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역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희열. 그것을 잊지 못해 이곳에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시부야와 하라주쿠, 그다음엔 아사쿠사, 지나서는 긴자, 마침내 도쿄 타워를 지나 도쿄역에 발을 디디면 서늘한 초봄의 기온이 무색하게 온몸에 뜨거운 피가 요동쳤다. 러너스 하이랬나. 어떤 과학적 기전으로 작용하는진 몰라도 억세게 쥐어짜인 폐와 심장이 평소와 같은 박동을 찾을 때까지 고양된 기분은 머리 속을 팽팽 돌려댔다. 언젠가 목에 메달을 걸지 못하고 마라톤의 관중에게 손을 흔들던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영업 중’ 팻말을 걸어놓았다. 애꿎은 무릎이 욱신거린다.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고, 애달프지는 않다.
인생은 하루아침에 이리저리 휘청인다고도 하는 걸 수 없이 들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도무지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죽어라 마라톤만 했더니 메달이며 상장이며 정리할 게 많아 손도 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몽땅 쓸어 상자에 넣어두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게 당장은 후련할 것 같아서. 러닝 복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살면서 평생 달리기를 안 할 것도 아니니까. 조깅하면서 쓸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깔끔히 빨아 정리했다. 미련인지는 모를 일이다.
친구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기사가 몇 개 났다던데 굳이 찾아볼 여력이 없었다. 아직도. 안타까운 마라톤 선수의 말로로 얼마나 대서사시를 써놨을는지. 아파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그딴 낡아빠진 신조는 코가 유다이의 인생에서 최고로 멍청한 선택이 되었다. 무릎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발을 내디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었다.
툭하면 우는 유다이. 별명은 이른바 수도꼭지. 하지만 그때는 울지 않았다.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새로운 삶으로 환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분리되고 나니 눈물이 날 정도로 실감 나지 않았다. 꿈에서 길을 잃었다고 현실에서 울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유학을 갔다. 상금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더니 돈이 꽤 되어서 따로 힘들인 일은 없었다. 외국어가 어려운 건 누구나 매한가지니. 다행히도 언어에 좀 재능이 있는지 곧잘 입에 붙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코가 유다이의 장점. 누구든 사랑하기. 매번 만남에 기뻐하고 매번 이별에 아쉬워하는 사람이어서 주변에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에서도 붙임성은 붙임성인지라 유다이는 늘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때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베를린’조차 발음하기 어려울 때 찾아오는 완벽한 이방인의 기분. 그럴 때마다 학교 앞 작은 브루어리에서 숨을 돌렸다. 그런 감정에 오래도록 매몰되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마라토너에게도 끝까지 달리기 위해서는 급수대가 필요하다.
케이 브루어리
뻔한 이름이다. 애초에 작명 센스가 유독 없기도 했다. 이름의 앞 글자와 사업장 정보를 나열했을 뿐인 간판이지만 친구들이 마구잡이로 뽑아준 후보 중에는 가장 그럴듯했다. 일본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곳에 있다. 이번엔 언제까지 도쿄에 살 수 있을까. 역마살이 낀 건지 정착이라곤 못하는 유다이의 몇번째 정류장이다.
종목이 종목인지라 퇴근 시간대가 되면 손님이 적잖이 몰려왔다. 장사가 깨나 되는 바람에 오픈한지 몇개월 차에 벌써 단골 행세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반대로 단골이면서도 티 한 번 내지 않는 사람도.
아사쿠라 죠. 근처 미술대학의 재학생이었다. 스스로의 신상을 줄줄 부는 편은 아니었으나 종종 학교의 앞치마를 두른 채 가게로 들어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레슨 있었구나? 물으면 곧장 얼굴이 화르르 타오르며 허겁지겁 물감 묻은 앞치마를 벗었다. 까⋯ 까먹어서⋯. 어벙한 목소리는 덤. 매일을 같은 시간에 출근 도장 찍다시피 하면서도 친분 과시 따위 하지 않는다. 모두가 “케이!”를 부르며 주문을 할 때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케이상⋯.” 하고 한 번 부를 뿐이다.
아사쿠라는 매번 구석진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떨어지는 은은한 조명 빛만 응시하며 느릿한 속도로 맥주를 마셨다. 한참을 미지근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맥주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교 일이 힘든가? 괜스레 이런 저런 걱정이 들어 부러 말을 더 걸어본 적도 있으나 민망한 웃음을 지어대길래 그마저도 줄인 참이었다. 아사쿠라에게도 브루어리가 숨구멍인 걸까. 나랑 비슷한 구석이 많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구태여 전하진 않았다. 마음대로 사람에게 레이어를 덧씌워 보는 버릇을 티 내는 건 일찍이 졸업해야 한다.
“케이상⋯.”
여느때처럼 아사쿠라가 조심히 손을 든다. 손을 높이 휘젓는 것도 민폐라는 듯한 느슨한 움직임이었다.
“네네 갑니다! 오늘도 바이젠?”
절레절레. 아사쿠라가 짧은 거절과 함께 작게 숨을 들이쉬고 이내 다짐한 듯이 내쉰다. 응? 유다이는 머뭇거리는 인영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 섰다. 남들 보다 큰 아사쿠라의 쉽게 빨개지고 쉽게 눈에 띄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허리를 살짝 굽히니 조명이 닿지 않는 벽 쪽으로 몸을 쑥 뺀다. 좀 상처⋯. 유다이는 멋쩍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시간 있으시면⋯.”
아사쿠라가 빳빳한 팸플릿 하나를 내민다. 뻗어진 두 손이 파르르 흔들리는 바람에 팸플릿이 꼴사납게 떨렸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아사쿠라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작지 않다곤 알고 있었지만 마주 보고 앉으니 눈이 얼핏 맞는다. 키가 크네. 카운터는 홀보다 한 단 높게 설계되어있는 탓이다. 부끄러움이 많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시선을 좇는다. 먼저 고개를 돌려버린 유다이가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전시회?”
“학교에서 전시회를 하게 되어서요. 싫으⋯신가요?”
목소리가 요동치길래 입술을 야트막이 깨물었다. 순전히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도 이 정도로 숙맥인 애는 없었는데. 장난으로 거절을 해볼까 하다가 눈 아래로 길게 진 속눈썹 그림자가 꼭 울 것만 같아 단숨에 승낙해버렸다.
“좋지! 갈게!”
거침없는 회신에 만면에 미소가 떠오른다.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럼 이건 러브레터? 전시 개요가 복사된 팸플릿을 이리저리 펼쳐보았다. 그런 것치곤 딱딱하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
오시면 제가 작품 설명도 해드릴게요. 호기로운 선언과는 달리 아사쿠라는 그날 제 역할 수행에 실패했다. 어디를 가나 북적거려 유다이도 맥을 못 출 정도였으니 아사쿠라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장안의 어수선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수순이다.
그도 그럴게 이번 졸업 기수에 유명한 도예가의 아들이 있댔나. 미술에 젬병인 유다이마저도 인터넷 어디에서 들은 적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만든 건 얼마 정도 해? 작품마다 다른데⋯. 저런 도자기는? 아마 백만엔 이상⋯. 입을 떡 벌리자 추위에 벌게진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키만 아니면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네. 어쩐지 학부모 참관 수업을 온 기분이다. 유치원 참관 수업을 다녀왔단 친구의 소식을 얼마 전에 들은 참이라.
“이 작품은⋯.”
“뭐라고?”
“아⋯ 그⋯⋯⋯ 이 작품은요!”
“깜짝이야.”
“죄송해요. 포옹이라는 작품인데⋯.”
아사쿠라는 목소리를 키우는 게 어색한 사람 마냥 웅얼거렸다가 소리를 질렀다가를 반복했다. 이렇게 수줍음 많은 애가 전시회에 초대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건지. 초대한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아사쿠라의 최대 볼륨마저도 잘 들리지 않아 옆에 바투 붙어서니 또 퍼뜩 떨며 귀가 빨개진다. 몸 둘 바를 모르며 손을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말보다 행동이 시끄러운 아이구나. 부끄럼쟁이 아사쿠라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반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제 페이스를 찾으며 나지막이 작품 해설을 이어 나간다. 유다이는 유심히 목소리를 들으며 작품에 집중했다.
“포옹하는 사람의 모습을 도형화해서 그렸어요.”
“아아. 이게 팔?”
“네에. 맞아요.”
“설명 들으니까 확실히 알겠다.”
아사쿠라의 작품은 대부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좋아하는 걸 눈 반짝이며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새삼스럽게 간질거렸다. 그런 열정이 반갑기도 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꼭 꼰대 아저씨가 된 것만 같아 스멀스멀 웃음이 나왔다. 그땐 방학만 되면 합숙 훈련을 했다. 산에 가서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뜀박질로 정신을 빼다 보면 바다로 놀러 가고 싶은 생각일랑은 들지도 않았다. 그때 같이 합숙했던 애들은 벌레라면 지긋지긋하게 익숙하다 하던데. 유독 유다이만 호들갑 떠는 게 고쳐지지 않아서 아직도 애같이 곤충 장난감으로 놀림을 당하곤 했다.
7년 전엔 이 애들과 같이 스타트 라인에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다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케이의 브루어리 밖에 없다. 몇 명은 결혼까지 했지만 유학이니 개업이니 돈을 거하게 써 온 유다이는 결국 브루어리를 연 직후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난 이제 결혼할 나이인데 유우는 결혼 생각이 없어 보여. 맥주잔에만 몇 십만엔을 쓰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하니. 촌철살인으로 유다이를 토막 내고 간 카렌은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 결혼사진을 올렸다. 수익을 보려면 맥주를 몇 잔이나 팔아야 하는 거냐며 경악하던 친구들의 잔소리는 그러게 그럴 줄 알았다로 바뀐 지 오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설명을 흘려듣던 유다이는 눈앞의 그림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라! 이건 우리 맥주잔이네?”
“맞아요. 케이상의 가게 맥주잔인데. 요즘은 이렇게⋯ 크롭해서 정물의 어느 한구석만 보이는 것도 트렌드거든요.”
“대단하네.”
“케이상의 브루어리는 크리스탈잔이 근사해서⋯.”
브루어리에 들리는 손님들 중 대개는 크리스탈잔인 걸 모르던데. 아사쿠라는 미술을 해서 그런지 눈썰미가 좋은 건지 용케도 알아본다. 뭐 다들 고작 맥줏집에서 크리스탈잔을 쓸 거라고 생각 못하는 것에 가깝겠지만.
두꺼운 잔에 반쯤 남은 누르스름한 액체. 희끗희끗하게 떠다니는 거품과 탄산이 올라오는 모양, 그리고 잔가에 맺힌 물방울까지. 매끈하게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에 한참을 훑어보았다. 배경을 새까맣게 칠해서인지 입술이 닿은 곳을 따라 뭉쳐있는 물 자국에 눈길이 갔다.
“헬레스를 마신 적이 있던가?”
“⋯그림만으로 맥주 종류를 알아보시나요?”
“내가 만드는 맥주 중에 색깔이 가장 연하거든.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난 헬레스만 마시는데 아사쿠라는 바이젠만 마시니까 말이야.”
아아 그게⋯. 아사쿠라가 뭔가 대꾸를 하려는지 우물쭈물거린다. 할 말을 기다리는데 작품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라라? 옆얼굴을 빤히 보니 얼굴에 피가 쏠린 듯 빨갛다.
“⋯캔버스를 많이 다듬었어요.”
“응?”
“젯소칠을 두껍게 하고 사포로 평평하게 가는 작업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우둘투둘한 보통 캔버스와는 달리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거든요.”
뭔가 석연 쩍은 게 있는 사람처럼 은근슬쩍 화제가 바뀌었다. “그렇구나!” 얕은 속임수에 속아주며 맞장구를 쳤다. 말하기 싫은 게 있나 보지. 바지런한 뒤통수를 보며 웃음을 참다 보니 어느새 관람이 끝났다. 저학년이라 작품 수가 몇 개 없는 까닭이 컸다. 다른 학생의 작품들도 구경을 해보려고 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한참을 기다려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아사쿠라는 더 이상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자꾸만 불안한 듯 몸을 기웃거렸다. 아직 서툰 게 웃기기도 하고 이해되기도 하고. 첫 데이트에 안달 내는 사람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어릴 땐 저래 보였겠지.
일찍 와서 가게 오픈까지 시간도 좀 있고⋯. 비 맞은 강아지를 도와주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사쿠라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자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이 입을 아⋯ 하고 벌린다.
“가게로 가자. 이번엔 내가 답례로 맥주 설명회 해줄게!”
무작정 쥔 손바닥에서 척척하게 식은땀이 나길래 금세 놓아주었다. 날씨가 좀 추운데. 흰 머플러를 아사쿠라의 목에 둘렀다.
“다한증 있는 사람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 땀 때문에 몸이 식으면 아프기 쉽거든.”
“감사합니다⋯.”
머플러 사이로 작은 얼굴이 파묻힌다. 흰 거 두르니까 흰둥이 같네. 아사쿠라는 가게에 가는 내내 손이 찝찝한지 쥐었다 피길 반복했다.
브루어리에 도착하자마자 물티슈를 내밀었다. 이걸로 손 닦아. 잠시간 머뭇거리던 아사쿠라는 물티슈 한 장을 꺼내 느릿하게 손을 닦았다.
코트를 벗어 한 쪽에 밀어 놓고 잔을 꺼냈다. 뭐부터 줘야 하나. 아까 봤던 그림이 떠오르길래 헬레스를 먼저 따랐다. 바이젠 말고 다른 맥주 시키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그림으로 그릴 정도면 마셔보고 싶었나? 맥주의 명칭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것에 생소해 잘 모르는 손님이 많았다. 유다이는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주는 사장이었지만 아사쿠라 같은 손님은 질문하지 못하고 그냥 아무거나 시켜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오늘 내가 제일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아주지! 혼자 포부를 세우다가 습관처럼 잔 가득 맥주를 따라버렸다. 아 실수! 반만 따라줄 생각이었는데.
“아사쿠라. 주량은 어때?”
“그런 건 아직 잘⋯.”
“모범생 타입이구나. 그럼 반만 마실래? 남은 건 마셔줄게.”
“엣⋯ 그래도 되나요?”
카운터석 위로 잔을 내밀었다. 보통은 손님이 잡기 편하게 왼손으로 잡고 잔을 내어주는데 반대쪽으로 잔을 돌려가져간다. 벌컥벌컥. 맛이 느껴는 지기는 하는 건지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마셔버린다.
“몰랐는데 왼손잡이?”
한마디 걸자마자 캑캑 기침을 해댄다. 눈꼬리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런⋯. 왼손잡이⋯인데, 오른손도 많이 써요. 그럼 양손잡이 아냐? 그런가요⋯. 양손을 번갈아 가며 젓가락질 하는 시늉을 해보다가 다시 남은 맥주를 들이킨다.
“자. 지금 마신 헬레스는 청량감이 특징이야. 가장 대중적이지. 그리고 살짝 고소한 맥아의 향이 나는 것도.”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기다릴까 봐 일부러 빠르게 마셔준 건지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소매로 대강 닦으며 잔을 내민다. 어이 집중해서 들어달라고? 아 죄송해요⋯. 급하게 마시지 않아도 돼.
새 잔을 꺼내 필스너를 따랐다. 이번에는 반만 따르는 것에 성공했다. 건배를 하려 잔을 들고 보니 아사쿠라의 그림에서 봤던 것과 같이 입술이 닿은 곳에 물 자국이 어려있었다. 아사쿠라가 불쾌해 할 것 같아 앞치마로 살짝 닦을 요량이었지만, 아직 앞치마를 두르지 않은 걸 깨달았다. 아 재킷만 벗었지. 엄지로 입구를 문질러 닦자 아사쿠라가 화들짝 놀라며 니트의 소매로 엄지를 감싸온다.
“더러⋯ 더러워요.”
“이 정도로 뭘.”
거품이 꺼지려고 하는 필스너를 재차 가리켰다. 식기 전에 어서 마셔. 아까 급하게 마시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던 게 마음에 내켰던 건지 몇 모금을 들이킨 후 내려놓는다. 알기 쉽다 쉬워. 어쩐지 지켜보는 내내 자꾸만 아저씨 같은 추임새가 나왔다.
“어때?”
“조금 쓴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아직 어리구나!”
“에에⋯⋯.”
“농담 농담.이건 쓴 맛이 나는 게 특징인 필스너라는 맥주야. 잘 맞히네?”
조금 긴장이 풀린 건지 베슬베슬 웃는다. 아사쿠라 벌써 취했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괜찮아요. 대답하는 말꼬리가 늘어진다. 취했구만⋯. 급하게 마시는 것 같더라니. 흐흐흐.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낸 아사쿠라가 묻는다.
“케이상은 원래부터 맥주를 좋아했나요?”
“딱히⋯. 원래 운동을 했거든.”
“와아. 저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운동을 했어요.”
원래도 느린 말이 점점 더 느려진다. 밖은 아직 밝은데. 가게 조명이 어두운 탓에 아사쿠라의 얼굴에 길게 그림자가 진다. 동글동글하게 생겼다. 가만히 얼굴을 내려다보던 유다이의 잇새에서 불쑥. 가끔 맴돌던 출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사쿠라. 너 나랑 닮은 구석이 많구나.”
취한 듯 머리를 살짝 꾸벅대던 아사쿠라는 또 눈이 접힐 정도로 웃었다. 기뻐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죠⋯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
–
집과 브루어리를 전전하던 유다이의 생활 공간이 한군데 늘었다. 한창 놀러 다니던 대학생 때와는 달리 좀처럼 놀 시간도 만날 사람도 없다 보니 주로 브루어리에 콕 박혀있곤 했는데, 요즘엔 시간이 날 때마다 죠의 자취방을 찾았다.
죠의 자취방 한켠에는 미대생이라는 걸 증명하듯 다닥다닥 그림이 걸려있었다. 유다이는 그림에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죠의 그림에 대한 꼭 설명을 듣곤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죠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만 같았다. 우쭐거릴 곳도 없는데 어딘가에 ‘난 이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지!’하고 자랑하는 기분.
그렇게 그림에 코를 박고 있다 여덟 시쯤이나 되면 슬슬 아침 식사를 차렸다. 죠는 먹는 양이 많지만 미식가는 아닌지라 아침으로는 주로 밥에 김을 싸 먹곤 했는데 유다이가 왕래한 뒤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하다고! 성을 내며 잔소리 한 뒤로는 꼬박꼬박 식자재가 냉장고에 채워져 있었다. 그것마저도 보통은 유다이가 써준 메모를 토대로 한 것이었지만. 유다이가 내일 아침에 뭐 먹을까? 물으면 이것저것 후보를 꺼내고, 장 볼 것을 메모하고, 심부름을 보내는 식이었다. 스무살짜리 마트 보내는 게 왜 이리 긴장되는 건지. 이거 완전히 ‘나의 첫 심부름’이잖아? 치쿠젠니를 만들기 위해 가츠오부시를 물에 넣고 끓이는 동안 죠는 또 조잘대며 말을 걸었다. 은근히 말이 많은 녀석이란 말이지.
“이 당근은 두 번 씻어 안전한 당근이라고 해서 샀어요.”
“그렇구나. 어쩐지.”
“연근은 자잘한 구멍이 많아서 소스나 국물을 잘 머금는다고 하길래⋯.”
“그렇구나.”
“⋯재미없으신가요?”
“아니 좋아. 계속 설명해 줘.”
“그러면 이 가츠오부시는 감칠맛이 좋다고 주부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하더라고요. 곤약이랑 이 버섯⋯ 그⋯.”
“표고버섯?”
“네. 표고버섯은 제가 좋아하는 걸로 골랐어요. 치쿠젠니를 할 거라고 하니까 닭고기는 안심으로 주셨는데.”
“잘 사 왔네.”
간장을 베이스로 한 소스에 닭고기를 뒤적거리며 조리는 동안 죠는 기어코 모든 식자재의 설명을 마쳤다. 브루어리에서 낯을 가리는 모습만 보던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다쟁이다. 스무살은 스무살이구나. 대답하다 가끔 눈을 마주치면 더 신나서 말이 빨라지곤 했다. 유다이가 밥을 그릇에 푸는 사이 죠가 수저를 놓는다. 동시에 잘먹겠습니다! 를 외치고 한 입을 뜨면 죠는 최대한의 리액션을 발휘했다.
“우왓⋯. 맛있어요.”
눈을 될 수 있는 한 땡그랗게 뜨고 작은 목소리를 그나마 크게 내는 심심한 반응이었지만 유다이는 요새 이 반응에 중독돼 있었다. 밥 해 주고 얻는 게 겨우 이런 리액션이라니. 코스파가 별론가? 싶다가도 뿌듯함에 매일 밤 조리법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거 무슨 육아도 아니고⋯.
보통 밥을 먹고 나면 바로 브루어리로 향했다. 일찍부터 수업이 있어 학교로 데려다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후 수업이 많아 가게 구석에서 과제를 했다.
“학교 안 가도 돼? 친구들이랑 점심 같이 먹지. 죠는 인기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질문을 자주 던져봤지만 항상 죠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더 좋아요.”
“나도 대학생 때 그러긴 했지만⋯. 한 잔 마실래? 이번에 둔켈 바이젠이라는 맥주를 새로 만들었거든.”
유다이가 시음을 권하면 죠는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네. 네. 좋아요. 유다이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수업에 술 마시고 가도 돼?”
“괜찮아요.”
“이럴 때만 대학생 같네.”
그런 객기가 웃겨 더 술을 권하기도 했다. 죠 이번 주말에는 카페 어때? 좋아요. 오케이 그럼 내가 찾아둔 곳으로 가자. 주말에는 주로 유다이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죠도 요코하마에서 쭉 살다가 도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소개해주기가 좋았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죠를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괜찮은 가게를 열심히 검색하게 됐다. 지나가다 “아 저기 죠 데려가야지” 중얼거리면 꼭 옆에서 “여자친구냐?” 하고 츳코미가 돌아왔다. 여자친구는 아니고 내 애야, 애.
–
도쿄에서 오래된 카페를 왔다. 영화감독들이 자주 찾는 카페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곳이라나. 어쩐지 골목길에 있어 찾기가 어렵다 했는데 들어서자마자 한 쪽 벽면에 이름 깨나 들어본 감독이며 배우의 사인이 붙어있었다. 분위기 좋네. 익숙하게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죠는 커피를 딱히 즐겨 마시진 않는 편이었는데 커피를 좋아하는 유다이랑 붙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커피를 배웠다. 써서 못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유다이 군과 있으니까⋯ 점점 익숙해져서 맛있어지더라고요.
유다이도 덩달아 그림을 배웠다. 전문적으로 배우는 건 아니지만 죠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평가 받는 식이었다. 비록 아직도 태양을 그리면 선글라스를 씌우는 유치원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죠는 늘 들고 다니는 작은 스케치북을 펼쳐 한 장을 뜯어주었다. 죠가 스케치를 하는 맞은 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목적은 죠의 반응 보기. 처음에는 난감해하며 칭찬할 구석을 찾더니 요즘에는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독설을 쏟았다.
“유다이 군은⋯ 그림이 늘지 않네요.”
그럼 유다이는 으하하 웃으며 죠의 가방에 그림을 꼭꼭 접어 넣어주었다.
“그런 서툰 게 좋은 거지! 이건 선물.”
“네⋯.”
죠의 스케치북 한 장을 더 뜯어 나무나 꽃 같은 걸 그리는 것에 열중했다. 인터넷으로 일러스트를 검색해 따라 그리다 보면 얼핏 느낌이 났다. 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이리저리 그림을 기울여가며 감탄하다가 불쑥 눈앞에 내민 그림에 고개를 들었다. 노란 색연필로 그려진 크로키였다.
“우왓! 이거 나야?”
“같이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요⋯.”
잘 그렸다며 연신 소리를 질러대자 죠의 얼굴이 빨개진다. 이건 제 선물이에요⋯. 간직해주세요.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미간을 삐죽 가르는 앞머리 한 가닥. 웃음을 참으며 그림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뭉클해졌다.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보네. 그림에 집중하는 사이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죠! 가게로 가자!”
무작정 죠를 태우고 브루어리로 차를 몰았다. 죠는 어버버 거리며 안전벨트를 매곤 여느 때처럼 노래를 틀었다. 유다이가 운전하는 사이 죠가 음악을 고르는 건 어느새 굳어진 습관이었다. 순둥순둥한 얼굴과 맞지 않게도 죠는 에미넴의 노래를 좋아했다. 처음 죠가 선곡을 했을 때는 웃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는데. 이제는 익숙하다.
브루어리 문을 따고는 자켓 벗을 새도 없이 곧장 카운터 바로 향했다. 대충 각을 보다가 벽면 한 쪽에 옷핀으로 그림을 붙였다.
“이건 여기에 둬야겠어.”
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어두운 가게 안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의 미소였다. 정말요? 당연하지! 기뻐요⋯. 역시 액자도 사야겠지⋯. 초롱초롱해진 죠와 눈을 마주 보다가 스멀스멀 웃음이 나왔다.
“오늘 가게 오픈하지 말아버릴까?”
“그래도 되나요⋯.”
“내가 사장인데, 뭐! 옥상에서 놀자!”
죠를 테이블에 앉혀두고 창고에서 컵라면 두 개를 꺼냈다. 가게 오픈 초반에는 요령이 없다 보니 굶는 일이 종종 있어 나중에 먹겠거니 하고 구비해둔 거였는데. 퇴근 러쉬를 몇 번 겪다 보니 빠르게 본인 챙길 정도는 하게 되어서 영영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거였다. 옥상에서 같이 먹는 거 어때? 좋아요⋯!
친구들과 딱 한 번 파티 비슷한 걸 할 때 빼곤 열지 않았던 옥상인지라 오랜만에 올라왔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돈을 모아 비치해둔 파란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에 흙먼지가 좀 앉아있었다. 이럴 줄 알고 가져왔지. 적신 행주로 테이블과 앉을 자리를 깨끗이 닦았다. 죠는 그동안 두명치 컵라면의 뚜껑을 따 스프를 부었다. 이제 물만 부으면 돼요.
“어 잠깐만⋯. 가게에 포트가 없는데?”
“⋯⋯세면대 뜨거운 물은 안 되겠죠?”
엉뚱한 대답에 푸하하 웃었다. 사차원인 건지 천연인 건지. 다행히도 전자레인지가 있어 컵라면에 생수를 넣고 돌릴 수 있었다. 조금 불긴 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요즘엔 일교차가 커서⋯. 죠가 으슬으슬 떠는 유다이에게 겉옷을 건넨다.
“괜찮아. 어린이가 입으라고.”
“저는 몸에 열이 많아서요.”
“⋯⋯역시 젊구나.”
상체에 겉옷을 두르자 언젠가 죠에게 선물해준 향수 냄새가 훅 올라온다. 섬유유연제처럼 은은한 향이 죠의 말간 이미지와 어울려서 선물해준 거였는데. 꽤 잘 쓰고 다니는지 만날 때마다 같은 향이 났다.
어느덧 해가 져 도쿄의 야경이 보였다. 옆을 돌아보니 얼굴 위로 은은하게 야경의 불빛이 내려앉는다. 왠지 긴장한 듯 목석처럼 앉아있길래 죠의 어깨에 기대며 허리를 콕콕 찔렀다. 평소 같으면 방실방실 웃으며 자지러졌겠지만 오늘의 죠는 어색하게 몸을 뒤로 뺐다.
천천히 시선을 맞춰오는 죠의 눈을 보다가 또 먼저 피해버렸다. 곧게 바라봐오는 죠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꼭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요.”
도쿄의 소음 공해를 해치고 죠의 숨소리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속에서부터 뭔가가 득실득실 끓어올라오는 느낌에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유다이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낭만이지.”
“⋯네.”
다시 정적. 이번엔 스스로의 숨소리가 의식되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기에 뭐라도 떠들어보려 했지만 죠에 의해 틀어막혔다.
“좋아해요.”
목소리가 떨린다. 망설이는 건지 두려운 건지 눅눅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저는 지금보다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어요. 유다이 군과.”
여전히 왼쪽에서 보내오는 시선에 얼굴이 따갑다. 유다이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죠의 손을 끌어 잡았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기시감이 들었지만 이번엔 손을 놓지 않고 깍지를 끼었다. 아. 그때도 죠는 이런 기분이었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나머지 한 손으로 죠의 눈을 덮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느껴졌다. 눈이 완전히 감겼다.
살짝 벌어진 입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움찔 어깨를 떤 죠가 허리를 잡아 온다. 옆구리를 붙잡은 손이 발발 떨려서 그런 건지. 간지러움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질척이는 소리에 귀가 멍해진다.
다행이다.
처음으로 이 지긋한 도쿄역에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유다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
집을 합치잔 논의가 나온 건 사귄 지 몇개월 만의 일이었다. 마침 둘 다 자취를 하는 바람에 서로의 집으로 오라며 고집을 부리다가,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결론이 여태 나지 않았다. 분위기 좋게 밥을 먹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맥주를 마시다가도 이 문제만 나오면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내 집이 죠 학교랑 더 가깝잖아.”
양치를 하던 죠가 급하게 입을 헹궜다. 평소엔 순하기만 한 애가 이럴 때만 황소고집이 된다. 욕실 불 끄고 나와. 앗⋯ 네.
“그치만 제 집이 더 넓어요. 그리고 여긴 학교랑 브루어리의 중간인 걸요. 그게 더 공평하지 않나요?”
유다이는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어느새 죠는 거울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사쿠라⋯. 그럼 월세를 알려달라니까. 내가 이 나이에 네 집에 얹혀살면 범죄라고, 범죄.”
“유다이 군도 월세 안 알려주실 거잖아요.”
“난 당연히 널 부양하는 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니까!”
아사쿠라가 입을 앙다문다.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잔뜩 심통 난 듯 올려다보는 얼굴. 이러면 이럴 수록 안된다고, 죠. 제 뒤에 있는 전신 거울을 들 수만 있다면 죠에게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좀 봐. 입 밖으로 꺼내면 또 한참 삐질 걸 알아 대신에 마른세수를 했다.
“저도⋯ 저도 부양할 수 있어요. 유다이 군의 남자친구니까요.”
“그런 문제가 아닌 건 알잖아.”
유다이가 긴 한숨을 내쉰다. 죠의 몸이 움찔 떨린다. 화내는 걸 무서워해서 웬만하면 딱딱하게 굴지 않지만 이런 논쟁에선 어쩔 수 없다.
“그냥 네 계좌로 돈 보내면 되지? 부동산 통해서 물어볼게.”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슬랙스의 벨트를 매만졌다. 죠는 안절부절 몸을 떨다가 입을 삐죽 내민다. 저런 표정이라곤 일절 짓지 않는 애였는데. 어느샌가 이것저것 배워서 써먹어 대는 바람에 표정이 다양해졌다. 마음이 약해진 유다이가 어깨를 잡자 폭탄 발언을 해온다.
“제가 유다이 군에게 돈 받는 게 더 범죄 같지 않나요?”
“너⋯ 너⋯ 그런⋯!”
넉다운.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유다이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유다이의 자취방이 먼저 계약이 끝나기도 했고 시기가 잘 맞은 탓에 죠의 바람대로 술술 풀렸다. 이미 출근할 때 쓰는 건 어느 정도 옮겨 놨으니 죠의 집에 없는 것만 옮기면 되는 거였는데. 혼자 이사하는 거면 몰라도 누구랑 집을 합치려니까 버릴 짐이 많았다. 가구도 죄다 중복되는 게 있는 탓에 건조기 하나면 옮기면 되고. 그렇게 챙길 건 없는데? 그러네요. 메모장에 체크해놓은 것들은 스크롤도 얼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우선은 옷부터? 출근이나 데이트에 입는 옷은 죠의 집에도 대부분 가 있어 상자가 7할 정도 차니 정리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꺼내든 건 러닝복. 한참을 들고 있는데 죠가 옷장 안에 오래전 박아둔 상자를 끄집어낸다.
“아 그건⋯.”
몇 년이나 습기를 머금은 상자는 살짝 비틀려 보일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오랜만에 열어보네. 볼품없는 상자에서 메달이며 트로피가 줄줄 나오니 에⋯? 하고 의문을 표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마라톤을 했었거든. 죠도 농구 했다고 했지?”
궁상을 좀 떨고 싶었나. 처음으로 털어놓은 날이다. 마라톤을 그만두고 나선, 유다이가 마라톤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슬펐다거나 괴롭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냥 말하고 싶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나중에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면 어떻게 하게 될까를 상상해본 적 있었지만 그땐 생각지도 못한 담담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깊게 묻지 않는 건 죠의 배려.
“나름 유명했다고.”
조금 농담 같은 말투. 그렇지만 죠는 언제나 유다이의 기분을 먼저 눈치챘다. 메달을 만지작대는 위로 죠가 손을 겹쳐온다.
“무릎을 다쳐서 그만뒀어. 제때 치료를 못했거든. 뭐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지만.”
말을 고르고 고르던 죠가 가만히 얼굴을 쓰다듬는다. 울지 마세요. 조금 떨리는 입술이 입을 맞춰온다. 짠맛이 났다. 내가 울었나? 죠의 어깨를 꼭 잡았다. 소파 손잡이로 점점 상체가 밀려났다. 그제야 중력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볼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죠와 있으면 마음이 끝없이 물러진다. 울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는데.
등판을 한 번 쓸어내리자 죠가 크게 움츠린다. 해본 적 없겠지. 딱히 남자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리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먼저 바지춤에 손을 댔다. 죠는 어쩐지 울상으로 유다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유다이 군은 뭐든지 익숙한가 봐요.”
당황함에 손이 멎었다.
“죠⋯?”
“당연한 건데 기분이 안 좋아요⋯.”
이마를 비비적대는 죠에게 차마 나도 남자는 처음이라고 소리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죠가 결심한 듯 허벅지 사이로 다리를 끼워온다.
“그래도 저는 처음이에요.”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가 이런⋯ 이런⋯ 말에 흥분하는 사람이라고? 자괴감에 빠져있는 동안 죠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앞을 자극해왔다. 잠깐만 죠⋯. 지그시 바라보는 죠의 눈길을 피하며 도리질을 치자 서운한 목소리를 한다.
“저 봐주세요⋯.”
으으으. 새어 나오려는 앓는 소리를 참고 죠의 눈을 올려다본다. 나 바지 좀 벗고⋯! 무릎이 고간을 꾹 눌러 사정을 재촉한다. 윽. 볼품 없는 소리를 낼 것 같아 두손으로 입을 막으니 죠가 손깍지를 껴온다.
“유다이 군 귀여워요⋯.”
눈물 때문인지 앞머리가 척척하게 이마에 붙어온다. 죠가 시야 앞에서 거슬리는 앞머리를 넘겨줌과 동시에 바지춤이 질척해진다. 탈력감에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죠를 밀어냈다.
“죠오오오! 이러고 집까지 어떻게 가!”
“여기서 하루만 자고 갈까요.”
불이 붙은 듯 몸을 붙여오며 전혀 죠같지 않은 소리를 해댄다. 손은 이미 배를 더듬고 있었다. 처음이라는 거 구라 아니야?
폭주기관차처럼 진도를 나가려는 죠를 제지했다. 알겠어요⋯. 소파 위에 늘어진 유다이 위로 죠가 함께 늘어진다. 바지 안이 찝찝해 빨리 일어나고 싶었지만 감상에 빠진 듯한 죠의 모습에 그냥 등을 쓰다듬었다.
“지금의 삶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전 유다이 군의 이야기가 모두 궁금해요.”
지금 이게 이러고 할 얘기라고? 목에 얼굴을 부벼온다. 아기 같네. 죄책감에 흥분이 조금 누그러들자 향수 냄새가 올라왔다. 이것도 아기 냄새. 애를 재우듯 토닥토닥 손을 움직이며 유다이가 답한다.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죠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넌 그중 하나야.”
–
계절이 지는 건 왜 이리 빠른지. 감상에 빠지다가도 어린 남자친구가 학교 행사로 들뜬 걸 보면 가끔 나이가 다다 싶다. 아직 많은 나이는 아니라지만 대학생과 사회인의 에너지는 천차만별인 건지 감당이 안되기도 했다.
그래도 유다이가 이렇게 들뜬 이유는 혼자 구상해본 거창한 데이트 계획 덕이었다. 단풍놀이는 다 같이 가는 게 좋지! 친구들과 있는 단체라인방에 이번 가을 단풍놀이 어떠냐는 제안을 던졌다. 죠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서였다. 남자친구라고 하진 못하겠지만 아끼는 사람이라곤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 나는 가족들이랑 가려고, 난 그때 일, 난 여자친구, 한 명도 된다는 사람이 없네. 좋다는 답장이 나올 때까지 채팅방을 내리다가 죠에게 시선을 돌렸다.
“죠. 다음 데이트는 단풍놀이 어때?”
“좋아요.”
돌아오는 즉답에 눈치를 살폈다.
“내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거면?”
“⋯제가 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같이 사는 동생이라고 소개도 시켜줄 겸.”
티브이를 향해있던 몸이 유다이를 향해 기울어졌다. 같이 사는 동생⋯. 죠는 다시금 말을 곱씹다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요.”
처음으로 죠가 유다이를 거절한 순간이었다. 에? 잘못 들었나? 소파에 기대있던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뭐?”
죠의 표정이 어두운 게⋯ 잘 들은 것 같은데? 사람은 다들 거절도 하고 사는 건데 죠라고 충격일 일인가. 그런데도 뭐라 대꾸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유다이가 가만히 벙쪄 있자 죠가 못 박듯이 말한다.
“⋯저를 그렇게 소개시켜주는 거면 싫어요. 친구분들이랑 놀고 오는 동안 기다릴게요.”
삐졌다. 확실히 삐졌다. 유다이는 급하게 죠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죠오오오.”
대답이 없다.
“죠랑 같이 가고 싶어.”
“⋯⋯.”
“응?”
유다이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이러면 대개 죠는 못이기는 듯 부탁을 들어주곤 했는데, 이번에도 무반응.
“응? 처음이잖아?”
처음이란 말에 죠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통했다. 유다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죠의 허벅지를 쓸었다. 애 달래기 힘드네. 죠는 대답을 한참 망설이다 무작정 유다이의 위로 올라탔다. 얼굴이 새빨갛게 토마토가 된 게 꼭 사귀기 전에 보던 모습이라 푸학 하고 웃음이 나왔다. 죠는 나름대로 진지한 건지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다.
“처음으로 친구들한테 소개하는 자리인데⋯. 싫어?”
죠의 허리에 손을 두르려는데 허벅지를 들어 상체에 올려 누른다. 갑자기 반쯤 접힌 몸에 헉 하고 숨이 뱉어져 나왔다. 일부러 죠를 조금 자극하긴 했지만 대낮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가 처음이에요?”
⋯이런 자세로 물으면 뭔가 이상한데? 뭐라 대답할지 갈등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전여친들도 소개해준 적 있다고 말하기엔 또 웃긴 것 같아서 대충 죠가 원하는 답을 둘러댔다.
“으응⋯. 그렇지? 처음이야.”
“긴장되겠네요.”
“긴장되지⋯.”
바지 단추를 풀길래 장단에 맞춰주며 엉덩이를 들었다. 하의가 발목에 걸린다.
“긴장 안 하셔도 돼요. 잘해볼게요.”
“잠시만. 이게 무슨⋯. “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건지. 주어 없이 대화를 요상한 쪽으로 이끌어가는데 대꾸할수록 수렁에 빠져버린다. 티셔츠를 말아 올려 손에 쥐여준다.
“잘 잡고 계셔 주세요.”
가만히 상의를 들고 있으니 휑한 공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죠는 찡그려지는 얼굴을 살피며 가슴께를 엄지로 문질렀다. 자극에 복근이 앞으로 곱아든다. 탄탄한 배를 따뜻한 손이 덮어온다.
“같이 가요.”
“어이. 너 자꾸 이상한 말만⋯.”
“가서 친구분들한테 저 소개해 주세요.”
아니었네. 민망함에 고개를 모로 돌렸다. 눈치챈 듯 죠가 조용히 웃는다. 잘하면 가게 해드릴게요. 어이 이건 진짜 이상한 말이잖아! 아⋯ 그러네요.
–
은근히 투덕거림이 잦아졌다. 죠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같은 브랜드 옷을 사 입는 건 다 만들어진 취향이라는 듯이 성향 자체가 달랐다. 어쩌다가 우리가 닮았다고 생각했더라?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먼저 라인을 보냈다. 어린애한테 계속 꽁해져 있는 것도 웃기고⋯. 브루어리의 손님에게 초대받은 전시회로 데이트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미리 가게 오픈 일정도 조금 바꾸었다. 죠가 좋아하겠지?
죠- 같이 그림 보러 가자-
그림이요?
응 손님한테 티켓 받았다구
응? 답장이 없네. 며칠 내내 화나도 답장은 꼬박꼬박 해오던 죠가 묵묵부답이다. 케이는 와이파이가 제대로 통하지 않나 싶어 데이터를 켰다. 한 번 더.
죠는 그림 좋아하니까
또 읽고는 답장이 없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반응에 잠시 멈칫하다 맥주를 제조하는 창고로 향했다. 무슨 일 있나? 전화를 거니 몇 번 연결음이 가자마자 끊긴다. 뭐야. 슬슬 수업 끝날 시간인데. 난생 뜯지도 않던 손톱까지 틱틱 뜯었다. 일에 영 집중이 되지 않는다.
케이! 주인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맥주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네 갑니다!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달려 나갔다. 때마침 앞치마에서 전화 진동이 몇 번 웅웅 울린다. 아 지금 못 받는데. 손님들이 들어오고 빠지는 게 빠르게 반복되는 바람에 오늘따라 숨 돌릴새 없이 바빴다.
조금 인파가 잦아들고 카운터에 걸터앉았다. 고생이네. 단골손님의 음성에 또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 드릴까요?”
“됐어. 사람 없는 사이에 좀 쉬라고?”
아하하 그렇죠. 앞치마도 바로하고 말이야. 정신이 없어 그런지 앞치마 오른쪽이 삐뚜름하게 내려간 채였다. 으악! 부끄러. 급하게 앞치마를 고쳐 정리했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리는 휴대폰. 아 맞다!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딸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폰 하고 계셨네요. 계속 전화했는데.”
“아니 지금 딱⋯!”
죠가 들어온 그대로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이걸 어쩌면 좋아. 다시 창고로 향해 문자를 했다.
죠- 폰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 바빠서 그때 처음 봤어
미안해애애
라인 좀 봐줄래?
채팅창을 도배해도 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집으로 차를 몰았다. 뭐가 이렇게 다 어렵냐. 이번엔 또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여자 만날 때도 이렇게 고생은 안 했던 것 같은데. 죠는 방금 올라갔는지 딱 4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었다. 집에 있지? 기다려. 그 사이에 또 어디로 가버릴까 싶어서 라인을 보냈더니. 현관을 열자마자 집을 나서려던 죠와 딱 마주쳤다.
“기다리라니까 어디 가?”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문다.
“죠. 라인 읽은 거 맞지?”
“읽었어요.”
“근데 왜 그래⋯.”
죠의 팔을 잡고 나가지 못하도록 신발장 입구를 틀어막았다. 우물쭈물. 망설여지는 듯 바닥을 보고 있다가 결국 운동화를 벗는다. 이렇게 술술 불어버릴 거면서.
“⋯손님이 전시회 티켓을 줬다고 했잖아요.”
뜬금없는 말에 응? 하고 가까이 다가섰다. 죠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제가⋯ 유다이 군한테 썼던 방법인데⋯.”
“응?”
“그 손님도 그랬다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잠깐만, 이거 질투야?”
죠가 눈을 아래로 내리 깐다. 에? 손님한테 질투? 유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보지 마세요⋯.”
아. 무리. 피곤에 중첩되어 복잡하던 머리가 새하얗게 바랜다. 유다이는 재킷을 벗으며 죠에게 키스했다. 죠는 곧이어 유다이의 셔츠를 꾹 쥐었다. 맨살을 드러내며 슬금슬금 올라가는 상체에 손이 들어온다. 혀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입을 떼고 죠와 이마를 맞댔다. 안으로 들어가자. 짧은 시간 눈을 맞추던 죠가 다시 입술을 물어온다.
“못 가요⋯. 너무 멀어요.”
“에? 바로 저기라고?”
들리지 않는 듯 유다이의 버클에 손을 댄다. 죠. 죠오. 나 허리 아파! 급하게 죠의 손을 막으니 울상을 짓는다.
“넌 젊지만 말이야⋯. 난 이제 침대에서 안 하면 허리 다쳐. 곧 서른이라고.”
말을 내뱉고 나니 급격히 찾아오는 자괴감에 눈을 감았다. 셔츠를 주섬주섬 내렸다. 죠와 눈이 마주치곤 마른세수를 했다. 넌 대체 날 왜 좋아하니. 까만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생각을 삼키다 죠의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워요⋯.”
“⋯⋯네가 뜨거운데?”
죠가 입술을 붙이려 달려든다.
“아니. 잠시만, 죠. 너 진짜 뜨거워.”
“에⋯?”
“열나잖아!”
어쩐지 아침부터 저기압이던 죠가 떠올랐다. 이런 것도 눈치 못 채고 있었네. 부랴부랴 환자를 침대에 눕혔다. 얼음 봉지를 만들려고 주방을 뒤적거렸는데 냉장고엔 여름에 쓰다 남은 얼음 겨우 몇 조각. 서랍에 넣어두었던 해열 시트라도 챙겨 죠의 이마에 붙였다.
이불에 폭 드러누운 애 같은 얼굴을 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열 좀 내리면 스키야키 먹으러 가자. 나으려면 잘 먹어야 해. 유다이의 말에 뜨거운 손이 팔목을 꼭 잡아 온다.
“계속 걱정해주세요⋯.”
죠가 상체를 조금 일으켜 유다이의 뺨에 입을 맞춘다. 도장이라도 찍는 듯이.
–
“바다⋯ 같이 가고 싶어요.”
일년에 몇 번 없는 연례행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죠가 데이트를 먼저 제안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새해가 되고 바빠서 얼굴도 못 본 지 오래된 상태를 참다 참다 못한 건지 죠가 출근하는 유다이를 붙잡았다. 곧 졸업 학년에 접어드는 죠도 개인작 연구에 파묻혀 시간 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가게를 운영하는 유다이는 유독 정신이 없었다. 매일 밤 쓰는 소소한 일기까지 몇주 치가 밀렸다.
“여름도 아닌데?”
“그래서 가고 싶어요.”
죠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오랜만에 놀러 가는 것도 환기할 겸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평일 하루 가게 일정을 뺐다. 너무 가까운 곳은 그렇지? 여행이라는 기분이 안 드니깐⋯. 꽤 고심해서 정한 목적지는 유이가하마.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죠가 예상외로 별 말을 하지 않아서 재즈만 잔잔하게 흘렀다. 컨디션이 안 좋은가. 힐끔힐끔 옆을 쳐다보았지만 창밖을 보기 바쁘다. 그러고 보니 요새 그림도 잘 안된다고 했고⋯. 기어에 올려놓았던 손을 허벅지에 탁 내려 놓자 살짝 손을 겹쳐온다.
“왜 그래?”
“요즘⋯ 생각이 많네요.”
“생각? 나한테 다 털어놔 봐!”
“아니 유다이 군이요.”
“⋯에? 에에? 나? 아니? 전혀?”
오바해버렸다. 정곡을 찔려 마구잡이로 부정을 했는데 그 덕에 죠의 눈초리가 더 따끔해졌다. 뾰족한 눈빛 같은 걸 보내오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워낙 순한 탓에 지금 같은 짧은 반응도 크게 와 닿는 탓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죠에게선 불안한 기색이 비친다.
사실 최근 가게 확장을 하는 일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미팅을 잡고 가게를 키워서 옮기는 방향으로 얘기가 나왔는데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오사카에 가게를 내면 자주 왕복을 해야 했다. 며칠을 묵는 일도 잦은 게 당연하고. 어쩌면 거기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렇게 만날 시간이 줄어드는데 그땐 거의 장거리 연애라고⋯. 아직 결정 난 게 아니라 죠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게 계속 신경 쓰였나보다.
“일이 바빠서 그래. 내가 신경을 너무 못 써줬구나? 미안해.”
장난으로 허벅지를 몇 번 주무르니 곧장 배시시 웃는다. 이런 애를 두고 오사카를 어떻게 가니.
바다에 도착해선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했다. 여름이 아닌데도 사람이 꽤 보였다. 조금 쌀쌀하길래 몸을 녹이고 움직이려고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와 여기선 바다가 보이네. 죠는 만족스러운지 연신 카메라를 찰칵댔다.
업무용 전화가 울려대는 걸 무시하다가 죠가 정신 팔린 사이 조금 빠져 전화를 받았다. 네 케이 브루어리 입니다. 죠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혼자 카운터로 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케이상! 가게 이전 축하해!
볼륨을 크게 해놓은 탓에 한번 찡그리고 딸깍딸깍 소리를 낮췄다. 혹시나 들렸을까 뒤를 돌아보는데. 얼어붙은 죠와 눈이 마주쳤다.
“⋯이전?”
“그건⋯ 그냥 소문이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급하게 빨간 버튼을 연타했다. 일단 앉아. 천천히 얘기하기 위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는 사이에도 죠는 묵묵히 서 있었다.
“중요한 문제잖아요. 왜 안 알려준 거예요?”
원망하는 투였다. 덩달아 억울해진 유다이는 죠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럴 거야?
“아직 결정도 안됐고⋯. 일 얘기를 너랑 상담하는 건 죠도 부담스럽잖아?”
대답이 없다. 화나면 말 안 하는 건 언제까지 할 건지. 뭐든 터놓고 얘기해버려야 하는 유다이에게는 가장 이해 못할 행동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쏘아붙이라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이 일이 소중해. 너도 소중하지. 하지만 이 기회는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 ⋯나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죠한테 뭘 상담할까. 널 두고 오사카에 가고 싶다고?”
“⋯저도 오사카에 가면 돼요.”
“넌 아직 졸업도 안 했잖아!”
또 혼자 화내버린다. 카페에서 커플 싸움이라니. 언제 이랬었는지 까마득하다. 내가 무슨 이십 대 초반도 아니고.
얼굴에 물까지 맞아봤는데. 죠는 그럴 위인이 아니라 커피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죠. 우리 쉴 땐 좀 쉬자. 스스로 세뇌하듯 그렇게 말하고 나니 씩씩거리던 숨이 진정된다. 창밖으로 파도가 밀려오고 빠지는 걸 쳐다보다가 허탈한 목소리로.
“죠.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문득 이별 선고나 마찬가지인 말을 꺼냈다. 죠는 여전히 말이 없는 채로 가방을 챙겼다.
“어디 가.”
“⋯집에 갈 거예요. 따로.”
죠는 목에 두른 흰 머플러를 풀었다. 이건 가져가세요. 언제 줬던 거더라. 이젠 죠의 향수 냄새가 더 강하게 나는 머플러가 유다이에게 둘러진다. 모질지 못한 건 죠의 천성이고.
“너 면허도 없잖아.”
“차를 타지 않아도 도쿄는 갈 수 있어요. 전 어린애가 아니거든요.”
“죠!”
“유다이 군은⋯ 몇 년 전의 저와 영원히 사는 것 같아요.”
죠의 마지막 말. 유다이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일어서지 못했다. 머플러를 한 손으로 만져보다가. 그렇지⋯. 죠가 이제 몇 살이더라. 이제는 완전히 눈높이가 맞아 내려다볼 일이 없던 것까지 실감한다.
유다이는 호텔을 취소하고 차에 탔다. 브루어리를 정리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음악을 틀었는데. 오랜만에 혼자 노래를 정하려니 잘 안되었다. 플레이리스트 기록에 남아있는 건지 재즈가 몇 곡 나오다가 에미넴 노래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가 이 상황이 웃긴 건지 뭔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노래를 껐다.
불 꺼진 브루어리에서는 발효된 맥아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크게 정리할 건 없으니 몇몇 군데에 비치해놓은 소품만 조금 챙겼다. 언제 왔더라, 여기. 천천히 뒤를 돌아 창밖을 쳐다보았다. 죠가 그린 그림 몇 장이 창문에 붙어있었다. 언젠가 따지 못해 아쉬웠댔단 메달의 그림도 있었다. 제가 대신 드릴게요. 랬나.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이었나. 생각보다 오래도 살았다 싶다. 도쿄역은⋯.
그럼에도 내 도착지가 되어주지는 못하는구나.
도쿄역을 지나 첫 걸음을 디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