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에 가족 출현 주의 구간입니다

평범한 가정에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는 장면. 화장실에서 넥타이를 고쳐 맨 뒤 마지막으로 한 가닥 내려온 앞머리를 정돈하고 있는 아빠와 눈곱도 떼지 않고 소파로 기어나와 꾸벅꾸벅 졸면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여섯 살짜리 딸. 또한. 역시 무척 잠이 쏟아지는 얼굴로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거리며 아기 새의 입에 밥을 한 숟갈, 미소시루를 한 숟갈 번갈아 떠 넣어 주고 있는, 비-생물학적 삼촌.

“네에, 죠. 말했잖아. 밥 떠먹여 주지 말라니까. 식탁에 앉아서 먹으라고 해.”

셔츠 깃을 꼼꼼히 정리한 코가가 거실 쪽에 대고 소리치면 반 박자 늦게 네에에, 하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졸린 거겠지. 추측에 이어지는 아이의 키득대는 소리. 무어라 속삭이는 낮고 얌전한 목소리. 바쁜데 진짜. 애 버릇 들면 어쩌려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최종적으로 상태를 확인한 뒤 욕실을 나서면 아사쿠라와 유이는 어느새 식탁에 앉아 각자의 숟가락을 들고 웃는 얼굴로 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엔 유이가 좋아하는 아침 예능까지 틀어 둔 채. 유이. 티비 보며 밥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게다가 왜 매번 이런 예능을 보는 거야? 유우 짱은 아직 어린이 만화 같은 걸 볼 때 아냐? 타박하면 유이는 곧장 반격해 왔다.

“금요일엔 사츠키 상이 나온단 말이야. 놓칠 수 없어.”

9인조 여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츠키 상은 금요일마다 아침 예능에 고정으로 출연해 퀴즈를 풀고, 정답을 맞추지 못하면 전기의자 고문을 당하는 등의 모진 수모를 겪고 있는 유이의 오시 연예인이었다. 아빠. 난 커서 사츠키 상처럼 될 거야. 아이돌 할래.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와 도톰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입술을 보며 코가도 감탄한 적 있었다. 과연 코가 유다이의 자녀. 꿈 한번 거창해. 솔직히 속으로 공감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목욕을 마치고 발그레한 두 뺨에 로션을 발라 줄 때마다 너 이렇게 예쁘면 연예인밖에 못 해, 진짜 어쩔 거야, 매일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 댄 전적이 있다. 지금이야 제대로 된 교육이 더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코가는 소파 한쪽에 올려두었던 가방과 정장 재킷을 집어 들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빠처럼 길쭉하게 자라려면 밥 먹을 때 티비 보면 안 될걸. 사츠키 상이고 하즈키 상이고 밥 먹을 땐 도움 안 돼. 자연스레 흘린 잔소리에 조심스레 반응해 온 건 이 집에 있는 또 다른 장신의 남자였다.

“저는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면서 밥을 먹었습니다만….”

고작 1.5센티 차이. 그마저도 따라잡겠다며 기를 쓰고 쫓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죠, 네가 그렇게 말하면 도무지 교육이라는 게 안 된다고.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유이의 입에 간장에 졸인 닭고기를 쏙 넣어 준 아사쿠라가 배시시 웃었다. 작업복으로 매일 입어 살짝 늘어난 흰 반소매 티셔츠. 그 위에 대충 걸친 베이지색 스트라이프 에이프런. 잔뜩 헝클어진 새카만 머리나 붉어진 왼손 손목 근처를 보니 어제 작업도 그다지 수월하지 않았던 듯한데. 와중에 아침부터 유이 등원 준비까지 도와주고. 애쓰고 있는데도 나한테 잔소리나 듣고. 솔직히 좀 면목 없네. 민망한 기분에 얼른 다가가 가방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살짝 어깨를 주무르면 아사쿠라는 티비 안의 시계를 확인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유우 짱. 아빠한테 인사하고 올까요. 부드러운 제안에 유이는 튕기듯 의자에서 내려와 코가보다 먼저 현관 앞에 섰다. 파파, 오늘 몇 시에 와? 묻는 얼굴을 붙잡고 볼에 쪽쪽 입술을 붙인 코가는 신발장 한쪽을 짚으며 오늘의 업무를 가늠했다. 아마 7시쯤? 그래도 오늘은 일찍 오지? 기뻐할 유이를 기대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 유이는 이미 아사쿠라의 다리 한 짝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유우 짱, 삼촌 말 잘 듣고 있어.”
“삼촌이랑은 싸울 일 없어. 언제나 잘해 주기만 하니까.”

올려다보는 눈이 뾰족했다. 통통한 입술도 삐죽삐죽. 귀엽고 예쁘고 요정 같은 거랑 버릇없이 행동해도 되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몇 번 말하니. 나무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어느새 유이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아아. 기묘한 서포터다. 무척 도움이 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돼. 코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문고리를 잡았다. 늦겠다. 진짜 다녀올게. 인사하며 손잡이를 살짝 밀어 열려는 순간 신발장 반대편 선반에 놓인 차 키가 눈에 들어왔다. 힐끔 돌아보면 아사쿠라와 유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코가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으응. 이제 진짜 간다! 외치며 문을 열면 훅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 새벽에 설마 눈이 내렸나? 복도도 좀 미끄러운 것 같고. 감기 걸리기 딱이네. 얼른 밖으로 나가 빠르게 손을 흔들면 저절로 문이 닫힌다. 쿵. 띠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 뒤로 따라붙는 아이의 목소리.

삼촌, 오늘도 자전거로 데려다 줄 거야?

 

전방에 가족 출현 주의 구간입니다

 

어떤 가족은 사고처럼 발생한다. 실제로 7년 만에 코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아사쿠라는 본가에서 가지고 온 소중한 밥그릇을 떨어뜨리고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네? 누구시라고요?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챈 휴대폰 너머의 주인공에게 다시 한번 이름을 물었다. 단순히 확인만을 위해서.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갑자기 이렇게, 너무나 예상치 못한 일상적인 시간에, 무심한 인사로 전화를 걸어 주셨다고. 깨진 그릇의 파편 사이로 흩어진 밥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코가는 가볍게 웃었다.

-나 맞아, 죠. 오랜만이야. 잘 지내?

안부를 물어오는 목소리는 전처럼 상쾌했다. 바람이 스치는 듯 깨끗하고 쾌활한 음성. 그였다. 유다이 상. 정말이야. 인식하고 나자 손이 떨렸다. 꼭 쥐고 있던 젓가락이 서로 자꾸만 부대끼며 달그락거렸다. 네에. 네에. 유다이 상도 역시 잘 지내고 계셨으려나요. 얼이 빠진 채 대답하면 코가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요새 좀 어때. 여전히 늦게 자나? 아침은 챙겨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했는데….”
-늦네. 절대로 늦어.

전화를 주신 덕에 더 늦어지게 생겼지만… 아사쿠라는 말을 삼키며 쪼그려 앉았다. 출근 중에 전화를 걸었는지 휴대폰 너머에서는 엷은 엔진 소리와 적당한 템포의 팝이 섞여 넘어왔다. 흥얼흥얼. 조그맣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코가의 목소리를 듣다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웠다. 천천히 부서진 그릇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을 때 코가가 본론을 꺼냈다. 처음 인사를 건네던 것과는 완벽히 달라진 조심스러운 어투로. 있지. 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혹시 아이 등하원을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네?”

요코하마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말이야. 유우 짱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모시던 시터님은 출퇴근이 어렵다고 하시고. 다른 분을 알아보려고 하니 면접도 봐야 하고, 맞춰 가는 기간도 필요한데 일단은 시간적 여유가 없네. 아사쿠라 상에게 전화해 여쭤보니 네 얘기를 하시더라고. 집이 바로 근처고, 프리랜서라 집에서 일을 한다고. 혹시 가능할까?

대화의 결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이는 이미 여섯 살이라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아. 내가 늦게 출근하는 날은 하원만 도와주고, 혹시나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날이나 외근이 있는 날은 죠 네 집에 일찍 들러서 아이를 맡기고 가면 등원이랑 하원을 좀… 하는 부차적인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려고, 했는데.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바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당황했는데. 어… 네. 네. 일단 알겠습니다. 네. 답이 쏟아졌다. 의미 없을 정도로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의문했다. 그럴 능력이 있나. 내가 아이를 볼 수 있나? 어렵고 힘들지 않을까? 아이가 다치면 어쩌지? 그런데 그것보단. 어쩌다 나에게 부탁까지 하게 되신 거지, 하는 생각이 더 커서.

고마워. 진짜 고마워. 몇 번이고 인사한 코가는 이제 곧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깨어진 파편들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사쿠라는 커다란 조각들을 먼저 집어 들어 키친타월에 감싸며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 끝에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간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응, 유우 군이 아이 맡길 곳이 없다고 해서. 어차피 죠는 집에만 있잖니?

집에만 있었다. 밤새 개인 작업을 하고 낮에 잠드는 게 일상이었으니 시간이 많았고 혼자서 2LDK의 맨션을 작업실 겸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공간도 충분했다. 다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저는 아이를 돌본 경험이 전혀 없는데…. 난감해하면 어머니가 빠르게 덧붙이며 말을 끊었다. 그러지 말고 마음 좀 써.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 보는 엄마 마음도 좀 생각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유우 군이랑 다시 잘 지내는 것도 좋고. 아마 유우 군이 사례로 얼마쯤 용돈도 줄 거야. 지금 죠한테는 꽤 좋은 제안인 거 같은데, 안 그러니? 일단 엄마 모임에 와 있어서. 끊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유우 군, 이라고 부르시는구나. 아직도. 그런데 어째서 여태껏 유다이 상과 연락하고 계신 건가요. 언제부터 다시 가깝게 지내셨던 건가요? 묻고 싶었으나 전화는 이미 뚝 끊겨 있었다. 휴대폰 화면은 짧은 통화 시간을 표시한 뒤 금방 까맣게 꺼져 버렸다. 에. 끊겨 버렸네. 정말 자신 없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용돈 같은 건 전혀 필요 없고. 게다가 갑자기 라이드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난 안 되잖아. 못다 한 말이 계속 떠오르는데도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휴학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창 다음 전시를 준비 중인 데다가, 요새 특히나 잠을 설치고 있는 탓에 낮에 아이까지 보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게다가 유다이 상과는,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아이는 처음 만나는 거잖아. 잘 지낼 수 있을까. 집엔 장난감도 하나 없는데. 혹시 밥을 챙겨 줘야 하면 뭘 먹여야 하지. 요리는 자신 없잖아. 뒤늦게 떠오른 걱정들로 머리가 새카맣게 복잡해졌지만. 아사쿠라는 곧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하기로 했고,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거절하고 돌아섰다 해도, 나중엔. 기어코 하고 싶어졌을 것만 같으니까.

그래. 그렇겠지. 유다이 상에 관련된 일이니까. 수긍한 아사쿠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 이마를 짚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청소기를 가져온 뒤엔 허리를 굽혀 파편 난 그릇 조각들을 주워 식탁 한쪽에 올려두었다.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 얼마 만이지. 골몰하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자그마한 파편 끄트머리에 검지를 베었다. 아. 짧은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면 깨끗했던 손가락에 슬며시 피가 비쳤다. 서서히 동그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밴드 귀여워.”
“유우. 삼촌한테는 존대해야지.”
“귀여워요.”
“으응, 고마워.”
“머리도 귀여워.”
“응?”
“삐죽삐죽. 아빠 자고 일어났을 때랑 비슷해.”

종알종알. 전날 저녁 겨우 정리한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 중인 귀여운 발. 작업실과 침실, 욕실까지 쭉 돌아보고는 다시 거실 근처로 돌아와 아빠의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는 힐금거리는 눈동자가 코가의 것과 꼭 같았다. 선명하고 까만. 그런데도 투명하고 맑아 보이는. 얇은 쌍꺼풀. 섬세하게 뻗친 속눈썹. 코가의 솜씨인지 높낮이는 약간 다르지만 양쪽으로 짱짱하게 당겨 묶은 머리칼은 익숙하게 짙은 흑갈색이었다. 부슬부슬거리는 샤 스커트가 덧대어진 베이지 원피스와 하얀 스타킹. 현관에 놓여 있던 흰 스니커즈 옆엔 앞코가 뾰족한 구두 한 켤레와 나머지 신발 두 개의 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빨간 에나멜 구두가 추가되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이 예쁘다. 귀엽고. 누가 봐도 유다이 상의 딸이네. 정말 그렇네. 생각하고 있으면 식탁 근처에 서 있던 코가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매만졌다.

“저래 봬도 의젓해. 잘 먹고 잘 자고.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죠랑 잘 맞을 거야.”

아, 물론 여기서 재우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덧붙인 코가는 살짝 걷고 있던 셔츠 소매를 내리며 돌아다니던 유이의 양쪽 볼을 붙잡아 꾹 눌렀다. 유우 짱. 죠 삼촌은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해. 가능하면 노래는 참아 줘. 알겠지? 볼을 문지르며 하는 말보단 허리를 숙이자 보이는 살짝 뒤집힌 셔츠 카라가 더 신경 쓰였다. 아이 챙기느라 모르셨나. 손을 뻗어 정리해 주고 싶었지만 뭔가 좀. 아닌 것 같아서. 아사쿠라는 목만 슬슬 문지르다 조용히 대꾸했다. 노래해도 괜찮아요. 혼자서는 늘 조용하게 있으니까….

평소 같았으면 양치를 한 뒤 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을 텐데. 간만에 작업을 마치고 조금 수선을 떨었다. 20분쯤 일찍 의자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도 빗고. 몸에 익은 탓에 매일 입어 핏이 조금 흐트러진 반소매 티셔츠 대신 새로 꺼낸 티셔츠에 까만 카디건까지 걸쳤다. 잊지 않고 창문을 열어 새벽 공기로 환기까지 마치면, 좀 부족하지만. 어쨌든 준비는 된 것 같은데. 덜 마른 머리를 손으로 살살 빗어 정리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랜만이네, 죠.”

7년 정도 지났으려나. 코가는 여전한 모습으로 아사쿠라의 집 문을 두드렸다. 동그랗고 깨끗한 눈. 도톰한 입술과 부드러운 선. 문을 열자마자 지문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이 초가을의 공기와 함께 들이닥쳤다. 갑작스러운 방문이 민망한지 장난스럽게 눈썹을 까딱이는 코가의 옆에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코가의 허리쯤에 오는 작은 키와 허벅지를 꼭 끌어안은 조그마한 손. …아이다. 정말 아이잖아. 실감하며 살피는 눈길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어어.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 뒷걸음치며 물러나면 코가는 꾸벅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집이 멋지네요. 가벼운 농담과 함께 바깥의 공기가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고. 서늘하게 식은 바람. 나뭇잎이 말라가는 냄새. 거기에 섞인, 머스크일까. 꽃 향이 조금 더해진. 정장을 갖춰 입은 등이 눈앞을 스친 뒤엔 보드랍고 달달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건 아마 아이 특유의 따끈한 온기를 덧입은 섬유 유연제와 로션 냄새. 인상적이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고마워.”

식탁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유우, 신발 정리하고 들어와, 부드럽게 던지는 잔소리도. 응. 짧게 대답한 유이가 툭툭 벗어 놓은 신발을 정리하는 동안 코가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둔 뒤 곧 달려온 유이의 원피스 끝단을 툭툭 털어 정리했다. 가방 벗고. 외투도 벗어서 여기 걸어둬. 단출한 지시에 맞춰 움직인 유이는 곧장 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으려나. 보이는 곳은 대충 치워 놓긴 했는데. 지내기 괜찮은 곳으로 보여야 할 텐데. 검사를 받는 기분으로 서 있으면 코가가 먼저 입을 뗐다.

“보다시피 활달해.”
“유다이 상을 닮았네요.”
“닮았지. 딸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마저. 너무 아빠 같아서. 물론 아빠이시지만. 감상과 인식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얼떨떨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나. 현실인가. 현실이지. 결혼식 사진을 보았을 때나,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이혼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빠가 된 유다이 상. 소파에 앉은 인형 같은 아이.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어색한 풍경에 오늘부터 당장 등하원을 도와야 한다는 긴장까지 더해져 구체적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코가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홉 시 반 정도까지 등원하면 돼. 하원은 다섯 시 반쯤. 일찍 퇴근 가능한 날엔 내가 갈게. 어려울 땐 집으로 데리고 와서 조금만 돌봐 주고 있으면 내가 빨리….

“아빠, 진짜 노래하면 안 돼? 춤은?”

빙글빙글. 코가의 주변을 두어 바퀴 돈 유이가 코가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유우. 눈빛으로 제압하며 짧게 호명하는 얼굴이, 또. 너무. …아빠네. 아사쿠라는 얼른 고개를 젓고 유이와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정말 괜찮아요. 노래하고 싶으면 해도 돼요. 몸을 살짝 숙이며 얼굴을 마주하면 유이는 아사쿠라 대신 코가의 눈치를 봤다. 안 돼, 그래도. 너무 신경 쓰이게 하지 마. 단호한 훈육과는 달리 슬쩍 솟아 있는 코가의 입꼬리를 보고서야 살짝 긴장이 풀렸다.

“그럼 잘 부탁해.”

코가는 유이의 이마와 양볼, 코를 차례대로 톡톡 건드린 뒤 들고 있던 재킷에 팔을 꿰어 넣었다. 그럼 오늘부터는 삼촌이 데리러 오는 거야? 유이가 동그란 코를 살짝 찌푸리며 어리광을 부리자 코가는 신발장으로 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부터 유이한테 멋진 삼촌이 생기는 거야. 좋지? 아사쿠라는 허리를 숙이고 구두에 발을 밀어 넣는 코가의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조심히 따라붙었다. 저, 코가 상. 셔츠가. 간단히 말하면 몸을 일으킨 코가는 자연스레 현관의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며 카라를 정리했다.

“벌써 출근하세요?”
“응, 오늘 외근이 있어서 일찍 가 봐야 해서.”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죠. 고생해 줘.”

고민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 그러나 문을 밀어 열다 잠깐 뒤돌아본다. 열린 문틈으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마주치는 눈빛보다도 시큰해진 콧등이 어색했다. 어느새 10월 초. 구름의 색이 짙어지는 계절. 요란한 바람에도 소란하지 않은 바깥. 색이 바란 세상을 뒤로 하고 돌아선 얼굴이 바깥의 날카로운 공기와는 달라 이질적이었다. 셔츠까지 갖춰 입은 깔끔한 정장에도 조금쯤 아기 같은 부드러운 얼굴이 분명 낯익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표정. 어쩌면 어리광처럼 보이기도 하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허리 근처에서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살짝 돌아보면 올려다보는, 또 다시 동그란 눈. 코가는 아사쿠라의 허리춤을 붙든 유이와 아사쿠라를 번갈아 바라보다 양쪽에 윙크를 한 번씩 날리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문틈 새로 불어오던 바람이 뚝 끊어질 때쯤 유이는 몸을 틀어 거실로 달려갔다.

“창문 열어봐도 돼요?”
“응? 추운데.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요.”
“발코니에 나가 보고 싶어. 새가 온 것 같아!”

하얀 스타킹을 신고 거실을 활보하는 아이를 보고 있다가 뜬금없이 생각했다. 테이블을 치워야 하려나.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은데. 걱정하며 발을 옮기려는 순간 이미 아이는 발코니로 연결된 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난간에 앉은 작은 새. 그 너머로 보이는 코가의 뒷모습.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 금세 문을 열고 나간 아이가 코가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아빠! 잘 다녀와! 나 잘 놀고 있을게! 유치원도 늦지 않게 갈게!”

확신하며 외치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얼른 소파에 놓여 있던 담요를 집어 들고 발코니를 향해 달렸다. 오늘 추워요. 그냥 나가면 안 돼요. 작은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며 내려다보니 어느새 몸을 돌린 코가는 머리 위로 팔을 올려 커다란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건 원래 하는 출근길 배웅 의식인가. 아니면 오늘만 특별히, 낯선 사람 집에 아이를 맡기고, 맡겨지는 바람에 이렇게들. 조금은 부산스럽고 애틋하게. 혼란스러운 마음에도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잘 다녀오세요. 코가는 조그맣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아사쿠라에게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이건 마치 남편…을 배웅하는 전업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붉어진 얼굴에 닿는 늦가을의 선연한 기운. 그대로 돌아서서 숨을 고르면 유이가 먼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으으. 진짜 춥다! 삼촌도 빨리 들어와! 티비 조금만 보다가 출발하자! 아빠가 사라지자마자 짧은 말로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귀여웠다. 소파에 편하게 늘어져 앉은 유이에게 리모컨을 건네주려는 순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잊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여기요. 보고 싶은 거 봐도 돼요. 작은 손에 리모컨을 쥐여주면 곧 아침 방송 패널들의 리액션이 쏟아졌고.

[미안하다는 말은 지금 할게. 아이가 들으면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 고멘- 아사쿠라. 염치없지만 조금만 도와줘.]

도착한 메시지엔 몇 년 전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어머니의 회사에 재직 중인 직원의 결혼식 날이었을 것이다. 전날 내린 비가 구름을 모두 쓸어내렸는지, 아침 하늘이 무척 깨끗했던 어떤 가을날. 밤새 작업을 하다 겨우 스케치에 가까운 습작을 그려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머니는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서 햇볕이라도 좀 쬐는 게 어떠니. 수면 패턴부터 바로 잡아야지. 타박하는 말에도 대꾸할 정신이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에 올랐다. 일단은 무척 졸렸고. 머릿속엔 미완성 습작의 부분 부분이 둥둥. 과감하게 시도한 색감이 배경과 어울리지 않아 계속 신경을 거슬렀다.

차창을 꿰뚫고 당도하는 아침의 볕. 싫은 건 아니지만. 너무 따갑고 강렬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바깥을 살피면 사람들은 추운 날씨에도 꽤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어두워진 옷차림 위로 떠오른 발갛게 상기된 얼굴들. 주말이라 그런 건가. 무감히 스치다 보면 어느새 미나토미라이 근처의 고층 빌딩 숲 사이로 진입했다. 건물 그림자가 드리우며 피부를 태울 듯 쏘아대는 빛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느낄 때쯤 어머니는 말했다. 유우 군, 아이가 태어났대. 어젯밤에 낳았는데 아주 건강하대.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 어머니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덜컹거리며 방지턱을 넘었고. …그렇군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중얼거리면 어머니는 좌회전을 하기 위해 사이드 미러를 흘끔거리며 덧붙였다.

‘응. 이름은 유이래. 사진도 보내줬는데 정말 귀여워.’

진심으로 기뻐하고 계시네. 정말이야. 웃는 얼굴로 유다이 상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리창에 반사되어 난사된 빛이 얼굴을 간질였고. 피로하다. 서서히 창문을 내린 아사쿠라는 뜻 없이 물었다. 무슨 뜻이래요? 한자는 뭘 쓴대요?

‘세상에 오직 하나. 유일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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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길었던 출근길 배웅은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걸.

적요. 헤드폰을 쓰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면 적막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젤과 캔버스. 얼룩덜룩한 팔레트와 앞치마. 붓. 스케치를 위한 짧아진 연필. 좁은 공간이 팽창한다. 바닥이 사라지고 벽이 아득히 멀어진다. 근처에 세워 둔 습작들과 아무렇게나 펼쳐 둔 재료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젤 앞에 선 나만이 남는다. 완전히 혼자다. 영원히 팽창하는 공간 속에 오롯이 혼자. 인지하는 순간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틀어 둔 힙합이 뚝 멎으며 날카로운 설교가 들려온다. 그런 건 취미로 삼아도 되잖아.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실패할 기회가 없어. 더 이상은 부끄러워지면 안 돼. 죠. 다시 생각하자. 그림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우리 조금만 더 애써 보자. 아사쿠라로 사는 거, 지겹잖아. 응?

“유우, 다메!”

그리고 꿰뚫고 들어온다. 먼 곳을 울리는 소리.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연이어 들려오는 폭발적인 소음. 아냐아냐아냐아냐, 삼촌 일하는 중이잖아. 열지 마. 열지 말라니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무한히 부풀어 가는 세계를 조각내고 유우 짱이 침입한다. 삼촌! 외치는 소리는 입자가 되어 공중을 부유하는 듯하다. 자그마한 입술을 보며 멍하니 가늠했다. 꿈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깜빡이는 눈동자 앞으로 다가온 부스스한 긴 머리의 아이는 주저 없이 아사쿠라의 몸을 향해 풀썩 안겼다. 허리에 폭 안겨 오는 따끈한 온기. 삼초온. 일하지 마. 애교 섞인 목소리에도 몽롱히 발산하던 감각은 문밖에서 달려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야 가라앉기 시작했다. 헤드폰을 벗자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선명해지는 현실감. 흐트러진 셔츠. 분명 드라이까지 마쳤으나 군데군데가 뻗친 미완성의 머리. 삼촌 방해하면 안 된다니까. 아연한 얼굴로 이마를 짚고 선 코가를 보자 바닥을 디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유우 짱. 잘 잤어요? 물으며 머리를 쓰다듬으면 으으응,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를 언제까지고 받아주고 싶었다.

“일찍 출근하셔야 하는 날은 전날 자고 가시는 게 어때요.”
“안 되지. 그렇게까지 하면 정말 민폐잖아.”
“그치만 이렇게 서두르시다 사고라도 나면….”
“에. 무슨 사고. 아이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그런 건.”

비죽비죽 솟은 유우 짱의 머리를 빗어 주는 건 아사쿠라의 몫이 되었다. 딸을 키운 경험이 없었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6년 차 딸 바보인 코가보다 미감이나 손재주가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스타일을 하고 싶나요? 인어공주 스타일로 해 줘. 인어공주 스타일이라는 건 어떤 스타일…? 있잖아. 자연스럽고. 이렇게 커다랗고. 아아. 뒷쪽을 중심으로 조금 풍성하게 땋아 드리면 될까요. 응, 좋을 것 같은데. 주문처럼 주고받는 대화가 어이없어 화장실 밖으로 나와 보면 아사쿠라는 소파에 앉은 유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타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이. 대충 묶어도 된다니까. 어차피 한 시간이면 엉망이 된다고. 넥타이를 매며 조언해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고민하던 아사쿠라는 휴대폰을 켜고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들여다보고 있는 영상의 제목은 ‘풍성한 디스코 머리’ 따위의 것들. 으응. 그래. 많이 봐 두라고.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니까. 포기한 코가는 다시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이상이 요코하마시 가나가와 구의 어느 맨션 303호의 아주 평범한 평일 오전의 일상.

단정했던 첫 등장은 첫날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에게, 심지어 피도 섞이지 않은 남에게 아이를 맡겨야 한다는 사실에 은근히 긴장했던 코가와 모르는 삼촌을 만난다는 생각에 반쯤은 긴장하고 반쯤은 설레서 잠을 설친 유이는 평소보다 1시간 반 일찍 기상했다. 유이의 침대맡에 앉아 멍하니 유이의 다리를 주무르던 코가는 코를 한 번 훌쩍거리고는 제안했다. 유우 짱. 응. 우리 빨리 준비해서 삼촌 만나러 갈까.

그렇게 완성된 모습이 아사쿠라의 눈에 비친 첫인상. 공들여 꾸민 완벽은 바로 다음 날 무너졌다. 유우 짱. 큰일이다. 아빠 지각하겠어. 일단 일어나. 일어나서 옷 입자. 눈곱도 떼지 않은 아이에게 겨우 옷을 입히고 차를 태워 달렸다. 아사쿠라의 맨션 아래 주차하면서는 누가 봐도 방금 뽑은 새 차 옆에 차를 대느라 긴장했다. 시트에 비닐은 뜯은 거냐고. 차는 또 왜 이렇게 좋아. 이거 긁으면 일 날 거 같은데. 얼어서 겨우 주차를 마친 뒤엔 아이를 들쳐 안고 뛰었다. 헉헉. 숨도 고르지 못하고 초인종을 누르면 아사쿠라가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에. 유다이 상. 왜 이렇게 급하게….

왜지. 나도 모르겠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적응하느라 그런 걸까. 아니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믿을 구석이 생겨서 이러려나. 요코하마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오며 했던 결심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여긴 연고지도 아니고. 도와줄 가족들도 없고. 딱히 도움받으며 유우를 키웠던 건 아니지만. 실은 언제까지고 시터님이나 주변 가정에 의지하며 유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난 이제 곧 초등학생 학부모가 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갑작스러운 발령이나 휘어지다 못해 꺾어진 커리어 패스 따위를 핑계 대기엔 책임질 게 너무 많아. 그러니 최대한 타인의 도움 없이, 유우 짱과 둘이 해나가자. 둘만으로도 완벽한 가정을 만들자. 굳게 세운 다짐은 아사쿠라에게 유이의 등원을 부탁하며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아사쿠라가 생각보다 아이를 꽤 잘 돌보고. 유이도 삼촌과 자전거로 등하원하고 간혹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 금세 익숙해진 데다가. 마지막으로. 둘이 서로 너무 좋아하잖아.

“가 볼게. 오늘도 잘 부탁해.”
“조심히 다녀오세요.”
“잘 갔다 와, 파파.”
“응. 삼촌 말 잘 듣고.”
“아빠나 상사 말 잘 들어. 빨리 일하고 빨리 와.”
“유우 짱, 너 진짜…. 고멘, 죠.”
“아니에요. 오늘은 고로케를 튀기겠습니다.”

부녀간의 말다툼은 깔끔히 무시하고 비장하게 저녁 메뉴를 선포하는 얼굴. 이해할 순 없지만 아무튼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섰다. 뭘 먹든 알아서 잘하겠지. 가끔은 아사쿠라 상이 아이가 먹을 반찬 몇 가지를 구입해 가져다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걱정이라면 역시 유이다. 죠랑 지내며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는 것 같아. 상냥한 삼촌이란 역시 훈육에는 방해가 되는 존재인가. 코가는 고민하며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향해 총을 쏘듯 키를 겨눴다. 삑,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는 토요타 캠리에 몸을 실으면 역시 옆에 세워진 차가 신경 쓰였다. 이 차는, 빠지긴 하는 거야? 언제나 제일 좋은 자리에 주차해 놓고 말이야. 괜히 툴툴거리며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면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은 이렇게 스타일링 해 보았습니다.]

아사쿠라에게 등하원을 맡긴 지 약 한 달째. 가끔은 잠옷을 갈아입히지도 못하고 아사쿠라의 집으로 달려온 탓에, 또 가끔은 하원한 유이가 외출복이 불편하다며 잠옷으로 갈아입겠다고 투정을 부린 탓에 웬만한 유이의 외출복과 내의가 아사쿠라의 집으로 옮겨 와 있었다. 유치원은 코가의 집에서 차로 10분, 아사쿠라의 맨션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 통학 버스를 태우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동네를 돌아야 하는 데다가 버스를 놓치거나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날엔 아이를 등원 시킬 방법이 없어 직접 등하원을 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아이를 태우고 달리는 데 익숙해진 아사쿠라는 매일 아침 등원 완료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도 무사 등원했습니다.] 짧은 메시지 뒤엔 가끔, 헬멧을 쓰고 자전거 보조 좌석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유이의 사진. 최대한 팔을 길게 뻗고 뒤를 찍었는지 구석에 아사쿠라의 눈이 걸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귀엽네. 생각하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도착하는 메시지. 수신 시간은 늦은 오후 또는 이른 저녁.

[유다이 상. 유우 짱이 간식으로 초코 빵을 먹다 조금 흘렸는데,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해서 함께 버스를 타고 댁에 다녀왔어요. 유우 짱이 댁의 비밀번호를 모두 외우고 있더군요. 아마 천재가 아닌가 싶어요….]

…어이. 죠. 진정해. 그런 건 아빠보다 심하잖아. 유치원생이라면 다들 전화번호 길이의 숫자 몇 개 정도는 외우는 편이라고. 정정해 주고 싶었으나. 기분은 또 나쁘지 않아서. 코가는 퇴근길에 타코야끼를 잔뜩 사서 귀가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원인을 이유로 최근 들어 자주 벌어지고 있는 실랑이였다. 대체로 현장에는 범인이 없다. 잠든 척하는 범인을 얼른 방 안으로 숨긴 공범은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귀가를 반기고 있다. 오카에리나사이. 떨어지는 현관 센서등을 맞고 선 길쭉한 몸. 눈썹이 드러나도록 조금 다듬은 앞머리. 배시시 웃느라 가늘어진 눈을 덮은 속눈썹이 참 촘촘하고 예쁘다는 생각은 잠깐이었고. 얼굴이 붉은 걸 보니 조금 전까지 몸으로 놀아 주고 있었구만. 추측하며 구두를 벗은 코가는 아사쿠라의 야식거리로 사 온 야끼소바를 식탁에 내려놓고 바로 침실로 직행했다. 유우! 낮게 부르며 문고리를 밀어 열려는 순간 아사쿠라가 코가의 손목을 잡아챘다. 쉿.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목소리를 낮추며 하는 뻔뻔한 말엔 헛웃음이 터졌다.

“거짓말.”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이지.”
“같이 드세요. 뭐 사 오셨어요?”

여전히 웃는 얼굴. 어릴 때보다 깔끔해진 선에도 순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아사쿠라는 조심스럽게 잡고 있던 손목을 놓고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식탁으로 걸어가 코가가 들고 온 봉투를 풀어헤쳤다. 와. 냄새가 좋아요. 혼자 먹기엔 역시 많을 것 같은데. 얼른 와서 앉으시면….

“배고파서 봐줄게.”
“다 드셔도 돼요. 전 유우 짱이랑 저녁을 먹어서.”
“가라아게? 그거 가지고 되겠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일단 먹자. 먹다 보면 나오겠지.”

안 자는 거 아니까. 유이는 아이답게 참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코가는 젓가락을 들고 오는 아사쿠라를 살짝 노려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소곤대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가야 돼. 솔직히 자고 가는 건 정말 아니잖아.”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작업실에 있으니까, 두 분이 침대에서 주무시면….”
“미쳤어? 그거야말로 확실한 민폐라고.”
“상관없는데… 침대도 좁지 않고….”

예술 한다면서. 대학을 다니며 SNS에 일러스트를 게시하다 좋은 기회로 개인 전시까지 열었다고 들었다. 최근엔 브랜드와 이런저런 협업도 하고 있고, 표지나 삽화 같은 걸 그리기도 하면서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코가도 우연히 본 적 있었다. 유이를 데리고 간 서점의 잡지 매대에서. 아레. 이거, 죠 군의 그림 아냐?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아사쿠라 상에게 전송했을 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로 얼마나 돈을 벌겠어. 잠깐이지. 정신 차리고 다시 복학하라고 해야지. 딱 잘라 말하시는 탓에 직접 검색을 해 보고서야 아사쿠라의 정확한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기준이 타이트하시네. 죠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걱정했던 게 얼마 전의 일인데 이제 와서 작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건. 정말 웃기잖아. 아니. 절대로 괜찮아. 조금만 이따 데리고 갈 거야. 야끼소바를 나눠 먹으며 여러 번 거절을 하고 있으면 스르르 침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우 짱. 나와 봐.”

침대에서 꽤나 뒹굴거렸는지 엉망으로 풀어진 머리. 이불 자국이 난 볼. 부스스한 몰골을 드러낸 유이는 발을 끌며 거실로 나와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삼촌 네서 자고 가고 싶어. 부루퉁 내민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린 코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훈육을 시작했다.

“안 돼. 삼촌은 밤에 일한다고 했잖아. 우리가 가야 삼촌이 일을 하지.”
“난 잘 건데? 아빠도 잘 거잖아. 삼촌이랑 조금만 더 놀다가 조용히 잘게. 괜찮지, 삼촌? 그래도 되죠?”
“어… 물론 괜찮….”
“아아, 안 돼. 죠. 대답하지 마. 유우 짱. 우리 집에 가자.”
“유우는 삼촌 네서 자고 싶어. 삼촌 집이 더 좋단 말이야!”

삼촌은 벽에 낙서해도 혼내지도 않고. (벽지는 어쩔 셈이야?-작업할 때 쓰던 전지를 벽에 붙이고 놀아서 괜찮습니다.) 과일도 많이 주고. (밥 적게 먹으니까 과일 많이 주지 말라고 했잖아.-먹고 싶다는데 어떻게… 밥도 많이 먹어 주었어요.) 영어 학원 버스에서 내릴 때 꼭 안아 주고. (누가 보면 아빤 줄 알아.-그래도 저는 어리니까…) 놀이터에서 철봉에 매달리게 해달라고 해도 힘들다고 안 하고. (그건 전에 봐주시던 시터님 허리가 안 좋으셔서 그런 거잖아.-아무래도 저는 젊으니까…)

“삼촌네 집은 더 넓고!”
“유우!”
“삼촌도 있고!”
“뭐?”
“집에 가면 삼촌이 없잖아!”

으아앙. 울음이 터진 유이를 감싸 안은 건 아사쿠라였다. 유우 짱. 울지 말아요. 자고 가요. 괜찮아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는 폼이 엉성해서 더 황당했다. 뭐하냐고, 둘이. 한 달 만에 어떻게 된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달래 주는 사람의 품에서 완전히 오열하기 시작한 아이를 더 다그칠 수도 없었다. 꺼이꺼이. 엉엉. 아빠는 바쁘면서. 으응. 그렇지. 이쯤 되면 싱글 대디가 죄인이지. 그렇지만 그게, 고작 한 달 전에 알게 된 삼촌 품에 안겨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코가는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이마를 짚었다.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내면 유이는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어댔다. 떼쓰는 걸 알고 있는데도, 사실. 미안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어서. 아. 머리야. 골이 아프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는데 누군가 어깨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쏟아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자 아사쿠라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재우고 있을게요. 집에 다녀오세요. 또렷한 눈에 떠밀리듯 일어서 현관문을 열었다. 시커먼 밤공기에 어깨가 떨렸다.

계획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원래는 금방 새 시터님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고, 물리적인 여유도 없었고. 솔직히 모르는 사람의 손에 아이를 맡기는 것보다 마음이 훨씬 편하기도 했다.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둘 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그치만 이렇게까지 의지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죠에게도 자기 일이 있잖아. 게다가 죠의 말대로 아직 애아빠 노릇을 맡기기엔. 걔가 너무 어리고. 죠도 아이잖아. 한참 고민이 많을 시기에, 아직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했고. 그냥 청소년이나 다를 바 없는 코도모한테, 계속 이렇게 의지하는 게 정말 맞는 건가.

손끝을 물며 도착한 집은 싸늘했다. 아침 일곱 시 반. 코가와 유이가 빠져나간 뒤 아주 오래 식어 있던 집. 현관에 완전히 들어서 문을 닫았는데도 바깥인지 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웠다. 춥네. 어릴 때 가족들과 다 함께 살던 집에 들어설 때도 가끔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은데. 중얼거리며 들어선 거실도 어색했다. 너무 깨끗해. 방금 전까지 있다 온 죠의 집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는데. 자리를 잃고 한쪽으로 밀려난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엉망으로 널려 있던 장난감과 스케치북 같은 것들. 아른거리는 풍경을 곱씹으며 멍하니 서 있다 보면 곧 센서 등이 툭 꺼졌다. 좁은 발코니 창밖으로 시커먼 밤이 펼쳐졌다.

뭘 챙겨 가야 하려나. 유이의 애착 이불. 혹시 모르니까 좋아하는 토끼 인형인 모모와 토토도. 아침에 일어나 준비하며 책을 읽어 달라고 조를지 모르니 유우 짱이 좋아하는 동화책도 몇 권 챙겨야겠다. 혹시나 이런 일이 또 생길지도 모를 걸 대비해 잠옷도 몇 벌. 뭐야. 이사하는 것도 아니고. 챙기다 보니 한가득이 된 유이의 짐을 현관 앞에 내려둔 뒤엔 잠옷과 정장을 챙겼다. 셔츠도, 혹시 모르니까 몇 벌 더 챙겨 가야 하려나. 스킨 케어 제품도 챙겨야 하나. 너무 기회다 싶어 보이는 것 아냐? 쭉 신세 질 생각은 정말 없는데.

그러면서도 집어 든 짐이 양손 가득이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캐리어를 챙겼어야. 근데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긴 꼴이지. 자조하면서도 뒷좌석에 꾸역꾸역 짐을 싣고 다시 밤거리를 달렸다. 건반처럼 선 가로등을 지나. 불 꺼진 작은 건물들을 건너. 조용한 골목을 끼고 한 번 접어 들어간 삼 층짜리 낮은 맨션. 조그만 발코니에 의자 두 개가 놓인 집. 이런 맨션에 주차장이 있다는 게 정말 좋고, 신기해. 죠는 운전도 하지 않으면서 굳이 이런 곳에 사는 거야? 코가는 정해진 자리처럼 남아 있는 공간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멈칫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네에, 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기다리다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밀어 열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침실 문을 닫고 나오는 아사쿠라와 마주칠 수 있었다.

“금방 잠들었어요.”

아사쿠라는 왠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코가의 앞에 섰다가. 손에 들린 짐을 보고 살짝 뒷걸음질 쳤다. 아. 역시 좀 오버였나. 간단히 오늘 정도 보낼 짐이나 챙겼어야 했나? 머쓱해진 코가가 옷걸이 몇 개를 들고 어기적어기적 신발을 벗으면 아사쿠라는 현관에 놓인 유이의 짐가방을 집어 들며 서운한 듯 중얼거렸다.

“제 옷을 입으셔도 되는데….”
“응?”
“출근은 어려우시더라도 잠옷 정도는….”

…고생하셨겠어요. 조용히 돌아서는 뒷모습이 왜 갑자기 조금 처량한 건데.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아사쿠라는 유이의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코가에게 미리 꺼내 놓은 듯 식탁에 올라와 있던 수건을 내밀었다. 편하게 씻고 주무세요. 어차피 저는 새벽까지 깨어 있을 거라 유우 짱과 함께 제 침대에서 주무시면 돼요. 배려하는 말이 진심인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아니, 죠. 침대까지는. 그렇다고 유우 짱을 죠랑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머뭇거리며 고민하자 아사쿠라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작업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달리 선택지도 없고. 코가는 식탁 의자에 대충 옷걸이를 걸어두고 욕실로 들어섰다.

세수랑 양치는 시켰겠지. 그 정도는 알아서 했겠지. 방에 가습기는 있나? 죠도 알러지가 있는 편이라. 아마 구비해 뒀을 거야. 그나저나 좋은 바디 워시를 쓰네. 답지 않게 향수도 몇 개 있고. 로션은 고작 하나를 바르는 거야? 귀엽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치고 나면 기분이 꽤 나아져 있었다. 좋아. 내일은 좀 더 잘 수 있겠다. 죠는 늦게까지 고생해서 피곤할 테니까 내일은 머리도 내가 묶어 줘야지. 응. 거울 속의 자신에게 굳게 다짐하며 얼굴을 확인하고 욕실을 나서는데 거실에 여전히 아사쿠라가 서 있었다. 뭔가 딱 들킨 얼굴을 하고. 에. 죠. 뭐해? 물으면 새카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도르르 굴러갔고. 뭔데?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가서자 아사쿠라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비밀을 실토했다.

“한 캔만… 하려고 했는데요.”
“엑. 아사쿠라 벌써 음주가 가능한 나이?”

그런 편입니다만. 맥주 캔을 들고 종알거리는 입술이 꼭 부리 같았다. 그런 편이란 건 뭐야. 그치만 정말 그렇겠네. 벌써 스물셋의 생일도 지났으니까. 날짜를 가늠하며 동의하면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사쿠라의 손에 들린 맥주 캔 겉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바닥을 향해 똑 추락했다. 아. 나도 한 캔 하고 싶다. 막상 보니까 당기는데. 넉넉잡아 한 시간쯤은 더 잘 수 있기도 하고. 조용히 입맛을 다시면 아사쿠라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코가의 앞으로 내밀었다. 실은, 한 캔 더 있는데요. 혹시….

“마감 때문이라든지 바쁜 거 아냐?”
“어제까지 마감인 게 하나 있었고, 오늘은 괜찮아요.”
“몰랐네. 고멘. 잘 마친 거야?”
“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단둘이 마주 앉은 자리가 생각보다 어색했다. 유이의 잠을 깨울까 속삭이듯 이야기하려니 더 조심스럽기도 했고. 뭐. 건배나 할까. 코가는 캔을 맞부딪히며 머릿속으로 계속 할 말을 찾았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진지하게 묻기엔 타이밍이 너무 늦어 버린 것 같고. 작업물에 대해 질문하기엔 그쪽으로는 워낙 문외한이라. 아는 게 없으니까. 역시 만만한 건 공통 분모 이야기이려나. 아사쿠라 상에 대해 물을까. 맥주를 몇 모금 홀짝인 코가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아사쿠라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유우 짱. 정말 귀여워요, 하고.

영어 학원도 좋고 재미있지만 댄스 학원에도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얼마 전엔 영어 학원에서 배운 오렌지 송의 춤과 노래를 보여 주었는데 정말 귀여웠어요…. 과일도 역시 오렌지가 가장 좋다고. 유다이 상을 닮아 어른 입맛인가 싶어 신기했습니다. 달콤한 과일보다는 채소류를 좋아하셨던 게 생각 나서…. 며칠 전 하원할 때는 갑자기 비가 와서 함께 자전거를 밀며 달리게 되었는데 달리기도 무척 빠른 것 같았어요. 역시 유다이 상의 자녀라 그런지 운동 신경도 좋은 것 같고….

볼과 귀가 살짝 발개진 아사쿠라는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에? 댄스 학원? 요코하마에도 괜찮은 곳이 있으려나. 그치만 역시 영어가 먼저 아냐…? 그랬군. 분명 여름까진 수박이 가장 좋다고 했는데. 그나저나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달리기야 잘하겠지. 무엇보다 유전적으로 다리가 완전 길잖아. 코가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죠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아니면 취한 거야? 여러모로 정말 새롭네. 생각의 끝엔 어떤 깨달음도 찾아왔다. 응. 그래. 죠는 원래 이렇게 관찰하는 인간이었지. 집요히 뜯어보고, 살피고.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지만 언제나 무언갈 발견하고 있고.

그래서 좋았다. 신기했어. 그런 동생이 생긴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를 무한히 두드려 보고, 파헤친 뒤 닮아가려 애쓰는 모습이 귀여웠고. 고요한 눈은 조명처럼, 열린 귀는 마이크처럼 느껴질 때면 가끔은 두렵기도 했다. 너는 나를 분석해. 해체하고 흡수해. 실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홀로 형제라는 개념을 발명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서툴게 닮아가려 해. 안쓰러웠고, 그래서 귀했다. 사랑은 측은지심을 동반하니까. 가족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니까. 형제가 될 수 있을까요. 저희가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묻는 너에게 기어코 답해 주고 싶었다. 될 수 있어. 우린 연결될 수 있어. 꾸준히 관측하고 세심히 닮아가며 머무른다면 가족이 될 수 있어. 자신하던 관계가 끊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형제는 닮지 못했고 구성되다 못한 가족은 깔끔히 절단 났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다시 마주 앉은 이유는 뭘까.
세계가 우리를 이곳에 끌어다 앉힌 이유는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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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가정은 하나의 성 씨로 구성된다. 코가가 보기에 아버지는 그런 보통의 기준에 맞춰 삶을 정돈해 가는 과정을 유달리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과 꼭 닮은 전형적인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깨어진 것은 코가가 열한 살, 형과 누나가 각각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때쯤으로, 이 무렵 어머니는 후두암 1기 판정을 받았고 아버지는 중의원의원 출마를 결정했다. 꼭 지금이어야 해요? 코가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더 강해져서 너희를 지키기 위함이란다, 하고 답했다.

코가 삼 남매는 눈물을 매달고 선거 유세를 이어가는 아버지를 따라 유세에 동원됐다. 복잡한 사정에도 아버지는 당선되었으며 형과 누나는 유학을 결정했고 어머니가 치료를 이어갈 때 코가는 학교를 다녔다. 학원도. 원해서 등록한 축구 교실과 니가타에서 열린 스키 캠프도. 어떤 여름엔 한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10년의 투병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궐 선거에 낙선한 아버지는 두 달 만에 재혼을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아사쿠라 상을 소개했다. 몇 년 전부터 연애를 하고 있다고. 어머니도 알고 계셨다고. 두 사람을 축복해 주며 돌아가셨다고. 응접실에 모여 앉은 코가 삼 남매는 애틋한 얼굴을 한 아사쿠라 상과 인사했다. 다 자란 어른들에게 어머니가 필요할 리는 없고. 아버지의 마음이 결혼을 결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깊은가 보다, 생각했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코가 삼 남매는 트위드 셋업을 차려입은 아사쿠라 상과 어린이를 겨우 벗어난 아사쿠라의 건너편에 앉아서도 잘 웃고 잘 먹었다. 누나는 아사쿠라의 접시에 여러 번 가니쉬를 덜어 주었고 형은 직원을 불러 아이가 비운 오렌지 주스를 두 번이나 리필해 주었다. 코가는 누나와 형의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덜덜 떨고 있는 일곱 살 어린 새 동생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떠올렸다. 작은 새. 깃털이 채 마르지 않은. 날개조차 제대로 펼 줄 몰라 파닥거리는 꼴이 꼭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았다.

축구 클래스의 주전으로 발탁되고도 시합에 나가진 못했지. 엄마가 아픈데도 즐겁게 축구를 하는 건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홋카이도의 어느 스키장에서는 밤새 카드놀이를 하는 친구들에게서 따로 떨어져 나와 혼자 객실에 남아 있었다. 다시 표적 항암에 들어간 엄마를 두고 웃는 건 몹쓸 녀석이나 하는 짓 같아서. 마라톤 선수로 뛰기 시작하면서는 수상할 때마다 어머니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어떤 날엔 달리며 단 한 차례도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음에도. 불 꺼진 집에 도착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가사를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해 두고 간 식은 밥뿐이었는데도.

트로피를 아버지의 서재 한편에 세워 두고 나올 때면 괜히 깊은 얼굴을 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날들. 기쁨과 보람과 성공과 행복과 일생에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엄마의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발판 삼아 긍지로, 열의로, 투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우리 가족에겐 실패란 없어야 해. 그늘을 보여서는 안 돼.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코가 집안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 어려움을 건너, 비극마저 극복해 버린 채. 굳건히 결속하고 기어코 쟁취해 내는 사람들로서.

멋진 스토리였다. 인생이 정말 그렇게 흘러갔으면 했다. 형이나 누나는 진실로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웃어야 엄마가 기운을 내실 거야. 우리가 해내야 엄마가 일어나실 거야. 우리가 극복해야 엄마가 마음 편하게 눈 감으실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보란 듯이 잘 살아야 엄마가 기뻐하실 거야. 형과 누나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팔아 사업을 시작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미국에서 일자리를 얻었을 때 아버지는 자상한 아버지와 신실한 남편 이미지를 기반으로 동정표와 호감을 얻고 있었고 코가는 무난하게 대학에 진학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머니의 투병으로 삶의 진실 따위를 알아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맑고 깨끗한 영혼이었으므로. 그렇게 보이려 애썼으므로.

하지만 외로운걸요. 괴로운걸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엄마를 마음에 품고 있는 일은 정말이지 불안하고 슬픈걸요. 아픈 걸 알면서도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고 싶어져서, 서운하고 속상해서 죄책감이 느껴져요. 동시에 친구들을 만나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땐 내 자신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져요.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고, 가지고 싶은 건 전부 얻을 수 있지만 내 마음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담을 수 없어요. 전부 사라져 버려요. 마음이 텅 비어 있어요. 아무것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곤란한 얼굴로 듣고 있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된 거라며 나를 다독이고 칭찬하고 인정해 주려 들겠지만. 내가 해낸 그 어떤 일도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해요. 그 어떤 성공도, 어떤 증명도 나를 나로 완성하지 못해요. 어떤 쓸모도 나를 가치 있게 만들지 않아요. 왜냐면 나는. 처음부터 완전히 비어 있었으니까.

동질감을 느꼈다. 아직은 아사쿠라가 코가보다 이십 센티는 더 작을 때였다. 괜찮은 척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분명 네 속도 말라 있겠지. 그런데 아직은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저 어딘가 공허하다고 느낄 뿐이겠지. 이유를 몰라 홀로 침잠하곤 하겠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휘발하는 감정들이야 책임질 수 없겠지만 적어도. 혼자라고 느끼지는 않았으면 했다. 유우가 자주 만나서 좀 챙겨 줘. 어릴 땐 동생을 가지고 싶어 했잖아. 스테이크를 입 안에 밀어 넣으며 아버지가 하는 말에 제가 언제요? 하고 되묻는 대신 코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생기면 좋지. 코가 집안의 비극적 가정사에 피가 섞이지 않은 누군가가 포괄된다 하더라도 그 애만큼은 고갈하지 않았으면 했다. 작은 새. 손가락이 길고 섬세한 아이. 오래 키운 고양이를 아끼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농구를 한다고? 그래 그래. 나도 축구를 했었어. 응. 물론 마라톤을 더 오래 했지. 지금은 매니지먼트를 공부하고 있어. 아무래도 형의 회사가 있으니까. 돕게 된다면 내가 아닐까. 역시 가족 사업으로 시작한 거니까.

“아사쿠라 군도 함께 하게 되려나?”

농담했을 때 건너편에서 몬자야끼를 긁어 먹던 아사쿠라는 알 수 없는 물질을 뱉으며 캑캑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물 좀 마셔. 급히 채워 건넨 물잔을 들고는 와중에 꾸벅 인사까지 하고 물을 마시는 아사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먹을 때 귀여워. 잘 먹이고 싶다. 피어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주 만났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차를 타고 아사쿠라의 학교 근처로 달려가 하교하는 아기를 낚아채 텐동이나 히쯔마부시를 먹고 학원에 데려다준다든지, 주말을 맞아 잠깐 머리를 식히며 수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아사쿠라에게 합류해 바닷가를 달린다든지. 요코하마 좋은데. 역시 그렇죠. 따위의 감상을 나누며 나란히 앉아 스포츠 음료를 마시는 시간이 좋았다. 빌린 자전거를 반납하는 코가 옆에 서서 바람에 나뭇잎 그림자가 살랑이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아사쿠라의 키가. 좀 자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잘 먹으니까. 잠은 잘 자? 물으면 그래도 꽤… 하는 답을 들을 수 있었고 코가는 아사쿠라를 데리고 곧장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있잖아. 어머니 바쁘시지만. 셔츠가 짧으면 감기 걸리니까. 짧아진 소매가 눈에 밟혀 저지른 짓이었지만 이것저것 입혀 보는 재미가 있어서 이후로 몇 번 더 데리고 쇼핑을 나섰다. 종이봉투 몇 개를 옆에 놓고 함께 올데이 브런치 가게에 앉아 있으면 아들을 키우는 것 같단 기분마저 들었다. 봉투에 든 새 옷을 흘금거리며 몰래 좋아하는 모습. 진짜 아기잖아. 어머니랑 외출 자주 하지? 메뉴를 기다리며 가볍게 물었을 때 아사쿠라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지. 자랑할 만하지 않아, 아사쿠라는?”
“어머니는 바쁘시니까요. 회사 일이 많으시고….”

아사쿠라 상이 경영자로 있는 회사는 미디어 송출 장비를 독점으로 수입하는 중소기업으로 규모에 비해 실적이 좋은 편이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전 남편의 보험금으로 기업을 설립한 아사쿠라 상은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는 듯했다. 혼자가 된 부모는 보통 그런 식으로 굴게 되는 건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방치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건가. 코가는 방금 나온 베이컨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아사쿠라 쪽으로 밀어주고 자기 앞으로 팬케익과 커피를 가져왔다. 에에. 그럼 아사쿠라는 보통 누구랑 외출해? 여행은? 칼로 팬케익 조각을 잘라 입에 넣다가 깨달았다. 이쪽에도 없었군, 어머니란 존재는. 그래도 시간은 가지. 그래서 착각했다. 아사쿠라 역시 이 결합에 우호적일 거라고.

“그래서 서운해요. 연애를… 하셨다는 게.”

만으로 열 넷? 열 다섯쯤일까. 이제 막 팔다리가 길어지며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 앞으로 1년에 10센티 씩 커 버리는 해도 있을걸. 그럴 때 이 아이의 바지 길이를 살펴봐 주고, 소매 길이를 체크해 줄 어른이 없을 거라는 게 안타깝고 미안하고 서글펐다. 결혼을 하신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사쿠라 상은 아사쿠라 상대로 각자의 일에 매진하며 지금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것이다. 그랬기에 만나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 상처 입고 허전한 감상을 품은 채 어른이 되어 갈 것이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복잡한 고립감. 모르는 마음이었다면 쉽게 위로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알고 있는데도 함부로 입을 대기도 어려웠다. 응. 그럴 수 있지. 솔직히 난 조금 자라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야. 깨끗하게 인정하면 아사쿠라의 순한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내려앉는 어깨. 터지는 숨. 실은요. 어머니의 인생에 있어 저의 감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겁이 나요. 어머니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시고, 저 역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그 과정에서 저의 생각은 전부 지워집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사춘기 아이의 부질없는 욕심이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하지만 재혼을 결심하셔서 좋은 면도 있습니다. 코가 상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실토한 뒤엔 갑자기 가까워졌다. 아사쿠라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감춰야 할 것들을 공유해 버린 탓인가. 이제 잘못을 저질러도 공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기 같은 사고 방식이 우습기도 했으나 동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옷자락이라도 붙드는 듯한 눈빛을 떨쳐낼 수 없어서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아사쿠라에겐 의외로 불도저 같은 면이 있었다. 한 번 신뢰할 만한 어른이라는 확신을 얻은 아사쿠라는 작은 호의도 놓치지 않고 밀착해 왔다. 고교는 도쿄로 진학할까요. 코가 상처럼 운동을 해 볼까요. 자기 전에는 추천해 주신 음악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 함께 먹었던 아부라 소바를 먹었어요.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는데도 2, 3일에 한 번씩은 꼭 도착하는 문자가 귀여웠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빈 그릇을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서는 당장에 열람실 밖으로 튀어 나가 깔깔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아사쿠라 군. 보고 싶은데 지금 어디?

함께 먹은 메뉴의 이름을 더 이상 외울 수 없게 되었을 때쯤부터는 죠라고 불렀다. 아사쿠라는 끊임없이 질문을 건네 왔다. 대학교 수업은 재미있나요. 요코하마는 비가 옵니다. 도쿄의 하늘은 어떤가요. 저녁으로는 무엇을 드셨는지 궁금해요. 대답하다 보면 딱히. 억울하고 슬플 틈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잘되지 않을 정치 행보에 목을 매고 계시고 형은 사업을 일구어 나가느라 바빴고 누나는 해외에서 지내며 피상적인 안부를 물어올 뿐이지만. 일상을 부담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진폭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나이 차이는 있었으나 또래를 대할 때보다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지가 비슷한 두 사람. 공유하고 있지. 전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떤 교집합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바꾸거나 해결해 나갈 수 없는 상황을. 서로가 당사자이기에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투박한 위로와 위선적인 동정에 대한 불편한 감정까지도. 그런 관계란 너무나 긴밀하고 부담스러운 동시에 편리하고 안심이 되어서.

여러 해 아사쿠라를 돌봤다. 아사쿠라는 금방 자랐다. 키가 컸고 목소리가 낮아졌고 몇 벌의 옷을 더 사게 된 끝엔 고교에 진학했다. 입시를 중심으로 하는 요코하마의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성적이랄까, 완전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적당한 대학을 졸업하고 같이 일하면 되니까. 코가가 지도하면 아사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요하게 쫓아왔다. 바스케로 부 활동을 하는 아이의 친구들에게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대접하기를 몇 번.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주기를 또 몇 번 정도. 형이야? 묻는 친구들에게 아마… 라고 대답했던 아이를 바래다주는 길에 문득 헤드락을 걸고는 마구 괴롭혔다. 오마에. 내가 네 형도 아닌데 이러고 있겠냐고. ‘아마’가 뭐야 ‘아마’가. 머리칼 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장난을 치면 얼굴이 새빨개져서 품을 벗어난 아사쿠라가 대뜸 머리를 정돈하더니 가방을 열고 뭔가를 꺼내 건넸다. 진지하게 굳은 얼굴에 삐죽삐죽 뻗친 머리가 너무 언밸런스라 코가는 조금 웃으며 둘둘 말린 종이를 받아 들었다.

“뭐야?”
“첫 완성작입니다.”
“에? 이거 죠가 그린 거야?”
“네, 시험이 끝나고 여유가 되어서….”

우와. 코가는 감탄했다. 아는 건 없었지만 감각이 대단하다는 건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한 핏의 하늘색 셔츠. 통이 넓은 부츠컷의 슬랙스. 조금 길었던 머리와 드물게 착용하곤 했던 시계. 처음 만난 날의 차림을 한 코가가 고스란히 종이 위에 옮겨져 있었다. 약간의… 첨가된 이 아이만의 해석과 함께. 스고이. 아사쿠라 정말 대단해. 그림에 소질이 있었구나. 아사쿠라 상도 알고 계셔?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가로등 불빛에 비춰 그림을 뜯어 보고 있으면 아사쿠라는 조용히 덧붙였다. 요즘 저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에요.

“갑자기 사람 감동 시키네.”
“마음에 드세요?”
“응, 무척. 그나저나 방금 약간 고백하는 장면 같았어.”
“…역시 전해졌나요.”
“응? 아니, 농담을 그렇게 받지 말고.”

근데 정말 장난 아니네. 이런 실력이라면 차라리 미술을 전공하는 쪽이 낫지 않아? 여전히 그림에 코를 박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익숙한 향기가 났다. 내… 향수 냄새. 내가 선물했던가? 이 아이에게? 돌아보자 마주친 눈이 깊었고.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곧게 선 아이의 얼굴. 성장했구나. 깨닫는 순간 시야가 박동했다. 아사쿠라는 차분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골목을 울린 음성이 옅어질 때쯤 코가는 주저앉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관계를, 맺고 싶었잖아. 호적에 다닥다닥 붙은 이름끼리도 갖지 못했던 유대감이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조금 지나친 듯도 싶었으나 깊게 엉켜 있어야 풀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잡아뗄래도 떨어지지 않겠군. 지저분하게 뜯겨 나갈지언정 완벽히 사라진 않겠어. 마치 뿌리부터 얽혀 버린 두 그루의 나무같이. 실은 다른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도 어깨를 기대고 선 연리지같이. 기묘해. 진짜 기묘한 위로야. 그래서 그런지.

“나 지금 좀 울고 싶어.”

낯선 감정에 휩쓸리며 이마를 짚자 아사쿠라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코가의 어깨를 짚었다. 바보냐. 손이 너무 떨리잖아. 타박하면 일 초도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해 오는 아이가 웃기고 어이없었다. 코가는 고개도 들지 않고 아사쿠라를 그대로 껴안았다. 터뜨릴 듯 힘주어 껴안으면서도 손에 든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애쓰느라 상완에 힘을 세게 주었다. 고마워, 아사쿠라. 고마워, 죠. 뒤로 잇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잘 정리되지 않아 오래도록 아이를 품고 있으면 아사쿠라 역시 조심스럽게 코가의 등에 손을 얹었다. 토닥토닥. 무엇을 위로하고 달래는지도 모르고 서로의 마음을 두드리던 밤. 그리고 고작 며칠이 지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완벽한 타인이 되었다.

어른 코가와 어른 아사쿠라가 이별했다. 깨끗한 끝맺음은 아니었다. 여러 날에 걸쳐 전화와 만남으로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낸 어른들은 어느 가을 3년이 조금 넘는 연애를 종결지었다. 코가는 술이 잔뜩 취해 돌아온 아버지에게 더 이상 헛된 곳에 에너지를 쓰지 말고 네 미래에나 집중하지 그러냐는 잔소리를 들었다. 며칠 뒤 아사쿠라는 늦은 밤 방문을 두드려 자신을 불러내고는 모두 지나갈 인연이었다며 에둘러 정리하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만나면 안 되나요? 왜요? 유다이 상은 이제 제게… 정말 가족 같은데…. 생경한 얼굴을 한 아사쿠라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돌아서며 말했다.

“죠. 그런 건, 가족이 아니야.”

가족이 뭔데요. 가족이라는 건 어떤 건데요. 내가 선택할 수도 없이 그냥 되어 버렸으면서. 내 인생에 이미 존재해 버렸으면서. 교리처럼 강제되는 부모님의 방식. 때로는 자신들의 실패를 자식에게 투영하기도 하며. 미안해. 나도 최선을 다했어. 서툴러서 그랬어.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하잖아. 가족이잖아. 용서마저 강요하며 허울 좋게 포장할 뿐인 관계보다 유다이 상과 나눈 마음이 훨씬 더 진짜 같았다고. 우리는 서로의 설움과 비극을 지우고. 상대에게서 미래를 보고 과거를 치유 받으며. 바깥의 소란을 가라앉히는 눈과 목소리.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이해하고 남은 것은 고스란히 교집합의 바깥 부분에 남겨 둔 채.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을. 어쩌면 더 없는 외부인이었을. 유다이 상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저의 가족인가요?

더플 코트 하나만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역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도쿄로 향하는 전철에 올라타고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코가가 사는 곳을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와 주소까지는 알지 못했다. 항상 데리러 와 주셨었구나. 보러 와 주셨었구나. 계속 달리고 계셨구나. 고작 한두 사람의 승객이 전부인 공허한 열차 안. 불빛이 너무 과했다. 아사쿠라는 좌석에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아주 조용히 숨을 쉬었다. 몸이 실려 가는 것과 동시에 시간 역시 빠르게 흘러 당장 코가의 앞에게 당도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몇 년쯤을 거슬러. 내가 어른이 되고. 더 이상 부모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단하고 강한 버팀목이 되어 그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이름만을 들어 본 적 있는 역에서 하차했다. 휩쓸릴 인파도 없어 그저 아무런 걸음으로 아무런 출구를 빠져나가 근처의 건물 입구 아래 주저앉았다. 바람이 불었고 볼이 차가웠다.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야 할까. 잘못된 행동이라고 혼내시려나. 그렇지만 정말 보고 싶었는데. 지금 당장 만나지 못하면 삶이 끝날 것도 같았는데. 이대로 관계 속에서 소멸해 버리는 건, 정말 죽기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나 결국엔 습관처럼 의심하게 되는 자신의 판단. 나는 언제나처럼 어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으며, 때로는 무의미한 응석을 부리고, 가끔은 귀찮고 성가시기까지 한….

“이제 감기에 걸릴까 걱정해 주는 일도 평범하게 할 수는 없는데 말이야.”

어린애의 고개를 들게 한 건 코가의 목소리였다. 올라온 출구의 맞은편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음성. 그새 키가 또 컸나? 바짓단이 짧아졌잖아. 마지막으로 쇼핑한 게 언제였지. 갸웃거리며 걸어오는 코가의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아사쿠라는 손바닥을 털고 일어나 코가와 마주했다. 한 단 올라간 건물 입구를 밟고 서니 시선이 높아졌고 자연스레 접근한 코가를 내려다보게 됐다. 짓무를 듯 붉은 눈꼬리. 자꾸 코를 찡긋거리는 게 추운 것 같기도, 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털어 앞머리를 정리한 코가는 뜬금없이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사쿠라의 어깨에 팔을 휘감았다. 오래 기다렸나. 같이 귀가한다니 정말 동생 같네.

눅눅하고 짙은 가을밤의 공기. 안개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것을 뚫고 코가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축축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코가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어깨에 기댄 코가는 간혹 휘청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집을 향해 걸었다. 차들은 발치에 전조등 불빛을 떨어뜨렸다 회수하며 드문드문 곁을 스쳤고. 엉키는 발 때문에 자꾸만 부딪는 어깨. 춥고 더운 감각. 친구들과 마셨는데 말이야. 다들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응. 어차피 시간은 흐르니까. 지나고 나면 무감해지기 마련이고. 그렇지? 혼자서 떠드는 코가의 옆에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디뎌 나가다 보면 어느새 코가의 걸음이 느려졌다. 맨션 입구 앞에 발을 멈춘 코가는 아사쿠라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걸쳐 놓았던 팔을 떼어낸 뒤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쓸어 정리했다. 늦었으니 자고 가. 그 정돈 괜찮아. 아마도. 중얼거리며 돌아선 등이 타박타박 층계를 오르다 얼마 가지 않아 우뚝 멈춰 섰다. 난간을 잡고 서서히 돌아본다. 사선의 그늘이 콧잔등을 가로질렀다.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 몇 번 눈을 깜빡인 코가가 다시 앞을 보고 짧게 한숨을 터뜨렸다.

“가자! 집으로!”

대장처럼 외치는 코가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불 꺼진 복도를 걸어 어느 문 앞에 도착한 코가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한참을 문과 씨름했다. 철컥철컥. 덜커덩. 철컥. 몇 번의 소음 끝에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코가의 세계는 혼자 잠들어 있었다. 코가가 현관의 선반에 키를 올려두며 안으로 들어서자 센서등이 켜졌고 그제야 아사쿠라는 실감했다. 필요한 것들뿐이겠지만, 어쨌든 물건이 복잡하게 쌓인 코가의 세계 사이사이 먼지처럼 끼어 있는 어떤 감정. 뭉치지 않고 산재하는 바람에 단숨에 들어내 치워 버릴 수도 없는. 바닥을 구르며 그의 긴 다리에 걸려 영원히 걸리적거릴. 극복할 수조차 없게 너무나 자연한 슬픔과 외로움. 집에 머무른다는 건 그런 것들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겠지. 오래 달리고자 했던 어느 시절의 결심을 문득 이해하게 되었을 때. 코가는 문고리를 붙잡고 선 아사쿠라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냈다. 죠. 설마 외박이 처음?

…네에에. 대답하며 얌전히 집 안으로 입성한 아사쿠라는 입고 온 더플 코트를 벗어 들고 식탁 근처에 섰다. 낮은 조도의 조명 하나만을 켠 코가는 가벼운 민소매 차림으로 대충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나갔다 오느라고. 평소엔 이렇게 너저분하진 않은데. 움직일 때마다 등이며 어깨며 팔에 엷은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코가가 옷가지나 쿠션을 들어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아사쿠라는 일부러 시선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옷은… 어디에…. 쭈뼛거리면 바닥에 있던 쿠션을 집어 침대에 올려두던 코가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마저 쿠션에게 자리를 잡아 준 코가는 코트를 받아 들고 안쪽 방으로 사라졌다 수건과 잠옷을 한 쌍씩 들고 나타났다. 먼저 씻을래? 빤히 바라보는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시선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젓자 코가는 어깨를 으쓱하고 욕실로 향했다. 삐그덕. 문이 닫히는 소리. 뭔가를 정돈하는 소리. 탁 탁. 조그만 소음이 이어지다 곧 물줄기가 쏟아진다.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물소리에 생각이 흩어진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뻗고 움직이던 코가의 잔상이 부서진다. 다리를 껴안고 웅크린 채 바람에 일어난 먼지처럼 부유하는 상념을 붙들기 위해 애쓴다.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최초의 감정. 머리 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 심장은 방금 전까지 전속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잠들고 싶다. 늦은 시간 먼 거리를 달려온 데다 추위에 떨었으니까 눈만 감으면 쓰러지듯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아사쿠라는 조심스레 희망하며 팔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숨을 쉬었다. 어깨에 힘을 빼며 심호흡을 하면 천천히 세계가 기울어졌고.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들. 볼을 두드리는 햇빛. 이상하리만큼 포근한 온도. 어깨에 둘린 푹신한 이불을 감각하며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거리자 깨끗해진 시야 안으로 코가의 찌푸린 얼굴이 들어왔다. 침대 바깥쪽에 누운 코가는 안쪽에 누운 아사쿠라와 닿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짱까지 끼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 코가의 눈꺼풀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는 아침 햇살. 조심스레 몸을 움직인 아사쿠라는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어 코가의 눈꺼풀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도톰한 살갗 아래로 쌍꺼풀 아래 감춰져 있던, 속눈썹 바로 위의 매끈하고 붉은 살결까지. 검지가 닿으려는 순간 의식의 수면 위로 밀려오는 다정하고 슬픈 목소리. 죠. 마지막으로 안아 주는 거야. 보고 싶을 거야. 어깨를 끌어안는 따뜻한 손길.

헤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사쿠라 상은 코가의 아버지로부터 신랑의 어머니로서 결혼식에 참석해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고민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유다이 군이 죠를 끔찍이도 챙겼던 건 사실이잖니. 일요일 아침 식사 내내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빵 부스러기 한 조각도 삼키지 못한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하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막내아들의 결혼을 자기의 유일한 실패로 남기고 싶지는 않대. 갑자기 어디서 되도 않는 여자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는데 말려지지도 않는다고, 제발 와서 자리라도 지켜 달래. 안 해 준 게 없고 못 해 준 거 없이 키웠는데 별 볼 일 없는 여자랑 어머니도 없이 결혼시키느니 차라리 앉아라도 있어 달라는데. 애는 불쌍하지. 걔는 그냥 살려고 그러는 거겠지. 근데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는 걸까?

비밀이 새어 나오는 방문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서 있던 아사쿠라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갑자기 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가슴이 조여들고 깨질 듯 욱신거려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두꺼운 이불마저 투과하고 마는 햇빛을 느끼고는 눈까지 질끈 감은 채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늦은 오후였다. 이불을 걷고 나와 침대 귀퉁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코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족을 찾으셨나요.] 충동적으로 적어 보낸 문장을 읽고 읽고 또 읽다가 휴대폰을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공원을 달렸다. 사람들과 섞여 농구를 했고, 다시 큰길을 달렸고, 학교에 갔고, 수업을 듣고, 부 활동을 하고, 학원을, 다시 학교를, 집에서 어머니와 식사를, 수변 공원을 뛰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메시지를 확인하진 않았다. 메시지의 수신 상태가 바뀐 것은 코가의 결혼식 날. 아침 일찍 준비를 위해 메이크업 샵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온 방에서 아사쿠라는 드디어 코가의 메시지를 읽었다. 결혼 소식을 들었던 날. 아사쿠라가 메시지를 보내고 약 열 시간 후에 도착했던 문자.

아사쿠라.
미안해.
우리 좋은 선택을 하자.

/

오전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해가 안 보여, 삼촌! 외치며 들어오는 유이를 안아 주며 현관을 바라보면 뒤늦게 집 안으로 들어서는 코가의 뒤로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엄청 어두워. 아침 같지가 않아. 그래서 그런지 더 피곤하네. 기다랗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한 코가는 자연스레 아사쿠라의 작업실로 들어가 코트를 걸어두고 나왔다. 그러게요. 옷은 단단히 입었나요? 허리에 매달린 유이를 내려다보며 물으면 유이는 쫑알쫑알 설명을 시작했다. 응! 근데 유이는 핑크색 운동화를 신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비 오는 날엔 신으면 안 된다고, 근데 사실 이 바지에는 역시 핑크색 운동화가 맞는데, 그치 삼촌!

나란히 앉은 코가 부녀와 함께 과일 샌드위치로 아침 식사를 했다. 유이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검지로 슥 닦아낸 코가가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가 꺼냈다. 유우 짱. 삼촌 오늘부터 그림책 준비한대. 이제부터는 자고 간다고 떼쓰면 안 돼? 코가가 나름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지만 유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림책? 유이도 볼 수 있어? 어떤 내용인데? 오렌지 주스가 든 컵을 들고 종알거리는 유이의 반짝반짝한 입술을 바라보던 아사쿠라가 손을 뻗어 유이의 입술 밑을 살짝 쓸었다. 휴지에 손가락을 살짝 닦아낸 아사쿠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시했던 그림들로 원화집 준비하는 거예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래도 첫 출판 아냐?”
“그래도 많이 바빠지는 건 아니니까요. 괜찮아요.”

피곤할 텐데. 무리라면 언제든지 말해. 시터님 알아볼게. 코가는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면서도 눈썹은 힘주어 찌푸리고 있는 게 왠지 웃기고 기분이 좋아서. 흐흐흐 웃음을 흘린 아사쿠라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유이, 생크림만 먹지 마, 과일도 다 먹어야 돼. 빵 끝은 왜 남기는 거야? 이렇게 해 놓으면 누가 먹어! 외치는 아빠를 두고 식탁 의자에서 뛰어내려 발코니를 향해 도도도 도망가는 아이의 머리칼이 나풀나풀. 삼촌! 새가 또 왔어! 외치는 여린 목소리가 새록새록.

며칠 전 새 싱글을 발매한 사츠키 상의 스타일을 따라 머리를 묶는 동안 코가가 먼저 출근하고. 헬멧 안 쓰고 싶어어. 머리 망가지잖아. 싫어! 울먹거리는 유이를 달래고 또 달래 자전거에 태우고 페달을 밟았다. 이미 새카만 하늘. 묵직한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는 동안엔 피부가 촉촉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원할 때는 무조건 비가 올 것 같은데. 그것도 쏟아질 것 같은데. 우산을 쓰고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것 빼고는 딱히 방법이 없어서 걱정이 됐다. 거리가 가까워 따로 운행하는 버스도 없었고, 통학 버스를 태우기에는 고작 5분 거리를, 몇십 분 걸려 돌아오는 게 좀 그래서. 그냥. 빨리 데려와서 함께 노는 게 좋으니까. 유치원 입구에서 유이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돌아서자마자 코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다이 상. 혹시 댁에 유우 짱의 우비라든지 하는 것이 있을까요? 하원할 때는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습니다.]

하늘은 순식간에 젖어 드는 것 같았다. 페달을 밟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들어가서 집을 좀 정리하고, 낮잠을 좀 잔 다음 유다이 상 댁에 다녀와서 바로 유우 짱을 데리러 가야겠다. 만약 우비가 없다고 하면 사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아이용 우비는 어디서 구매할 수 있지? 고민하며 달리는 사이 길바닥에 동그란 자국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굽은 골목길엔 슬그머니 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하고. 조금 이르게 떨어진 낙엽 위로 튀기는 물방울.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공기. 아사쿠라는 다급히 뛰어나와 스쿠터에 방수포를 씌우는 근처 식료품점의 사장님과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며 거리를 미끄러져 나갔다. 가는 빗줄기에 옷이 서서히 젖어 들고 있었지만 유우 짱을 뒤에 태우고 달릴 때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기분 좋다. 하원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멀리까지 가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분명 있었으나 일단은 마음이 급했다. 예쁘고 귀한 유우 짱에게 비를 맞혀서는 안 되니까. 우비랑 우산 정도면 걸어오는 덴 문제 없겠지. 몇 번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려 도착한 맨션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머리를 털었다. 졸리다. 어제도 많이는 못 잤는데. 상쾌한 공기에도 밀려드는 잠을 애써 무시하고 있으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유다이 상. 고멘, 죠. 우비는 없는데.

[운전은 무리? 집에 차 키 있지 않아?]

알고 계셨구나. 생각하자마자 손이 굳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액정 위의 글씨들이 어지럽게 번졌다. 아사쿠라는 멋대로 굵어진 글씨 몇 개를 멍하니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액정을 슥슥 문질러 닦고 주머니에 넣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자물쇠를 채운 뒤엔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난간을 두드리는 경쾌한 빗방울 소리. 이미 반쯤은 젖어 버린 복도.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도어 록을 해제하면 아침의 즐거움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눈에 들어오고. 코가가 가볍게 신기 위해 가져다 둔 슬리퍼. 여벌로 챙겨 둔 유우 짱의 구두. 신발 몇 켤레가 추가 된 현관 옆 선반 위에 차 키가 놓여 있었다. 면허를 따고, 어머니의 권유에 구입한 뒤 단 한 번도 몰지 않은. 탁송을 받은 날엔 주차마저 헤매는 바람에 이웃 주민이 나서서 주차를 도와주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운행한 적 없지. 자신이 없었다기 보다는 두려웠다. 혼자 차를 몰고 도로로 나서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장면들.

백미러. 머리 위의 천장.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아스팔트. 기울어진 아버지의 고개와 달랑거리며 흔들리고 있던 조그만 가족사진. 피가 쏠리는 느낌과 함께 시야는 재구성된다. 백미러 아래의 천장. 흐트러진 아버지의 팔과 깨어진 앞유리를 투과하며 부옇게 번지는 빛. 아빠. 아빠. 외치며 다가가려 하지만 벨트로 단단히 묶인 카 시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머리가 점차 천장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고. 아빠. 아빠. 일어나세요. 아빠. 일어나세요, 제발. 외치는 순간 빨간 줄에 매인 가족사진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백미러로 달려오는 차가 비친다. 속력을 줄이지 못한다.

아버지는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칼치기 차량으로 인한 1차 전복 사고 때문인지, 뒤이어 일어난 2차 충돌 사고 때문인지 명확하게 가릴 수는 없었으나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숨진 상태였다. 뒷좌석에 실린 카 시트 벨트에 꽉 붙들려 있던 어린 아사쿠라는 우측 측두부에 경미한 외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살아남았다. 사고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어머니는 바빠졌다. 홀로 남은 아사쿠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몽과 현실을 견뎠다. 아이 생일이었대. 휴가까지 내고 디즈니 랜드에 가는 길이었대.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빈소를 찾은 사람들이 어머니의 어깨를 쥐고 흔들다 결국은 서로의 품 안으로 쓰러져 울부짖는 모습에 머리를 지배당했다. 잠으로 도피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굴레에 갇힌 듯한 느낌. 벗어날 수 있을까. 버릴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오가는 마음에 따라 정신이 부서졌다. 뱉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꺼내야 해. 비워야 해.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림을 그렸다. 빈 스케치북에 쏟아내듯 쉬지 않고 토해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만큼 손을 움직였다. 방에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었다. 스케치북에 엎드려 잠들었다 깨면 해가 지거나 떴고. 시커멓게 물든 왼손 손날의 물은 닦아도 닦아도 빠지지 않았다. 방문을 열었던 어머니는 언제까지고 멈추어 있을 수는 없지 않겠냐며 회복을 재촉했다. 슬픔을 누리는 것에도 기한이 있는 법이라고. 비극에 삼켜지는 것은 가끔 추하고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며. 냉정한 눈을 한 어머니께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내리깔면 길게 한숨을 쉰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문밖으로. 집 밖으로.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요원한 곳으로. 종이로 이뤄진 풍랑에 잠겨 죽을 것만 같았던 순간에도 바깥은 고요했다. 적막. 도래하지 않는 귀가를 소원하는 날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한 사람. 언제나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주셨던. 유다이 상.

맑고 밝았다. 그의 곁을 스친 시련들이 그를 전혀 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부서지지 않을 수 있구나. 유실되지 않을 수 있구나.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마음마저, 지킬 수가 있구나. 깨닫고 나니 닮고 싶었다. 닮고자 하니 앞을 보게 됐다. 방 안에 슬픔을 숨겨 두고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고. 함께 있을 땐 불행이라는 것은 고작 주사위 놀이 같은 확률 싸움에 불과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개인의 실수나 실패와는 무관한 불운. 그저 흐름에 가까운 것. 휩쓸린 것과 달리 빠져나올 때는 모든 게 쉬워 보였다.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농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그야 전부 유다이 상과 함께였으니까. 언제나 그를 생각했으니까.

운전 면허에 도전했던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유다이 상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래. 물론 좌절했었지. 원인 모를 배신감과 대상 없는 원망에 괴로웠지만 그것 역시 이 세계를 관통하는 질문에 비하면 사사로웠다. 이번엔 혼자서 해내고 싶어. 극복하고 싶어. 당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어. 그를 이겨 보고도 싶단 마음과 함께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학원을 등록했고 몇 달 만에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과정은 비록. 좀 험난했지만. 고군분투하는 아사쿠라를 곁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는 아사쿠라가 면허증을 획득하자마자 차부터 계약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다니. 이제야 내가 원하던 아들이 되어 가는구나. 내가 좋아했던 죠의 얼굴이 되었어. 칭찬하는 어머니께 억지로 웃어 보였으나 도로에 나서 백미러를 보는 것이 여전히 두려웠다. 그리고 또 다시 구부러진 날들. 좁은 거리를 걷거나 달리고 페달을 밟으며. 비가 내리면 맞고 눈이 오면 미끄러지고 해가 쬘 때는 손바닥으로 엉성한 그늘을 만들어 가며. 그렇게 차가 방치된 지 벌써 2년째. 주차장 구석에 선 렉서스 세단을, 내가 몰 수가 있을까. …아마 배터리도 나갔을 것 같은데.

[운전이 서툴어서요. 지금 가서 우비를 사 오겠습니다.]
[오케. 이번 주 급여에서 조금 더 부칠게.]
[알겠습니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의 강렬한 소음.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집 안을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몸을 둥그렇게 말아 웅크리고 있으면 외부의 소음이 점차 사라지며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자 까맣게 물드는 시야 위로 선반 위에 올려둔 차 키가 동동 떠다녔다. 안 돼. 아직 자신 없어. 게다가 빗길이잖아. 지루한 합리화와 함께 수마에 잡아 먹혔고.

하원 두 시간 전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오전보다는 줄어든 빗줄기에 주행이 수월했다. 눈앞으로 튀기는 물방울의 서늘하고 시원한 감각. 공기도 조금쯤 깨끗해진 것 같고. 개운한 기분으로 달려 쇼핑몰에 도착한 아사쿠라는 자전거를 세우고 우비 겉면이 안쪽으로 가께끔 조심스럽게 접어 팔에 걸쳤다. 아동복 매장이 위치해 있는 7층에 도착해서는 브랜드 매장을 한 바퀴 쭉 둘러보며 우비 판매 여부와 디자인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색은 핑크가 좋겠지만. 또 너무 유치하고 튀는 건 좀 그렇고. 혹시 모르니 스카치가 포함된 디자인으로. 꼼꼼히 체크한 아사쿠라는 매장 한 군데에 들어가 우비를 결제하고, 체크무늬가 들어간 베레모와 코트를 한 번 더 결제했다. 나중에 구매한 것은. 단순히 귀여워서. 곧 겨울이기도 하고. 삼촌으로서. 이 정도 선물쯤은 괜찮겠지. 지하 마트에 들러 아기 우산과 비닐로 된 일회용 우비를 구매한 아사쿠라는 유이의 옷이 든 쇼핑백을 우비로 둘둘 둘러 자전거에 싣고 다시 유치원으로 향했다. 늦지 않겠어. 이 정도로 내리는 비는 맞고 놀아도 좋을지도. 부지런히 밟아 나가다 보면 가끔 빗길에 바퀴가 밀려 자전거가 휘청이기도 했다. 역시 걸어야 해. 결심한 뒤엔 조금 더 속력을 냈다.

“삼촌!”

유치원 입구엔 가장 먼저 도착했다. 우비를 뒤집어쓴 아사쿠라는 우산을 쓰고 뒤이어 도착하는 학부모나 할머니, 시터님들과 눈짓으로 인사를 하며 기다림을 견뎠다. 언제 나오려나. 미리 유우 짱의 우산과 우비만 꺼내 둘까. 짐을 뒤적거리는 와중에 등 뒤에서 유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빗방울도 뚫을 기세였다.

유우 짱. 부르며 출입구로 뛰어가면 유이가 폴짝 뛰어 아사쿠라의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유우. 삼촌 옷이 다 젖었는데요. 말려도 기분이 좋아진 유이는 아사쿠라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삼촌. 비 오는데 자전거 타고 갈 수 있어? 발을 달랑거리면서 묻는 유이를 들고 일단 자전거 근처로 온 아사쿠라가 얼른 아기 우산을 펴 유이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걸어갈 거예요. 우산은 들 수 있나요?”
“당연하지!”

신나게 외치는 유이의 어깨에서 유치원 가방을 풀어낸 뒤엔 가방을 꼼꼼히 일회용 우비 안에 감춰 짐칸에 싣고. 아이용 우비를 꺼내 유이의 두 팔을 쏙쏙. 우와아. 삼촌. 이거 내 거야?! 신이 나서 묻는 유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엔 아사쿠라 자신의 우비도 점검했다. 가는 길에 놀이터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잠깐 물놀이를 하고 들어가면 좋겠지. 결정한 뒤엔 자전거를 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안녕! 내일 봐! 조심히 가! 여러 번 멈추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어린이들과 유이를 기다리며. 응? 아빠 아니야, 우리 삼촌이야! 엄청 멋있지! 아니야, 아빠가 더 커! 으스대는 유이가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고 생각하며.

두 블록쯤을 걸어 나왔을 땐 드디어 유이가 빗방울에 집중하며 걷기 시작했다. 삼촌! 벽이 젖었어. 화단에 물이 엄청 많아졌네. 꽃이 잠길 거 같은데? 장화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종알거리는 말에 아사쿠라는 빠지지 않고 대꾸했다.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쪼그려 앉았다가, 고개를 들어 우산 위로 튀기는 빗방울을 바라봤다가, 스카치가 들어간 우비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는 유이를 따라 걷다 보면 금세 놀이터였다. 삼촌! 나 웅덩이 밟아도 돼? 묻는 유이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총알같이 뛰어나간 유이가 놀이터 바닥의 물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었다. 아사쿠라도 놀이터 한 편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유이가 밟고 선 웅덩이의 가장자리를 밟았다. 찰박, 소리와 함께 튀기는 물방울에 바짓단이 젖는 게 느껴졌고. 아. 시원해. 얄팍한 해방감에 잠깐 멈춰 있으면 유이가 발을 세게 굴러 아사쿠라 쪽으로 물을 튀겼다.

“선전 포고인가요.”
“유이는 어린이니까 적당히 해.”

아빠는 꼭 나를 상대로도 안 봐주고 그러더라. 투덜거리며 입술을 비죽 내민 유이는 이번엔 다리를 크게 휘두르며 앞을 향해 물을 차냈다. 촤아악.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물이 아사쿠라의 우비 앞자락으로 쏟아졌다. 그러는 유우 짱도. 삼촌을 상대로 너무 심한 건 아닌지. 얼이 빠져 서 있다가 아사쿠라도 발을 움직였다. 쿵. 가볍게 한 번 웅덩이를 밟았을 뿐인데도 아이의 작은 발이 만든 것에 비해 훨씬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고. 아, 진짜! 삼촌! 히도이! 세게 하지 말랬잖아! 앞머리가 살짝 젖은 유이가 우산을 던지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탕, 탕. 바닥을 몇 번 구른 우산이 펼쳐진 채 자전거 옆에 멈춰 섰다.

한참을 놀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엔 둘 다 몸이 무거웠다. 혼자서 샤워할 수 있어요? 걱정스레 물으면 다 젖은 머리 위로 우산을 쓴 유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응. 당연하지. 나 언니잖아. 축축이 젖은 옷과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서는 유이를 먼저 욕실로 들여보냈다. 이미 아이 샴푸와 바디 워시 같은 건 있으니까. 정말 잘할 수 있겠지. 비를 맞았으니까 따뜻한 물로 꼼꼼히 닦아야 해요. 몇 번이고 당부한 아사쿠라는 싱크대에서 간단하게 세안을 한 뒤 수건으로 대충 몸과 머리를 말리고 저녁 준비를 했다. 추웠을 테니까, 국물 있는 음식을 먹을까. 비가 오는 날엔 역시 우동인가. 찬장을 뒤져 적당한 레토르트 우동을 꺼내는데 욕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음음. 신나는 콧소리. 거기에 맞춰 물을 올렸다.

“진짜 맛있어!”
“아무래도 파는 거니까….”
“아빠한테도 이거 사자고 말해야겠어!”
“응, 유다이 상한테 브랜드를 알려 줄게요.”

후우 후우. 귀여운 젓가락질로 집어 든 면발을 불어 식히는 입술이 귀여웠다. 오늘, 나름 괜찮은 삼촌이었던 것 같은데? 혼자서 조금 뿌듯해하며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데 맞은편에서 유이가 눈을 질끈 감더니 외쳤다.

“역시 생일이 최고야!”
“…생일? 유우 짱 오늘 생일이에요?”
“응!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유치원에서 친구들한테도 축하받고, 집에 오는 길에 삼촌이랑 신나게 놀고. 우동도 진짜 맛있어. 우비도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터뜨리듯 속마음을 말하는 유이를 바라보다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11월 11일. 오늘이 유우 짱 생일이라고? 그런데 왜 알려 주지 않은 거야. 어쩌다 선물을 준비하긴 했지만.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면 유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고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빠는 바쁘니까. 원래 당일엔 잘 못 챙겨 줘서 주말에 놀이공원에 가고 그래. 아마 이번 주말에 코스모 월드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중얼거린 유이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하염없이 면발을 휘젓는 젓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사쿠라가 물었다.

“케이크는요?”
“그것도 아마 주말에?”

아빠는 디저트를 좋아하니까. 아마 맛있는 가게를 알아 두었을 거야. 툭 뱉고는 다시 면발을 집어 올린 유이가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다란 면발이 조금 삼켜졌다가, 금세 끊어지고. 오물오물. 열심히 움직이는 입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이가 못 박듯 다시 한번 말했다. 아무튼 신나.

코가는 예상보다 더 늦게 퇴근했다. 조심스럽게 작업실 방문을 밀어 연 코가는 피로한 얼굴로 사과했다. 죠. 고멘. 너무 늦었지. 이미 한참 전에 유이를 침대에 눕혀 두고 헤드폰을 쓰고 작업을 하고 있던 아사쿠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컨버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얇은 사다리꼴로 들이치고 있던 바깥의 빛이 점점 사그라들고. 작업실은 다시 밀폐된 공간. 미약한 조명 아래 작업물을 정리하던 아사쿠라는 등을 돌려 바깥을 향해 걸었다.

“주무시고 가세요.”

코가는 입고 온 차림 그대로 침실 방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아사쿠라가 낮게 속삭이면 코가는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냐. 가야지. 이렇게 늦을 일은 아니었는데. 쓸어 넘기는 머리카락에 맺힌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반짝반짝거렸고. 피곤하시잖아요. 운전하면 위험해요. 끝내 코가를 말린 아사쿠라는 욕실에 코가를 밀어 넣고 문밖에 섰다. 긴 한숨. 목이나 얼굴을 쓰다듬는지 계속되어 이어지는 작은 마찰음. 숨을 돌린 코가가 옷을 벗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지면 아사쿠라는 욕실 문 가까이로 다가가 말했다.

“저는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 어, 알았어. 간단한 답변을 듣고는 우비만 챙겨 집을 나섰다. 밤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진 탓에 몸이 좀 으슬거렸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오래 걸을 거니까. 걷다 보면 체온도 올라가겠지. 일부러 골목을 돌고 돌아, 도보로 닿아 본 곳 중 가장 먼 곳에 위치한 편의점에 들어가서는 딸기가 올라간 초코 컵케익과 생크림 조각 케이크, 몽블랑, 크림이 가득 찬 롤케이크 같은 걸 잔뜩 결제했다. 속도를 늦추고 늦춰, 천천한 걸음으로, 안개에 가까운 이슬비를 온 얼굴로 헤치며 걸어온 뒤엔 현관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잠드셨으려나. 들어가도 되겠지. 도어 록을 해제하고 들어서면 오전의 어느 순간처럼, 캄캄한 집 안. 아사쿠라는 냉장고에 사 온 디저트들을 차곡차곡 정리한 후 소파에 누워 담요를 목 끝까지 올려 덮었다.

그날 밤에. 누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11월 11일, 유이의 생일이 지나가는 그 새벽에. 비가 얼마나 내렸으려나. 기상 알람을 듣고 깨어난 코가는 거실로 나왔다가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떨어져 끙끙 앓고 있는 아사쿠라를 발견했다. 어이, 죠. 뭐야. 자다가 떨어진 거야? 웃으며 다가갔는데 아사쿠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표정이. 왜 이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그러고 보니 땀도 많이 흘린 것 같고. 열이 나는 건가? 가까이로 다가가 이마를 짚으니 이마가 터질 듯 뜨거웠다. 젖은 머리칼이 눈썹에 닿아 구불대고 있었고. 숨소리도, 색색. 어이. 죠. 왜 이래. 일어나 봐. 죠. 아픈 거야? 죠, 죠! 무릎에 얼굴을 얹어 놓고 볼을 두드리며 깨워도 소용이 없길래 코가는 아예 몸을 일으켜 키친으로 향했다. 물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은데. 탈수 아냐? 병원에 데려다줘야 하나. 긴장하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곳엔 가득찬. 어떤 의미들.

어젯밤, 자기 전에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있었나. 아니 없었다. 오늘 퇴근할 때는 과일이라도 좀 사다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걸 분명히 기억해. 그러나 지금 마주한 풍경은, 마치 마법처럼. 환영처럼.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그럴싸한 스위츠란 스위츠가 전부 아사쿠라의 냉장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코가는 냉장고 문을 잡고 서서 가만히 숨을 내쉬다가, 결국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오마에사. 이런 건 내 몫이란 말이야.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왜냐면 나는. 도와 줄 가족이 없으니까. 유이랑 나 단 둘뿐이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받치고 있으면 냉장고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코가는 가슴을 부풀렸다 코로 크게 숨을 뱉으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어차피 곧 주말이고. 올해 며칠 쓰지도 못한 휴가는 아직 넘쳐나고.

“죠. 소파로 혼자 올라갈 수 있어?”

병간호나 해야겠네. 코가는 작업실로 가 아사쿠라의 앞치마를 꺼내 입고 허리끈을 야무지게 졸라맸다. 민소매라 걷어붙일 것도 없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뒤엔 화장실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찬물에 적셨다. …유다이 상. 죽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뭐 어쩌라고. 불러서 어쩌게. 그것보다 왜 아직도 유다이 상 따위로 불리고 있는 거야, 나.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짜낸 뒤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사쿠라에게로 다가가 이마에 물수건을 척 올리고 담요를 끌어 올려 줬다.

“시터가 아프면 돼?”
“…죄송합니다.”
“오늘 급여는 까도 되지?”
“네에에….”

낮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말하지 마. 네. 말하지 말라니까. 네에… 따위의 대화를 나누며. 아사쿠라의 머리 옆에 털썩 주저앉은 코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오전엔 따스하게 빛이 드는 집. 발코니 창을 통과하며 조각난 빛이 왜인지 모르게 너울거리는 것 같단 감상과 함께. 죽? 아니면 스프? 코가는 담요와 머리칼 사이로 겨우 드러난 아사쿠라의 볼이나 몇 번 건드렸다.

/

가을빛은 깊어지다 못해 부서져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겨울의 한가운데. 둘둘 둘러맨 머플러와 누빔이 덧대어진 코트. 손모아장갑을 낀 작은 손이 보조 의자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아사쿠라의 허리춤을 간질였다가 했다. 어느 하원 길엔 아사쿠라의 등을 톡톡 두드린 유이가 삼촌, 나 걸어서 가면 안 돼? 물었다. 응. 내릴까요. 보조 의자에서 내린 뒤 헬멧을 벗겨 주자 유이는 근처에 쌓여 있던 낙엽 더미로 와다다 달려갔다. 그리고는 풀썩. 말릴 틈도 없이 낙엽 더미에 뛰어든 유이의 옷과 머리칼에 부스러진 낙엽 조각들이 달라붙었다. 삼촌! 생각보다 폭신폭신해! 외치며 허우적거리는 유이를 바라보다 아사쿠라도 신발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낙엽을 밟았다. 유다이 군과 함께 목격한 가을은 이미 등을 보이며 떠난 지 오래. 어제는 아주 잠깐이긴 해도 첫눈이 내렸다. 비록 눈은 유우 짱을 등원시키고 오는 길에 혼자서 보았지만.

코가는 출장을 떠나 있었다.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됐다며 설레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12월 중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까운 상하이까지. 3박 4일의 짐을 챙기는 뒷모습이 들떠 보여서 아사쿠라는 부루퉁해진 유이를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해외여행은 종종 다니시지 않으셨어요? 응, 그랬지, 그치만 이건 내 힘으로 가는 거잖아. 심지어 업무. 샤워를 하면서도 내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 코가는 잠들기 전 작업 중인 아사쿠라를 찾아와 다시 한번 진지한 얼굴로 부탁했다. 유이, 잘 챙겨 줘. 떨어진 적이 없어서 나 없으면 좀 불안해할지도 몰라. 죠랑은 워낙 잘 지내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염려하는 눈빛이 무거워 아사쿠라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세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다짐인지 추측인지 모를 말과 함께.

코가의 말대로 유이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매일 하는 등하원 길인데도 코너를 돌 때 허리를 꽉 잡아 오거나, 자전거에 오르고 내릴 때 안아 달라고 말하는 걸 보면 조금쯤 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저녁으로 좋아하는 돈가츠를 튀겨 가츠동을 만들어 주었을 때도 잘 먹겠습니다, 조그맣게 인사를 하고는 밥그릇에 숟가락을 푹 꽂아 넣는 모습이. 왠지 시무룩해 보인다고나 할까. 물론. 다 먹어주긴 했지만. 하원할 때면 종종 조르곤 했었는데, 밖에서 놀자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아사쿠라를 꼭 붙들고 하원한 유이는 곧장 아사쿠라의 집으로 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날씨가 추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마음이 쓰였다. 매일 영상 통화를 시도했지만 감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둘이서 나란히 소파에 앉아 숙소에 누운 코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바이바이, 오야스미, 인사를 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면 찾아오는 적막이 두려웠다. 집 안도 왠지, 좀 차가운 것 같고 말이야. 아이가 있으니 역시 고타츠를 들여도 좋을까나. 고심하며 히터 온도를 올리고 유이를 침대에 눕혔다. 오늘도 혼자 잘 잘 수 있죠? 아빠 금방 오실 거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야기하면 다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고. 침대에 누운 유이를 토닥여 재운 뒤엔 코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우 짱이 조금 슬퍼해요. 선물 꼭 사오세요.]
[이미 엄청 샀어. 죠 것도 골랐어. 조금만 기다려 줘.]

코가가 귀국하는 날 오후에야 유이의 기분이 좋아졌다. 하원을 하고 돌아와서는 내내 김이 서린 창문에 바싹 붙어 지나갈 리 없는 비행기를 찾았다. 아빠 언제 오지? 아빠 지금 내렸나? 아직 비행기인가? 아빠가 유이 선물로 뭐 사 왔을까? 이제쯤 공항에 내렸으려나? 아사쿠라도 유리창에 손가락 자국을 남기며 종알거리는 유이의 머리칼을 고쳐 묶으며 창밖을 기웃거렸다. 글쎄요. 내리면 바로 전화하시지 않을까요? 차분한 손길로 머리를 매만져도 유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창가와 아사쿠라의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아빠가 오면 함께 저녁을 먹겠다는 유이를 간신히 구슬려 어머니가 만들어다 주신 쇼가야키와 밥을 데워 먹었다. 별일 없겠지. 생각하던 아사쿠라도 약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유다이 군이 어제 보내 주신 항공편 정보에 따르면 착륙은 여섯 시 반. 지연이나 연착이 되지 않았다면 수속을 마치고도 한참 남을 시간이었다. 이제는 정말, 전화가 올 때도 됐는데. 초조해하고 있으면 불안을 눈치챈 유이가 아사쿠라의 허벅지를 안고 울먹이며 물었다.

“아직도야?”
“으음… 이제 내리실 때는 지난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왜 전화가 안 와? 아빠가 안 왔어?”
“글쎄요… 내리자마자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유이를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나 봐, 곧 전화하실 거예요, 하는 말로 달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사쿠라 스스로도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가. 정말 연착이 되고 있다든지. 휴대폰을 잃어버리셨다든지. 아니면. 이런저런 상상이 머리를 스쳐갔다.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단, 먼저 걸어 보는 게. 꺼져 있다면 연착일 확률이 높아진다. 확인하고 나면 스스로도 좀 더 확신을 가지고 유이를 달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결심한 아사쿠라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드디어 코가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갔다.

“받았어? 아빠 받았어?”

그런데 연결되지 않았다.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으며 휴대폰을 들고 서 있으면 유이는 소파로 뛰어가 아사쿠라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직 안 받아? 왜 안 받지? 아빠가 안 오나? 와르르 쏟아낸 유이는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을 바라보다 아사쿠라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또 다시 신호가 가고. 귓바퀴와 휴대폰 틈을 뚫고 새어 나간 똑같은 소리가 대여섯 번 더 거실을 울렸을 때쯤. 송신음이 뚝 끊기며 코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사쿠라는 얼른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스피커 폰 버튼을 눌렀다.

-어, 죠.
“유다이 군. 도착하셨나요?”
-응. 근데 나 지금 병원이야. 전화를 받기가 조금 곤란해.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기다려 줘.

엣…? 에…? 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전화는 뚝 끊겼다. 본능적으로 유이가 앉아 있는 소파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유우 짱.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마주하면 유이는 벌써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사쿠라는 유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이의 어깨를 살살 다독이기 시작했다. 유우 짱. 괜찮아요. 별일 아닐 거예요. 말을 꺼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병원? 병원에 왜 갔는데?”
“아까 목소리 들었죠? 별일 아닐 거예요. 너무 걱정 마요.”
“큰일이 있으니까 병원을 간 거 아니야? 아빠가 아파?”
“아닌 것 같았는데… 금방 전화 주신다 했으니 기다려 보면 어떨까요.”
“아빠가 아프면 어떡해? 그럼 유이는 어떡해?”

으아앙. 와아아앙.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한층 더 설움이 북받친 듯했다. 게다가 병원이라니. 전화를 받기가 힘들다니. 자세한 설명도 없이 뚝 끊겨져 남겨진 유이가 느낄 불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휴지를 잔뜩 뜯어 눈물을 닦아 주며 달랬지만 아이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빠는 어디 있어? 아빠 괜찮은 거야? 왜 병원에 간 거야? 우느라 부정확한 발음으로도 계속해서 묻던 유이의 입에서 결국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나왔다. 아빠한테 갈래.

“나 아빠한테 갈래. 데려다 줘.”
“유우 짱, 지금은 유다이 군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고…”
“갈래! 아빠한테 갈래! 절대로 아빠한테 갈래!”

또 한 번 와아아앙. 이미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다시 한번 찌그러지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입이 네모가 됐어. 귀엽다. 유다이 군도 울 땐 이런 얼굴일까. 상황을 침범한 잡념에 놀란 것도 잠시. 벌써 한참 울고 있잖아. 이제는 유이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 괜찮으신 건지, 나도 빨리 알고 싶으니까. 별일 아니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까. 정말 별 수 없으니까. 방법은 하나였다. 택시를 잡고 모르는 곳으로 향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은. 어떻게 출발부터 하면. 아사쿠라는 휴대폰으로 코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어느 병원에 계세요?]

당장 답이 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휴대폰을 그대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작업실로 들어가 옷을 챙겼다. 아직 그대로 외출복을 입고 있던 유이에게도 외투를 입혔다. 패딩에 쏙쏙 팔을 끼워 넣는 유이의 울음 끝이 점점 잦아들었고. 삼촌. 우리 아빠한테 가? 머플러에 파묻힌 입술이 물었을 때 아사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아빠한테 가요.

지갑을 챙기고. 차 키를 챙기고. 또 챙겨야 할 게 있나. 유우 짱, 가져갈 거 있나요? 정신이 없어 아이에게까지 물으면 유이는 파드득 고개를 저으며 아니! 빨리 가자! 외쳤다. 응. 빨리 가요. 빨리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사쿠라는 코트 소매자락에 살짝 감춰진 유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 시동이 걸려야 하는데. 언제 마지막으로 운전석에 앉아 봤더라. 가끔 내려와 차를 살피던 일도 유이를 돌보기 시작하고서는 소홀해졌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제발 걸려라. 소원하듯 빌며 차에 다가서서 손잡이를 잡으면. 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행히도 차 문이 열렸다.

첫 운전이었다. 그러니까, 조수석에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로, 아니 뒷좌석에 아이를 싣고, 내가 운전을. 이거 괜찮은 거야? 정말로 괜찮은 거야? 면허 자체는 수월하게 획득했지만, 그때는 운전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별로 없었다. 그냥. 퀘스트를 깨고 있는 기분이었지. 미션을 하나하나 돌파하는 기분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문제들이었으니까. 실제 운전은 다르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딜 가든 초행길이야. 변수가 많겠지.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게, 침착하게. 그냥 서행하자. 답답해진 뒤차가 쾅 들이박아 버리는 게 아닌 이상 사고날 일은 없게 최대한 천천히 가자.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며 트렁크에서 혹시나 몰라 사 둔 휴대용 카 시트를 꺼내 설치하는 동안 휴대폰을 쥔 유이는 계속 문자 수신 상황을 보고했다. 삼촌, 아직 안 왔어! 삼촌, 아직도 전화가 안 와. 삼촌, 아빠가 왜 답장이 없지? 삼촌, 삼촌!

낑낑거린 것 치곤 꽤 수월하게 카 시트를 설치하고. 아이를 태우고.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뒷문을 닫은 아사쿠라는 차를 반 바퀴 빙 돌아 운전석 앞에 섰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유우 짱이 있으니까, 잘해야만 한다. 운전석 문을 연 아사쿠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건 뒤 뒷좌석을 흘금 바라보면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울고 있던 유이는 어느새 살짝 들뜬 얼굴로 아사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험을 기대하는 듯한 반짝이는 눈. 아니. 눈물 때문인가.

“유우 짱. 삼촌이 운전이 조금 무섭거든요. 괜찮을까요.”
“응! 유우 아기 때는 아빠도 운전 무섭다고 했었어!”
“무사히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응! 아빠도 길 가다가 인도에 바퀴 부딪혀서 끼기긱 소리 난 적 있는데 그냥 갔어!”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응! 떨지 마, 죠 군! 화이토!”

백미러를 통해 전해지는 마지막 말은 꼭. 코가 상의 응원 같아서.

기어를 바꾸고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스르륵 밀려나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려 주차선 바깥으로 벗어났다. 요시. 된다. 아무튼 돼. 이제부터 더 침착하게. 살살 가속 페달을 밟아 가며 주차장 바깥으로 나오면 사방이 캄캄했다. 그러니까. 초보 운전에, 사실상 첫 운전이나 다름없는데 야간 운전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태우고. 아아. 아사쿠라. 너 생각보다 대범하다….

“삼촌! 길에서 우리 차가 가장 느리게 가는 거 같아!”
“삼촌이 초보 운전이라 그래요.”
“저기 지나가는 사람보다도 느린데?”
“사고 나면 안 되니까….”

슬금슬금 나아갔다. 어차피 아직 목적지가 없으니까. 나리타 근처의 병원에 계신 건지, 요코하마까지 오셔서 일이 생기신 건지 몰라 일단은 확률이 높은 나리타 근처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 핸들에 바짝 붙은 몸. 시야는 조금씩 좁아지고 긴장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거리를 점령한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 같은 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아사쿠라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 신호에 걸릴 때면 백미러로 슬쩍 유이를 쳐다봤다. 유이는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백미러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사쿠라와 눈을 맞췄다가 했다. 다행히 유이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구나. 그럼 이제 유다이 군에게서 연락만 오면 되는데. 빨간 신호를 바라보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뒷좌석에서 흥분한 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아빠 문자 왔나 봐!

센터페시아에 커다랗게 뜬 코가의 이름. 아사쿠라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짤막하게 적힌 메시지는 아사쿠라도 잘 알고 있는 요코하마 소재의 병원 이름이었다. 엣, 어쩌다가. 그럼 왜 연락이 안 되었던 거지. 걱정이 되는 한편 거리가 가까워 안도하기도 했다. 다행이야. 그럼 이제부터는 진짜진짜, 더 조심히.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 뒤엔 다시 한번 유이를 슬쩍 바라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한 번 신호에 애매하게 걸려 너무 일찍 멈춰 서는 바람에 살짝 눈치를 본 이후로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옆도 뒤도 볼 겨를이 없어 신호만 겨우 확인하며 서행했다. 아아. 큰일이야. 조심해야 하는데. 덜덜 떨며 차선을 바꾸고 겨우겨우 우회전 좌회전을 거듭해. 다행히 아무도 빵빵거리지는 않았지만 (혹시 너무 긴장한 탓에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병원 입구에 도착하면 주차라는 난관이 남아 있었다.

“유우 짱. 혹시 먼저 들어가서 데스크에 안내 방송을 부탁할 수 있겠어요?”

진입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차단기를 통과하기 위해 유도봉을 박아 놓은 구간의 각도가. 초보가 무사히 통과하기엔 너무 가파랐다. 아아. 일단 어떻게든 여기에 진입해서 입구에 유우 짱을 내려주고. 주차는 나 혼자. 어떻게든. 병원엔 보안 요원들도 있고 할 테니까. 천천히 숨을 고른 아사쿠라는 병원 입구의 주차 차단기 앞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핸들을 틀고. 서서히 풀며. 느릿느릿 차단기 앞에 서면 번호판이 찍혔고 곧 차단기는 올라갔다. 이제 남은 건 과하게 둥글어 보이는 회전 구간. 조심스럽게 핸들을 조향해 들어선 뒤엔 슬슬 브레이크를 밟았고 유도된 주차선에 무사히 안착했다. 기어를 바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뒤 차에서 내린 다음엔 재빨리 뛰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이미 벨트를 풀고 기다리고 있던 유이는 뒷문이 열리자마자 차 밖으로 뛰어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삼촌! 내가 아빠 찾아올게!”

손을 붙잡고 뛰어가 보안 요원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다시 차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씩씩하게 뛰어간 유이는 병원 입구에 서 있던 보안 요원 하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우리 아빠를 찾으러 왔어요! 코가 유다이!

조금 놀란 듯한 보안 요원은 아사쿠라의 얼굴을 힐끔 확인하더니 유이의 손을 잡고 안내 데스크쪽을 향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주차뿐인데. 아사쿠라는 차를 돌려 나오며 차분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괜찮아. 시험을 볼 때도 주차는 언제나 잘했었잖아. 실수만 안 하면 돼. 결연한 얼굴로 들어선 주차장은 이미 만차에 가까웠다. 안 돼. 제발 두 자리 이상 비어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기도에 가까운 바람과는 달리 남아 있는 자리는 거의 없었고. 가까스로 발견한 빈자리는 몸값이 꽤 비싼 차와 벽 사이의 딱 한 자리. 아아. 잠시 좌절했지만 시간이 없어 일단 핸들을 감아 진입을 시도했다. 사선 앞쪽을 향해 길게 돌려 뺐다가, 반대로 감아 넣으면서 후진. 들어가나. 들어간다. 사이드미러로 벽과 옆 차의 앞 범퍼 사이로 차의 후미가 쏙 진입하는 것을 확인한 아사쿠라는 이제 센터페시아에 뜬 후방 카메라를 보며 브레이크를 조절했다. 거의 다, 들어갔나. 더 넣어야 하나? 긴가민가하며 고민하다 브레이크를 밟으려는 순간 원내에 방송이 울려퍼졌다. 원내에 계시는 코가 유다이 사마. 코가 유다이 사마. 가족들이 안내 데스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히 안내 데스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드립니다. 원내에 계시는 코가 유다이 사마. 코가 유다이 사마. 가족들이….

“악.”

천천히 밀려나다 쿵. 그대로 뒷범퍼를 벽에 들이받았다. 뻑하고 뭔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고. 빠른 속도는 아니었기에 충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 크게 놀랐다. 에에엣! 어떡해.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지금, 사고 낸 거지. 그런 거지. 방송을 듣고 놀라는 바람에. 단어 하나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아사쿠라는 기어를 바꾸고, 차를 살짝 앞으로 뺀 뒤엔 아예 시동을 꺼 버렸다. 허탈해. 여기까지 잘 왔는데. 아아. 웬 사고람. 이게 무슨 일이야. 복잡한 마음은 차량 뒤로 돌아가 뒷범퍼를 확인하고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찌그러졌다. 제대로. 누가 봐도 사고 차량이야. 그래도 현장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 일단 안내 데스크를 향해 뛰었다. 범퍼는, 나중에. 일단 유다이 군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하니까. 유이가 울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게 먼저니까. 입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면 입김이 부서졌다. 그런 식으로 가시화되는 어떤 것. 찌그러지고 부서지며 증명되는 것들.

다시 한번 안내 드리겠습니다. 원내에 계시는 코가 유다이 사마. 코가 유다이 사마. 가족들이 안내 데스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히 안내 데스크로…

서걱한 공기. 깔끔하게 관리된 병원의 조경과 응급실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온 불빛을 거쳐. 그래도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어떻게든 도착했으니까. 차는 숨을 안고 끝까지 질주했다. 자동문을 한 번, 두 번 통과하고. 늦은 시간이라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을 뿐인 병원 로비를 달리다 보면 안내 데스크에 딱 달라붙어 있는 유이가 보였다. 마이크를 쥔 안대 데스크의 직원 앞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이는 간절한 얼굴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력을 낮추며 숨을 고르다가 유이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유우! 죠!”

따뜻하고 깊은 소리. 동그랗고 부드러운 발음. 돌아보면 응급실에서 나온 코가가 양손 가득 두 사람 몫의 외투와 짐, 캐리어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엔 목발을 짚은 동료가. 아빠! 크게 외치며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짐을 전부 내려놓은 코가는 크게 팔을 벌려 아이부터 안았다. 유우 짱. 잘 있었어? 폭 안긴 유이의 머리며 귀, 볼, 입가에 쪽쪽 입을 맞춘 코가는 죠를 보며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죠, 잘 있었어? 고생했지. 낮게 물으며 웃는 코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사쿠라는 데스크에 팔을 걸치고 간신히 서서 고해했다.

“유다이 군.”
“응?”
“저 차 박았어요.”
“뭐?!”

돌아오는 길의 운전은 코가가 했다. 사고를 내고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왠지. 기대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면 코가는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말을 하지 그랬어. 다른 차를 박은 줄 알았잖아.”
“다행인 건가요….”
“다행이지, 그럼. 살짝 찌그러진 정도니까 괜찮아. 금방 수리할 수 있을 거야.”

나란한 시선. 유이는 뒷좌석 카 시트에 앉아 픅 잠들어 있었다. 신호에 걸린 코가는 유이를 한 번 돌아보고, 아사쿠라를 바라봤다. 아이. 그리고 더 이상은 아이가 아닌 누군가. 어느새 선이 짙어진 바른 얼굴. 예쁘고 깨끗했다. 고생했어. 다시 한번 말하면 아사쿠라는 코가를 돌아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운전할 줄 알긴 알았던 거지? 면허는 있었어요. 그런… 수준으로 유이를 태운 거야? …죄송합니다. 느슨한 대화를 싣고 이어지는 밤의 드라이브. 즐거웠다. 비어 있는 자리에 차를 주차하고는 코가는 유이를 안고, 아사쿠라는 코가의 짐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타박타박. 겹치는 발소리. 현관문을 열고 함께 집으로 들어서면서는 확실히 느꼈다. 우리, 함께 귀가하고 있네. 돌아갈 곳이 같네.

유이를 그대로 눕히고 짐을 정리했다. 코가가 씻으러 간 사이 아사쿠라는 빨랫감과 생필품을 정리했고 아사쿠라가 씻는 사이 코가는 가져온 선물들을 꺼내 식탁에 올려두었다. 유이를 위한 인형과 옷, 과자. 아사쿠라를 위해 상하이 현대 미술관까지 가서 고른 색연필 세트와 도록. 전시는. 안 봤지만. 다들 좋아하겠지. 유우 짱도 일어나면 바로 볼 수 있게 예쁘게 전시해 놔야겠다. 인형과 옷가지의 자리를 잡으며 식탁을 꾸미고 있으면 아사쿠라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수건을 목에 둘러매고, 머리 위로 모락모락 따끈한 김을 풍기면서. 귀여워. 볼도 발갛고 말이야. 코가는 슬그머니 다가온 아사쿠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고 냉장고로 걸어갔다. 뭐 사 왔는지 봐. 마음에 들려나? 기분이 좋은지 가볍게 흥얼거린 코가는 맥주를 꺼냈다.

“죠도 한 캔 할래?”
“좋습니다.”

아사쿠라는 코가가 사 온 색연필 세트와 도록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았다. 맥주 두 캔을 들고 따라온 코가는 그 모습을 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사쿠라의 옆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아, 시원하다. 기분 좋아. 덜 마른 머리를 털어내며 말하면 아사쿠라도 코가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슥슥 문지르고 있으면 코가는 아사쿠라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갔다. 줘 봐. 내가 해 줄게. 양손으로 수건을 잡고는 머리칼을 부슬부슬. 손을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고개가 귀여웠다. 목욕을 마친 강아지라도 닦아 주는 기분. 좋다. 하루 마무리가 완벽해. 중간엔 좀 고됐지만 말이야.

동료가 공항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발목이 골절된 모양이지 뭐야. 병원은 가야겠는데 짐은 많고, 응급 상황은 아니니까 퇴원이랑 통원을 고려해서 요코하마에 있는 병원까지 가겠다고 우기고, 미치는 줄 알았어. 그래도 유우랑 죠 보니까 마음이 싹 녹더라. 얼굴 보는데 진짜 단숨에 행복해지는 거 있지. 신이 나서 머리를 말려 주다 말고 살짝 헤드락을 걸면 아사쿠라가 히히 소리 내며 웃었다. 후, 후 머리칼을 불다가 놓아 주자 빨갛게 익은 얼굴이 등장했고. 응. 이쁘다. 생각하는 순간 아사쿠라가 고개를 푹 떨궜다. 왜. 갑자기 왜? 물으며 볼을 잡고 눈을 맞추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저는 사실 속상해요….”
“뭐가?”
“차를… 부숴서….”
“어이, 그 정돈 부순 것도 아니야. 진짜 괜찮다고. 펼 수 있을지도 몰라.”

우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바보 같이 왜 그런 걸로 울어. 괜찮아. 얼굴 봐 봐. 응? 운전하다 보면 다 그래, 왜 별것도 아닌 걸로 울고 그래.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스럽게 달래면 아사쿠라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멋있게 보이고 싶었는데….”

실수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는데요. 속상해하며 우는 얼굴이 귀엽고 안쓰러웠다. 무릎에 올려뒀던 색연필과 도록까지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까지. 이거 뭐. 유우 짱도 아니고. 애처럼 그런 얼굴을 하며 우는 거야. 그깟 실수가 뭐라고. 난 더 하잖아. 함부로 결혼했다 이혼하고. 아이까지 너한테 맡기고. 실수란 실수, 실패란 실패는 계속. 그런데도 이렇게 너랑 유이랑, 행복하게 지내고 있잖아.

실은. 선택해보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거, 한 번쯤은 마음대로 가져 볼 수도 있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아사쿠라마저 잃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가족이 되어 줄 것 같았던 녀석마저 잃어버렸으니까. 지치다 못해 지겨웠다. 내가 정말 가족다운 가족이라는 걸 가질 수는 있는 건지. 그럴 자격이 있는 건지. 어쩌면 누군가는 영원히 가족을 가질 수 없는 운명인 건 아닌지. 전부 궁금했다. 결혼만큼은, 내가 가족을 내가 고를 수 있으니까.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사람과 가족이 될 수 있으니까. 물론 아무나 골랐던 건 아니었다. 꼭 코가만큼 외로웠던 사람. 외로워하는 사람.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가능할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험했으니까.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어떻게든 잘해 보려 애썼지만 쉽게 되진 않았다. 여전히 외롭고 힘들다며 이혼 이야기를 꺼내길래 그러자고 했다. 그래도 아이만큼은. 아이만큼은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아서.

가족들은 전 아내도 유이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인생에 더 이상 실패란 건 없어야 하니까. 아이라는 이유로 예뻐하면서도 사랑까지는 주지 않는 가족들을 보며 자주 슬펐다. 가족들과 서서히 멀어져 유이와 둘이 지내게 되면서는 종종 아사쿠라 생각이 났다. 그냥. 그때. 혹시 내게 선택권이 또 하나 있던 건 아닐까 하고. 너를 선택할 수도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그렇다고 아이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절대로 없었지만.

“엄청난 실패잖아. 그렇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은 말이야. 책임을 지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방치되는 아이가, 또 생겨서는 안 되니까. 민망하게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아사쿠라는 조용히 코가를 돌아봤다. 아주 잔잔하고 애틋한 얼굴. 언젠가 마주한 적 있었던. 파쇄해 삼키고 이해하며 인정하려는 눈빛. 교집합의 바깥에서 안을 향해, 무수히 두드리며 다가서는 눈동자.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일 것 같은, 그래도 마음이 쓰여 계속 확인하게 되는. 나를 안정시키고 채우는. 내가 마주한 최초의 충족.

“실패하면 좀 어떤가요.”

실패가 왜 죄가 되나요. 그게 왜 잘못인가요. 실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어른들의 실패가 우리를 남겼듯이. 유다이 군의 실패가 유우 짱을 남겼듯이. 실패를 실패한 실패로 만들었듯이.

실패는 예정되어 있어요. 누구도 피할 수 없어요. 감추고 숨긴다 해도 결국엔 드러나 삶 앞에선 모두가 연약함을 알게 해요. 예상된 실패를 알고서도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사랑 아닐까요. 그렇게 쟁취한 실패마저 사랑의 결과물 아닐까요. 그러니 서로의 실패를 껴안고 같이 견뎌 보면 어떨까요. 제가 유우 짱을 아끼듯이. 유다이 군이 저의 상심을 위로하듯이. 우리는 실패로 직조한 그물이 되어. 겪을수록 촘촘해지면서. 질긴 믿음으로 서로를 떠안으며. 서툰 실패를 함께 도모하면서.

“그렇게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시선. 다시는 홀로 외롭게 버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 잠깐 그런 기분이 든대도 그것은 사랑이 아닌 방식에 있어서의 실패이며, 그 실패마저 우리는 서로 껴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걸. 그렇게 예견된 실패를 확인하는 일을 무수히 거듭하며 아주 오래 실패해 나갈 거라는 걸. 그런 서로가 아쉽고 안타까워 울먹이며 끌어안는 날들이 오고야 말 거라는 걸. 코가는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다가서야 해. 이번엔 제대로 선택해야 해. 실패의 도모를 약속하는 너를. 가족의 형태가 아니어도 가족인 너를. 그래서 가장 가족에 가까운 너를.

고요한 얼굴에 입 맞췄다. 고개를 꺾어 가까이 다가가면 아사쿠라는 금세 눈을 감고 얌전히 입맞춤에 응해 왔다. 숨을 참고 있는지 잔뜩 긴장한 어깨가 좀 웃겼지만 조그맣고 부드러운 입술을 맞대고 있으니 금방 마음이 녹았다. 아사쿠라가 뒷목을 감싸 쥐며 몸을 붙여 오는 과정에서 바닥으로 수건이 떨어지는 걸 목격했을 땐 스스로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 위험한데. 좋긴 하지만. 아이도 있고 말이야. 슬쩍 밀어낸다는 게 손을 헛짚어 허벅지를 꾹 누르자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에서 숨이 새더니 순간 움직임이 멎었다. 이야. 고멘. 의도한 건 아니었어. 변명하니 멈춰 있던 고개가 쇄골 근처로 뚝 떨어졌다. 목덜미엔 뜨거운 숨이 닿고. 색색거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으면 아사쿠라는 목 근처에 몇 번 입을 붙이더니 한참 만에 웅얼거렸다.

“계속해도 될까요.”
“그런 건 허락을 구하지 말고 분위기 봐서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 더 실례하겠습니다.”

말투가 너무 딱딱하잖아. 그런가요. 역시 긴장이 되어서. 엑. 죠 설마 처음? 이… 정도까지는 해보지 않았습니다. 와, 미친 거야? 따위의 대화 사이사이를 끊기지 않게 연결하며. 어이. 손이 왜 들어와. 배는 왜 만져. 죄송합니다. 처음 치고 너무 급진적인 거 아냐? 마음이 급해서… 같은 대화로 멀리 가려는 분위기를 애써 붙잡으며. 어느새 아사쿠라의 아래 깔린 듯 누운 코가는 천천히 아사쿠라의 목을 껴안고 키스했다.

“자꾸 놀려서 미안.”

그치만 아사쿠라는 좀. 답지 않게 귀여운 면이 있잖아. 좁은 소파에 몸을 잔뜩 구기고 누운 채 사과했다. 손은 아사쿠라의 티셔츠 목 부분을 침범해 은근히 어깻죽지를 만지면서였다. 똑같이 구겨진 아사쿠라는 기분이 좋아진 고양이처럼 볼을 비비다가 답했다.

“평생 놀리셔도 괜찮아요.”

언제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이제
유다이 군과 저는.

/

“유우 짱. 오늘은 꼭 패딩 입어야 해요.”
“삼촌이 사 준 코트 입을래!”
“안 돼, 감기 걸려! 오후엔 눈 소식도 있어. 코트 입으면 옷이 상할지도 몰라.”

일주일 전엔 폭설이 내렸다. 아사쿠라가 지독하게 감기를 앓는 바람에 가지 못했던 유이의 생일 기념 테마파크 나들이를 뒤늦게라도 수행하려고 겨우겨우 잡아 둔 날이었다. 휴가를 낼 때만 해도 눈 소식 같은 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예측이 안 되면 직장인들은 휴가 어떻게 내라고. 소중한 휴가를 하루 날린 코가도 속상했겠으나 슬픔의 중량으로 따지자면 유이의 서러움에 비할 바가 안 됐다. 발코니에 두껍게 쌓인 눈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유이를 데리고 일단은 밖으로 나갔다가 셋 다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인 게 불과 며칠 전 일. 눈싸움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눈사람 만드는 데서 멈췄어야지. 유우 군이 대책 없이 눈 위에 누워 버리는 바람에 유이가 그걸 따라해서…. 눕는 것쯤은 별거 아니지. 죠는 눈에 발자국으로 그림 그린다고 30분이나 애를 데리고 운동장을 돌았잖아!

그런 고로 다시 잡은 날짜가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어떡해, 그럼, 이브 날 날씨가 요 며칠 중 가장 포근하다는데. 해를 넘기는 건 좀 그렇잖아. 주장한 코가는 다시 휴가를 냈고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오늘 아침 사츠키 상이 등장하는 아침 방송에서 눈 소식을 맞닥뜨리게 된다.

“지난번처럼 셋 다 감기 걸리면 큰일나. 죠도 잘 챙겨 입어야 해.”

티비 옆에 펼쳐 놓은 조그만 트리 위의 알전구가 반짝반짝. 맨 꼭대기에 매달린 하얀 별은 유이가 아사쿠라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가 직접 달았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빨간 니트 차림의 사츠키 상은 오후에 예보된 갑작스러운 폭설 소식에 놀란 표정을 했다. 작업실에서 유이의 외출복과 패딩, 목도리, 장갑, 혹시 몰라 챙긴 여벌옷 등등을 바리바리 꺼내 들고 나온 코가가 유이의 다리에 바지를 두 벌째 꿰어 입히며 신신당부했다. 네에에. 대답한 아사쿠라도 옷을 고르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그래도 나름 놀러 가는 건데. 너무 기능만을 위한 복장은 조금. 고심한 끝에 두꺼운 니트와 바지를 걸친 아사쿠라는 코트에 비니와 머플러로 멋을 내기로 결심했다. 아직은 젊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아사쿠라의 작업실은 거의 코가와 유이의 옷과 짐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사쿠라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부녀는 세간살이를 조금씩 조금씩 아사쿠라의 맨션으로 옮겨 두었는데 그게 조금. 과했다고나 할까. 얼마 전 전시를 진행하며 개인 작업으로 그렸던 원화가 꽤 많이 팔리기도 했고, 갤러리에서 작품 판매 중개를 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짐이 좀 정리되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고멘. 우리 때문에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던 아사쿠라의 맨션이 아이 키우는 집이 되어 버렸네. 코가는 사과했지만 사실 집 주인은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넘어오다가, 결국엔 집을 합쳤으면 좋겠다. 작업실이야 따로 구하면 되니까. 유우 군과 내가 함께 침실을 쓰고 작업실로 쓰던 방을 유우 짱 방으로 꾸며 주면….

시커먼 속내를 펼칠 기회는 날이 추워질수록 늘어갔다. 이른 아침 거의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집으로 들어오는 유이를 볼 때마다 아사쿠라는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그냥 유우 짱에게 방을 하나 주는 것은 어떨까요? 아침이나 저녁에 오가는 길이 너무 춥고, 위험하고…. 아사쿠라 상이 무려 도쿄에서 공수해다 준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으면서 내비친 속마음은 단칼에 거절 당했다. 안 돼. 작업은 어쩌려고. 커피를 들이키며 쏘아보는 코가의 눈빛이 꽤나 무서웠지만 아사쿠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작업실을 따로 구하고, 저도 이제 유우 짱의 스케줄에 맞춰 건강한 생활 리듬을 회복하면….

‘허튼소리 말고 정신 차려. 어제 아사쿠라 상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어느 순간인가부터 유이를 사랑하게 된 아사쿠라 상은 종종 집에 들러 유이와 시간을 보내거나 바쁘지 않은 날엔 직접 하원에 나서 유이를 픽업해다가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기 바빴다. 일 때문에 도쿄에 가서는 유이 생각이 나서 유명한 빵집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식빵을 샀다는데. 아사쿠라는 에에? 식빵? 역시 기본이 최고이기는 하지만… 하는 반응이 전부였고 가게의 상호 명이며 유명한 빵을 전부 꿰고 있던 코가가 대신 나서 헤에에, 아사쿠라 상, 고생 많으셨겠다, 이거 진짜 유명한 건데! 저 한 번도 못 먹어 봤어요! 진짜 감사합니다. 유우도 얼른 감사합니다, 해야지! 하며 곤두박질칠 뻔했던 아사쿠라 상의 기분을 간신히 올려놓았다. 아사쿠라의 애매한 반응에 은근히 상처를 받은 아사쿠라 상은 유이의 입에 직접 귤을 한 조각씩 넣어 주며 돌려 돌려 잔소리를 했다.

‘유우 군처럼 센스가 있어야 여자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할 텐데. 멋지게 낳아 줬더니 저 모양이네. 난 손주 보려면 한참 먼 것 같아.’

손주, 이미 보고 계신데요. 라고 말하려는 눈빛인 거냐. 역시 그렇지. 정말 미친 거야? 경악한 코가는 얼른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아직 죠는 어리니까요, 아사쿠라 상도 할머니가 되기엔 아직 너무 아름다우시고. 아하하. 하하하. 하하하. 웃는 어른들 가운데서 유이만은 맨정신으로 외쳤다. 삼촌 결혼해? 안 돼! 하지 마! 삼촌은 유이 꺼야!

“진짜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엄청 떨고 있잖아!”
“그렇게 보이시나요….”

그런고로 저런고로 즐겁고 행복한 반-동거 생활을 이어가던 세 사람에게 닥친 고난은 비단 눈 소식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래. 손을 너무 떨어서 핸들이 떨리다 못해 차 전체가 다 떨리는 거 같다고. 조수석에 탄 코가는 다시 한번 아사쿠라를 말렸으나 결심은 확고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각오를 다지는 아사쿠라의 옆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도대체 뭘, 뭘 자꾸 보여주려 그래, 가만히 있어도 귀엽다고, 왜 자꾸 멋지려고 그래, 따위가 전부였고. 신이 나서 발을 구르며 아빠가 앉은 앞좌석을 팡팡 차대는 유이를 싣고 떠나는 놀이공원까지의 드라이브. 심지어 눈 소식이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폐장 전에 도착할 수는 있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운전. 곁을 스치는 모든 차의 뒷모습에 안녕을 고하고, 앞질러 가고자 하는 모든 차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가끔은 핸드 워머를 끼우고 달리는 스쿠터보다, 더 가끔은 추위에 종종거리는 행인보다 느리게 진행하는 아사쿠라의 렉서스에 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뭐. 일단 출발했으니까. 코가는 놀이공원에 도착해 먹으려고 준비해 온 과자를 뜯어 유이에게 나눠 주며 창문 밖을 구경했다. 건조하게 불어오는 히터의 바람. 살짝 김이 서린 창문을 소매로 닦고 내다보면 거리는 연말 분위기로 찬란했다. 이제 진짜 한 해가 가려나 봐. 크리스마스 장식이 막 반짝여. 유우 짱. 저기 트리 봐. 노란 전구만 둘렀는데도 정말 화려하고 예쁘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앞차의 테일 라이트조차 크리스마스 데코 같다. 빨갛잖아. 조근조근 떠드는 코가의 옆에서 아사쿠라는 운전에 집중했다.

주차 사고 사건 이후로 몇 번인가 동네를 돌며 혼자 연습해 보곤 했지만, 아무래도 디즈니 랜드까지는 거리가 멀어 걱정했는데. 두 번째 시내 주행이라 그런 건지, 주간 운전이라 그런 건지 지난번보다 훨씬 부담이 덜했다. 시야도 조금 넓어진 것 같고. 뒤에서 이걸 앞질러야 해, 말아야 해 고민하는 차들까지 다 보였다. 그렇지만 뒤차가 압박을 준다고 해도 쉽게 동요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유우 짱뿐만 아니라 유우 군까지 태웠으니까. 최선을 다해 안전 운전. 할 수 있다, 아사쿠라 죠. 전의를 다지고 서행하다 보면 그래도 어떻게 도착은 했다. 아직 눈이 내리기 전. 짙은 회색으로 변해 가는 하늘과 뾰족한 추위. 주차장엔 녹다 말고 방치된 눈이 그늘진 구석마다 듬성듬성 쌓여 있었다. 아사쿠라는 최대한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한 뒤 만족하며 벨트를 풀었다. 야바이. 진짜 고생했어. 그래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농담을 던진 코가가 먼저 차에서 내려 유이를 내려주었고. 도착이다! 외친 유이는 매표소를 향해 달려갔다.

셋이서 다 같이 탈 수 있는 놀이 기구는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유이의 키가 부쩍 자랐는지 대부분의 놀이 기구를 탈 수 있어 손발과 볼이 꽁꽁 얼 때까지 엄청 즐겨 버렸다. 추워서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더 좋았다. 도착하자마자 캐릭터들과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샵을 들락날락하며 소품들을 구경하던 유이는 제 몫의 마법사 미키 머리띠와 아빠와 삼촌 몫의 미니 마우스 머리띠를 챙겨 왔다. 우리 다 같이 이거 하자! 조르는 유이를 따라 셋이서 머리띠를 쓰고 어트랙션을 정복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아 가면서도 유이는 까르륵까르륵 웃어댔고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둘이 짝이 되어 앉아야 하는 놀이 기구를 탈 때면 아빠와 삼촌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줬다. 돌아가면서 타자! 한 번은 유이가 아빠랑, 한 번은 유이가 삼촌이랑! 쫑알거리는 아이가 예뻐서 코가가 먼저 장난을 걸었다.

“그럼 한 번은 아빠랑 삼촌이랑 타도 돼?”
“응!”

쿨하게 허락해 준 유이 덕분에 아사쿠라와 코가는 유이의 뒷 열에 앉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내 손을 잡고 있을 수 있었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온 뒤엔 디즈니 랜드 곳곳을 돌아다니며 탐험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온 뒤엔 디즈니 랜드 곳곳을 돌아다니며 탐험했다. 캐릭터들과 인사하고, 잠깐이지만 퍼레이드도 보고. 메인 구역에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는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아사쿠라는 유이를 안고, 코가는 팔을 길게 뻗어 셀카를 찍고 있으면 다른 가족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유이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서 웃고 있으니 반대편에서 닮았어요, 귀여워,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가? 생각하며 돌아본 곳에는 못 견디게 행복하단 표정으로 웃고 있는 얼굴. 이제는 숨기지도 않는 거야? 헛웃음을 터뜨리자 멀리서 셔터 소리가 들렸고. 이건 진짜, 인화해야 할 것 같은데. 액자에 넣어 두자. 찍힌 사진을 보면서는 확실히 수긍했다.

모두가 즐거운 휴일. 코가는 녹다 만 눈의 끄트머리를 밟아 가며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유이의 뒷모습을 열심히 찍었다. 누굴 닮았는지 길쭉한 팔다리에 자그마한 머리통. 패딩을 입고도 숨겨지지 않는 비율. 얼굴도 귀엽고 예뻐. 분위기가 깔끔해. 추위에 코가 빨갛게 물든 것까지 완전히, 겨울 아동복 키즈 모델이잖아. SNS 광고에서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유우. 여기 봐 봐. 카와이. 머리띠 진짜 잘 어울려. 따뜻하게 입어서 다행이다. 와. 진짜 멧챠 카와이이이이이. 유이는 무릎까지 꿇고 미친 듯이 셔터를 누르는 코가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코가의 근처에 서 있던 아사쿠라에게 돌진했다. 어어어. 유우 짱. 허벅지를 꽉 안는 힘에 뒤로 살짝 밀린 아사쿠라가 중심을 잡고 유이를 안으면 유이는 아사쿠라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삼촌. 응? 팝콘 사 주세요.

“밥 많이 먹었잖아?”
“바스케가 갖고 싶어.”
“어디에 두려고?”
“삼촌 집에.”
“삼촌 집이 유이 집이야?”
“당연하지! 아니야?”

말을 꺼내자마자 주머니를 더듬어 지갑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후다닥 팝콘 판매점을 향해 달려가는 아사쿠라의 뒷모습을 보며 부녀는 같은 생각을 했다. 아빠. 응. 삼촌은 좀. 응. 바보 같아. 응, 역시 그렇지? 가게 앞에 서서는 상시 판매 중인 바스케와 한정 판매 중인 바스케 두 개를 가리키며 돗찌? 하고 입 모양으로 묻는 아사쿠라를 보며 부녀는 동시에 한정 판매 중인 바스케에 대고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빠.”
“응.”
“이제 내가 아빠를 책임질게.”
“응?”
“아빠는 삼촌을 책임져.”

가족은 그런 거니까. 다른 건 몰라도 너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과 좌절과 낙담까지도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런 능력 없어도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만 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결국은 그렇게 해낼 사람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가족이니까.

“유우 짱. 이거 맞죠?”

환히 웃으며 달려오는 얼굴. 팝콘을 사오랬더니, 음료수는 왜 또. 그거 다 짐이라고. 잔소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났다. 바보 아니야, 진짜. 유이 콜라는 최대한 주지 말자고 했잖아. 떠오르는 말은 그런 것들인데 왜 이렇게. 가득 찬 느낌이 들지. 코가는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서 코앞까지 달려온 아사쿠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언제나와 같은 눈빛. 없는 영원을 발명해서라도 가지고만 싶은 사람. 오래도록 이어져結 있을 나의 누군가. 깨닫는 순간엔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다들 긴장하세요.
유약한 부분을 모조리 드러낸 채
서로의 외로움과 실패까지 전부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아주 서툰 가족의 출현.

첫 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