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운을 돌려줘’ 모티브
아사쿠라 죠의 어깨엔 보이지 않는 음울이 자리 잡고 있다.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집기 위해 배게 밑으로 손을 휘적였다. 익숙한 그립감이 잡히며 많이 눌려 헤지기 일보 직전인 전원 버튼을 누르니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프로그램이 틀어진다. 원룸에 딸린 티비라 화질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오직 한 프로그램만 보는 아사쿠라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침 방송에서 주기적으로 방영하는 별자리 운세를 보기 위해 아사쿠라는 침대 헤드에 기대 얌전히 게자리의 순서를 기다렸다. 매달 있는 아사쿠라만의 작은 의식. 경쾌한 목소리로 드디어 고대하던 멘트가 흘러나온다. 11월 게 자리 인생이 바뀔 만큼의 아주 큰 대운이 찾아옵니다. 행운의 물건은 물, 행운의 색은 흰색 입니다. 게자리 시청자분들 상당히 부러운데요! 이런 운세는 별자리 운세 방송하면서 처음이에요! 사실 오하아사는 아사쿠라에게 행운의 척도가 아닌 불운의 척도를 점쳐보는 수단이었다. 행운.. 감히 담아보지 못했던 단어. 입에 굴려본 그 단어가 어색하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아 살며시 작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비적비적 일어나 냉기가 미미한 냉장고에서 어제 마시던 우유를 꺼내 마신 아사쿠라는 그대로 뿜어버리고 말았다. 상단에 표기된 유통기간은 역시나 지나있었다.
철문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밀어 열자 따듯한 햇볕과는 달리 서늘한 바람이 집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금세 쌀쌀한 날씨가 되었어. 옷을 좀 더 따듯하게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깨에 겨우 매달려있는 가방을 고쳐매니 아사쿠라의 앞날을 기대하는 듯이 네잎클로버 모양의 키링이 달랑거리며 빛난다.
세상은 나의 편
반면 코가 유다이를 바라보자. 태어날 때부터 양손에 행운을 쥐고 태어난 자. 무수한 돈과 애정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이 마련해준 도쿄의 고급맨션을 두고 밥 먹듯이 드나드는 호텔의 정문에서 유유히 발렛 파킹을 기다린다. 유다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5살 유다이의 생일을 기념하며 유다이를 좋아하는 모든 아이들을 초대해 본가 저택 마당에서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유다이는 디즈니랜드처럼 아이들이 많았다고 기억했으나 유다이의 어머니는 정확히 일러주었다. 118명이 왔다고. 현관문에 쌓인 선물 포장만 풀어보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유다이는 이십 대 초반에 파리 컬렉션까지 런웨이를 섰던 모델이지만 일찌감치 은퇴하고 모델 에이전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매일 굶고 초라하게 운동 해야 하는 자신은 빛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련없이 무대를 떠났다. K에이전시의 성공을 이끈 것 또한 유다이의 불멸의 행운이 한몫했다. 클럽에서 느낌 좋은 남자를 물색하던 중 허탕 쳤다 싶어 나가려던 참에 유다이는 한 남자와 부딪히게 된다. 자신도 일본에서 드문 키를 갖고 있었으나 고개를 들고 올려다볼 수 있는 남자였다. 정체불명의 장신 미남의 팔목을 움켜쥔 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인간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심야에도 운영하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그는 모델을 꿈꾸고 있다고 실토했다. 유다이는 회사로 데려가 그를 그럴듯한 모델로 만들었고 결과는 대성공으로 모델을 넘어 흥행 보증수표 딱지를 단 영화배우 켄타가 되어 K에이전시의 간판 인물로 자리 잡았다.
오늘은 면접을 통해 아마추어 몇 명을 골라내야만 했다. 몇 주 뒤 있을 K에이전시의 모회사 그러니까 유다이의 아버지가 후원하는 자선행사에 신입 모델들을 무대에 세워 기사를 내보낼 생각이다. 모든 게 탄탄대로였다. 마침 스피커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와 볼륨을 높이자 거짓말처럼 도로 위로 초록 불만 들어온다. 이 시간에 시원하게 뚫린 긴자 도로 한복판을 달리니 하늘에 구멍난 듯 쏟아지는 비와 달리 유다이의 기분은 상쾌했다. 엑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분 뒤에 바로 마실 수 있게 따듯한 커피 하나 내려놔 줘.
지지리 운 없는 소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바닥을 보며 걷는 것이 습관이 된 아사쿠라의 시선에 하나 둘 씩 작은 원이 늘어난다. 올려다본 하늘엔 잔뜩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무섭게 흘러오고 있었다. 분명 방송에선 맑은 날씨라고 했는데 온몸을 젖게 할 기세로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가까운 카페의 어닝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재앙은 최대한 피해 보자는 마음으로 아사쿠라는 만능배낭을 제작했다. 겉보기엔 평범하고 낡은 가방이지만 열어보면 각종 비상약, 찢어진 옷을(떨어진 물건을 줍다 바지가 찢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꿰매기 위한 반짇고리, 버스를 놓쳤을 때 택시를 타기 위한 비상금, 넘어져 다리를 다쳤을 때 짚을 삼단 지팡이, 귀마개, 호신용품 등등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우비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사쿠라는 이 정도로 재수를 탓하지 않는다. 이런 것 쯤이야 별거 아니니까.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먹색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사쿠라가 가엾은지 카페 사장님이 문을 열고 나와 손님이 두고 간 지 꽤 오래된 우산이라며 괜찮다면 쓰고 가라며 건넨다. 앗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이런 소소한 행운이 찾아오네요. 기쁘게 받아드린 우산을 펴내자 반도 펴지지 않는다. 혹여나 카페 사장님이 유리창 밖으로 지켜보고 미안해하진 않을까 아사쿠라는 넓은 어깨를 오므려 좁은 우산을 쓰고 있는 힘껏 뛰었다. 우산 위를 때리며 쏟아지는 빗줄기가 마치 하늘이 제게 주는 벌처럼 느껴진다. 저는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은 걸까요. 제대로 된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아사쿠라는 남모를 위로를 자신에게 건넨다. 저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모르는 저마다의 사정은 누구나 있을 테니. 신발 밑창에 물이 들어와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꼴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의 행운이면 된다. 기꺼이 버틸 수 있으니까요.
정류장에서 가쁜 숨을 돌리며 버스를 기다리지만 타야 하는 버스는 도통 도착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늦을 텐데…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사쿠라의 앞으로 웅장한 소음을 내는 하얀 벤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며 생긴 물길을 직격타로 뿌리고 지나갔다. 행운의 물건이 물이라 했던 아나운서의 멘트가 떠오른다. 이골이 날 지경이지만 뭐든지 체념이 빠른 아사쿠라는 참새 입김만큼 미약한 한숨을 폭 내시고 만다.
“아사쿠라 죠는 안 온 거야?”
유다이의 날이 선 물음에 영문을 모르는 신입 모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유다이를 오래 모신 비서가 곤란한 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연락이 계속 안되네요..
“그럼 오디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과는 이번 주 내로 회신 드리겠습니다”
유다이의 말이 끝나자 진열장 속 나열 된 프라모델처럼 경직되어 있던 모두가 몸이 접힐 듯이 인사를 하곤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에.. 오디션은 끝났는데? 프로필이 담긴 아이패드를 성의 없이 넘기던 유다이는 고개를 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도로 나가라 말할 심산이었다. 눈앞에 처참한 행색의 한 남자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 폭우를 그대로 맞고 온 건지 온 몸은 젖어있고 머리카락은 다 들러붙었어. 그런데… 그래서인지 달라붙은 옷 사이로 그의 바디가 눈에 들어왔다. 바디가… 좋잖아? 그것도 엄청나게
“아사쿠라 죠?”
“네 아사쿠라 죠 맞습니다”
“연락은 왜 안 받은 거지?”
“아아… 배터리가 다 달아버리는 바람에.. 정말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이마 좀 까보고 그 다 젖은 셔츠도 벗어볼래?”
엄마가 어린 아들의 머리를 넘겨주듯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멋없이 넘겼음에도 죠의 비주얼은 유다이의 탄성을 자아냈다.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작네”
“그런가요… 그런 소리는 자주 듣긴… 했는데”
프로필 안 속였네.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리며 아사쿠라가 보낸 이력서와 실물을 번갈아 보던 유다이는 입이 벌어졌다. 모델이 되고 싶어 안간힘을 쓰며 키를 1센티미터라도 높여 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하필 유다이는 그런 사람들 골라내는 데에는 귀신이었다. 이 바닥에 십년 구르다 보니 쳐다만 봐도 한눈에 키가 몇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클럽에서 켄타를 끌고 나왔던 때와 같은 카타르시스가 몰려왔다. 발군의 모델이 직접 여기까지 굴러 들어오다니. 어깨가 넓은 데다가 모양도 좋고. 유다이의 끊임없는 칭찬에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아사쿠라는 참을 수 없는 황송함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시선을 바닥으로 옮겨 젖은 신발 끝을 바라보았다. 내려놓은 셔츠와 가방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아까 오디션 보러 온 모델들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화려하다고 느꼈습니다. 프로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 없을 만큼요..”
“모델은 아웃핏이 중요해. 아무리 바디가 좋아도 그 바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아무도 몰라주지. 행색이 중요하단 얘기야. 오늘의 아사쿠라의 차림은 내가 그동안 본 오디션 참여자 중 최악이네”
“…”
“그러나 타고난 바디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 아마 내일의 아사쿠라가 다 추월할 거라 보는데”
“네?”
아사쿠라! 너 멋있다고! 내일 연락 갈 거야~ 유다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천장에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덕지덕지 붙어 있던 부적이 미약해진 점성에 나풀나풀 떨어져 이마에 착지했다. 별자리운세가 정말 들어 맞는 건지 하루 만에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K에이전시에 붙다니, 침대에 누워 공중에 다리를 차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우유라면 어제 구독 취소했는데… 좀비처럼 일어나 문을 연 죠의 눈앞에는 아침부터 깔끔하게 차려입은 유다이가 서 있었다. 미처 떼지 못한 죠의 머리 위에 붙은 부적을 보곤 유다이는 부업으로 퇴마하냐며 배를 잡고 웃었다.
멋대로 죠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뼈대가 단단한 손목이 순종하듯 손쉽게 이끌려왔다. 발 걸음이 가벼웠다. 원석을 발견하여 다듬고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 에이전시와 연계되어 있는 미용실에서 깔끔한 헤어로 다듬고 유다이가 즐겨 입는다는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사기도 했다.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을 땐 긴장해서 제대로 못 먹는 건지 원체 먹는 양이 적은 건지 더 이상 포크를 잡지 않았다. 죠 벌써 관리하는 거야? 왜 이렇게 적게 먹어? 유다이의 놀림 같은 물음에 죠는 쑥스러워하며 양식보다는 흰 쌀밥을 선호한다 했다. 아하하 참고할게. 다음엔 스키야키를 먹으러 가는 게 어때? 나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죠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경청하지 않으면 못 들었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아요.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먹다 빵 터져버렸다. 대충 비슷한 거지. 뭐 앞으로의 죠 인생은 달라질 거니까. 유다이의 대답에 소리도 없이 입에 주먹을 대며 작게 미소를 짓는 죠. 웃는 얼굴은 꽤 귀엽네..
죠 거울을 봐.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런웨이에서 조명 받는 널 생각해봐. 아직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혼란스럽지 아직? 다 네가 감당해야 할 감정들이야. 무대에서 빛 날 그 순간을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해.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죽을 것 까지야ㅋㅋ 죠는 뭐든 열심이라니까. 하지만 좋은 태도야 런웨이 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던지 앞만 바라봐 다른 건 필요 없어 오직 네 눈앞에 있는 길만 걸어가면 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봐 조금은 서툴더라도!
“대표님 이제 무대에 올라가셔야 합니다!”
비서의 서두르라는 재촉에 유다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정성스레 손질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죠가 아직 도착 못했다고! 전문 사회자의 K에이전시 대표 유다이를 소개하는 멘트에 결국 등 떠밀려 무대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구둣발로 두 번 바닥을 두드리며 컨디션을 체크했다. 아직도 고치지 못한 모델일 적 습관이다. 성심성의껏 준비한 행사이니 파티를 즐겨달라는 말을 마친 뒤 에이전시의 신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으나 무대로 올라오는 루키 중에 기다리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무대인사를 위해 며칠간 야근을 자처하고 죠의 연습을 봐준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K에이전시의 신인 모델을 소개하겠습니다”
한 명 한 명 소개를 마친 뒤 마이크를 내려 논 유다이는 결심한 듯 마른 침을 삼키곤 다시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음… 스케쥴로 인해 오늘 자선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루키도 있습니다”
유다이는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하나하나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름은 아사쿠라 죠, 키는 184cm 보기 드문 아주 잘생긴 미남형의 모델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당당한 표정과는 달리 간곡한 요청을 끝으로 유다이는 90도로 인사를 한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파티의 호스트인 바람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쥐어지는 샴페인 잔에 끊임없이 건배를 했다. 더러 유다이 보고 현역으로 무대에 서도 되겠다는 칭찬에 바람 빠진 웃음이 새 나왔다. 에이 그건 욕심이죠~ 어느새 옆자리로 다가온 안면 있는 연예부 기자가 유다이에게 물었다. 아까 마지막에 소개한 불참 모델 말이에요. 얼마나 괜찮길래 대표님이 따로 언급까지 한 거에요?
“내.. 분신같다고 해야 하나”
“분신?”
“굉장히 닮았어”
행사를 마친 유다이는 파티 플래너가 건넨 참석자 명단을 모두 확인하자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급속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리곤 담배 한 대가 간절해졌다. 곤두선 신경이 진정되자 넙죽 받아먹은 술기운이 올라오는 탓에 눈은 거의 반쯤 잠길 지경이었다. 건물의 밖에는 아직도 리무진을 기다리는 인파가 모여있었고 할 수 없이 유다이는 건물 뒤로 돌아가 인적없는 골목에 자리 잡았다. 자켓 안을 더듬거리며 넣어둔 담뱃갑을 집을 때 반대편에서 아주 익숙하고 기다란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자 초점이 명확해지며 시야에 들어온 아사쿠라 죠. 정확히 말하면 거지꼴을 한 아사쿠라 죠. 유다이의 앞에 나타나는 죠는 항상 기묘했다. 비에 홀딱 젖어 안색이 시퍼런 죠, 까치집 머리를 한 채 이마에 부적이 붙은 죠, 얼굴은 숯검댕인 채로 입고 있는 옷은 다 헤진 죠.
“죠. 무슨 일 있던 건지 설명해줄래?”
“코가상께 정말 중요한 자리인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런 자리는 몇 번이고 만들어 낼 수 있어”
“…하지만 코가상께서 신경 많이 쓰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유다이의 손에 들린 담뱃갑을 발견한 죠는 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편히 흡연하세요.. 라 말하며 다리를 모아 쭈그려 앉았다. 왜 그래.. 그러지마.. 왜 쓰레기통 옆에 앉고 그래.. 그러면 너무 가여워 보인다고. 귀엽고 가여운 것에 약한 유다이는 난감했다. 분명 내가 화내야 할 타이밍인 거 같은데 뭐랄까 죠는 면죄부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종용할 수 없었다.
“밤엔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유다이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축 처진 어깨에 걸쳐준 뒤 같은 자세로 앉았다. 사실 더러워 보여서 앉기 싫었지만 아끼는 흰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 보단 죠를 위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긴 다리를 곱게 접은 두 남자가 쪼그려 앉은 모습은 어딜 가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큰 대로변의 시끌벅적한 소리는 담을 넘어 들려오는데 이 어두침침한 골목 속에선 아무 말에도 힘이 실리지 않는다. 유다이는 원래 이런 정적을 참기 어려워 어쩔 줄 몰랐다. 어떤 위로를 해야 죠가 활기를 되찾을 지 궁리 중에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 앞으로도 멋진 모델이 되지 못할거에요”
“넌 내가 직접 뽑은 사람인데? 지금 이 코가 유다이의 눈을 못 믿는 거야?”
“글쎄요.. 자꾸만 제 자신이 초라해지네요”
“어리잖아~ 이제 시작이라고. 언젠가 이 순간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런가요.. 죠가 살며시 유다이의 어깨에 기댔다. 이런 젠장! 잘생긴 남자가 연약하게 기대면 마음이 더 약해진다고! 순탄하게 살아오던 유다이는 충동적으로 핸들을 꺾어 죠의 인생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지나가다 발견한 고양이에게 캔을 사주고 크리스마스에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호의를 담은 적선이 아닌. 극단적으로 자학적인 죠의 원초적 결핍을 손수 팔 걷고 나서서 해결해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걱정된다. 뭔가 도와주고 싶다. 이 망할 오지랖. 이건 아사쿠라의 거대한 계획에 내가 속수무책으로 휘씁려가는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사쿠라 죠의 등장은 유다이의 가슴속에 성급한 불꽃을 심어주었다. 곁눈질로 내려다 본 죠는 아무 말 없이 긴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인다.
“내가 책임질게”
“절대로 널 망하게 두지 않을 거야”
“아사쿠라 죠를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일본 최고의 모델로 만들어 줄게”
유다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죠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최고의 모델이요?… 옆에서 결심에 차 보이는 유다이의 표정을 보자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고이다 길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대표 앞에서 우는 꼴 사나운 모습은 보이기 싫어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에 유다이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떨리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입술을 벌려 받아들이자 이층 발코니에 부착된 에어컨 환풍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얼굴에 잘게 튀는 물방울에 유다이는 슬며시 눈을 떴다. 있는 힘껏 눈을 꾹 감은 채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있는 모습에 지금 벌칙 받는거야?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유다이는 말하는 대신 입술을 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옆에 있던 쓰레기통 뚜껑을 집게 손가락으로 집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럭키! 쓰레기통 옆에 앉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키스가 진해질수록 물줄기는 유다이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상하네요. 분명 하늘에서 화분이나 새똥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말이에요. 심지어 내리쬐는 햇빛은 따사하고 꽉 묶은 신발 끈도 풀리지 않았어요. 이게 무슨 일 일까요? 아사쿠라는 오늘 기이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에 급하게 모델을 구한다며 연락해 온 스튜디오로 가는 길 까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전봇대에 박지도 않았다. 심지어 발도 산뜻하다. 신발에 지나가는 개가 오줌을 누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무심코 쳐다본 신발의 밑에는 만 엔의 지폐가 깔려있었다.
자선행사 당일 날 아사쿠라는 고대하던 데뷔를 위해 깔끔히 목욕 재개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그 언젠가 저에게 최악의 오디션이라고 말했던 유다이의 표정을 떠올렸다. 행거에 걸린 얼마 없는 옷 중에 특별히 수트케이스에 보관해둔 유다이가 선물해준 옷을 꺼내 들었다.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도 지어보며 한창 거울 앞에 서 있던 중 발바닥이 점점 축축해졌다. 이상함을 느껴 방안을 둘러보니 주방 천장 쪽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위층이 바로 옥상이라 옥상 하수도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아사쿠라는 물을 받아놓을 바구니를 찾다 결국 봉투를 빼낸 쓰레기통으로 물을 받아내던 중 쓰레기통에 채워지고 있는 물이 미세하게 물결치며 요동치는 것을 발견했다. 지진인가? 유다이가 선물해준 옷이 젖어가는지도 모르고 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물을 짜내는 와중에 아사쿠라의 오피스텔에 지진 경보음이 울렸다. 책장에 있던 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더 많은 양의 물이 누수되기 시작했다. 바닥을 닦던 아사쿠라는 결국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 그치기만을 기다렸으나 큰 흔들림 한 번에 물이 담긴 쓰레기통이 엎어지고 바닥엔 물이 차올라 아사쿠라의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떨어진 부적들이 방안을 둥둥 떠다닌다. 책상 밑에 쭈그려 침수돼가는 방바닥을 보며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시선에 걸친 티비 콘센트가 꽂혀있는 멀티탭. 아사쿠라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 이후로 튀는 스파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두 눈을 번쩍 뜬 유다이의 등 뒤로 왠지 모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불길한 기분. 젠장 지각이다! 급하게 들여다본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 스무 통의 알림이 떠 있다. 미친! 대강 치약 짠 칫솔을 입에 넣은 채로 급하게 다리를 끼워 넣은 바지의 단추가 톡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고 다른 바지를 찾았다. 하필 입을만한 옷은 전부 다 세탁을 맡겨버린 제 탓을 하며 할 수 없이 두 사이즈나 큰 탓에 유기해 두었던 바지를 집었다. 좀 크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냐. 냉장고에 있던 캔 커피 하나를 집어 들고 잽싸게 차 문을 열어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자 눈 앞에 펼쳐진 하얗게 얼룩덜룩 덮인 눈. 이 아닌 철새 무리가 지나가면서 단체로 새똥을 뿌리고 간 건지 차 앞 유리를 점령하고 말았다. 시동을 켜 와이퍼를 돌리자 앞 타이어 공기압 위험경고가 뜬다. 타이어 펑크다. 결국 유다이는 소리 지르고 말았다. 영원히 잡히지 않는 택시 덕분에 결국 비서가 유다이를 데리러 왔다.
“대표님께도 이런 일이 있네요. 결국 대행사 부사장님은 기다리시다가 가셨어요.”
“이건 내가 아니야…”
“어쩌죠 광고에 들어가기로 했던 모델들 계약 전면 무효화 하시겠다는데..”
“뭔가 이상해 천하의 코가 유다이가 갑자기 재수 없을 리 없잖아?”
“음.. 좀 재수 없긴 한데 그렇긴 하네요..”
“잠깐잠깐!! 저기 세워봐”
비서가 갓길에 주차하자 유다이가 급하게 편의점에 들어갔다 바로 나와 조수석에 앉는다. 뭐 하시려고요? 잠깐만 기다려봐 유다이가 심혈을 기울이며 동전으로 복권을 긁자 꽝이 나왔다. 이런 불행은 난생처음이다. 내가 어긋날 수도 있다고? 유다이가 연속으로 긁은 복권 모두.
“꽝이네요”
“이럴 순 없어 이건 말이 안된다고..”
“그러게요 항상 긁었다 하면 오천엔씩은 당첨되셨는데”
유다이가 두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자 지난 과오들이 떠오른다. 혹시 못되게 살아서 이제서야 벌 받는 건가? 몇 달 전 매달리던 남자를 매정하게 차버렸지. 미국에 살 때 친구들 골탕 먹인 거? 그건 다른 애도 같이 했는데! 혹시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나쁜 짓이라도 한 걸까? 카르마? 전생의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탓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대행사와의 계약은 결렬됐지만 큰 프로젝트 였기에 넋 놓고 포기할 수 없었다. 유다이는 법무팀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재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전등이 깜빡 하고는 모든 사무실이 암전이 되었다. 어두운 모니터 화면에 아연실색의 유다이의 얼굴이 비친다. 긴박한 상황에도 노크를 빼먹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건물 전기가 통째로 정전됐답니다… 복구되려면 세 시간은 걸린다고 합니다..
뭘 해도 안되는 날이 이런 걸까 도피성으로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유다이는 잔뜩 인상을 구기고 보이는 대로 걸었다. 유다이를 짝사랑하기로 유명해 늘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던 데스크의 여직원은 다른 남직원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유다이를 흘깃 보더니 남직원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려 먼지를 털어준다. 회사 건물을 벗어나자 평소와 변함없는 거리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시선을 돌렸다. 종종 들리던 카페는 문이 굳게 닫힌 채 close 팻말이 걸려있다.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뛰어오던 아이는 결국 유다이와 부딪혀 넘어지면서 유다이의 바지를 잡는 바람에 끔찍한 봉변을 당했다. 지나가던 여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기웃거리며 쳐다봤고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는 호방하게 남자는 역시 핑크색 팬티지! 라며 약 올렸다. 괜찮냐는 아이 엄마의 물음에 유다이는 바지춤을 붙잡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유다이를 둘러싸고 있던 인파를 벗어나 결국 인적없는 길에 다다르니 한 블록 뒤에서 검은 오라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회사에서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어이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그만 쫓아다니고 나오지 그래?”
“아… 들키고 있던 거군요”
“그럼 모르겠냐. 키 큰 장정이 따라붙었는데. 안 그래도 마침 죠를 찾아갈 참이었어”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언제까지나 붙들고만 있을 수 없어 한적해 보이는 카페로 검지손가락을 가리켰다. 눈썹을 한껏 치켜세운 유다이는 말했다. 일단 저기로. 아이스 커피와 아이스크림 라떼를 시키고 자리로 돌아오자 죠는 수상하리만치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안된다는 듯 유다이의 자켓을 두르고 있었다. 한 마디 하려던 차에 커피를 가져오던 직원이 역시나 보기 좋게 유다이의 앞에서 스텝이 꼬여 아이스커피를 어깨에 쏟아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닦아드릴게요! 유다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털며 입을 열었다. 수건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거짓말처럼 트레이의 죠가 마실 아이스크림 라떼는 멀쩡했다. 유다이의 커피는 다시 제조되고 있었지만 죠는 마실 생각이 없는지 얼음 위로 위태롭게 얹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이 갸우뚱 거리며 무너질 것 같았다. 에에 저거 당장 먹지 않으면 무너질 텐데… 아 참 내가 지금 걱정해줄 처지인가?
“나한테 뭐 죄지었어?”
“네.. 거의 비슷한.. 사실 코가상이 옷을 덮어주신 그 순간부터 저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옷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서 제게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글쎄 내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유다이의 시선이 자켓에 닿자 혹여나 뺏길 새라 입고 있던 자켓을 깃을 감싸 쥔다. 그거 꽤 비싼 건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응? 그건.. 그 날 이후로 난 진흙에 빠진 것 같아 뭘 해도 안된단 말이지. 난 안 풀리고 넌 잘되고 그렇다면 내 기운이 다 뺏긴 거 아니야?”
“제가 감히 코가상의 기운을 어떻게.. 뺏겠어요 저의 은인이신데 “
“너한테 준 자켓은 그날 행사를 위해 새로 산 디올 자켓이야 행운과는 거리 멀다고”
“그래도.. 왠지 저에겐 부적같이 느껴지는 걸요”
“문제는 키스야”
제가 봐도 비정상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저와 죠의 상황이 180도 바뀐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사쿠라 죠와 제가 주고받은 것은 키스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이 합리적 의심을 아사쿠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머리를 굴렸다. 뭐라 해야 사이비 신도 같지 않으려나.
“네?”
“믿기 힘들겠지만, 죠”
“…”
“내 입술에서 네 입술로 내 행운이 흘러간 거 같아”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에요”
“아하하! 행운의 자켓은 말이 되고?”
종업원이 새로 가져다준 커피를 금방 비워버리곤 얼음을 휘휘 저으며 반대편에 앉아있는 인물을 면밀히 뜯어봤다. 머리를 긁으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열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순결을 앗아간 놈을 때려잡을 듯 멱살잡고 내 행운을 돌려내라고 말해야 하는데.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분노는 어느새 사그라지고 멍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눈앞의 상대에게 저며오는 원초적인 감정. 유다이는 언제나 죠에게 약했다.
“나를 미행한 이유가 뭐야?”
“코가상은 괜찮으신지 궁금해서..”
“음.. 이건 기분이 좀 그렇네. 키스한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 날 키..키스는..!”
“혹시 키스가 성에 안 찬 거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기분 좋은 키스였어요. 부드럽고 로맨틱했다고 해야 하나 코가상 특유의 좋은 향기도 났고요.. 특히 코가상이 물 줄기를 막아 주셨을 땐 정말 영화 속에 들어간 것 처럼”
“그만그만그만! 그 정도의 감상평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냐!”
“그치만 정말 좋았는데요..”
“일단 아사쿠라 넌 좋은 일들이 생겼다는 거고 내가 어떤지 궁금해서 미행했다는 거지 그렇지?”
“네에..”
“그 말은 너도 어느 정도 나에게 페널티가 있을 거라 예상한 거 아냐?”
“정확히 맞습니다..”
“이기적인데 아사쿠라? 네 말대로 행운의 자켓을 돌려줄 생각도 안 하고”
손끝으로 유리잔을 매만지던 유다이는 눈도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하는 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나를 납득시켜봐.
“너에 대해 궁금해졌어 아사쿠라 죠”
“저 말인가요..”
“네 얘기를 해줘”
과거 얘기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죠가 그동안 숨겨왔던 개인사에 대한 물꼬를 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불행의 시작, 아사쿠라를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 죠가 생각하느라 대화가 잠시 끊겨도 유다이는 성급하게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기다렸다. 단어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하게 고르는 그를 위한 배려였다.
“저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가까운 사람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꼴이 되어버려서..”
“그럼 나는 된다?”
“아뇨!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코가상과 함께 걸어도 저만 광견병 걸린 개에 쫓기고 제 밥에만 돌이 씹히고 그런 상황들이 올 때마다 코가상은 무척이나 행운아이시구나 불행을 빗겨나갈 수 있으시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좀 럭키하긴 하지. 럭키했었지”
“한 번도 남들이 누리는 일반적인… 정상적인 일상을 누려본 적 없어요. 제가 코가상의 일상을 빼앗은 것이라고 해도 이 일상이 간절했습니다. 대답이 됐나요?
“뻔뻔한 거 봐 넌 도둑이야 도둑!!”
유다이의 말을 들은 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조그만 뒤통수가 미세하게 떨리자 유다이는 당황스러워 엉덩이를 들썩이다 결국 죠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이 죠! 설마 우는 거야?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끅”
“에? 정말? 이런 일로? 아니지? 사실 진심 아니었어!”
“…….그럴리가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작은 얼굴을 들어 올린 죠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코가상 순진하신 거 같아요. 제가 정말 작정하면 깜빡 속으실 거 같아요”
“이 녀석 봐라?”
“제가 뺏은 걸 안 돌려준다면요?”
자리에 일어선 죠는 유다이에게 자켓을 도로 걸쳐주며 어이없게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데었다.
“…”
“마지막 말은 저도 진심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만”
가방을 고쳐매곤 유다이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열고 카페를 벗어난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꿈에 죠를 빼닮은 캐릭터가 나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본인은 전지전능한 시점으로 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잘 걷는다 싶더니 갑자기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저거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떤 꿈은 너무 생생하여 마치 현실 같아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꿈인 줄 알았다. 그 날 죠가 저를 따라왔던 건 자켓이든 행운이든 돌려주려고 따라온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되찾아온 일상은 평온했다. 밀어주던 모델이 드디어 해외에서 반응이 와 루이비통 독점계약을 따냈다. 죠의 행방을 물으니 들어오는 일도 없고 근근이 나가던 spa 화보도 짤린 모양이다. 워킹 수업은 꼬박 참석하고 있으나 워낙 조용하니 회사에서도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아니 관심도 없어보인다. 결국 유다이는 찾아갔던 이력이 있던 그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멀리서 꼴이 엉망인 채로 걸어오고 있다. 꿈에서 본 캐릭터처럼.어디서 굴렀는지 흐트러진 머리엔 나뭇잎이 얹어져 있고 바지는 찢어져 다리엔 피가 흐르고 있다.
“코가상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유다이를 발견하자마자 멀리서부터 뛰어와 놓고 막상 민망한지 입술을 깨물곤 가만 서 있다. 아기 같은 얼굴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풍파의 흔적. 꼴이 왜 이래? 어떻게 지냈어? 굶은거야? 왜 이리 말랐어? 너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싶은 말을 감춘 채
이봐.. 유다이가 죠의 볼을 톡 건들며 볼품 없지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져가 이번엔 죠군한테 필요할 거 같네”
맞닿은 입술 끝에서 유다이가 스스로 자처한 상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 어째서 저에게 주시는 거죠”
“그거 말고도 줄 거 또 있어. 죠는 이미 크리스마스네 선물도 많이 받고”
“…”
“회사에서 도쿄 런웨이 오디션 넣어놨어. 내가 무조건 아사쿠라 죠를 적극 추천했다는 것에 감사하도록. 자주 울지만 착한 아이라서 산타코가상이 주는 거야”
“장난치지 마세요…”
“죠 비주얼에 실력이면 당연히 붙을 수 있을 거야”
“제가 감히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아주 충분하지”
“감사합니다 코가상.. 정말 감사합니다 “
“기죽지 말고 고개도 숙이지 말고 당당히 어깨 펴고 잘 다녀와”
“코가상은 어쩌시려고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주어 없이 말하니 참 묘하네! 근데 뭐 별 수 있나”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몇 번이고 고맙다며 인사하는 죠를 만류하며 뒤돌아 설 때 유다이에게 차 빼라며 옆집 아저씨의 고함이 들려왔다. 죠 이만 가볼게 행운을 빈다!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죠가 점점 작아졌다. 코너를 꺾어 차가 사라질 때까지 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런 형체도 존재하지 않는 행운을 그저 입술을 통해 넘겨줄 수 있다는 허상의 미신으로 그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유다이를 압박해오던 의무감에서 해방시켰다. 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동안 내가 영위해온 안락한 삶은 진실된 내 것이 아니었나.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잠시 품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 꺼 모조리 뺏어간 아사쿠라를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응원만 할게.
아사쿠라 죠는 당연하게도 런웨이의 출전권을 따냈고 쏟아져 나간 기사 사진을 통해 비주얼 모델로 단숨에 여러 cf까지 꿰찼다. 한편 죠의 성공에도 유다이는 절망 같은 몰락을 얻게 된다. 계약기간이 한 달 남은 켄타의 재계약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다음 주 유다이의 라이벌 에이전시와 계약하겠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바닥 친 주가와 그에 비롯된 회의에서 아사쿠라 죠가 라이징하고 있으니 조금 더 투자가 들어가면 된다는 유다이의 스피치에도 어림 없었다. 카미야 켄타를 붙잡지도 못한 채 아사쿠라 죠에게 투자하고 싶으면 대표직에서 잠시 물러나라는 주주들의 반발이 컸다. 게다가 믿었던 켄타의 배신으로 연계되어 있던 업계 최고 쇼핑 플랫폼마저 계약이 마무리되며 유다이는 인생 최대 쓴 맛을 보고 말았다. 너덜너덜하게 깨진 채로 회의실에서 나온 유다이의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죠가 걸어온다.
“이야~ 얼마 만이야. 안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어? 그 가방 나도 사고 싶었던 건데. 역시 안목이 있어 천상 모델 같네. 죠 앞으로도 좋아질 거야 그렇게 믿어. 넌 이제 우리 에이전시가 내세우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근데 어쩐 일로 회사에 온 거야?”
“…”
“기분 안 좋구나 그렇지?”
“…”
“기분도 꿀꿀한데 밥이라도 먹으러 갈래?”
“좋습니다”
“이제 알아볼 사람도 꽤 있으니 프라이빗 한 곳으로 가야 하나~”
유다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뒤를 돌아 죠의 얼굴을 보며 뒤로 걸었다. 어이 죠, 저번 발망 런웨이 봤는데 말이야 넌 다리가 길어서 골반을 많이 안 써도 돋보여. 뭐 이제 슈퍼스타니까 이 몸의 조언은 필요 없겠지만 말이야, 라고 능청을 떨자마자 유다이가 모나게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됐다. 일어나면 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된다. 그런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넘어지는 거 정말 익숙해지지 않네. 몇 번이고 넘어지는 중인데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릎 꿇은 채로 바닥에 팔을 짚고 일어나지 않으니 죠가 유다이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넣어 일으켰다.
“고작 이런 일로 상처받지 마세요”
아사쿠라의 말에 코 끝이 찡해져 왔다. 너 누구보다 내 상황을 잘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하지만 제가 파버린 땅굴이기에 코를 훌쩍이며 다른 말로 돌렸다. 덤으로 얻은 인생 나한테 좀 적선해주지 그래? 사실 너 밥 사줄 돈도 없다고! 유다이가 징징거리자 죠가 지갑을 꺼내 카드 한장을 내민다. 굶지 마시고 밥 챙겨 드세요. 좋아하시는 커피도 꼭 사드시고요.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에~ 맞다 드라마 들어간다지? 드라마까지라… 이대로라면 발렌타인 데이에 데이트 하고 싶은 연예인 1위 차지하는 거 아냐?”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을 필요… 없어요”
“응? 하지만..”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니까 뭐를? 죠의 뒷말이 삼켜졌지만 유다이는 물어 볼 수 없었다.
코가상께서 저에게 하사해주신 삶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매일 아침 개운하게 눈을 뜨고 티비는 때리지 않아도 잘 나오고 버스를 한참 기다리지 않아도 매일 매니저분께서 집 앞까지 저를 데리러 와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사할 정도로 친절히 대해주고 계세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찍는 화보마다 반응도 좋습니다. 작은 역이지만 기대를 받고있는 드라마의 주인공 남동생 배역도 얻었습니다.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코가상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디서 넘어지진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진 않았나. 밥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진 않았나 하고요. 귀하게 자라신 코가상이 다 견뎌내실 수 있을 지 의문이에요. 아무도 코가상에게 상처를 입힐 순 없어요. 절대 그래선 안 되는데. 그렇게 어슴푸레 동이 틀 때까지 코가상을 걱정하다 잠에 듭니다. 매일 수면이 모자란 상황이에요. 피부가 푸석하다며 혼날 때도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는데요. 코가상은 제게서 어떤 희망을 발견해내신 걸까요? 화려하고 멋진 사람들 속에서도 제가 가장 빛난다고 말해주던 코가상. 제 얘기가 궁금하다고 하셨던 코가상. 저 또한 궁금한게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으시네요..
얼마 전 계약을 위해 찾아간 회사에서 마주친 코가상은 얼굴에 생기가 없음에도 밝게 웃어주셨습니다. 개인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 나오면서 비서분과 하는 얘기를 엿들었어요. 대표직에서 물러나신다고요. 또 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코가상.. 잠시만 가지 말아주세요”
“죠! 언제 왔어? 다시 돌아올 거니까 두고봐”
“이러시면 제가 죄책감이 들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잘 들어. 흔들리지 마 뭣보다 지금 넌 아주 잘하고 있어. 엄청나게 성공해서 날 대표로 다시 스카웃하던지 하하”
“그치만..”
“내 걱정 말고 나한테서 도망가라고! 런던이던 파리던 지구 반대편으로 가!”
그렇게 걱정하던 코가상을 등지고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겁쟁이 같죠.
꿈꾸던 삶을 사는 것은 정말 벅차오르는 일입니다. 클로징 멘트를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던 차에 인터뷰어가 아쉽다는 듯이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뽑자면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작은 헛웃음이 새 나왔다.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때 말곤 없네요. K라는 분과 K했던 순간입니다.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인터뷰어가 무슨 뜻이냐 물었지만 웃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지켜보라고 한 게 고작 이거였냐. 기껏 단기간에 일본 최고의 모델이 되어놓고선 최고의 순간을 코가 유다이와 키스한 순간을 뽑다니. 역시 시시하다니까~ 채널을 돌리려다 인터뷰가 끝나고 송출되는 죠의 화보 촬영 영상이 시선을 붙잡았다. 눈물 날 만큼 멋있었다. 화면으로 보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절실히 깨달아버렸다. 제가 소유할 때보다 저 아이가 가졌을 때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이제 와서 나에게 돌아온들 회사를 되찾고 돈을 잘 버는 무의미한 일보다 화면에서 빛나는 저 아이의 꿈이 펼쳐지는 것이 세상에 더 이로운 거 아닌가. 저런 앤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 해. 수 많은 모델을 양성해오면서도 모델을 돈 벌어오는 수단으로만 봤던 유다이가 죠의 눈부신 성장만으로 마더 테레사의 성정을 가슴 깊이 느꼈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눈물이 흘렀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눈물이 헤퍼졌단 말이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리기 위해 거리마다 아기자기한 장식이 달린 트리가 즐비하고 익숙한 캐롤이 흘러나온다. 작년 크리스마스엔 뭘 했더라.. 유다이는 꼼꼼하게 맨 목도리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저녁도 먹기 전에 해가 져버렸지만 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조명들이 잔잔하게 빛났다. 따듯한 온기를 내뿜는 스키야키 가게를 지나칠 땐 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살짝 보고 싶기도 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피해가 갈까 혼자 다녔다던 죠처럼 유다이 또한 자연스레 혼자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죠 넌 어떻게 했어? 나름 불운의 선배인 죠의 해결 방법이 궁금하기도 했다. 죠가 물려준 (정확히는 유다이에게 전해주라며 회사에 맡긴) 낡은 배낭을 그대로 메고 다녔다. 나름 유용하기도 했다. 팔아버린 벤츠 대신에 튼튼한 두 다리로 꽤나 잘 걸어 다니고 있다. 운명에 굴복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굶주린 배를 잡고 어느새 단골이 되어버린 편의점을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선 순간.
아사쿠라 죠. 정말이지 너는…
“죠 거기 서! 더 이상 오지 마! 내가 갈게”
신호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뛰어오는 죠를 향해 클랙슨이 시끄럽게 울렸다. 더러는 차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결국 멈춰 있는 죠를 사이에 두고 차들이 빠른 속력으로 무수히 지나간다. 신호가 초록 불로 변하자 유다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부동의 죠. 내가 숨을 불어넣은 죠. 밀려오는 타인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홀로 선명한 모습인 그에게 극한의 유대감이 차오른다. 청각이 소멸하고 체내의 뛰는 심장 소리만 들려온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거야? 그동안 외면하려던 감정을 맞닥뜨린 순간 유다이는 뱉은 말과 다르게 앞서 나가지 못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죠가 유다이의 앞으로 성큼 걸어온다. 이 녀석은 뛰지도 않았으면서 입김을 마구 내뱉으며 비장한 표정을 한다.
“다시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뭐?”
“유다이상께..”
“정말 엉뚱하네 너.. 나한테서 도망간 게 아니었어?”
“몇 번이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저보다 불행한 코가상을 참을 수 없었어요.
“도저히 걱정이 되어서..”
“내가 걱정됐다고?”
“네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 바보야 너 내일 뉴욕 스케쥴있다고 기사가 얼마나 쏟아졌는데”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단호한 눈빛을 가진 어린 아이. 하지만 몸이 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몰랐을 테지만 유다이는 투시할 수 있었다. 정말 죠한텐 못 당하겠다니까. 도저히 화낼 수가 없어.
“빨리 가. 저녁 비행기 타면 아슬하지만 내일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더 이상 욕심 내지 않을래요. 원래 제 것이 아니니까요”
“죠! 이거 가야 해. 여기서 잘 풀리면”
“마음이… 아팠어요”
모든 것을 앗아간 이 겁 많고 연약한 아이가 그 날처럼 자신의 행운을 버리기 위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런데 말이야, 그러는 넌 그동안 어떻게 버텨온 거야?”
유다이의 물음에 죠의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아… 또 죠를 울렸다! 코가 유다이 나쁜 놈. 넌 천국은 못 갈 거다.
“글쎄요… 그런 질문은 아무도 저에게 물어봐 주지 않아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지나가는 행인들의 웃음소리에도 그들의 안위한 일상을 질투했습니다. 참고 지내다가도 불쑥 튀어나오는 비참함을 감추기가 어려웠어요. 버거웠을 때도 많아요. 유다이상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에요”
“통하는 게 있어서 그런지 죠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드네. 이젠 나도 익숙해져서 가끔은 이벤트로 느껴진달까… 농담이야~ 죠 좀 웃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절실히 느껴왔으니까요”
웃으면서 말 했지만 사실 전혀 웃을 일이 아녔다. 하지만 정말로 반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실이었다. 이미 죠의 인생에 자조적으로 한 발을 담그며 코가 유다이는 불우한 공범이 되기로 작정했으니.
“연애하면 참 잘하겠어 상대방 마음도 꿰뚫을 줄 알고 말이야”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고백은 꽤 받았어? 그랬을 거 같은데”
“유다이상은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돼요”
죠가 유다이의 입술을 부드럽게 감춰 물었다. 포옹의 의미와 같은 짧은 키스였다. 마치 그동안 아팠던 거 제가 알아드릴게요 하는 것만 같은. 입술을 떼고선 제가 감히 만져도 될까요라 말하는데 참 웃기지. 입술은 몇번이고 맞춰놓고. 벌게진 큰 귀 그리고 벌벌 떠는 손으로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견딜 만 했는데? 아무 것도 남지않은 유다이에게 내세울 건 자존심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죠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 마주 바라보자 눈망울은 촉촉한 채로 대답 없이 청순한 얼굴을 도리도리 흔든다. 참을 수 없어. 죠 진실로 내가 지켜주고 싶어졌다.
“너 오디션 안 볼 거면 진짜 내가 가져간다?”
“마음이 5초 만에 변할 수도 있나요?”
감당할 수 없는 세금 때문에 집도 팔아버린 유다이는 그동안 기대왔던 부모님께도 손을 벌리기 싫어 작은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데려다주겠다는 죠에게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계속 따라오는 탓에 결국 유다이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 같이 걷는 거 오랜만이네. 그렇지?
“혹시 저 때문에 대표직에서 물러나신 것도 사실인가요?”
“그렇게 봐도 무방하지”
“…”
“왜 좀 멋있어?”
“아주 많이요… 반해버릴 수밖에 없을 만큼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코가상을 만나게 된 후로 제 인생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어요.
“뭔데?”
“키스로 행운을 주고받는 거라면..”
그동안 코가상이 살아왔을 단비처럼 달콤한 생활을 잠시 영위해봤어요. 정말 꿈결 같았습니다.
“응?”
“그 이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지금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비를 흠뻑 맞고 빙판길에 넘어지고 다시 만신창이로 되돌아가도 말이에요.
“지금 죠 입에서… 나온 말 맞아?”
“네에…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럼 한 번 시험 해볼래?”
“좋습니다”
코가 유다이.
당신이 나의 첫 행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