸다. 뼈가 단단한데 반해 죠는 물러터졌다. 파도란 가변적이니까. 언제든지 부러질 수도, 사라질 수도 있을 것처럼. 바람 한 겹에 망가졌다가 돌산을 깨부수기도 하니까. 그래서 유다이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순간을 아주 그리워하게 될 거란 확신.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맹세. 그럴 때마다 심장이 헐거워졌다. 혈관에 녹이 슨 것처럼 부식됐다.
뭍으로 나가는 순간이 드물었다. 해파리보다 오래 수영하는 것 같았다. 수영하지 않더라도 발은 담갔다. 죠를 건드리고 싶었다. 눈앞으로 어설프게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오갔지만, 못 본 척 했다.
금방 감기에 들었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유다이는 철옹성이 아니니까. 코를 훌쩍이면서도 젖어 있었다. 죠의 걱정스런 눈초리는 또, 못 본 척 했다. 그냥 쪽쪽 거리며 칭얼댔다.
빨리 내 감기 가지고 가.
죠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풀 죽은 정수리 위로 유다이의 손바닥이 얹혔다. 무덥고 가뿐하다. 코끝이 시큰할 만큼 죠를 기쁘게 만든다.
열병 같은 사람. 걸리면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머리가 후끈후끈. 눈알이 어지럽게 돈다. 상흔처럼 남는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나 옮겨붙었다. 심장에 낙인이 찍힌다. 그래서 날 아주 아프고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아사쿠라 죠를 그네처럼 휘젓는 사람. 마음이 곤죽으로 흐트러진다. 여름밤 발치를 훑고 지나가는 샛바람 같은 사람. 목덜미를 덥히는 열대야 같은 사람. 내리는 불꽃마저 역류시키는 폭풍 같은 사람.
유다이와 있을 때 죠는 파도가 된다. 숨을 훅 뱉으면 뱉는 대로 철썩. 바람에 떠밀리듯이. 때론 외계인 그림이 그려진 서핑 보드로 밟아가도 좋고. 그래주었으면 했다.
너무 빨리 자라지 말자.
너무 빨리 익어버리지 말자.
너무 빨리 끓지 말자.
모든 게 뭉근하게 흘러가길 바랐다. 그래서였을까. 유다이는 서서히 식어갔다. 깨닫지 못할 만큼 점진적으로. 그 높은 체온이 곤두박질치도록. 언제나처럼 가슴께에 물이 고인 채 껴안았다. 바닷물이 찬 줄 알았는데, 유다이가 파랬다. 입술이 혈색을 잃고 죽어 있었다.
유다이군. 추워요. 잠깐 나가요.
죠가 유다이의 뺨에 손을 대며 부탁했다. 말투가 차분한데 눈이 덜덜 떨렸다. 이미 죽었는데도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유다이가 눈꺼풀을 내리깔며 죠에게 기댔다. 으응…… 싫어. 자꾸, 바다에 중독된 것처럼 굴었다.
죠는 반쯤 혼이 나갔다. 제발요……. 너무 차가워요. 유다이의 어깨를 안고 해변 가까이로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모래에 발이 박혔다. 죠. 목소리 끝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네.
왜 이렇게 춥지.
죠는 울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발을 구르며 유다이를 달랬다.
오늘 물이 차요.
그래? 그래서 추운가보다.
…….
다행이다.
다행입니다.
안아줘…….
이미 안겨있으면서. 죠는 유다이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제발. 거기서부턴 기도가 수반됐다. 유다이의 몸에서 힘이 빠져들었다. 체온이 줄줄 샜다. 유다이군. 제 말 들리세요? 목소리가 작아서라고 믿고 싶었다. 유다이는 대답이 없었다. 품 안을 쳐다도 못 봤다. 정강이까지 물이 얕아졌을 때가 되어서야 유다이가 기절했음을 알았다. 바다의 끝자락까지 도달하자 비로소 죠가 무너져 내렸다. 유다이를 바다 밖으로 꺼내줄 수 없었다. 거기선 닿지 못했으니까.
어느덧 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이 만신창이로 슬퍼졌다. 끌어안고 비비며 체온을 나누고자 했다. 유다이는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죠는 귀신이라. 유다이를 데울 수 없었다. 유다이가 해줬던 것처럼 박동을 공유할 수도, 숨을 심어줄 수도 없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신음이 새었다. 쇳소리가 났다.
죠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말끝엔 꼭 제발이 붙었다. 태닝을 하는 커플도, 비치볼을 놓친 남자도, 발을 차던 아이도 듣지 못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거스러미를 뜯기 바빴다. 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을 맞추고 볼을 더듬어도 살아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생명 따위는 없었다.
삶이 뙤약볕처럼 내려앉고 끓어올랐다. 유다이가 잿빛으로 변해가기 직전인 때였다.
극적인 발견이었다. 고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무리가 사제 폭죽을 터뜨렸고 이목이 한 데 모였다. 쓰러진 유다이와 고작 다섯 걸음 먼 거리였다. 쨍쨍한 태양 아래로 불꽃이 폭발했다. 웅성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다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살렸다. 백사장으로 옮겼고, 몸을 데우고, 정신을 깨웠다. 죠가 해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유다이는 눈을 뜨자마자 죠부터 찾았지만 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사쿠라 죠는 유다이에게 어떤 형태의 벌인가. 애당초 유다이가 무슨 죄를 지어 죠를 되뇌이나.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나를 보면 환해지는 유다이군. 나 대신 비를 맞던 유다이군. 따가울 만치 빛이 나는 유다이군.죠는 결심했다. 떠날 것이다. 파도를 타는 유다이를 마주하고 영영. 더는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더는 유다이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
죠는 유다이 때문에 여기 남았으니 유다이만이 돌려보낼 수 있었다. 죠의 소원은 유다이가 파도를 타는 것. 되도록 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하지만 유다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서울 만큼 칼 같았다.
저는 유다이군의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그냥 있어. 만지지 못 해도 돼. 내가 잘 조절할게. 죠는 가만히 모래알을 매만졌다. 아니에요……. 제가 있으면 위험해요. 이번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다 떠나서 유다이의 삶 자체도 문제였다. 허공에다 대고 별 짓을 다 하는데 곧 신고라도 할 기세인 사람을 여럿 봤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러자고 유다이에게 나타난 게 아니었다.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는 척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죠는 유다이의 울퉁불퉁한 면까지 아꼈지만. 저로 인해 빗금지는 인생은 원치 않았다.
며칠을 내리 실랑이했다. 폭우를 앞두고 서핑을 우기던 때보다 치열했다. 그때 물러섰다가 크게 데인 경험 때문일지. 유다이는 한없이 날이 섰다. 그냥 외면하고 싶은 것 같았다.
죠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곤거렸다. 앞머리가 일정한 방향으로 날렸다.
저 하나 없이도 괜찮으실 겁니다.
여태 살아오신 것처럼. 제가 나타나기 전처럼요. 죠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유다이의 널찍한 가슴팍을 응시했다. 유다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
한동안 대꾸가 없던 유다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난 한 순간도 너 없이 살 수 없었어.
어딘지 상처 받은 아이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줄 알았지? 어쨌든 지금 살아있으니까.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들이 매캐하게 흩어졌다.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목구멍을 들쑤신다.
근데 아니야. 죽지 못했을 뿐인 거야.
죠가 몸을 흠칫 떨었다. 단단히 실수한 기분.
사실 그것도 아니야. 못 다 죽은 거야.
죠는 고개를 떨궜다. 시야에 들어온 유다이의 손이 유독 허전해 보였다. 잡아주고 싶다. 유다이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넋두리에 가까웠다. 아니 그냥 일종의 절규였다.
그래 너 없이도 난 살겠지. 살 수 있겠지. 매일 눈 불어 터지게 울어도 숨은 쉬니까 살아는 있겠지. 근데도 니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고. 니 말처럼 너 하나 없다고 못 사는 거 아닐 텐데 자신이 없다. 지금 니가 나한텐 그래. 아사쿠라 죠가 어디쯤에 있는지 볼 수가 없어. 있어도 그립고 없어도 이골이 난다. 너 어쩔래. 이젠 나도 니가 미워 죽겠어.
슬픈 얼굴. 나의 여리고 억센 유다이군. 아사쿠라 죠가 밉다면서도 아주 애틋한 얼굴. 서글프고, 그래서 값지다. 죠는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울지 마세요……. 단지 뺨을 매만질 뿐이었다.
해수만큼 눈물을 흘린 날. 발목을 적시는 바닷물이 없었더라면 우린 닿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어코 여름을 넘어서지 못하는 계절. 방 한구석 버리지 못한 서핑 보드. 외로워도 잡을 수 없는 손. 그런 것들을 상기하며 유다이가 잠잠해졌다.
다시 서핑할게. 너도 그게 행복한 거지?
죠가 드물게 눈을 피했다. 유다이가 죠의 머리통을 품에 안았다. 끄덕이는 고개는 미미하고 단정하다. 바람이 파도에게 일렁였다. 엉망으로 뒤섞였다.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다.
–
양 팔을 벌리고 태양을 들이켰다. 불처럼 뜨거운 세례를 받았다. 귓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죽기보다 벅찬 더위가 온몸을 핥고 지나쳤다. 그런 아무런 날.
유다이는 죠의 보드를 들고 해변에 나타났다. 반대 손에는 죠가 그린 보드가 있었다. 어느 쪽을 탈지 십수 분을 토론했다. 정수리가 애매하게 포개져 있었다. 그래도 제 보드였으면 좋겠어요. 죠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투명하다. 입꼬리로 호선을 그리며 유다이가 죠의 보드를 들었다.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것이었다. 남은 유다이의 보드는 영영 간직될 것이다. 죠가 사라졌던 날의 냄새 그대로.
모래를 밟고 선 유다이가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팔을 뻗자 근육결을 따라 윤이 돌았다. 죠는 따라 움직였다. 길이가 비슷해 실루엣이 닮았다. 아마 죠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었다면 모양이 같지 않았을까. 애석하게도 죠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 몸이었지만. 민둥한 백사장을 가리키며 한바탕 웃었다.
유다이는 손발부터 물을 묻혔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 심장에서 먼 곳부터 차례로 적셨다. 죠는 심장이 없으면서 똑같이 했다. 달빛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불볕 아래. 그럼에도 해변은 바보를 양산한다. 탈수기에 돌린 옷가지처럼 몸을 구기며 깔깔댄다.
끝으로 보드를 띄웠다. 배를 붙이고 보드에 엎드렸다. 팔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죠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헤엄쳤다. 서로 속도를 맞추느라 거북이 만큼 느렸다. 아마 바람이 거꾸로 떠미는 속도보다 굼떴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대로 부유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인파가 까마득해질 만큼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바다에 푹 찔러 박은 못 같았다. 유다이가 먼저 보드를 밟고 올라섰다. 쉴 새 없이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타이밍 맞춰 죠의 손을 잡아 당겼다. 버둥대다 간신히 유다이의 옆에 섰다. 하나의 보드 위에 같은 높이로 눈이 마주쳤다.
준비 됐어?
먹먹한 목소리. 네 됐습니다. 죠는 이제 파도 소리에 쉽게 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엉키며 몸이 뒤섞였다. 하나, 둘, 셋. 수많은 파도를 지나쳤다. 파도를 고르는 건 유다이의 몫. 유다이는 기다렸다. 죠를 닮은 파도가 올 때까지. 결연하고 고요하지만 막대한 물결이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먼장에서부터 파도가 일었다.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뻐근할 만큼 강하게 붙잡았다. 놓치지 않기 위해. 더는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사랑해 마지않던 바다에게 서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지금이야!
동시에 자세를 낮췄다. 보드의 가장자리를 타고 물줄기가 번쩍였다. 로켓에 붙은 불꽃처럼 따가웠다. 높은 파도였다. 온 바다를 전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떠올랐다. 구름을 밟고 선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기분. 이곳이 천국이라도 된 양 성스러웠다. 아마 유다이가 정말 천국과 극락을 논하는 날이 온다면, 죠는 나자빠지겠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며 결사반대 할 것이다. 폭우를 딛고 일어서던 기세로 덥석. 유다이를 감춰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둘은 파도 속에 갇혔다. 동굴처럼 말린 배럴이 죠와 유다이를 감쌌다. 위성을 거느리는 태양이 된 것 같다. 유다이가 죠를 돌아봤다. 곧장 눈이 맞았다. 예쁘지! 예뻐요. 어딘지 집요한 말투였다.
온 세상이 물방울로 가득찼다. 눈을 감고 코를 막아도 여기가 파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드 끝이 큰 파장을 그리며 또 한 번 기울어졌다. 멀미가 날 것처럼 벅차다.
유다이는 배럴의 끝을 직감했다. 이 물길이 끝나고 나면 영영. 다시는 죠를 볼 수 없겠지. 그래도 웃었다. 죠가 스케치북에 옮겨담곤 했던 열을 재현했다. 죠는 이런 유다이를 좋아했으니까. 죠가 싱그럽게 웃음 짓는다. 예쁘게 접힌 눈매와 말려올라간 윗입술. 아주 그리울 것이다. 없이 살아봤으니 잘 알았다. 마지막으로 유다이는 죠를 끌어당겼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여전히 둘 사이에는 유다이의 호흡만이 잔존했지만. 잠시간 입술을 맞붙였다. 폭신폭신. 함께 베고 누웠던 호텔 방의 침대보다 부드럽다. 너에게 흠뻑 빠지고 싶다. 벌어진 입술 새로 유다이가 안녕을 고했다. 물결의 꼭짓점으로 향한다.
안녕.
나의, 죠!
죠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들리지 않았다. 또 졌구나. 그 한결 같음에 웃음이 났다. 눈이 질끈 감겨들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땐 파도가 멎어 있었다. 흩어지는 물길과 함께 죠는 사라졌다. 흔적 없이 녹았다. 유다이는 수면 위로 떠오른 채 맑은 하늘을 봤다. 죽기 딱 질색인 날씨였다. 보드 끝을 붙잡고 흔들리다, 죠의 작별을 짐작했다.
아마도 사요나라.
그냥 같은 말을 건넸기를 바랐다.
안녕. 나의 유다이.
–
끝없이 펼쳐진 야자수. 자유롭게 춤을 추는 피서객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의 향연. 서퍼들은 파도를 타고 폭죽처럼 발포된다. 이곳은 발리의 백사장.
케이!
부르는 소리에 유다이가 뒤를 돌아본다. 초보자용 롱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파라다이스를 가로지른다. 샌들 사이로 모래알이 까끌거렸다.
청색으로 반짝이는 바다에서 가장 눈부신 남자. 세계가 그를 두르고 공전한다. 그의 열을 받아 생존한다. 유다이는 여기서 제일 무더운 파도를 안다. 역광에도 지지 않는 아이를 기억한다. 물살이 유다이의 보드를 떠밀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오늘도 파도는 서퍼를 이끈다.
수억 개의 불꽃이 심긴 해변으로.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