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반이 다 되도록 취활을 미루던 유다이가 이십대 초반에 사장님이 된 것은 주변인들에게도 그리 놀랍지 않은 행보였다. 학교 앞에 차린 작은 요리주점은 그의 취향에 따라 은은한 조명과 제법 가격 높은 메뉴들로 채워졌다. 이케멘 선배를 동경하던 후배들이 테이블을 채워준 덕에 유다이의 가게는 오픈과 동시에 붐볐다. 대학가 치고는 고급스러운, 다른 말로는 부담스러운 가게였으나 사장의 저력 하나로 사업 수완은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해가 거듭되어도 가게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유다이의 후배들이 죄다 졸업한 뒤까지 홀로 남은 입소문 덕분이었다.
가게는 저녁 밥때가 끝나갈 즈음 오픈해서 완연한 새벽이 오면 닫았다. 때마다 출퇴근이 조금씩은 옮겨지더라도 OPEN 팻말을 거는 시간과 그를 뒤집어 CLOSE로 바꾸어두는 시간은 일정하게 유지했다. 하루의 영업을 마감하고 나면 유다이의 하루를 마감하는 루틴도 시작되었다. 멀지 않은 곳까지 걸어 귀가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달리기를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새벽 조깅을 하며 하루를 열 때 유다이는 그보다 약간 일찍 동네를 뛰었다. 본디 장사란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더구나 술을 파는 일은 더욱이 그렇다. 유다이의 첫 가게가 물 흐르듯 자리를 잡은 비결은 미련하리만치 루틴을 지키는 심지에 있었다. 고교시절 마라톤 선수였던 유다이가 부상을 입고 운동을 그만 둔 뒤 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나서도 조깅을 그만두지 않은 건 오랜 습관을 유지할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날의 첫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하루의 영업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해가 점점 길어져 가는 늦봄에 찾아오는 대학생들은 대부분 들떠 있었고 주문은 최소로 했으며 어째서인지 이런 손님을 마수걸이로 받으면 비슷한 느낌의 단체 손님을 끌고 왔다. 마치 오늘처럼. 영업 준비를 마친 유다이가 OPEN 팻말을 건 지 10분 도 되지 않아 어린 얼굴 예닐곱이 우르르 들어와 한 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작년부터 여기 와 보고 싶었다든가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든가 떠드는 분위기가 슬쩍 보기에도 왁자지껄한 2학년의 그것이었다.
분위기가 좋네. 모두 첫 방문인지 다같이 인테리어를 구경하느라 두리번거리는 것을 유다이 역시도 구경하다가 순식간에 멀끔한 얼굴을 만들었다.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주문해주세요.
그가 메뉴판을 건네며 손님 하나하나와 짧게 눈을 맞추었다. 슬쩍 보았을 때 구석에 앉은 남자는 매우 훤칠하다는 정도의 인상이었으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다이는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그가 꼿꼿한 자세로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눈동자가 지나치리만큼 새카맸다.
그는 저들끼리 메뉴를 정하는 와중에도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었고 여자애들이 저기, 아사쿠라 군은 어느 게 좋아? 관심을 보이며 의견을 물어도 저는 다 괜찮습니다, 하는 맥빠지는 리액션만을 보였다. 치즈플래터와 술을 주문한 그들은 본격적인 수다에 돌입한다. 배경음악을 뚫고 들려오는 말소리 가운데 유다이는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험을 대체한 과제를 막 제출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전날 밤을 샜다면서도 술로 시험기간을 마무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테이블을 감돌았다. 저들끼리 떠들면서도 금세 구석의 남학생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따라오는 질문이 아사쿠라 군은 평소에 뭐 하고 놀아? 동기들이랑 따로 만난 건 우리가 처음이지? 첫 인상은 어땠어? 따위였다.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애가 학교 생활까지 뜸하니 관심이 마구 쏠리는 모양이었다. 느릿느릿한 답을 이어가던 그는 옆 자리 아이가 이번 작품은 어땠냐고 묻자 아주 잠깐, 눈이 빛났다가 다시 뻣뻣한 얼굴로 돌아갔다.
유다이는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어린애. 요령이 나빴다. 신비주의 컨셉이라니… 당장 웃고 다니기만 해도 하렘의 왕이 될 수 있을 텐데. 가볍기 싫다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왕자님도 괜찮을 것이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유다이는 대학생활 내내 후자의 지위를 유지했다. 날 때부터 피곤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그에게는 그 편이 좋았다. 주목 받는 일은 익숙해지면 그만이었다. 유다이가 보기에 저 남자애는, 피곤하게 사는 타입이다.
그들은 치즈플래터 한 판을 앞에 두고 얼마간을 더 떠들었다. 소극적이지만 성실한 태도로 대화에 참여하던 숫기 없는 남자애도 나중에는 지친 모양인지 대답이 뜸해졌다. 이후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관찰할 여유조차 나지 않았고 얼마 안 가 신입생 무리는 가게를 떠나갔다. 유다이는 빈잔이 가득한 테이블을 치우다가 구석 자리 의자 위에서 분실물을 하나 습득했고 곧 주인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카운터의 빈 서랍에 넣어두었다. 요즘 애들이 휴대폰 없이 몇 시간이나 지낼 수 있을까?
예상이 무색하게 영업 종료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주인은 찾아오지 않았다. 유다이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직장인 손님을 상대하느라 일이 곤란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감은 거의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가게 문을 닫는 것 뿐인데…… 아 어쩌지. 유다이가 퇴근 후의 루틴을 지키려면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CLOSE 팻말을 걸 때까지 휴대폰의 주인은 소식이 없었다. 결국 유다이는 빈 가게에서 삼십 분 가량을 더 기다리다가 문을 닫았다.
운동복 차림의 유다이가 몸을 풀고 가볍게 지면 밟아오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택가는 새벽이면 행인 하나 없이 고요했다. 일정한 속도를 지켜 가로등 아래를 누비는 일은 그의 중요한 일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아무리 바쁘고 고된 날이더라도 루틴은 이어졌다. 유다이의 하루는 홀로 달림으로써 종료되었다. 낮 내내 북적거리던 골목 사이사이를 런닝화로 달리다보면 그의 머릿속을 포함한 세계가 전부 조용해지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다리를 움직여도 한 구석의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펄떡대는 심장과 미지근한 새벽 공기…… 이런 것들도 유다이를 비워내지 못했다. 드문 일이었다. 오래된 마트를 지나서, 불이 깜빡거리는 가로등을 지나서, 새로 포장한 보도블럭 위를 달리고, 매일 일하는 가게 앞을 스쳐 지나가다보면,
어. 그 애가 있다.
유다이의 발이 멈춰선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숨이 밭았다. 반바지에 트레이닝 져지를 입은 나는 못 알아보려나. 그러나 고민보다 입이 빨랐다.
안녕하세요.
꼿꼿한 벼 같던 그 남자애였다. 끔뻑이며 유다이를 바라보던 그는 아, 상대를 알아본 듯 몸을 주춤댔다.
안녕하세요.
혹시, 폰 두고 가셨나요.
……
멀뚱히 유다이를 보기만 한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손바닥으로 뺨을 슥슥 문질렀다.
아까… 뭘 좀 놓고 가서. 혹시 여기 있나 하고 와봤는데. 문을 닫았네요……
잔뜩 취한 모양인지 안 그래도 굼뜨던 말의 유속이 더 느려져 있었다. 잘 보니 비틀대는 것도 같다. 무리해서 마셨구나. 제 주량을 모르는 애들이 잔뜩 들뜬 채로 할 만한 일은 거기서 거기다. 유다이의 가게를 나가 저렴한 술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마셔댔을 게 뻔했다. 유다이가 가볍게 웃었다.
여기 계세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문을 열고 컴컴한 가게로 걸어들어가 카운터 아래쪽 분실물 칸을 휘적였다. 그나저나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서는 여기까지 용케 걸어왔군. 영업 시간도 지났고, 내가 마침 여기 모퉁이를 돌며 조깅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러고 보니 대체 언제부터 여기 서 있던 거지?
휴대폰을 건네자 남자가 허리를 푹 숙여왔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별 일 아닌걸요.
아……
아, 그리고 이거.
유다이가 주머니에서 조그만 생수병을 꺼냈다. 조깅이 끝나면 집 앞에서 원샷하려고 챙겨둔 거였는데, 그보다는 이 녀석한테 절실해보였다.
운동 후의 갈증보다 주정뱅이의 갈증이 더 끈적한 법이었다. 그가 벌컥벌컥 물병을 비워냈고 곧이어 상쾌한 얼굴로, 중심을 잃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유다이의 팔이 그를 받치자마자 커다란 몸이 유다이 품에 퍽 안겼다. 보이는 것보다 제법 묵직하네. 술 냄새가 심하다. 잠깐만, 지금 나한테서 땀 냄새가 날 텐데…
남자가 유다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어, 잠깐만요.
으응…
그는 안긴 채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퍽 밀쳐내자 바닥에 엎어지고 만다. 이 미친.. 취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마다 유다이는 제가 얼마나 오지랖이 넓은지를 실감한다. 경찰에 신고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 여기 쪼그려 앉아 이 거대한 남자를 경찰에게 인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테고 잘못 걸리면 이것저것 캐묻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해가 뜰지도 모른다.
저기요.
……
저기, 잘생긴 남자 분.
……
걸을 수 있어요? 우리 집 갈래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좋아요.
뭐가 좋다고, 실실 웃어댔다.
그를 제 집 바닥 한가운데 내팽개쳐 둔 채로 유다이는 땀범벅이 된 몸을 씻었다. 손에 닿는 뼈대가 얇아 그를 끌고 오는 것쯤이야 거뜬할 줄 알았는데 취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몇 배는 무겁다는 걸 간과했다. 그는 맨바닥에서 베개도 없이 코까지 골아가며 잤다. 어떻게 목소리뿐 아니라 코골이도 이렇게 작은 소리를 낼 수 있지? 집안이 적요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유다이는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이불과 베개를 꺼내 그의 널브러진 몸뚱이를 수습했다. 전 여자친구가 놀러왔을 때나 쓰던 건데. 내일 일어나면 은혜를 톡톡히 갚으라고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운 유다이는 서서히 수마에 빠졌다. 그가 어떻게 갚아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다음날 그를 재웠던 자리에는 남자의 거대한 신체 대신 종이쪽지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수업이 있어 먼저 갑니다.
나는 간밤에 선행을 베푼 것뿐인데 찝찝한 원나잇을 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눈을 뜨면 낮이었다. 유다이는 가게를 열고 돈을 벌어야 한다. 가끔은 이 당연함이 지겹다.
어딘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물기 어린 컵을 닦으며 오늘의 마수걸이는 누가 하려나, 하고 있으면 문이 열린다. 가게 안으로 발 들이는 늘씬한 다리. 다리의 주인을 보자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손님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며칠 전에 있었던 민폐 취객과의 에피소드를 잊어버리고 있던 스스로가 웃겨서.
남자는 2인석에 앉아 메뉴를 주문한다. 종종 홀로 와서 술을 마시다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통 문을 열자마자 찾아오진 않는다. 그에게 음식을 내주자 감사합니다.. 중얼거리고는 할 말이 있는 눈빛으로 끈덕지게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들을 말이 있긴 하지. 손님도 없는데 앞에 앉아 말상대나 해드릴까. 맞은편의 의자를 당겨 꺼내는 순간, 출입문의 종소리가 울리고 두 손님이 가게에 들어온다.
어서오세요. 오, 스즈키 씨, 타카하시 씨. 오랜만이네요.
최근 일이 좀 바빴네요. 그사이 유다이 씨는 더 잘생겨진 것 같은데?
그래요? 여기서 더 잘생겨지면 큰일인데?
유다이는 곧장 그들을 맞이했다. 꽤 오래된 단골이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까지 양주나 와인을 마시다 대화에 함께 하게 된 적도 있었고 자연히 이름을 포함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킵해두었던 브랜디를 앞에 둔 채 한참이나 유다이를 붙잡고 최근 시작한 일에 대해 떠들었다.
별안간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고 유다이는 그제야 카운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
2120엔입니다.
카드로……
네. 카드 받았습니다.
……저기,
네?
그 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민폐를 끼쳐서요.
아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누구나 그랬을 걸요.
남자의 느닷없는 사과와 감사인사에 단골들이 흥미를 보였다. 앞뒤 맥락 없는 지켜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괜히 그가 엮여버리지 않도록 얼른 카드를 돌려주려는데,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떤 부탁을?
저…… 통성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
정말 범상치 않다. 아니, 그냥 이상하다. 순수한 남대생인 줄 알았는데.
코가입니다. 코가, 유다이.
그러나 유다이는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제공하고야 만다. 내 이름을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참을 수 없을만큼 궁금해져버려서.
저는 아사쿠라 죠입니다.
남자가 유다이의 손에 들린 카드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미소를 띤 채로 가게를 나선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야?
그러니까요.
특이하네. 참 어리고.
그러게 말이에요.
유다이는 에이프런을 고쳐매며 스즈키 씨와 타카하시 씨가 덧대는 말에 멍하게 대답했다.
단골은 늘고 손님은 불어나고, 알바생이라도 고용해야 하나. 가게 영업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1인 영업이 힘에 부치는 날이 잦아지던 차에 유다이는 자주 오던 여자애를 상대해주다가 그만 사고를 쳐버렸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할까 고민이야,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눈을 빛내며 그 자리, 제가 꼭 가고 싶다고 어필해왔던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에 약한 유다이는 구두 계약을 해버렸고 방학부터 수습으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죠가 자꾸만 찾아왔다. 죠를 보고 그 여자애가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그는 매번 유다이가 영업 준비를 마치자마자 가게에 들어섰다. 치즈플래터와 도수가 낮은 칵테일을 시켰다. 우걱우걱 씹어대는 볼을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다. 유다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먼저 말을 걸었다.
아사쿠라 군은 지금 저녁을 해결하는 거야? 네. 학교 수업을 듣고 오는 거지? 네. 치즈를 좋아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에, 그럼 어떤 음식을 좋아해? 쌀밥이요. 쌀밥이라고. 네. 아사쿠라 군, 진짜 특이하네. 밥이 가장 맛있는 걸요. 그럼 만약, 우리 가게 신메뉴로 ‘맛있는 쌀밥’을 내놓으면 사 먹을 의향 있어? ……가격은요?
주로 유다이가 묻고 죠가 대답을 하는 방식이었지만 스몰토크는 나름 오래 이어졌다. 특이한 게 있다면, 대개 손님들은 이런 구도의 잡담에서 자신이 떠들어야 하는 포지션임을 알고 있고 애쓰지 않아도 제 이야기를 늘어놓아버린다. 적절한 질문과 능숙한 맞장구는 유다이가 섭렵한 운영 스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죠는 쉽사리 스킬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묻고 답하는 사이에 먼저 프라이버시를 떠들게 되어버리는 것은 언제나 유다이였다.
자잘한 질문 공세로 끼워맞춘 죠의 조각들. 미대생, 2학년, 여자친구 사귀어본 적 없음(동정), 기숙사생, 월초에 용돈을 받아 지갑이 넉넉해지는지 파스타나 감바스 알 아히요 같은 것을 시켜 먹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주로 치즈 플래터를 시켜 먹음, 요즘은 유다이의 권유를 따라 프렌치프라이에 생맥주를 마심.(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듣고 유다이가 특별히 사이드 메뉴인 프렌치프라이와 가장 저렴한 음료인 생맥주를 추천하자 고집 하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은, 엔쵸비 파스타 부탁드립니다!
네, 네.
내심 뿌듯한지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채로 앙 다문 표정이 귀여워 유다이는 때마다 싱긋 웃었다. 그런 얼굴을 선망하듯 바라보는 눈빛도 좋았다. 참 솔직하고 감정에 성실한 애야. 겨우 저녁 먹는 데서조차도. 파스타 면을 볶으며 죠를 일별하면 곧장 눈이 마주쳤다.
슬슬 구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생.
제가 할까요?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어?
단기 아르바이트라면 조금.. 코가 씨가 제 상사가 되면 기쁠 것 같아요.
아사쿠라 군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대해주는 건 다 손님이라서, 라구. 사장님이 되면 아주 무서워질걸?
그것도 좋아요..
유다이는 웃기다고 생각한다. 그냥 어른 남자일 뿐인 나한테는 같이 있으면 기쁘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말이 술술 나오면서 여자애들한텐 그게 안 된다니. 어지간한 쑥맥이 틀림 없다.
실은 이미 구했어. 그런데 그 친구도 단골 손님이었어서 내가 멋대로 부려먹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저는 마구 부려먹어주셔도 좋은데…
아사쿠라, 너 형 있어?
있긴 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았어.
가끔은 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강아지처럼 기분 좋아할지, 평범하게 불쾌해할지 궁금해졌다.
예비 아르바이트생이 건방지게 사장을 밖으로 불러내다니. 뻔히 그 의도를 알면서도 유다이는 응해주었다.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까지 친히 행차했다.
종일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의 마지막, 여자애가 고백을 해왔다.
사실은 코가 상이 먼저 고백해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먼저 고백을?
여자애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음, 받아주시나요?
유다이는 좋게 거절했다. 여자아이는 끝까지 눈물을 떨어뜨리진 않았으나 툭 치면 목놓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유다이를 올려다 보았다.
아르바이트생 구하는 건 글렀나. 누구든 이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순간 유다이는 막막해지는 대신 어떤 종류의 순응을 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릴 일이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날이 한창 더워지던 어느날의 저녁. 불 앞에서 파스타를 만들던 유다이는 문득 뒷덜미에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생각했다. 시즌 한정 메뉴라도 만들어볼까? 어울리진 않겠지만 빙수 같은 걸 만들면 일단 내가 덜 덥지 않을까? 모양은 밥그릇에 잔뜩 퍼올린 쌀밥으로…… 죠에게 의견을 물어야겠다. 쌀밥 모양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하려나.
주문하신 알리오올리오 나왔습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죠의 앞에 파스타를 내려놓는데, 그가 덥썩 유다이의 팔목을 잡았다.
앞에 앉아서, 같이 드셔주실 수 있을까요.
에? ……그래, 뭐.
감사합니다.
맞은편에 털썩 앉은 유다이가 입을 벌리며 꾸며낸 목소리를 냈다.
아~
……
뭐야? 민망하게. 빨리 한입 먹여줘.
죠가 느릿하게 파스타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포크가 홀로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장난이야, 장난. 얼른 먹어.
아하… 장난……
너무 심했나? 하하하.
……사실은, 저 오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그게 뭔데?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듣고 싶은 말이라니.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때 가게 안으로 몰려든 손님들이 유다이 쪽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사쿠라 군!
흐릿한 기억을 건져올리자 그들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처음 죠를 가게로 데려온 동기들이었다. 죠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다들 여긴 어쩐 일로…
수업이 끝나고 아사쿠라 군을 축하해주려고 하는데 또 어디론가 잽싸게 가버리기에 말이지. 몰래 뒤따라왔더니 여기였네.
생일인데 혼자 밥 먹고 있던 거야? 같이 파티하자!
그래. 아사쿠라 군, 이리 와.
몰래 뒤따라왔다니, 그런 말을 본인 앞에서 한다니. 흘긋 본 죠는 몹시 곤란해보였다. 이런 상황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다이는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사쿠라는 저랑 약속이 있어서요.
네?
NPC인 줄로만 알았던 사장의 개입에 사람들이 눈을 치떴다. 저질러버렸네.
아사쿠라, 우리 집에 먼저 가 있을래? 나도 조금 있다 갈게.
넋 놓고 유다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죠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윙크라도 해줄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네. 가 있을게요.
알아들었네. 죠가 느릿하게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남은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서는 뒷모습이 사라지자 동기들이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저 녀석 뭐야? 기껏 축하해주려고 했더니.
하, 선약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들은 머쓱해하더니 금방 가게를 나가버렸다. 누군가는 유다이를 째려보는 것도 같았다. 무슨 사이냐고 묻지 않아서 다행인가? 괜한 짓을 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갓 태어난 강아지 같은 애를 혼자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얼른 조깅을 끝내고 자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길쭉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이었다.
너… 뭐해?
집으로,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셔서..
그래서 여기서 내내 기다린 거야?
죠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유다이가 헛웃음을 쳤다.
일단 안으로 들어올래?
반바지를 입은 죠의 다리에 모기 물린 자국이 잔뜩이었다. 그는 유다이의 집에 두 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먼저 씻어.
아니에요.
왜?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됐어! 얼른 들어가.
그를 얼른 욕실에 밀어넣으려는데 가만히 선 죠가 유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한 거, 기억하시나요.
아, 그랬지. 그거 뭐였어?
사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아. 이제 어제라고 해야 할까요.
뭐?
실은 사장님한테 축하받고 싶어서 가게에 간 거였어요.
정말 일방적인 남자였다. 유다이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일단 씻고 나올래? 지금이면 기숙사에도 못 돌아갈 테니까 자고 가.
죠가 미묘해진 얼굴로 네 알겟습니다 했다.
물소리가 들리자마자 유다이는 지갑을 챙겨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근처의 세븐일레븐으로 직행해 푸딩을 몇 개 쓸어담았다. 계산대에 올려놓고 카드를 내려던 차에, 아, 잠시만요, 다시 매대로 돌아가 소금주먹밥을 하나 집어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물소리는 끊겨 있었다. 죠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 모양인지 아직 욕실에 있었다. 급히 식탁에 푸딩을 차려놓던 차에, 벌컥 문이 열렸다.
어… 푸딩?
……
푸딩이, 드시고 싶었나요?
아니야. 당장 생일케이크를 사올 수는 없으니까. 이걸로 만족해.
촉촉해진 죠가 말간 얼굴로 되묻는다. 저를 위해 사오신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딱히 푸딩을 즐겨 먹진 않으니까 말이야.
와……
여기 앉아볼래?
큼큼. 유다이가 목을 가다듬자 산타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주춤대는 발걸음으로 죠가 다가온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아사쿠라, 생일 축하합니다.
유다이가 제 엄지를 들이밀며 타오르는 촛불 흉내를 냈다. 얼른 끄라고! 푸딩이 다 타버릴지도 몰라. 후— 입바람이 손톱을 간지럽혔다.
밤이니까 푸딩은 내일 먹을까? 죠의 아침밥으로 차려줄 소금주먹밥도 사왔는데.
아, 소금주먹밥은 지금 먹어도 좋겠어요.
진심으로?
최고의 생일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일기에 써놓기라도 해.
꼭 적어놓을게요. 나의 스무번째 생일은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이렇게…
그래, 그래. 근데 잠깐. 스무번째 생일? 그럼 너, 엊그제까지 미성년자였다는 거야?
법적으로 성인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였다는 거지?
……
죠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으아악!
손에 얼굴을 파묻은 유다이가 고통스러워하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괜찮으세요? 안절부절 못하며 유다이에게 손을 뻗으려는 죠는 유다이의 일갈을 듣고.
너, 당분간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마!
벌 받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유다이는 아주 오랜만에 조깅을 걸렀다. 그러나 몸이 근질거리지도, 뛰고 싶어 답답하지도 않았다. 이미 수면의 세계로 떠난 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방에서 곤히 잠들었다.
죠는 한동안 가게에 오지 않았다. 가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자조가 터졌다. 단골 손님이라는 건 무정한 남자친구 같을 때가 있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해놓고도 어기지 않는 그가 서운했다.
유다이는 새로운 코스로 조깅하기로 했다. 평소 코스에서 조금 더 달려나가면 길게 자리한 강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강가를 러닝 코스로 활용하곤 했다. 처음 새벽 조깅을 시작할 땐 유다이도 곧잘 강가를 달렸으나 새벽임에도 기대만큼 한산하지 않아 동네를 달리는 것으로 루틴을 바꾸었던 기억이 있다. 익숙한 코스를 두고 굳이 코스를 바꾸는 것은 최근 조깅이 재미없어진 탓이었다. 조깅의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은 상념이 날아가는 데 있다고 그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근 몇 년을 반복적으로 뛰어댄 탓인지 요즘은 아무리 달려도 머리가 복잡했다. 완치된 발목이 괜히 시큰거리는 것 같다든가, 잃어버린 단골 생각이 난다든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상념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이제 발목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고민해도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강가는 한여름의 강물 냄새가 났다. 막상 길을 달리고 있으면, 기억하던 것보다는 사람이 적은 같고..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발꿈치에 닿는 기분 좋은 탄성을 느끼며 유다이는 숨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달리다가, 강변 구석에 설치된 농구 골대에서 길쭉한 인영을 마주했다. 홀로 농구공을 튀기다가 점프슛을 하길 반복했다. 공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멈추거나 쉬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 옆에 순간적으로 멈춰서며, 유다이는 생각했다. 탁 트인 곳에서 달리는 건 이런 점이 싫었지. 자꾸 시선을 빼앗겨버리는 거.
코가 씨?
아는 목소리가 유다이를 불렀다. 스스로도 왜 멈추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런 이유가 물밑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구나.
아사쿠라. 오랜만이야.
조깅 하시는 건가요?
응.. 너는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새벽에 혼자 농구라니.
아, 가끔 여기로 오곤 해요. 작업을 하다가 잘 안 되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낫다만.. 그래, 기특하네.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유다이는 또 저도 모르게 말을 뱉고 만다.
요즘은 왜 가게에 안 와?
오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서 그림자도 안 보여줫다고? 농구하러 올 여유는 있으면서.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긁적.
갑자기 서운해서 미칠 것 같았고..
아, 코가 씨, 조심하세요.
죠가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뭐야? 프러포즈? 그가 유다이의 러닝화에 손을 가져다댔다. 차분한 손길로 신발끈을 묶어주었다.. 유다이는 그런 거 내가 하면 돼 라고 빼지도 못하고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만 쳐다보았다.
아사쿠라.
네.
아르바이트 할 생각 있어?
죠가 유다이를 올려다본다. 잠시의 정적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시원한 새벽공기가 그들을 훑고 지나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이 뜨거워서, 정말 한여름이 다 되어가는구나. 유다이는 체감했다.
몸을 일으킨 죠가 무릎을 털었다.
사실은 지금 시험기간이에요.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를 제출해야 해서 조금 바빴어요.
응?
그러니까,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돌아갈게요. 코가 씨의 가게로.
그때, 제 사장님이 되어주세요.
와, 이건 진짜 프러포즈 같다. 웃기네..
강가의 물비린내가 훅 끼치는데도, 어스름하게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도, 죠의 결의는 비장하거나 우습지 않았고 그저 로맨틱하게 들렸다. 우스운 건 이 상황이나 눈 앞의 어린 남자가 아니라 여기 서 있는 나 자신이라고, 유다이는 생각했다.
알바생 아사쿠라에 대해 알게 된 점.
동정 티가 너무 많이 난다.
유다이처럼 손님을 상대하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정말 요령 없는 남자였다. 방학철 대학가라도, 미남 둘이 상주하는 펍은 무적이다. 오히려 신학기 시즌보다도 사람이 북적였다.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부대끼며 늦은 시간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가벼워 보이면서도 만만하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유다이에게는 쉽게 치대지 못하는 여자 손님들이 죠에게는 달랐다. 그는 자주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고, 감사하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가 SNS 아이디를 묻는 손님에게는 꿋꿋이 죄송하다며 거절을 돌려주었다.
유다이의 새벽 루틴에 스케줄이 하나 더 늘었다. 가게 마감과 조깅 사이에 ‘귀여운 알바생 데려다주기’가 추가된 것이다. 너 같은 애한테 세상은 너무 위험해! 장난스럽게 말해도 죠는 베시시 웃기만 했다. 방학에는 기숙사 통금이 넉넉한 모양인지 그는 보통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무사히 귀가했다. 종종 통금과는 상관없이 건물의 문이 닫혀 있는 날도 있었다. 유다이의 에스코트는 그럴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둘은 사이 좋게 유다이의 집으로 갔고, 차례로 샤워했고, 자연스럽게 자기의 자리로 가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말이 많다.
불이 꺼진 유다이의 방에서, 그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간단하게는 술에 취하는 감각을 싫어하는 사람과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부터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찰까지.. 유다이라면 그런 생각이 드는 즉시 머리에서 지워버렸을 이야기들을 입밖으로 내서 고민했다. 가끔이라면 이런 잡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으로서 나누는 담소라면 유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진지해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진지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었다. 예술가라서 그런 걸까? 독특한 타입이니까?
오늘도 죠는 물어온다.
첫사랑이 가장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건 왜일까요?
글쎄. 아파서?
첫사랑은 전부 아픈 걸까요?
원래 처음은 다 아파. 그렇게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끔은 폭로의 충동을 참느라 꽤나 애먹기도 했다. 겨우 그런 물음이 중요한 것도 어리다는 증거 같아서, 죠의 순수한 얼굴을 마주하면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중요한 스포일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유다이가 차곡차곡 모아 온 세상의 진리들을. 직접 부딪히고 깨지고 찢어지면서 발견했으면 했다. 유다이가 발설해버린다면 그는 한 음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그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말 한 마디에 묶여있어야 할 것이므로. 유다이는 그런 사실조차도 알고 있었다.
죠가 아침을 만들고 싶댔다. 유다이가 능숙하게 메뉴를 만드는 모습이 멋있어보였는지 그를 따라하듯 부엌에 서서 소매를 걷어올렸다.
메뉴는 뭘로 할 거야?
파스타 어떠세요?
파스타 지겨워~ 쌀밥에 미소된장국 어때?
그렇지만 재료가 없는걸요…
죠가 쩔쩔매며 부엌 어딘가에 미소가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둘러보았다. 유다이가 소리내 웃었다. 그럼 파스타로 결정.
면을 삶고 냉장고에 처박혀 있던 야채와 베이컨을 구웠다. 남이 만드는 요리를 먹는 게 실로 오랜만이었다. 전여자친구도 이렇게 해주진 않았던 것 같단 말이지… 커다란 몸을 부엌에 구겨넣고 싱크에 면수를 버려내는 죠를 지켜보았다. 어리고, 아깝다.
저기 아사쿠라.
네.
굳이 거절하지 않아도 돼.
어떤 것을?
너한테 집요하게 말 거는 손님 중에, 가장 네 취향인 여자 한명쯤에게는…… 대화도 하고, 조금 오래 말을 잇고, 그래도 돼.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교환하고. 네가 요 앞 미술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말해주고. 제 작품 보러 오실래요? 그렇게 물어봐도 돼.
……제가 왜 그런 말을 하나요.
글쎄. 죠라면 이렇게 플러팅 할 것 같아서.
뜨거운 팬에 끼얹은 파스타 면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죠는 대꾸도 없이 토마토 소스를 붓는 데 열중했다.
청춘이잖아. 아깝지 않아? 그렇게 잘생겨놓고.
……코가 씨는요?
난 연애할 생각이 없는걸.
이유가 있나요?
으음. 뭐랄까, 사는 게 다 그렇잖아. 온난하다가도 한 순간에 다 뒤집혀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최대한 미니멀하게 살고 싶은 거지.
유다이는 문득, 사모았던 LP판과 향초 같은 것이 가득한 집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어드바이스하는 어른 놀이는 그만둬야겠네. 뭐, 다 자기 맘이지만. 그렇게 마무리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죠가 입을 떼고.
그렇지만 불안해하며 매순간을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뼈 있는 한 마디를 해왔다.
하하하. 나 불안해 보이나?
코가 씨가 그렇다기 보다는… 코가 씨를 보는 제가 괜히 불안해질 때가 있어요.
어째서?
그건 알 수 없네요. 언제든지 어디론가 달려나가버릴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여서일까요?
그러나 유다이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죠야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다이가 곁으로 끌고 온 많은 것들이 훌쩍 떠났으니까. 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강한 예감이 들었다.
죠가 완성한 요리를 그릇에 옮겨 담자 유다이는 함께 상을 차렸다. 둘은 마주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죠의 요리 솜씨는 그닥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유다이는 너, 재능 있는데? 우리 가게 셰프로 스카웃 할게. 하며 능청을 떨었다. 죠는 머쓱하게 웃으며 마저 음식을 씹었다.
가을이 완연해질 무렵, 개강 직후의 미대생은 하루하루 죽어나가고 있었다. HP 게이지가 끊임없이 닳는 게임 캐릭터처럼 죠는 날이 갈수록 피곤한 얼굴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지만 자잘한 실수가 늘었다.
너,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밤을 샜지만… 내일은 잘 수 있을 거예요.
심각한데. 이만 들어갈래?
괜찮습니다.
유다이는 죠를 집으로 데려온 뒤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내주었다. 그가 말없이 과자를 씹다가 문득 돌아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기에 얼른 욕실에 밀어넣고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유다이의 여분 홈웨어를 입은 죠는 머리를 말릴 틈도 없이 이부자리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한눈에도 지쳐보이던 그는 잘 때만큼은 더없이 평온했다. 유다이는 무해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몇 번이고 이런 적이 있었던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죠는 설거지를 하던 와중 기어이 글라스 잔을 떨어뜨려 깨먹기에 이른다. 허겁지겁 바닥에 무릎꿇은 채 산산조각이 난 유리를 치우다 손이 베이자 그가 탄성을 질렀다.
야!
유다이가 달려와 그를 일으켰다. 유다이는 죠의 손을 잡고 흐르는 물에 피를 씻어주며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을 한다.
너도 나도 너무 계획이 없었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 일수를 줄여야 할 것 같아. 격일로 나오는 건 어때?
정말 괜찮은데……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걱정 돼서 그래.
걱정시켜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아무튼 내 말 듣는 걸로 해.
그날 이후 죠는 주에 세 번씩 출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피곤이 덜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갈수록 출근 횟수를 더 적게 줄였고 한번 줄어든 것이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너무 지치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돼, 유다이는 진심으로 말했으나 죠는 감사하다는 대답만 할 뿐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었을까? 나는 왜 매번 혼자 결정했을까? 러닝을 하다가 후회의 자문이 시작되면 유다이는 강변의 농구 골대 근처에 앉아 공기를 마셨다. 여름이 끝난 강가는 물비린내가 가셨고 유다이는 저의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을 맡을 수 있었다.
유다이는 대학시절 무엇이 자신을 지탱해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우 술이었다. 술을 마시며 사람들과 떠드는 일도 즐거웠기야 했지만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것은 취하면 몸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하다는 감각, 정말 나쁜 실수는 하지 않는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펍을 열었고 그는 완벽하게 사장님 노릇을 해내는 자신을 보며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안정 속에서 불안정을 느끼고 일정한 불안정이 곧 지면에 발을 딛도록 해준다. 유다이는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죠가 이대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면 어떨까. 우리는 단순히 전 사장과 전 알바생 사이가 되는 걸까. 명료한 관계 정의를 위해 그를 펍에 끌여들였지만 이제는 더 모호해져버리고 말았다.
10월이 끝나가던 즈음의 어느날, 홀로 일하던 유다이의 폰에 메시지 알림이 쏟아졌다. 칵테일을 만들던 중이라 몰아치는 전화도 받지 못한 채로 내버려두었다. 서빙을 하고, 설거지거리를 정리하고, 손님 몇을 더 받거나 보내고 나서야 겨우 연락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생일 축하해
코가 군 보고 싶어
오늘을 기대해
벌써 생일이구나. 그 이상의 감상은 들지 않았으나 하나하나 답장을 돌려주었다. 여력이 남지 않을 만큼 피곤했는데도 손가락만은 관성적으로 움직였다.
유다이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은 대부분이 유다이와 비슷한 성정이어서, 축하라거나 기념 같은 것에는 물러설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알바생보다도 먼저 펍에 도착해 케이크를 내밀었다. 너희들, 이거 영업 방해야. 유다이가 웃으며 촛불을 껐고 그들은 테이블 구석에 앉아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짧게 회포를 풀었다.
대학 시절 함께 했던 여행을 추억하던 차에, 학교 수업을 듣고 막 출근한 죠가 그들을 발견했다.
죠, 여긴 내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희는 그냥 서프라이즈 파티 하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구요.
알바생이 사장님 생일을 왜 신경 써.
친구들이 저마다 낄낄댔다. 유다이는 죠를 두고 웃는 것 같아 부드럽게 그들을 말렸다.
곧 영업 시작 시간이니까 그만해.
케이크만 주러 잠시 들른 거야. 다음에 제대로 생일파티 하자!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고마워.
OPEN 팻말을 뒤집기 이전의 조용한 펍에 사람들이 떠나고 둘만이 남겨졌다. 일부러 숨긴 것도, 별 의미를 두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유다이가 헛기침을 했다.
생일… 이셨군요. 축하드려요.
아사쿠라 생일도 이런 식으로 알게 됐던 것 같은데.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라니.
……저도 생일 파티를 해드리고 싶은데요.
그래? 쟤들이 하는 얘긴 신경 안 써도 돼.
사장님도 저에게 해주셨으니까요, 생일 파티.
우리가 푸딩 열 개를 한꺼번에 먹은 그거 말이지?
하하.
유다이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 죠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그럼 오랜만에 자고 갈래?
유다이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아사쿠라는 잠시 편의점에 들르겠다고 했고 유다이는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가 세 달 전 푸딩을 샀던 세븐일레븐이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해졌음을 실감하며 유다이가 계산대를 넌지시 훔쳐보았다. 뭔가 위험한 물건을 사려나? 돌아온 죠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 속에는 희고 노르스름한 푸딩만이 가득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생일 노래를 불렀다. 박수를 치던 유다이는 떨리는 노래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노래를 마친 죠가 엄지를 들어올렸고 유다이는 눈물을 흘려가며 크게 웃다가 바람을 불어주었다. 그의 엄지가 주먹 속으로 접혀들어갔다.
그들은 익명으로 만났고, 죠 덕분에 서로 이름을 불렀고, 마주앉아 식사를 했고,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죠는 그것도 모자라 또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했다.
생일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갖고 싶은 게 있나요?
잘생긴 알바생의 해피 버스데이 송이면 충분해.
그래도… 뭔가 남는 걸 드리고 싶어요.
그렇다면…… 눈 좀 감아 볼래?
유다이가 몸을 쭉 내밀었다. 순순히 눈을 감은 죠는 유다이의 손에 뒷덜미가 잡혔고, 곧이어 입술에 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보낸 밀접한 접촉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쏜살같이 흘러가기도 했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기분을 알 수 없는 유다이의 얼굴 뿐이었다.
어때?
……
어떻냐구.
기뻐요.
기쁘다고?
네. 무척.
대답을 들은 유다이는 죠의 올곧고 뜨거운 눈빛을 피할 수밖에는 없었다. 죠는 늘 성실했고, 유다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런 것뿐이어서. 기쁘다는 말에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기다릴뿐이었다. 키스 다음에 올 무언가를.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리고 믿었다. 죠는 언제나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유다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인물이었다.
죠는 봄방학까지 펍에서 일을 하다 그만두었다. 그 사이 둘은 함께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가거나 새해 참배를 갔고 누구도 함부로 관계를 정의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더는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명료하게, 같은 기분이었다. 유다이는 여전히 죠가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조깅을 했다. 그러나 조깅은 낡은 습관의 위치에서 빼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죠와 만나는 날에는 그를 위해 체력을 아껴둬야 했다. 죠가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영원히 함게할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에 당장은 온 집중을 다 쏟기로 했다. 죠는 아주 빠르게 성숙해져갔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일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