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아. 너는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 지난밤 술에 취한 시즈오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시즈오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이마를 쾅 박으며 장렬히 사망했다. 잠깐 바 안 사람들의 시선이 시즈오를 향한다. 유다이는 턱을 괴고 그런 시즈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니 세상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나. 고주망태가 된 인간이 하는 말답게 모순덩어리였다.
코가 유다이. 27세. 현재 S 무역회사 영업팀 무급 휴직 중. 업무 스트레스라는 핑계로 휴직을 선언했을 때 동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얘기했다. 코가상 답지 않아. 코가상이 휴직을?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코가상? 아니겠지. 코가상이 그럴 리가.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는걸.
실례로 열정 빼면 시체인 유다이는 그 열정으로 인사 고과에서 항상 최상위 등급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훌륭히 해냈다. 그게 무슨 일일지라도. 똥으로 금을 만들라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 코가 유다이는 하하 웃으며 “역시 그런가요.” 하고 넘겼지만 사실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나다운 게 대체 뭔데!
그래. 맞다. 사실 업무 스트레스로 휴직계를 낸 것은… 핑계다. 물론 스트레스가 아예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다이는 일 년 째 비밀로 사내 연애 중이었다. 영업팀 후배로 들어온 그녀는 코가 유다이 이상형의 집합체였다. 코가상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 누가 봐도 유다이에게 딴마음을 먹고 있던 아라이상은 회식 자리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늘 그렇게 물었고, 유다이는 그때마다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첼 맥아담스요.
그게 뭐야아아아. 제 어깨를 콩콩 치며 서운한 티를 내는 아라이상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도 생각했었다. 이거 대외용 이상형이 아니고 진짠데. 근데 그 동양인 버전 레이첼 맥아담스가 정말로 유다이의 후임으로 입사했다. 그녀는 곧 유다이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행복한 일 년이었다. 유다이는 연애에도 성실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해보고 싶다는 것은 다 해줬다. 먹고 싶은 음식은 아무리 싫어하는 거라도 같이 먹었다. 그녀가 가고 싶다는 곳도 모두 데려갔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 이별 통보였다.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 거… 지겨워. 재미없어. 미안해. 그리고 레이첼 맥아담스는 재무팀 신입사원과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유다이와 헤어진 지 딱 한 달 만이었다.
아무리 유다이라도 이별은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법. 전 여자 친구와 그의 새 남자 친구가 붙어다니는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만 없던 유다이는 그대로 휴직계를 썼고, 되도 않는 히키코모리 코스프레를 하며 칩거를 시작했다.
그나마 모아둔 돈으로 먹고살고야 있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보이는 중이었다. 어제의 음주도 두 달 만이었고. 그것도 절친인 시즈오가 산다는 말에 나온 거였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어젯밤 유다이는 시즈오를 힘겹게 품에 안고 겨우 택시를 태웠다. 술은 시즈오가 샀으니 택시는 제가 잡아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텅 빈 지갑 속 현금 몇 장을 꺼내 기사님께 전달한 뒤, 유다이는 집까지 걸었다. 그제야 기운이 쭉 빠졌다. 전철을 탈 수도 있었지만 그냥 걷고 싶었다. 습관처럼 달린 기억이 있어서인가. 걷는 게 썩 힘들지는 않다. 상념을 잊기에 딱이었다. 아래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자 바로 반짝이는 세븐 일레븐 간판이 보인다.
이 세븐 일레븐은 오 년 전에 생겼는데, 집에 돌아갈 때 오뎅을 사러 몇 번 들렸던 적이 있다. 그 세븐 일레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오늘 오뎅을 사서 집에 갈까 말까. 혼자 한 잔 더 할까 말까. 지금 이 시간이면 영혼 없는 남자 알바생이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봉투 필요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딱 이 말만 중얼거리는.
…오늘은 참자.
유다이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골목길 사이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직장인들이 사는 아파트가 이어져 있다. 강을 넘어가면 값비싼 타워 멘션이 줄지어 있지만 그저 그런 직장인 형편에 그곳에 살 수 있을 리가 없고, 유다이는 2층짜리 아파트의 복도 제일 끝. 작은 방과 욕실이 하나씩 있는 곳에 산다.
유다이는 씻고 나와 잠자리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보낸 오늘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백수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 대체 다들 어떻게 집에서만 있는 거야? 안 되겠다. 내일부터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들었는데.
“….”
“뭘 고민해. 생각할 것도 없어.”
“그러니까 이걸 내가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너는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라던 시즈오는 유다이가 하고 싶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소개해 줬다.
“유다이. 이건 정말 기회야.”
시즈오는 유다이의 손을 꽉 잡았다. 시즈오가 제안한 아르바이트는 유다이가 원했던 조건에 매우 적합했다. 수상할 정도로. 비교적 일하는 시간이 짧고, 요청하면 유동적인 스케줄도 가능하나 페이는 적지 않은 아르바이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즈오는 유다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정말 너라서 소개시켜 주는 거야. 페이도 괜찮은 편이고 너희 집이랑도 가까워. 대중교통 타고 다닐 필요도 없어. 얼마나 좋냐. 그 말에 유다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어도 꽤 할만 한 일이긴 하다.
“취미 삼아 만화부 들어가서 활동한 적이 있긴 해.”
시즈오가 말한 아르바이트는 바로 만화가의 어시스트였다. 간단한 선만 따면 되는.
“그럼 됐어. 출판사도 그 작가님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면접 안 봐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경력도 있겠다, 바로 출근하면 된다고.”
에에.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나야 상관 없기는 한데…. 시즈오에게 받은 주소를 눈으로 훑었다. 알려준 곳은 바로 강 너머의 값 비싼 타워 멘션이었다.
찝찝한 표정을 짓는 유다이를 힐끗 본 시즈오는 뭐가 걱정이냐며 유다이의 등을 퍽퍽 쳤다. 정말 이렇게 일을 시작해도 괜찮다고? 고민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임시라고 했으니 뭐 괜찮겠지.
그리고 30시간 만에 그 결정을 후회했다. 부드러운 니트에 핏이 딱 맞는 슬랙스를 입은 유다이는 남자가 내어온 차를 홀짝이며 긴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사실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곁눈질로 방 안을 힐끔힐끔 훑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진짜 미치겠네.
“차는 입맛에 맞으세요?”
“….”
“그림이 안 그려질 때 자주 마시는 차예요.”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추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때 이걸 우려 마시는 거구나. 유다이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넘김이 부드럽다. 그에 반해 기분은 깔깔했다.
방 안에는 수많은 고추가 현란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여기저기 붙여져 있다. 좆의 모양도 모양 나름인데 색감과 작풍까지 어두침침하니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까지 연출된다. 남자는 경건한 얼굴로 빈 찻잔에 차를 다시 쪼르륵 따른다. 유다이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러니까 시즈오. 만화 어시 아르바이트라고만 했지, 그 만화가 19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자신을 죠라고 소개한 남자는 문을 덜컥 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생각보다도 훨씬. 정말 무지 어리기에, 소년 만화나 순정 만화를 그리겠거니 싶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더니 죠는 그걸 멀뚱멀뚱 보다가 어색하게 잡아 흔들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를 연재하고 있을 줄이야. 곳곳에 있는 인체 관절 모형 피규어는 각종 체위를 연상케 하는 자세로 구부려져 있어 헛기침까지 나왔다. 차를 다 마신 죠는 앞으로 유다이가 해야 할 일들을 조곤조곤 몇 번이나 계속해서 설명하더니, 벌떡 일어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하고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죠의 말은 무척 느렸는데도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유다이는 곧 정신을 차리고 죠가 작업 중인 그림들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모자이크가 되지 않은 중요 부분. 여자 주인공의 까뒤집힌 눈. 하트로 꾸며진 민망한 단어들…. 그걸 어느새 집중해서 그리고 있는 죠는 아까의 그 어설픈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득 그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할 수 있다. 유다이는 후회를 뒤로한 채 다시금 투지를 불태웠다. 19금 만화 어시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유다이의 낯빛은 단 며칠 만에 어두워졌다. 멋있는 건 멋있는 거고. 유동적인 스케줄에 자유로운 아르바이트라고 누가 그랬지. 대체 누가. 남은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기는 개뿔 매일 하는 건 고추 선 따기다. 들어온 이후로 제각기 다른 모양의 고추만 족히 천 번은 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꽤나 강도 높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어시스트라고 앉아서 그림만 도와주면 될 줄 알았더니 잡일까지 도맡아 한다. 집 청소에, 빨래에, 설거지에. 불만을 표출하지도 못했다. 사실 앞치마를 입고 청소기를 돌리며 집안을 청소하는 일이 왜인지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했고 또….
같이 밤을 새웠으면서도 산뜻한 얼굴로 야동을 집중해서 보는 죠는 왠지 건드리면 안 될 존재 같았다. 안경 렌즈 너머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모니터 화면이 은근하게 비친다. 안경을 치켜 올리며 펜을 움직이는 표정이 꽤 진지해서 힐끔 보면, 말간 얼굴로 채색 끝낸 그림 위 말풍선에 신음 소리 넣고 있었다. 아앙, 흐아앙, 아읏, 아! 볼 때마다 좀 적응이… 안 됐다.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도 침착하고 평온할 것 같았던 죠는 시간이 임박하자 예상외로 얼굴이 곧 터질 듯이 빨개져서는 곤란해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S 무역회사 영업팀 휴직 중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유다이였다. 피디님. 작가님이 지금 잠깐 나가셨다가 아이고! 교통사고가…. 에, 어쩌죠. 괜찮긴 한데요. 오늘 마감을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 통화를 이어가며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 넘기면 죠는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살짝 치켜들었다. 귓바퀴는 아직도 빨갛게 물들인 채.
오늘도 죠는 야동을 틀어놓은 채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몇 번이나 터져 나왔다. 저러다가 바닥 뚫리겠다. 뚫리겠어. 유다이의 눈이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향했다. 메이드복을 입은 채 의자에 묶인 여자가 눈을 질끈 감는다. 그 앞에 선 근육질의 남자는 의자 주위를 돌며 채찍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이건 뭐. 코스튬과 에스엠 플레이가 합쳐진 혼종…. 처음에야 펄쩍 뛰었지 유다이는 이제 죠가 알아보기 쉽게 야동 폴더를 주제 별로 착착 정리해 놓기까지 했다.
죠는 곤란한 한숨을 쉬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코가상.”
“….”
“실례지만.”
실례인 짓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
“잠깐 이 자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다이는 순간 마시던 음료를 컵에 주르륵 뱉어냈다. 켁켁. 자세? 무슨 자세를 부탁해? 그가 가리킨 건 팬티 바람으로 엉덩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화질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건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멍한 유다이를 확인한 죠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자세를 그리기가 어려워서요. 코가상이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제가 직접하기엔 제대로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
“혹시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목소리가 살짝 커진다. 정말 살짝.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가끔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데시벨이기도 했다. 그치만 지금은 아닌데.
“…들리지 않는 게 아니야.”
죠는 “아.” 소리를 내며 묵묵히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잖아?
“진심인 거야?”
“해주시면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못 한다고 하면?”
“싫으세요?”
그럼 좋겠어? 냅다 민망한 자세를 취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리고 이런 자세는 찾아보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그러나 죠는 유다이가 해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다. 얼어붙은 유다이에게 덤덤하게 덧붙였다.
“어려운 자세는 아니니까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
저번에도 이랬었다.
“보통 입에 이게 다 들어갈까요?”
죠는 자신이 그린 남자의 성기를 물끄러미 보며 유다이에게 물었다. 유다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혹시 이 정도 넣어보셨어요?”
“…저기.”
“네.”
왜 당연히 남자 거기를 입에 물어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갸우뚱하던 죠는 유다이의 입을 주의 깊게 살피며 입안 사이즈를 대충 가늠했다. 아무래도 이 정도 크기는 안 들어갈 것 같아요. 수정해야겠어요.
그러니까 왜 그걸 나를 보면서 정하는 거냐고.
결국 유다이는 바지를 벗고 엉덩이만 치켜든 채 엎드렸다. 이것도 원래 만화 어시들이 하는 일인가. 모르겠다. 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앙 깨물었다. 죠는 진지한 얼굴로 유다이의 엉덩이와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죄송하지만 다리 조금만 더 벌려주시겠어요.”
젠장.
유다이는 죠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을 힘껏 찡그린다. 다리가 좀 더 벌어졌다.
“네. 이제 찍을게요.”
죠는 티셔츠만 입은 유다이의 몸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저렇게까지 찍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과하게 열정적으로. 유다이는 이제 초연했다. 언제 끝날까. 팔꿈치에 얼굴을 묻고 그런 생각이나 했다.
“이제 끝났어요. 일어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제야 유다이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고개를 돌렸을 때, 어떤 곳에 시선을 고정한 죠는 처음 보는 얼굴로 볼을 붉히며 씩 웃고 있었다. 유다이가 바지를 꿰어 입으며 물었다.
“왜 웃어?”
“아…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요.”
“….”
“코가상은 이런 걸로 느끼시나 해서요.”
지금? 내가? 고작 이런 걸로? 정말로? 그제야 유다이가 묵직해진 제 다리 사이를 알아차린다. 하하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유다이가 애써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안경을 쓴 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